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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2:37:27

철종(고종, 군밤의 왕)

1. 개요2. 작중 행적3. 철종이 이명복을 선택한 이유4. 기타

1. 개요

고종, 군밤의 왕의 등장인물.

본작에서 10화만에 사망할 정도로 직접적인 등장은 짧지만 본작의 조선이 원 역사의 조선과 크게 달라지는데 중요한 나비효과를 미쳤다. 본명은 원 역사처럼 이원범(李元範)이었다 즉위 이후 피휘를 위해 이변(李昪)으로 바꾸었다.

원 역사처럼 묘호는 철종(哲宗)이며,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충경왕(忠敬王)으로 추정된다. 작중에서 언급되지는 않으나 청나라에서 충경왕이라는 시호를 내려줬었다.[1] 본작에서는 조선이 칭제하지 않고 끝까지 조선 왕국 체제를 이어가기 때문에 장황제(章皇帝)로 추존되지 않았다.

2. 작중 행적

임술년(1862년) 봄, 김귀남이 이명복 시절 고종으로 환생하고 한성 시가지에서 군밤 장수 노릇을 하던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귀남의 군밤이 창덕궁 안에 있던 철종에게까지 전해졌다. 당시 철종은 중증 간경화를 앓아 죽어가고 있었고, 정사에 의욕을 잃은 채 술과 여자를 끼고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귀남의 군밤 굽는 실력이 워낙 뛰어난지라 우연히 알게 된 뒤로는 사람을 시켜 자주 사먹고 있었고, 강화도에서 강화도령으로 농사 지으며 살던 시절 군밤을 구워 먹으며 놀았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 직후 장동 김씨( 신 안동 김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현재의 처지를 떠올려 분노하고, 아무리 세도가가 설치고 다닌다 한들 자신은 조선의 왕이기 때문에 조선 왕이 종친인 이명복을 주목하는 듯한 제스처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질지 신경 쓸 수밖에 없기에 이를 이용해 장동 김씨를 몰락시키겠다고 결심한다.

귀남이 도성 한복판에서 효심으로 밤을 구우며 파는 것을 칭찬하며 상으로 은과 비단을 내렸는데, 귀남은 은과 비단을 팔아 전생에 군밤 굽는데 사용하던 기계를 만드는데 썼고 당당하게 효자밤을 구우며 인기를 끌었다. 이런 철종의 행동으로 장동 김씨 사이에서 철종의 본심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나, 당시 이명복의 아버지인 흥선군 이하응은 장동 김씨에게 얕보이는 처신을 하고 있었고 귀남의 행보도 양반 사회에서 천시되는 군밤 굽는 것이라 큰 경계심을 사지는 않았다.

한편 왕족 이하전(李夏銓)이 장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불만을 공개적으로 내뱉었다 역모 누명을 써서 사사당했다고 언급된다. 원 역사에서는 1863년 복권되고 1908년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되었는데 본작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하다. 자세한 가계는 언급되지 않으나 이하전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13대 종손으로 순조 대 대원군 종손에 한해서는 대수와 상관없이 군호를 가진 왕족으로 대우받는다는 규정이 생겨 왕족으로 대우받았고, 철종의 즉위로 전계대원군 종손도 이 규정에 들어갔다.[2]

임술년~계해년(1863년) 당시 조선 내부에 잦은 민란이 일어나는 등 내부 정세가 혼란스럽다고 언급된다.

장동 김씨의 언급에 따르면 흥선군이 효유대왕대비에게 철종의 후사로 이명복을 밀려고 했지만 효유대왕대비가 거절했다고 언급된다. 장동 김씨는 철종이 사망하면 남연군의 손자가 즉위하는 건 기정사실이니 흥선군이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겠냐 생각하면서도 여차하면 흥선군을 날려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김병학&김병국은 김좌근을 비롯한 다른 장동 김씨와 달리 흥선군과 친한 편이라서 흥선군이 뭐 그리 위험이 되겠냐고 생각했다.

계해년 봄이 되어, 장동 김씨의 당주 김좌근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김병기와 김병학&김병국의 당주 다툼이 벌어져 장동 김씨의 권세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김좌근은 이 다툼을 제대로 중재하는 것에 실패하였고, 뒤늦게 김병기를 밀어주려 하였으나 수십 년간 세도가의 수장 자리를 놓고 갈등을 빚다 이하전의 일로 갈등이 더해진 풍양 조씨[3]를 필두로 여흥 민씨 등을 비롯한 여러 유력가들이 병학&병국 형제의 편을 들면서 점점 한성 내 위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4]

김병학의 산하에 있던 장한익이라는 사내가 김좌근을 찾아와 병학&병국 형제가 흥선군에게 넘어가 흥선군의 아들을 추대하려 한다는 정보를 전하였다. 김병학이 오위장 이재두(李載斗)에게 장동 김씨가 이하전을 무고해 죽게 만든 증거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철종의 마음이 이명복에게 있으니 이재두가 이를 도우라는 편지였다. 이를 본 김좌근은 자칫하다가 장동 김씨가 내분으로 자멸할 것임을 깨닫고 김병학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철종을 찾아가고, 장한익에게 암살 지시를 내린다.

김좌근은 철종에게 김병학이 역모를 꾀했다 고변하려 했지만, 철종은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흥선군의 차자 이명복을 양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대답하고[5] 종친을 무고했다며 박규수를 불러 김좌근을 처벌하라고 명령한다. 박규수는 김좌근에게 선처가 필요하다 주장했고, 철종이 물러나라 명령하자 김좌근은 그 멍청한 조카들이 기어코 가문을 통째로 말아먹었다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박규수는 이 사건을 주도한 건 그 조카들이 아니라 흥선군이라 정정하고 현재 장동 김씨의 문중이 흥선군 산하의 병학&병국 형제에게 넘어갔으니 이를 이용해 우선 멸문지화를 피하고 후일을 기약하라 조언한다.[6]

그렇게 장동 김씨의 본가는 한순간에 압수수색을 당했지만, 흥선군은 원래 계획과 달리 철종이 살아있을 때 이 일이 벌어진 것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는 철종 사후에 이명복의 양자 입적을 공표하려 했지만, 철종이 자신이 살아있을 때 장동 김씨가 몰락하는 걸 보고 싶어하여 상황이 달라진 것. 그리고 흥선군은 박규수의 생각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에서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장동 김씨가 소유하고 있던 군권도 당사자들이 전향하면서 유명무실해졌고, 지금 순순히 전향하면 김좌근과 김병기도 명예직은 주겠다고 협박해서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본작 철종실록 철종 14년 음력 6월 18일 계사(癸巳) 첫 번째 기사에 이명복이 철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아! 과인이 부덕하여 열성조께서 내려주신 대업을 위태하게 하였노라! 신병(身病)이 깊음은 스스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니 홀로 부끄러워할 따름이나, 후사(後嗣)가 없음은 그 참담한 마음을 차마 말로 옮길 수조차 없구나. 다만 흥선군의 차자 명복이 그 영특함과 효성스러움을 드러내어 이미 뭇 세인(世人)이 널리 아는 바이니, 실로 열성조의 보살피심이요 화중지복(禍中之福)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명복에게 완정군(完靖君)의 군호를 내리고, 택일(擇日)하여 입적해 세자로 봉하고자 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고사를 상고한 연후 올바른 예를 갖추어 거행케 할지어다.”
8화 中

그렇게 귀남의 군밤으로 인해 개화파와 흥선군이 결탁하면서 계해년 여름에 조선 사상 최후의 환국인 '계해환국'이 일어났고, 한성의 명문가들은 이로 인해 바뀔 정계 구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심했으며, 한성 서민들은 군밤 장수 도령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에 기뻐해 입궐 당시 몰려와서 환호해 주었다.

이후 이명복은 '재' 항렬자에 따라 '이재황'으로 개명하고 왕세자가 되었지만, 철종도 이재황도 둘 다 궁 밖의 사람이다 보니 자유분방한 면이 있어 병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철종과 어울려주기 위해 스승들을 따돌리고 공부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밖에서는 예의를 갖추지만 궁인들을 물린 뒤에는 둘 다 서민적인 말투로 제법 편하게 대화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사관들이 뭐라 뒷담하든 철종실록은 흥선군의 감수를 받을 거라 세초될 테니 상관없다고.(...)

귀남은 질 좋은 북한 재령밤을 구해다 틈틈히 철종에게 군밤을 구워 주었는데, 왕족이지만 한낱 군밤 장수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정말로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자 철종은 강화도령 이원범으로서 이재황에게 조언해주었다.
“녀석, 임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게 군밤장수면 또 어떻다는 말이냐.
나도 태어나기야 종친으로 태어났다지만 저기 강도(江都, 강화도) 살 제는 그냥 평범한 농군이 되어 아낙 하나 만나 애 낳고 오순도순 살 생각을 하였단다. 그리로 간 거야 뭐, 내 뜻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사직이 어쩌고, 왕업이 저쩌고 하는 것보다야 그게 확실히 속은 편하다는 걸 깨달았지.
내가 맘대로 고를 수만 있었더라면, 글쎄다. 어쩌면 그대로 강도에 눌러앉았을 지도 몰라. 옆집 처자랑 눈이 맞았었거든. 그랬더니 웬걸, 날더러 용상에 오르라는 기별이 왔지 뭐야. 멋모르고 좋다고 따라가서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임금 노릇 제대로 해 보려고 발버둥을 쳐 보았다. 그 후과(後果)야 뭐, 내가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알 것이고. 내게는 도저히 이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어. 강화도서 만난 색시는 내가 궁에 들어와서 김문을 몰아내보겠답시고 어설프게 힘을 쏟는 사이 역질로 훅 가버렸고. 그제서야 느꼈지.
재황아, 너도 아마 알고 있을 게다. 너나 나는, 저 밖의 재상들이나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들과는 달라. 물론 그렇게 되고 싶다면야 그렇게 될 수 있겠지. 내가 지금껏 본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허나 그러려면 확실하게 모진 사람이 되어서, 인륜이고 천륜이고 모두 내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절대 잃지 마려무나. 네 욕심을 버리고 체면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야.”
9화 中

그 말을 들은 귀남은 그 나름대로 각오를 굳히게 되고, 이후에도 귀남과 이런 저런 이야기에 어울려주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자 몇 달 동안은 환각과 정신 착란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했고, 귀남은 그런 철종의 옆에서 그를 보살피며 동정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 귀남은 원 역사에 없던 철종의 유언을 듣게 된다.
“재황아... 내 묘는.... 강화도 보이는 곳에...”

계해년 겨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원 역사에서 철종이 사망한 1864년 1월 16일이 음력으로는 계해년 12월 8일이기 때문에 원 역사와 같은 날에 죽은 걸로 추정된다. 그래도 귀남과의 우정 덕분에 원 역사와 달리 말년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 사후 왕실의 최고 어르신은 철종의 법적인 형수인 효유대왕대비이지만, 선조의 수렴청정을 법적 큰어머니인 인종비 인성왕후가 아니라 법적 어머니인 명종비 인순왕후가 한 전례 때문인지 장동 김씨인 철종비 명순대비에게 수렴청정이 넘어갔다. 이는 명순대비가 장동 김씨이자 병학&병국 형제의 사촌지간이기는 하나 정치에 중립적인 성격이라 무리해서 장동 김씨를 부활시키려 드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개의치 않은 것이라고.

귀남은 즉위한 뒤 강화도가 보이는 곳에 묻히고 싶다는 철종의 유언을 들어주고자 문수산(文殊山, 현 김포)에 철종의 묘를 짓고자 하였고, 어디까지나 선의였으나 세간에서는 전례를 깨고 한강 너머 바닷가 김포를 묫자리로 삼은 것에 서양과의 통교와 관련된 뜻이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을축년(1865년) 음력 5월 27일 을축양요가 일어났을 때, 문수산에 있던 철종의 능을 두고 전투를 벌이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부르게 된다.

112화에서 원래 역사와 같이 철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3. 철종이 이명복을 선택한 이유

작중에서는 철종이 이명복을 마음에 들어해 양자로 삼았다고 나오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고종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고종(대한제국)/즉위 배경 문서에 나오지만, 철종의 다섯 아들이 모두 요절한 뒤 철종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생물학적 관계만 나열할 경우, 효종의 후손으로는 철종의 둘째 형 영평군과 5촌 조카 이재성만이 살아있었다.[7] 이재성은 서자였기 때문에 덕흥대원군의 11대손 이재덕이 익평군의 양자가 되지만, 법적으로 영조의 5대손이라도 덕흥대원군의 11대손이라는 입지로 인해 생물학적으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9대손인 남연군의 손자들에게 밀려나게 된다.[8]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의 양자였고, 설령 인평대군파의 종가를 기준으로 해도 철종 사망 당시 남연군보다 서열이 앞서는 종손들 중 철종의 조카뻘 남성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철종 사후 가장 즉위 가능성이 높은 건 남연군의 차남 흥완군의 아들 이재완, 3남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 4남 흥선군의 차남 이재면, 3남 이명복이었다.[9] 이재완, 이재긍, 이재면, 이명복의 나이를 비교해보면

철종 1831년생

이재완 1856년생

이재긍 1857년생

이재면 1845년생

이명복 1852년생

1863년 당시 철종 32세, 이재완 7세, 이재긍 6세, 이재면 18세, 이명복 11세였다. 즉 서열로는 이재완>이재긍>이재면>이명복이었지만 나이로 따지면 유일한 성년이었던 이재면이 유력했다. 이 때문에 원 역사의 흥선군은 철종 후기 이명복에게 시선이 쏠리는 걸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재면의 청탁을 하기도 했으며, 작중에서도 이재면의 청탁 건이 언급된다. 하지만 수렴청정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왕실의 최고 어르신이자 철종의 법적인 형수였던 효유대왕대비[10] 또는 장동 김씨 출신인 철종비 철인왕후가 수렴청정하기 위해서는 미성년이 즉위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리고 흥선군도 장동 김씨를 밀어내고 자신이 섭정으로 실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왕이 어린 것이 유리했다. 따라서 흥선군은 풍양 조씨인 효유대왕대비와 손잡고 원 역사에서 철종 사후 이명복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고종으로 즉위시킨 것이다.

그런데 본작에서는 이명복이 철종의 눈에 들면서 흥선군의 계산이 달라진다. 한동안 효유대왕대비에게의 로비를 끊은 건 아니었지만, 이미 중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명확했던 철종의 양자로 삼아 이명복을 즉위시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 경우 장동 김씨인 철인왕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11] 작중에서 철인왕후는 장동 김씨라고 편 들어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수렴청정 당시에도 수렴청정을 끝낸 이후에도 내내 중립만을 고수해서 철종이 살아있을 때 철종과 손잡아 미리 장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면 철종의 양자로 못 내세울 것도 없었다.[12]

익종보다 철종의 혈통이 훨씬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13] 그래도 '살아있는 왕'의 후계자가 되는 건 죽은 왕의 양자가 되어 즉위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위상이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철종이야 이명복의 군밤 장수 행세를 보고 강화도령 시절이 떠올라서 밀어준 것이 컸겠지만, 명분상으로도 이명복은 충분히 밀어줄 만한 위치의 왕족이 맞았다.

철종 당시 조선 시대 직계가 아닌 방계가 즉위한 사례는 정종의 셋째 동생인 태조의 5남 태종이 정종의 양자이자 왕세자가 되어 즉위한 것(정종 사후 태조의 아들로 복적되지만), 세종의 차남 세조가 조카 단종(세종의 장남 문종의 아들)의 왕위를 찬탈한 것, 예종 사후 아들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조카 자을산군(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차남)이 성종으로 즉위한 것, 연산군이 폐위되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된 것, 명종의 무녀독남 순회세자가 사망하자 이복형 덕흥대원군[14]의 3남 하성군이 명종 사후 명종의 양자로 즉위한 것, 선조의 차남 광해군이 폐위되고 조카(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한 것, 숙종의 장남 경종이 아들 없이 죽자 이복동생 왕세제(숙종의 4남)가 즉위한 것, 헌종이 죽고 생물학적 7촌 당숙인 철종이 즉위한 것이 있다.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에게 살해당해(...) 사도세자의 차남 정조가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로 즉위한 것도 나름 유사하다.

이중 명종과 선조의 사례가 주목할 만한데, 선조는 하성군 시절 암묵적으로 명종의 다음 계승자로 정해졌었다. 덕흥대원군은 명종의 9남이고 명종은 10남이었는데, 장남 복성군, 3남 금원군, 4남 인종, 5남 영양군, 7남 봉선군은 아들이 없었고, 차남 해안군은 서자밖에 없었다. 6남 덕양군 풍산군이라는 적자가 1명 있었지만 덕양군의 제사를 이었고, 덕흥군의 장남 하원군은 덕흥군의 제사를 이었으며, 차남 하릉군은 금원군의 양자가 되었다. 명종 시절에는 조선 후기와 달리 4대조인 세조의 남자 후손이 제법 남아있던 시절이라 서자와 봉사손의 계승권을 배제해서 순서상 하성군이 제일 앞에 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명종은 사망 당시 33세밖에 되지 않아 하성군을 정식으로 입적했다가는 친자가 태어난 뒤 문제가 될 게 뻔했기에[15] 1565년 명종이 쓰러졌을 때 왕세자에게 맡기는 병간호를 하성군이 맡았고 명종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으며, 죽기 직전 명종비 인순왕후는 이를 근거로 하성군을 선조로 즉위시켰다.[16]

철종의 다섯 아들은 모두 요절했고, 당시 철종은 중병으로 모두 얼마 안 가 죽을 거라 생각했기에 살아있는 상태에서 이명복을 양자로 삼아 왕세자로 책봉하는 건 그렇게 이상한 발상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작중의 고종은 조선 사상 처음으로 왕이 살아있을 때 조카(17촌이지만)가 왕의 양자가 되어 즉위한 사례가 되었다. 이후 본작에서는 고종의 차남 이척-독자 이은의 순으로 왕위가 이어져서 한동안 이런 사례는 안 나타날 듯하다.

4. 기타

군밤 세계관에서는 원 역사보다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을 군주라는 감상이 많다. 세도정치 척결도 흥선군이나 박규수의 도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철종 생전에 이뤄져서 결국 사람을 잘 본 철종의 업적이라 볼 여지도 있고 훌륭한 후계자를 일찍이 알아보고 과감히 택하여 조선 근대화의 기틀을 닦은 군주라는 평가를 들을 가능성이 높다. 원 역사에서도 철종이 정말 각 잡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세도가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면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 정도의 왕권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계해환국이 크게 고증오류는 아니다.

본작에서는 원범의 첫사랑이라고 구전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양순'이 실재하는 인물이었으며 원범이 용상에 올라 장동 김씨와 힘싸움을 벌이는 동안 역병으로 죽었다.

직접적인 등장은 매우 적지만 철종의 행보가 작중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미쳤다. 살아있을 때 계해환국을 일으켜 장동 김씨의 세력을 꺾었고, 생전에 고종을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세자로 책봉하여 고종의 정통성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또 고종에게 왕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지 강화도령 출신으로서 조언해주었고,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강화도가 보이는 곳에 철종의 능을 마련한 것은 훗날 서양의 통교와 나아가서 조선의 개화에 매우 큰 나비효과를 불렀다. 이 때문에 독자들에게 평이 매우 좋은 인물이다.


[1] 본작에서는 을미정난(1895년) 청나라가 조선과의 천조 질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입헌군주정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고종 이후로는 시호를 안 내려줬을 수도 있다. [2] 이후 고종의 즉위로 흥선대원군 종가도 이 대우를 받게 된다. [3] 이하전은 장동 김씨보다 풍양 조씨와 가까운 편이었다. [4] 한편 당시 13살이었던 김옥균은 이러다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고, 명성황후는 이번 일로 파혼할 유력가가 많을 테니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생길 거라 짐작하며 머리를 굴렸다. [5] 사실 흥선군의 장남은 이재선이라는 서자고, 이명복은 엄밀히는 3남이나 적차자라서 차자라고 언급한 것이다. [6] 박규수가 흥선군의 권력욕을 간파하고 흥선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세도가를 어느 정도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옛 붕당이 그러했듯 흥선군의 근왕파, 옛 세도가의 잔당, 박규수의 개화당으로 조정을 삼분하여 흥선군을 견제하고자 했다. [7] 철종은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의 8남 전계대원군의 3남이고, 이재성은 은언군의 4남 풍계군의 독자 익평군의 독자였다. [8]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후손은 효종 정통성 문제 때문에 배제되었다. [9] 흥선군의 장남 이재선은 서자라서 이재성과 같은 이유로 밀려났다. [10] 순조의 독자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처로, 헌종 재위기 효장세자가 익종으로 추숭되며 왕세자빈에서 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의 항렬이 효장세자와 같아 순조의 양자가 되면서 법적인 형수가 되었다. [11] 선조는 명종의 양자로 즉위했는데, 법적인 큰어머니인 인성왕후가 아니라 법적 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로 인해 본작에서는 고종이 철종의 양자로 즉위함으로써 원 역사와 달리 효유대왕대비가 아니라 명순대비(철인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12] 고종의 간택 당시에도 명순대비는 장동 김씨를 돕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는데, 본작의 효유대왕대비와 풍양 조씨가 쩌리가 되어 고종의 간택령에 개입했음을 고려하면 명순대비가 정치 관여를 철저히 피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민자영( 명성황후)이 귀남의 마음에 들어 간택되었지만. [13] 익종은 순조의 독자로 대리청정도 해본 세자이며, 혈통도 영조-사도세자(서자)-정조(적자)-순조(서자)-익종(적자)이라 영조-사도세자(서자)-은언군(서자)-전계대원군(서자)-철종(서자)인 철종보다 우위이다. 이 점도 고종이 익종의 양자가 된 이유였다. [14] 의외로 덕흥군이 명종의 4살 연상으로 이복형이다. [15] 명종 시대 일본에서는 양자로 들어간 동생과 뒤늦게 태어난 친아들 간의 계승권 다툼을 두고 센고쿠 시대의 서막을 여는 오닌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창궐한 왜구에 시달리던 당대 조선에서도 오닌의 난의 원인을 파악한 상태였다. [16] 여기에는 하성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 모두 사망하고 정씨의 친정도 권세가 대단치 않았던 것도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