九七式中戦車 "チハ" | ||||
파생형 | 실전 | 운용국 | 미디어 | 모형 |
1. 개요
일본 제국에서 만들어진 중형전차인 치하의 파생형 일람.해당 전차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첫번째 성공적인 중형전차였기에 여러 시제형의 테스트베드로도 사용되었으며, 전후에도 중국 및 소련 등지에서 소소한 개조를 받기도 하였다.
2. 일본 제국
2.1. 무장 교체 파생형
2.1.1. 97식 시키
|
九七式 シキ |
다만, 이미 치하 지휘차형이 존재했던데다 대보병화력의 부족으로 인해 치하 지휘차형보다 소수가 제작되었다.
2.1.2. 97식 카하
|
九七式 カハ[1] |
버마 전선에서 실전 투입되어 영국 전차부대의 통신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여러 활약을 하였으나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격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2.2. 장비 추가 파생형
2.2.1. 치하 지휘차형
|
九七式中戦車 チハ 指揮車型 |
또한 엔진 등의 전장계로부터 발생하는 잡음 전파가 탑재 무선기의 송수신을 저해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기에 육군 기술 본부는 1930년대 말부터 잡음 전파 방지(전자 차단·전자 실드) 대책의 연구를 실시해, 각 전장품에 대해서 방지기의 설치 등 방지 방법을 개발한 뒤 본 차량을 비롯한 무전기를 탑재한 차량에 장착했다.
기존의 치하와는 특유의 전차장용 핸드레일을 겸하는 "머리끈(鉢巻)" 안테나와 연막탄 발사기로 구분이 가능하다.[2]
다만 이 핸드레일 안테나가 기본형에 비해 식별하기가 더 용이한 바람에 태평양 전쟁 중 연합군이 안테나 증설 여부를 보고 지휘차량임을 간파하여 지휘차를 선제 공격하는 일이 다수 있어, 나중에는 핸드레일 안테나에서 직선형 휩 안테나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신포탑 치하에서는 아예 처음서부터 변경되어 차체로부터 늘어나는 직립식 안테나가 장착되었다.
또한 지휘차형이지만, 막상 소대에 배속된 다른 전차에는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3], 작전 진행 중에 변경 사항이나 긴급 상황 시는 해당 지휘차의 전차장이 해치에서 나와 깃발을 거수하여 전차장들끼리 소통하였다고 한다.[4]
현재는 야스쿠니 신사 유수칸 박물관에 1량이 정태보존 되어 있다.
2.2.2. 97식 치유
|
九七式 チユ |
2.2.3. 97식 GS
|
九七式 GS |
2.2.4. 시제화염방사전차 카호차
|
試製火焔発射戦車 カホ車 |
2.3. 자주포 개수형
2.3.1. 1식 포전차 호니 I
|
一式砲戦車 ホニⅠ |
2.3.2. 4식 포전차 호로
|
四式十五糎自走砲 ホロ |
2.3.3. 시제 5식 포전차 호치
|
試製 五式砲戦車 ホチ |
이후 1945년 2월 유사한 제안이 재검토되었고, 이번에는 97식 치하를 기반으로 하기로 했으나 무장은 동일할 예정이였다.
2.3.4. 시제 12리 포전차
|
試製 十二糎 砲戦車 |
차체에 포를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포탑링 위에 포를 얹어두었기에 360° 전방위 회전이 가능하다.
2.3.5. 12리 자주포
|
十二糎 自走砲 |
2.4. 비무장 개조 파생형
2.4.1. 특 97식 세리
|
特 九七式 セリ |
2.4.2. 97식 호-K
|
九七式 ホ-K |
2.4.3. 97식 갱정전차
|
九七式 更正戰車 |
또한 이렇게 재생된 97식 갱정전차 중 일부는 경찰이 사용해서 노동자들의 파업 및 시위 진압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도쿄에 내린 폭설을 치우는 제설차량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홋카이도에서는 1959~1960년까지 97식 갱정전차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소수의 치하는 크레인을 장착한 후, 요코하마 등의 항구에서 1960년대까지 하역 작업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2.4.4. 97식 T-G
|
九七式 T-G |
|
97식 T-G 99식 뱅갈로르 탑재형 |
2.4.5. 시제 97식 굴착기
|
試製 九七式 掘削機 |
현재는 상단 격파된 개체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전량 손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2.4.6. 시제 97식 굴착기 S-K
|
試製 九七式 掘削機 S-K |
2.5. 기술 기반 파생형
2.5.1. 1식 중전차 치헤
|
一式中戦車 "チヘ" |
3. 중화민국 국민정부
3.1. 자주포 개수형
3.1.1. 97식 자주포
|
九七式 自走砲 |
4. 중국
4.1. 현대화 개수형
4.1.1. 공신호
|
功臣号 (47毫米) |
|
功臣号 (57毫米) |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 다수의 치하 개량형을 노획한 중국 공산군은 전후에도 현역장비로 97식 치하를 사용하면서 주요 단점으로 지적된 구동계의 빈약함을 T-34 전차가 사용했던 500마력짜리 하르코프 V형 12기통 V-2-34 디젤엔진으로 교체하고 구동륜에도 머드가드를 추가로 장착하는 등의 성능 개량으로 해결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무려 최고 속도 100km/h를 달성했으며, 이에 매우 만족한 중국군은 이렇게 개량된 공신호를 1959년까지 운용했다고 한다.
비록 치하 개량형만 이렇게 개조된 것이 아니라, 베이징 군사 박물관에 있는 치하 중 1량도 상술한 개조를 차체에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중국군이 운용한 치하 개량형이 공신호 전차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
가오커와 공신호 전차 |
일제 패망 이후 중국에 있던 일본군 전차는 각지의 군벌들이 눈독을 들이는 먹잇감이 되었고 이는 심양 전차 정비창의 일본군 전차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공산군 입장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기에 가오커를 심양시에 파견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오커가 도착했을 때 이미 선수를 친 다른 군벌이 이 곳을 선점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가오커였지만, 정비창에 전차들이 있는 것을 보고, 포기할 수 없던 가오커는 이에 소대원들과 계략을 짜게되는데, 그 계획이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소련군 헌병대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9]
계획을 세운 가오커는 전투력이 뛰어나고 정신적으로 강인한 소대원들을 몇 명 골라서, 허리에는 마우저 C96 권총을 꽂고서는, 소련군 헌병의 완장을 찬 채 기세등등하게 정비창에 들어가, 직접 탱크에 뛰어올라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어이! 빨리 전차에 연료를 넣어두도록 해!" 라고 외쳤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경비병들이 다가오자 가오커는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완장을 가리키면서, "이봐, 이 완장이 안 보여? 우리는 소련군 소속 헌병대다." 라고 소리쳤다.
경비병들은 순간 깜짝 놀라 자리를 피했으며, 공장의 일본인 기술자들도 소련 헌병이라는 말에 속아 고분고분히 가오커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이후 소대원들과 가오커는 신포탑 치하 "102호차"에 탑승하고, 나머지 "101호차"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탑승 후 따라오라고 명령하였다.
가오커와 소대원들은 정비창 밖으로 몇 백미터 정도 전진했을 때, 갑자기 정비창에 있던 경비병 중 한명이 "저 새끼들은 소련 헌병이 아니야! 빨리 쏴버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갑자기 벌어진 전투에 가오커와 소대원들은 놀랐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102호차 신포탑 치하는 빗발치는 총탄을 무사히 막아내는데에 성공하고 탈출했다.
그러나 101호차 신포탑 치하는 이동 중 일본인 기술자들이 가오커와 소대원들이 소련 헌병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변심해서 파괴해버렸고, 결국 진지에 무사히 도착한것은 102호차 뿐이었다.
가오커는 한대를 유실했다는 것에 크게 상심했지만, 인민군 특수부대 창설자 "주루이"는 소식을 듣고 소련에서 전차 정비를 공부한 "류다샹"을 호출했으며, 이윽고 102호차가 주루이의 앞에 당도하자 그는 크게 기뻐하면서 가오커에게 "이제 우리에게도 전차가 생겼구만, 자네가 가져온 것은 전차 한 대가 아니라, 전차 대대를 가져온 것과 다름이 없다네." 라며 가오커를 칭송했다.
이후, 1945년 12월 1일, 비록 전차는 신포탑 치하 단 한대에 인원은 30명밖에 없었지만 어찌됐던 중국 공산당 역사상 최초의 전차대대인 "동북전차대대"가 창설되었다.
동북전차대대는 심양에서 북상해 흑룡강성의 동안현에 주둔했다. 1947년 10월 동북전차대대가 동북민주연군 전차연대로 개편될 당시 인원은 총 560여 명, 전차는 20여 대, 장갑차 40대, 그리고 구난전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루이는 기뻐했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는 이제 1개의 전차연대가 생겼고, 앞으로 전차사단, 전차병들이 더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전차부대는 암탉이 알을 낳듯이, 꾸준히 계속 늘어나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이후 하술하겠지만 이 "102호차"는 여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데에 큰 공을 세워 "공신호"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후일담으로, "공신호" 102호차는 재미있게도 전투 중이 아닐 때에는 잔고장이 무지하게 심해 낙오하는 일이 잦았지만, 전투에만 참전하면 평소에 그랬던 것은 온데간데 없이 귀신이라도 씌인 것 마냥 엄청난 전과를 여러번 세웠다고 한다.[10]
1949년 10월 1일, 102호차의 조종수인 둥라이푸는 102호차를 조종하여 선두에서 100여대의 탱크를 이끌고 개국대전에 참가하는 등, 102호차 "공신호"는 중국 기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 덕분에 "공신호"라는 명칭은 비단 102호차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치하 개량형을 뜻하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가 오늘날에는 중국군이 개수한 치하를 칭하는 명칭으로 뜻이 변경되었다.
5. 소련
5.1. 무장 교체 파생형
5.1.1. T-2597 (DP-28)
|
Т-2597 (ДП-28) |
아마도 소련군 내에서 정규적으로 개조한 것이 아니라 탄약의 부족으로 임시방편으로 차체기관총을 DP-28로 변경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군은 일본 전차의 기관총을 변경하지 않고 사용했던터라 중국군이 아니라 소련 극동군 내에서 개수되었을 확률이 높다.[12]
현재 이런 개조를 거친 치하는 베이징 전차 박물관에 단 1대만이 있는데 해당 단차는 관동군이었다가,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당시 소련군 제7기계화사단에게 노획되었고, 이후 1955년 소련군 제7기계화사단이 중국에게 ISU-152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해당 단차또한 공여하였다고 한다.
[1]
카하의 프로토타입 사진이다. 얼핏 보면 97식 57mm 전차포를 장착한 초기형 같지만, 포 하단의 주퇴복좌기가 없는 더미 주포인 것으로 구분 가능하다.
[2]
해당 핸드레일식 안테나는 소련의 지휘전차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해당 사양이
할힌골 전투 이후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의
T-26RT나,
BT 지휘전차 등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3]
본래 이 무전기가 소대장-소대원 단위로 연동된 것이 아니라 소대장-소대장이나 상급 부대간 통신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4]
수기를 사용할 수 없는 야간에는 차량 간 통신을 위해서는 신호등을 사용했다.
[5]
치하 Long Gun 이라는 말이다. 아마 미군이 붙여준 별칭으로 추정.
[6]
사실 꼭 치하가 아니라도 크레인으로 개조한
판터나 트랙터로 개조한
마틸다 II,
T-34,
M4 셔먼 등 종전 직후 남아돌던 전차를 중장비로 개조해 사용하는 경우는 많이 있었다.
[7]
1923년생으로, 2005년에 사망. 산둥성 치둥 출신으로 1939년 입대해 같은 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1988년에는 중장 계급으로 진급하였으며, 독립자유훈장 3급, 해방훈장 3급, 독립유공훈장 등을 받았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도 가오커 메달로 언급됨.
[8]
제 918 전차정비창이라고도 한다.
[9]
이는 당연하게도 신분 사칭으로 만에 하나라도 실패했다가는 당시 주둔중이었던 소련군과도 외교적 마찰이 생길 수 있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10]
대표적으로 톈진 전투가 있다.
[11]
동일 탄환을 사용하고, 유사한 형상을 지닌
DT 기관총은 부품 중 총구화염감소용 소염기가 존재하지 않지만, 해당 치하는 차체기관총구에 소염기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DT 기관총이 아니라 DP-28이 맞다.
[12]
굳이
DT 기관총이 있는데 왜 DP-28을 사용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마도 소련군 내에서 장착할 차량이 많아 항상 수량이 모자랐던 DT 기관총 대신, 해당 기관총의 원본이라 다수의 부품이 호환되고, 사용 탄환도 같은데다 결정적으로 잉여 수량이 많은 DP-28이 교체하기에 적합하다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