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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0:15:01

천주교 함흥교구

파일:대한민국 천주교 상징.svg 한국 천주교 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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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직속 군종 · 덕원자치수도원
밑줄: 대교구
※ 위 첨자: 침묵의 교회

천주교 함흥교구
Diocese of Hamheung
Dioecesis Hameungensis
형태 가톨릭 교구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명목상)

[[북한|]][[틀:국기|]][[틀:국기|]] (실질적)
특이사항 침묵의 교회
관구 서울관구
교구장 (서리) 김주영 시몬
교구 사무처장 신호철 토마스 신부
관할구역 함경남도 북부, 함경북도

1. 개요2. 역사3. 역대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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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흥교구는 함경남도 일부[1] 함경북도를 관할하는 한국 가톨릭 교구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구는 실질적으로 북한 치하의 종교의 자유가 없는 땅이기에 침묵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으며, 함흥교구장은 대한민국 춘천교구장이 겸직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유효한 교구가 아니기에 교구장이 아닌 교구장 서리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 함흥교구장 서리는 춘천교구장인 김주영 시몬 주교이다.

2. 역사

1920년 8월 5일 경성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분리되었다. 원산대목구는 함경도를 비롯해 만주의 연길·의란 선교지까지 관할했으며, 해당 지역은 오틸리엔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었다. 이를 위해 현재 서울 혜화동[2]에 위치했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원산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24년 원산시 베네딕도회 수도원장에 김시련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임명되고, 1925년 11월 툿찡(Tutzing)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원산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빈민학교 및 야학교와 의료사업, 유치원 등을 설치해서 사회사업에 주력하게도 되었다. 또한 1926년부터 작업해서 1927년 3월 덕원으로 수도원이 이전했다. 1940년 1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원산대목구를 해체한 후 함흥대목구와 면속구(免屬區)인 덕원자치수도원구가 독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탄압과 방해로 원산대목구 시절의 주교좌이던 원산성당이 덕원수도원자치구로 편입된 후 함흥대목구의 주교좌성당을 건설할 수 없었다. 이후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주둔한 소련군에 의해 종교탄압은 심해졌고, 1949년 5월 9일 밤 신상원 보니파시오 대목구장(수도원장)을 비롯한 사제 수도자들이 전부 체포되어 상당수 사제 및 수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수감 중 병에 의해 사망했다.

그 후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한국에서의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함흥대목구에서 함흥교구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함흥교구는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함흥교구장 서리는 덕원수도원자치구장 서리와 함께 베네딕도회 수도회 장상(長上)인 아빠스에게 자동계승되었으나, 2005년부터 한국 천주교 주교협의회 및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동의를 얻어,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한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직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로 인해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가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2009년부터 신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 평양교구와 같이, 함흥교구도 2016년부터 신학생을 모집한다. 함흥교구 사제를 지망하는 신학생들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임시로 춘천교구에서 사목하다가 남북통일이 되거나 북한 지역에서 사목활동이 가능해지면 함흥교구 지역에 우선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게 된다. 참고.

3. 역대 교구장



[1] 덕원자치수도원 관할인 원산시, 안변군, 문천군, 고원군은 제외. [2] 현재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이 위치한 그 부지가 바로 베네딕도회 수도원 위치였다. [3] 독일 제국 태생. 한국어명 '신상원(辛上院)', 세례명 '요셉(Joseph)'. 서울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에 의해 한국에 왔으며, 백산수도원과 덕원수도원 자치구를 세운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의 탄압에서도 수도원을 지켜냈지만, 결국 공산화에 의해 1949년 5월 9일 수도원의 사제 수도자와 함께 체포되어서 결국 평양 노동교화소에서 72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4] 스위스 태생. 한국어명 '이성도(李聖道)', 세례명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z X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