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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2 10:26:54

이동호(종교인)

파일:external/jewelleryculture.files.wordpress.com/escapulario-bendictino.jpg 파일:왜관 수도원.png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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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오도환 오도 아빠스
파일:독일 국기.svg
(1964~1971)
2대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1~1985)
3대
이덕근 마르티노 아빠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1995)
원장서리
김구인 요한보스코 신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2013)
4대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2013)
5대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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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鎬
Abbot Placidus Lee Dong-ho
1935년 ~ 2006년

파일:external/www.cbck.or.kr/abbas2.jpg

한국 가톨릭 교회의 제3대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 세례명은 '플라치도'이다.

만주 간도 연길현 팔도구에서 출생한 이동호 아빠스 서울 가톨릭대학을 졸업한 뒤 성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에 입회, 왜관본당 보좌 신부와 성주본당 보좌신부·구미본당 주임신부 등을 거쳐 1969년 9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71년 4월 15일 비교적 젊은 36살에 왜관수도원 제3대 아빠스로 선출돼 한국인 최초의 아빠스가 되었다.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62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 활동하는, 외국에서 설립된 수도회들 중 첫 방인 장상으로, 수도회 내적으로는 한국인이 국제적 공동체에서 동등하게 대접받게 되는 계기가 됐음을 의미했다.

독일인 아빠스가 물러나고 한국인 장상이 출현한 배경은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 요인과도 관계가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릿고개라는 용어가 없어지고 새마을운동 등 영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경제적인 성장을 거두며 전반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시점이었다. 또한 교회적으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현지 교회의 정신적 사회적 발전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그 의미대로 이동호 아빠스는 이전의 수도원 사업들을 계속해서 성실히 발전시켜 나갔으며 자립 수도원을 목적으로 했던 부산 수도원을 분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분도출판사 분도인쇄소를 분리 확장시켜 교회 출판사업을 진작시켰고 연화리 결핵요양원을 설립하는 한편 순심중학교ㆍ 순심고등학교를 확장하고 농장사업을 시작 발전시키는 일도 추진했다. 한국인에 의한 베네딕도회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시기였다.

2006년 11월 18일 향년 71세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