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15:14:13

철리말갈

철려에서 넘어옴
퉁구스의 역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숙신
(?–300년경)
읍루
(300년경–500년경)
물길
(400년경–600년경)
말갈
(500년경–1100년경)
흑수말갈 불열말갈 월희말갈 우루말갈 백산말갈 백돌말갈 철리말갈 속말말갈
흑수말갈 발해(698년-926년)
여진 (900년경–1588년)
금나라(1113년-1234년)
동하(1218년-1233년)
생여진 숙여진
야인여진 건주여진 해서여진 시버족
어웡키족· 어웡족 네기달족 오르촌족 우데게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울치족· 윌타족 만주족
청나라(1616년-1912년)
퉁구스
}}}}}}}}} ||
철리말갈
鐵利靺鞨
(7세기 후반 ~ 1100년경)
위치 북만주, 하바롭스크 일대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추장
주요 추장 나사 (11세기 초)
민족 말갈
종교 토속신앙 → 불교
주요사건 8세기 에 조공
926년 거란에 조공
1014년 고려에 조공

1. 개요2. 역사
2.1. 철리말갈2.2. 발해 철리부2.3. 10~12세기
3. 문화

[clearfix]

1. 개요

7세기에서 11세기까지 만주에서 활동한 말갈 부족이다.

2. 역사

2.1. 철리말갈

철리말갈은 고구려 멸망 후 7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부족이다. 흑수말갈 발해말갈을 주로 다룬 『 구당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 신당서』 권219, 북적 열전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여진어 '안춘'이 쇠(金/鐵)를 뜻하고 발해 철리부 위치가 훗날 금나라 발상지 안출호수(金水)의 옆인 것으로 보아 남북조시대 물길7부 중 안차골부와 명칭은 흡사하다. 명칭은 연결되나 안차골부와 철리부의 부락민들이 실제 계승되고 일치하는지는 기록부족으로 미상이다. 당나라 중후반기에 불열(拂涅), 우루(虞婁), 월희(越喜)와 함께 때때로 중국에 조공했는데, 당 개원 연간(713~741)에 6회 조공했다. 우루, 월희 말갈은 당 덕종 때인 정원 연간(785~805)에도 조공했지만 철리와 불열말갈은 당 현종 이후 조공이 끊겼고, 월희말갈의 조공도 단 한 차례에 그쳤다.

2.2. 발해 철리부

앞서 말갈 부족의 당 조공이 줄어든 이유는 발해의 건국 때문이다. 발해( 고왕 시기 추정)는 철리말갈의 땅을 정복하고 철리부를 세웠으며, 앞서 언급된 불열, 월희말갈 역시 발해의 영토에 편입됐다. 발해의 부(府)로 편입되면서 불열말갈은 동평부, 월희말갈은 회원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철리말갈은 솔빈말갈(솔빈부)과 더불어 부(部)였을 때의 이름을 유지했다.

철리부가 일단은 발해에 소속되긴 했지만 이는 간접적 복속에 그치고 여전히 큰 독립성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79년에 '발해'와 '철리부'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별개의 타이틀을 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발해 사신과 철리인 사신이 일본 조정에서 윗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발해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리 가지고 이런 자존심 다툼을 한 것을 보면 발해인 주류와 철리부는 서로 상당한 지역감정,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2.3. 10~12세기

13년 8월에 고려에 온 흑수黑水 아부한阿夫閒은 철리국鐵利國 수령首領 나사那沙가 파견했다. 철리국은 흑수말갈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고려와 통교했음을 알 수 있다. 철리국鐵利國은 발해 멸망 후 반자립적 부족생활로 돌아간 여진의 한 갈래인 철리鐵利가 세운 나라이다. 철리鐵利는 태조대에 후삼국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일리천一利川 전투에 흑수黑水, 달고達姑 등의 제번諸蕃과 함께 고려의 기병騎兵부대로 참전한 철륵鐵勒을 지칭한다. 사실 철리국과 고려의 첫 교섭은 5년 2월에 이미 있었다. 그때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여진女眞 만두萬豆를 시켜 말 초서貂鼠 청서피靑鼠皮를 고려에 바쳤다. 이후에도 철리국의 사신 왕래는 몇 차례 더 있었다. 6차 전쟁이 끝난 직후에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아로태阿盧太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토마土馬를 바쳤는데, 이는 고려의 대거란전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절일 것이다. 고려는 곧 이에 대한 보빙사報聘使를 철리국에 보냈다. 철리국은 12년 3월에 ‘이전처럼 귀부歸附한다’는 표表를 고려에 올린 것을 보면, 이전에 이미 고려와 철리국은 상국上國과 번蕃의 외교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구산우, 고려 현종대의 대거란전쟁과 그 정치,외교적 성격, 역사와 경계 74』
926년 발해가 요나라에게 멸망한 뒤에 철리부라는 이름을 철리주(鐵利州)로 고쳤다. 『 요사』에서는 철려(鐵驪), 『고려사』에서는 철륵(鐵勒)·철리국(鐵利國), 『 금사』에서는 철려와 철륵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철려는 월리독(越裏篤), 부아리(剖阿裏), 오리미(奧裏米), 포노리(蒲奴裏)와 같이 오국부(五國部)의 일원으로, 각 국부는 모두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철려는 발해의 옛 땅에서 빈발한 발해부흥운동 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995년 철려가 올야국 오소도와 발해 연파에게 침략당하자 요나라의 명을 받은 해족 왕 화삭노(和朔奴)가 철리를 지원해 오소도 등을 토벌했다. 이후 올야국 백성들을 잡아다 요나라에 바치는 식으로 부흥운동에 훼방을 놓았다.

11세기 여요전쟁이 한창일 때 철리국은 고려와 거란 양국에 사신을 보내며 중립 외교를 펼쳤다. 고려 현종은 일방적으로 조공을 받기만 하지 않고 1019년에는 답례차 철리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고려와 철리국 양국간의 밀접한 관계는 고려 덕종 즉위 초반인 1033년까지 이어졌다.

철려는 같은 퉁구스 계통으로 여겨지는 여진족과 동시대에 남아있던 말갈족이었으므로 고려와 거란에 조공할 때도 여진족과 함께했는데, 철리국은 아예 여진족이나 흑수말갈 사람을 외교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물론 여진족이 단일 집단이 아니었던 만큼 1040년 11월 여진족이 요나라 변방을 침입했을 때 황룡부(黃龍府)의 철려군이 막아낸 일도 있었다.

12세기, 철려는 천조제 시기까지 요나라에 조공했다. 1101년 7월에는 조복(阻卜)과 함께 조공했는데, 1114년 10월 철려가 여진족에게 귀부하면서 요나라와의 관계는 단절됐다.[1] 요사에서는 동년 12월 함주, 빈주, 상주, 철려와 올야가 모두 배반해 여진족에 붙었다고 서술한다.[2] 이 시기 활동한 해족 왕 회리보(回離保)는 '해철려왕(奚鐵驪王)'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요사 해왕해리보열전에서는 해족이 점거한 지역의 옛 부족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설명한다.[3] 금나라 건국에 참여한 쳘려부에서는 동중서문하평장사 철려돌리랄(鐵驪突離剌) 같은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3. 문화

那沙乞賜佛像, 儒書, 詔賜《護國仁王佛像》一, 《易》, 《詩》, 《書》, 《春秋》, 《禮記》各一部。
나사가 불상과 유교 경전을 부탁했기에 조서를 내려 『호국인왕불상』 1좌와 『역경』, 『시경』, 『서경』, 『춘추』, 『예기』를 각 1부씩 하사했다.
『요사』 권15, 성종 본기, 개태 원년(1021) 8월 병인삭.
중국 문명과 그들을 지배한 정복왕조, 그리고 한민족계 국가와 오랜 기간 교류하면서 유교, 불교 등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 복속되어 고려의 책력[4]을 받아가 사용하기도 했다.

철리말갈의 토산물은 다른 북만주 지역과 다를 바 없어서, 『신당서』에서 발해 각부의 특산물을 소개할 때도 특별히 언급된 철리부 산물은 없다. 철리국에서는 검은담비 가죽 초서피(貂鼠皮), 날다람쥐 가죽 청서피(靑鼠皮)와 지역 등을 주로 조공품으로 보냈다. 요나라에서 철려 등 5부족에 요구한 조공품도 주로 말과 동물 가죽이었다. 드물게 요나라에 를 바치기도 했다. 『요사』 식화지에 따르면 철리주에서는 이름 그대로 (鐵)이 많이 나왔다고도 한다.


[1] 十月朔, (...) 鐵驪部來送款.(《금사》 권2, 태조본기, 태조 2년 10월삭.) [2] 十二月, 咸·賓·祥三州及鐵驪, 兀惹皆叛入女直.(《요사》 권27, 천조제본기, 천경 4년 12월.) [3] 鐵勒者, 古部族之號, 奚有其地, 號稱鐵勒州, 又書作鐵驪州.(《금사》 권67, 해왕해리보열전.) [4] 당시 고려 책력은 중국의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 일식이 일어나는 날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등 오류가 많았다. 조선 왕조에 들어 세종 때 비로소 한반도 실정에 맞는 달력이 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