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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0:27:05

차이콥스키 콩쿠르


세계 3대 음악 콩쿠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차이콥스키 콩쿠르

파일:17thTchaikovsky.jpg

<colbgcolor=#441961> 대회 정보
<colcolor=#fff> 공식명칭 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Международный конкурс
имени П. И. Чайковского
개최지
[[러시아|]][[틀:국기|]][[틀:국기|]] 모스크바
분야 첼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목관악기, 금관악기
제1회 개최 1958년 ([age(1958-01-01)]주년)

1. 개요2. 출범3. 충격과 공포의 2019년 대회
3.1. 시작부터 가득했던 잡음3.2. 엉망이 된 결선 무대
4.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 회원 자격 박탈5. 엄청난 이변의 2023년 콩쿠르6. 역대 수상자

[clearfix]

1. 개요

공식 홈페이지

표트르 차이콥스키를 기려 개최한 콩쿠르로, 1958년에 첫 번째 콩쿠르가 개최되었으며 4년에 한 번씩 개최된다. 성악,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의 네 분야가 있으며 첼로는 1962년에, 성악은 1966년에 추가되었다. 2019년부터 목관악기 금관악기가 추가되었다.[1]

보통 6월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회를 연다. 다만 피아노 부문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 Большой Зал(Great Hall) 에서 진행하는데 에어컨이 없어서 참가자 전원이 연주하면서 본인의 땀으로 샤워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청중들도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이 건물이 워낙 오래되어 에어컨을 설치하기가 구조적으로 곤란하다고 한다.

서양인, 특히 주최국인 러시아 출신 참가자에게 유리한 정황이 있다. 아시아에서 우승은 전 종목을 통틀어 일본이 4번, 한국이 2번, 몽골과 중국이 1번인데 그 중에서도 피아노 부문이 비서양계에 불리하다는 의혹이 짙다. 피아노 부문의 1위는 웬만하면 러시아인에게 준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냉전 시기인 1973년 정명훈이 피아노 2위를 했을 때도 사실상 우승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한국에선 쇼팽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음악 콩쿠르"라고 일컫곤 하지만 정작 서양권엔 그런 인식이 없다. "3대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세계 3대식 분류, 표현을 즐겨쓰는 일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대콩쿨을 명시한 아사히 신문 기사, 3대콩쿨을 포함해 일본인들이 만든 세계 3대들을 나열한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어찌했듯 일본과 한국에선 쇼팽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함께 스포츠로 치면 올림픽 수준의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지만 온갖 뒷말과 잡음이 오고가는 것으로 유명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대해선 그간 소련이 자국 출신의 유명 음악인들의 명성을 이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평이 있다.

2. 출범

이 콩쿠르의 탄생은 정치적인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1950년대는 공산/ 자유진영 간의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는데 소련은 자국의 문화예술 수준을 전세계에 선전하고자 야심차게 이 콩쿠르를 창설하였다. 당시 소련은 국가 주도로 체계적이고 치밀한 음악영재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선별한 최고의 젊은 음악도들을 콩쿠르에 출전시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소련 음악계의 우월함을 자랑하려고 했다.

하지만 1958년에 개최한 1회 대회의 우승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소련의 철천지 원수 미국의 밴 클라이번(Van Cliburn. 1934~2013)에게 돌아갔다.( 대회 영상) 당시에는 심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기 전에 크렘린궁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심사위원단이 만장일치로 우승자를 클라이번으로 결정하고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보고하자 "그가 최고라면 그렇게 하라"며 심사위원단의 결정을 승인했다.( 관련 기사) 클라이번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미국 시민들은 귀국한 클라이번을 뉴욕에서 우승 퍼레이드로 맞이했다.( 퍼레이드 영상) 클라이번은 이후 저명한 피아니스트로서 세계 음악계에 족적을 남겼다.

이 대회에서 공동 2위로 입상한 중국의 류시쿤은 이후 중국에서 피아니스트 및 교수로 활동했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진 후 다른 예술인들과 마찬가지로 홍위병들에게 고초를 당한 후 8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소련 언론 매체가 홍위병이 그의 손목을 잘랐다는 뉴스를 내보내기도 했지만 이는 오보였다. 그가 고초를 겪은 사실은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전혀 서술되어 있지 않다.

3. 충격과 공포의 2019년 대회

3.1. 시작부터 가득했던 잡음

2019년에도 대회가 열렸는데 전 종목 통틀어 954명의 엄청난 인파가 참가신청을 하였다.[2] 그런데 참가 신청 마감일이 다가오니 대회 측에서는 지금까지 12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렸다고 발표했다가 신청기간이 끝난 뒤에는 954명이라고 슬쩍 고쳐 발표하는 행태를 보여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등 커뮤니티에서 빈축을 샀다.

이외에도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콩쿠르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2019년 1월이 되어서야 내놓았다. 최상급 국제콩쿨이라면 못해도 1년 전에는 참가에 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게다가 피아노 부문에서 서류심사를 통과한 신청자들의 절반이 러시아 국적자였다.

3.2. 엉망이 된 결선 무대


이렇게 콩쿨 전에도 진행이 엉망으로 진행될 될 조짐을 보이더니 결국 이 콩쿨의 간판급 매치라 할 수 있는 피아노부문 결선에서 국제 정상급의 음악 콩쿨이라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사건은 최종등수가 정해지는 결선무대에서 일어났고,피아노부문의 결선진출자들은 결선무대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국의 안톈쉬(安天旭)는 결선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먼저 연주하고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이어서 연주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결선 연주장에 입장하기 직전 갑자기 안내방송으로 이 연주자가 연주할 협주곡의 순서가 변경됐다는 방송이 나왔다. 문제는 이 방송을 러시아어로만 하여 안톈쉬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반면 이를 알아들었던 러시아인 지휘자는 방송에 따라 곡의 순서를 바꿔서 라흐마니노프 광시곡을 시작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광시곡은 하필 곡이 시작하고 3초도 안 되어 피아노가 합류해야 하는 협주곡인데, 안톈쉬는 당연히 당황하여 합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정말 다행히도 연주를 무사히 마치기는 했다.

연주가 끝난 후 심사위원단은 회의를 거쳐 해당 참가자에게 한 번 더 연주할 기회를 제안했으나 안톈쉬는 거절하였고, 결국 이 참가자는 4위에 입상했다. 심사위원단은 이 참가자가 안타까웠는지, 규정에 없던 특별상을 즉석에서 만들어 이 참가자에게 수여했다. 상의 이름은 확신과 용맹 특별상(Special prize for Self-confidence and Bravery)이다.

그런데 최종 순위를 보면, 결선 진출자 전체 7명 중 단독 1위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프랑스)의 뒤를 이어 공동 2위인 드미트리 쉬시킨( 러시아), 후지타 마오( 일본), 공동 3위가 3명으로 각각 러시아 2명 및 미국 1명이 입상했다. 즉 실질적으로 당해 중국인 참가자의 순위는 꼴찌인 셈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 순위에 2명이 공동 입상하는 경우는 비교적 흔한 현상이지만, 무려 3명이 한 순위에 공동 입상한 경우는 1990년에 개최된 9회 대회에서의 3위( 미국, 벨기에, 구 소련 각 1명) 2015년 바이올린 부문에서의 3위( 러시아 2, 몰도바 1)정도이다. 공동 수상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정확한 실력 판별을 책임지는 심사진의 역량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니만큼, 이러한 결과를 두고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비판이 쏟아졌다.

4.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 회원 자격 박탈

20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이에 대해 2022년 4월 19일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은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연맹회원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 연맹 긴급 총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무려 90%의 회원들이 회원 자격 박탈에 동의했다고.[3]

연맹은 "러시아의 야만적인 전쟁과 우크라이나에서의 잔혹한 인명 피해 앞에서, 러시아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콩쿠르를 더는 회원으로 유지할 수 없다. 콩쿠르 측이 총회에 참석을 해서 입장을 밝혔지만, 푸틴 대통령의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더는 연맹 회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정 이유를 설명했다.

콩쿠르 측은 "전 세계적인 음악 공동체가 정치적인 이유로 분열됨으로써 뛰어난 러시아 음악가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5. 엄청난 이변의 2023년 콩쿠르

WFIMC에서 강퇴당하고 러시아 본토도 전쟁통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한 와중에 2023년 콩쿠르는 6월에 열릴 것이라는 공지가 슬쩍 올라왔다. 참가비도 완전 면제에 왕복 교통비까지 콩쿠르 주최 측이 모두 부담하는 조건을 내걸었기에 남몰래 차이콥스키 콩쿠르 홈페이지를 매일 새로고침하던 수많은 전공생들의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한차례 참가신청기간이 연기된 후 최종마감이 되었고 뚜껑을 따보니 700명이 넘는 인파가 예비심사 참가신청을 했다! 콩쿨과 경쟁이라면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한국인들답게 한국인 참가자 숫자가 러시아, 중국 다음으로 높았다. 이 와중에도 참가국 중 우크라이나를 일부러 맨 마지막에 쓴 게 킬링포인트.[4] 그렇게 전쟁중임에도 콩쿠르는 조용히 진행되었는데...

한국인 최초 우승 타이틀이 무려 세 부문에서 튀어나왔다.

성악 부문에서는 테너 손지훈이 1위 베이스 정인호가 공동 2위, 첼로의 이영은과 바이올린의 김계희가 1위를 차지했다. 첼로 박상혁은 3위에 올랐다. 첼로 이동열은 5위에 올랐다. 피아니스트 예수아는 4위를 차지했다. 플루티스트 김예성은 공동3위를 차지했다. #1 #2

과거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입상자 수준을 생각해봤을 때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 음악계에선 주요 악기 부문에서 한국인이 우승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10년대 중후반 들어 급격히 줄어든 서양권 콩쿨 출전자 풀과 인구대비 역대 최대를 찍은 한국인 국제콩쿨 출전자 풀, 그리고 한국인 특유의 치열한 경쟁심리가 모두 맞물리며 쇼팽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한국인에게 차례대로 정복당하고 차이콥스키 콩쿠르마저 한국인이 모조리 쓸어담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 반응은 싸늘한데, 이번 콩쿨 우승자들의 폼을 현업 A급 연주자로 뛰고있는 한국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티어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대놓고 떠벌리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상 완벽한 빈집털이라는 게 현직 음대 교수들, 기획사 사장들, 도이치 그라모폰 갤러리를 비롯한 한국 클래식 업계의 솔직한 평가다. 중앙일보 KBS, 각종 클래식음악 관련 소식통들도 대놓고 말만 못하지 우회적으로 쟤가 이걸?이라는 논조로 보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은 콩쿨 우승이지만 옛 차이코프스키콩쿨의 거장 우승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대우를 받을 실력은 전혀 아니라는 것. 이번 결과를 두고 이번 입상자나 우승자들이 이전 콩쿨에서 훨씬 저조한 성적을 낸 국내외 현업 유명 연주자들보다 순수하게 실력이 우월해서 우승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초에 실력있는 유망한 서방권 출전자는 각자 자국내에서의 PC나 정치적 여론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참가를 주저했으며, 러우 전쟁 본진인 러시아인과 러우전쟁과 관련없는 동양인들만 거리낌없이 참가신청을 낸 것, 그리고 2019년 콩쿨과 같이 프리셀렉션 라운드에서의 철저한 승부조작과 국적차별이 이변의 요인이기도 하다.

원래대로라면 차이콥스키 콩쿨의 우승자는 우승 즉시 전세계 음악계의 스타 취급을 받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앞으로 세계 공연계가 이 콩쿨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번 우승자들과 입상자들의 권위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6. 역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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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2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7px"
피아노 부문 우승자
제1회
(1958년)
제2회
(1962년)
제3회
(1966년)
제4회
(1970년)
제5회
(1974년)
반 클라이번
파일:미국 국기.svg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파일:소련 국기.svg
존 오그던 파일:영국 국기.svg
그리고리 소콜로프
파일:소련 국기.svg
블라디미르 크레이네프 파일:소련 국기.svg
존 릴 파일:영국 국기.svg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파일:소련 국기.svg
제6회
(1978년)
제7회
(1982년)
제8회
(1986년)
제9회
(1990년)
제10회
(1994년)
미하일 플레트네프
파일:소련 국기.svg
공석 베리 더글라스
파일:영국 국기.svg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파일:소련 국기.svg
공석
제11회
(1998년)
제12회
(2002년)
제13회
(2007년)
제14회
(2011년)
제15회
(2015년)
데니스 마추예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아야코 우에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공석 다닐 트리포노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드미트리 마슬레예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제16회
(2019년)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파일:프랑스 국기.svg
}}}}}}}}}

[1] 2018년 2월에 공식 발표되었다. [2] 이 중 실제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100여명뿐이며 나머지는 서류, 비디오심사를 거쳐 다 탈락된다. [3] 클래식계에서 이미 친푸틴 성향의 러시아 연주자들은 배제되는 중이며, 2022년 3월에는 푸틴의 문화계 오른팔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공동조직위원장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독일에서 상임지휘자직을 잃었다.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 또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와의 협연을 취소하였다. 다만 말로페예프는 전쟁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소한 것. 우크라이나계 단원들이 말로페예프와 협연하기를 거부한 것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4] 다른 나라는 알파벳순으로 쓰면서 우크라이나만 맨 마지막에 굳이 쓴 이유는 안 봐도 비디오다. [5] 당시에는 신현수로 출전, 이후 개명함. 동갑인 클라라 주미 강보다 8년 앞서 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