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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폴리 아 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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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줄거리 개봉 전 정보 평가


1. 개요2. 평점3. 평론가 평4. 관람객 평
4.1. 호평4.2. 복합적 평가4.3. 혹평

1. 개요

조커: 폴리 아 되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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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론가 평

평론가들만이 참여하는 로튼토마토 신선도는 33%로 썩은 토마토를 받았고, 신선도의 탑 크리틱 46개 중 33개가 부정적인 평가로 굉장한 혹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메타스코어는 46점으로, 복합적과 불호 평가의 수가 호평의 2배이다. 평가 수치로만 따지면 같은 DC 코믹스 원작 영화 중 망작으로 꼽히는 저스티스 리그와 동급이다.
소격효과와 자학적 반성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탈진한 활력
김경수 ( 씨네21) (★★★)
조각난 할리우드의 환상 속을 헤매는 조커 최후의 벌레스크
김소미 ( 씨네21) (★★★)
내가 쓴 증오의 노래의 돌이킬 수 없는 성적표를 받아든 비운의 예술가
김철홍 ( 씨네21) (★★★★)
서도철도 아니고 조커가 자기 반성을 하니, 마음 한켠이 울적하다
김현승 ( 씨네21) (★★★)
유희를 내던진 거대 엔터테인먼트, 지친다
이용철 ( 씨네21) (★★★)
서커스장에서의 길고 지루한 진담과 궁색한 속죄
이우빈 ( 씨네21) (★★☆)
뼈 아픈 각성에 목 놓아 노래를
박평식 ( 씨네21) (★★☆)
반대를 위한 반대명제
이병현 ( 씨네21) (★★)

4. 관람객 평

불호평이 더 두드러지는 추세로, CGV의 에그지수는 60%로 내려앉았으며[1]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 네이버 등의 실관람객 평점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2] 북미쪽의 반응도 국내와 동일하게 좋지 않은 편으로, IMDb의 사용자 평가 비율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10점(만점)보다 1점(최하점)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작은 10점이 가장 많았고 1점은 1.4%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불호의 경향이 굉장히 강한 셈이다.

로튼토마토 팝콘지수의 경우 무려 30%대로 추락하였다. 상업영화가 60~70%대만 진입해도 호불호의 단계고, 50대부턴 불호가 다수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바닥이나 다름없는 점수다. 흔히들 망작이라고 놀림받는 영화들조차 대부분은 60~70대를 유지하고 지뢰급 폭탄이라고 혹평받는 영화들도 50대는 어떻게든 유지하는 것을 고려하면 대규모 상업영화로썬 초토화가 된 수준. 망한 코믹스 영화 중에서도 못난 취급을 받는 마담 웹조차 50대이며 같은 DC에서 근래 최악이라 평가받는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도 40대인 것을 고려하면 여론이 굉장히 부정적이다.

베니스 영화제 최초 공개 이후, 전작 《 조커》 이상으로 평가가 심하게 갈렸다. "《 다크 나이트》 이후 최고의 배트맨 프랜차이즈 영화이다"라는 극찬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완전히 망칠 작정으로 만든 영화 같다"는 혹평도 있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공통적으로 1편과 매우 다른 속편이라는 것은 동의하고 있다.

전작이 ‘어떻게 아서 플렉 조커가 되었는가’를 그리고 있다면, 이 작품은 큰 틀에서 ‘그는 아서 플렉인가 혹은 조커인가’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조커로서의 아서 플렉’을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매우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본작의 호오는 일차적으로 초점을 '아서'에 두었느냐 '조커'에 두었느냐에 따라 갈리게 된다.

여기에 극중 삽입된 뮤지컬 장면 또한 평가를 양분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각 장면별로 뮤지컬로 연결되는 부분은 크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편이나, 그 빈도수가 매우 많다. 이 때문에 영화를 호평하는 측에서마저도 너무 비중이 과한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할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상당히 난해하다는 평이 많다. 특히 평가의 호평 부분에 메타적인 평가가 들어가고, 재미가 없다거나 지루하다는 혹평이 있는 등 대중적인 재미를 챙기는 블록버스터보다는 예술영화에 더 어울리는 평가가 많이 보인다.

4.1. 호평

전작을 답습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전작을 거의 정면으로 부정하며 완전히 다른 전개를 보여주고 조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더 깊은 고찰을 보여주었다.

전반적으로는 ‘폴리 아 되’라는 제목 자체가 훌륭한 작명이라는 평이 많다. 작중 아서는 사람들의 광기와 기대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조커가 되어 사람들이 원하는 조커를 연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최후반부에 아서는 조커는 환상일 뿐 자신은 아서 플렉이라며 한탄하고 극 중 인물들의 상당수는 이에 대해 극도의 실망감을 표출한다.

재밌는 점은 현실 관객들의 상당수도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지 않았다며 동일한 혹평을 내린다는 것이다. 즉 극 중에서나 메타적으로나 ‘타인이 아서 플렉을 조커라며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또 일방적으로 실망한다’는 일치된 양상을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제목인 ‘폴리 아 되’는 아서와 할리(로 대표되는 조커 지지자들)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 관객과 극 중 조커 지지자들의 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조커 보러 왔는데 아서 플렉만 있었다.”는 혹평이야말로 감독의 의도 자체를 그대로 드러낸 최고의 찬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평을 자처하는 이들 중 "미개한 관객들이 화내는 반응이 영화를 대단하게 만든다", "아서가 아닌 조커를 보러 온 너희는 잘못되어 있고 그저 죽이고 불타는 걸 보고 싶은 광기에 차 있다" 등의 글을 달며 부정 평가자들을 대상으로 도덕 챙기라고 계몽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의 비율이 적지 않다 보니, 부정 평가자들이 이에 불쾌감을 느끼고 격앙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혹평 관객들을 향해 선민의식적으로 주장하기보단, '모두가 실은 조커(광대)를 원하는 반응이 영화 속 전개와 매치가 되면서 아서의 비극이 영화 밖으로도 이어진다' 정도로 혹평 관객이 아닌 영화 자체에 포인트를 둔 호평을 적는 것이 바람직할 모습일 것이다. 영화를 어느 관점에서 보고 평가할 것인지는 완전히 개인의 영역이니, 감독의 의도에서 벗어나 영화 자체를 두고 실망스럽다는 감상을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결국 전작이나 본 작품이나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전작은 사회 시스템 내에서 약자인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본작은 이미 ’조커가 된‘ 아서 플렉이 외부에 의해서 끊임없이 조커이기를, 혹은 조커가 아니기를 강요받으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과정을 보인다. DC 코믹스에서의 조커가 광기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점을 생각하면, 조커를 낳은 ’사회‘라는 광기를 조명하고 사회 앞에서 개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부평초처럼 휩쓸려 다니는 존재라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오히려 조커에 걸맞은 영화라는 호평이 나오기도 한다. 전작에서 잔뜩 쌓인 분노와 불만이 가득한 사회가 조커라는 불씨로 인해 타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담은 조커가 언제 어디서라도 태어날 수 있는 광기의 산실이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불호평에서 말하는대로 분명 관객들은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지 않았다. 그의 과거사와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과 슬픔, 분노에 크게 공감을 표하고 그가 조커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심히 공감한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혼돈과 파괴의 화신으로 치달은 조커라는 빌런의 오리진을 설득력 있게 극이 제시하면 그것을 흔쾌히 납득하고자 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임도 분명하다. 이 영화는 표제부터가 '조커'고 아서 플렉이라는 작중의 주인공이 제목의 슈퍼빌런 조커로 가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는 것 쯤은 이미 영화를 보자마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편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로 가는 모습을 애초에 기대하고 있던 관객들은 그가 정말로 조커 그 자체가 되길 원했는가, 그걸 긍정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당연히 그는 이런 불행한 과거를 겪었으니 조커로써의 삶을 긍정할 수 밖에 없었고, 긍정해야 한다'고 단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2편에서는 '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기원을 알 수 없는 혼돈의 악신 조커'가 아니라 '인간 아서 플렉'인 것이고 그에게는 어느쪽으로든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듯이 그는 망설이고 흔들리다가 그 길을 포기한 것 뿐이다. 애당초 1편에서부터 아서는 조커라는 아이덴디티에 휘말린 것이지 조커 그 자체가 되길 정말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결국 조커라는 부자연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에 가까운 것이며 그가 조커로 가는 길을 일관성 있게 견지한 것은 엄밀하게는 아서가 아니라 그가 조커가 되는 결말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관객들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가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를 지지한 작중의 조커 지지자들처럼 진정으로 그는 관객들에게 조차 이해받지 못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조커는 아서 플렉이 1편에서 결국 이를 자신의 일부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분명하고 사람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존재만이 될 수가 없고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게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조커가 비록 달갑지 않은 뭔가라 할지라도 결국은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아이덴티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 반대 역시 가능한 것이다. 즉 결국은 1편에서 스스로 받아들인 그 조커라는 아이덴티티를 어떻게든 오로지 받아들이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조커가 아닌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한 이야기가 조커2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1편을 전복해서, 1편에서 마치 어릿광대라는 아이덴티티를 구성해보려다 아서가 실패한 것처럼 2편에선 아서 자신이 새로 받아들인 이 조커라는 아이덴티티를 구성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 경우에는 자신의 새로운 아이덴티티에서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일종의 결함으로 인식되는 요소'가 바로 1편의 아서라는 소시민의 아이덴티티였기에 결국 이마저도 안 된것이다. 분명히 사람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존재만이 될 수가 없고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게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2편에서 '조커'라는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고 해서 그게 아서 플렉이 아닌것 역시 아닌것이다. 애초에 1,2편을 통틀어 조커 시리즈는 항상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이 사회에서 받아들이는 무언가의 아이덴디티가 되려고 노력해봤지만 실패하는 이야기'로 1편과 2편은 같은 주제를 마치 거울에 비친마냥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은 사실 이렇게 단 하루의 불운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들조차 항상 모두 같은 광기와 혼돈으로 치달야하고 자신의 폭력과 파괴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하지 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항상 일관성만 있는 존재가 되기 어렵고 대부분은 항상 자신의 앞에 놓은 길의 불확정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킬링 조크의 결말에서 똑같은 '몹시 불행한 한 순간'을 겪고 변해버린 사람들조차 그 결과물은 배트맨 조커로 확연히 갈려진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1편에서, 그리고 2편에서 아서가 진정으로, 일관적으로 원했던 것은 사람들의 인정과 자신을 사랑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였으며, 폭주하는 혼돈과 광기의 화신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잊으면 곤란하다. 그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2편에서처럼 설령 폭력을 갈구하는 자들을 만족시키려 조커와 같은 폭력과 광기를 흉내내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혹은 그 반대로 1편에서처럼 모두의 사랑을 받는 어릿광대가 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는 이 뒤틀린 사회와 본인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로 본인이 원하는 천국에 어느쪽으로든 결코 도달할 수 없었고, 결국 어떤 길도 선택할 수가 없어서, 실패해버려서, 자포자기하고 파멸해버리는 그것이 그의 비극이란게 이 영화 시리즈가 일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1편의 관객들은 그 아서 플렉의 암울한 삶을, 정도는 다르지만 역시 고달픈 일상의 한 조각을 할애해가며 1시간 이상 지켜본 끝에 그가 조커야 되어야 할 당위성만을 생각하고 그가 조커라는 슈퍼 빌런이 되면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1편에서, 그리고 2편에서 보여줬듯이 현실에 천국은 없고 오로지 그의 망상에만 존재했으므로, 그의 노력 자체가 결국 그를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자신과 주변을 오히려 불행하게 하므로, 그의 노력도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결국 이 영화 시리즈는 그런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버려 실존을 위협받는 개인에게 닥쳐온 거대한 비극을 관조하는 시리즈에 가까웠던 것이다.[3]

그리고 물론 불호평에서 말하듯이 관객들이 배신당했으며 아서 플렉은 작중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조커 지지자들을 스스로 버린것마냥 조커의 지지자인 관객들을 버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1편에서 돈내고 그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사람들이 2편에서도 같은 경험을 하러 극장에 왔는데 영화가 그 기대를 배신한 것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사실 조커라는 거대 프랜차이즈 타이틀에서 분명 사람들이 기대하는 지점이 있는데 감독이나 제작진이 안티플롯으로 뒤통수를 치고 '사실은 1편에서 당신들이 좋아했던 해석은 그런게 아닙니다!'라며 상업영화로써의 강점을 포기하는 짓은 상업영화 가지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 예술이나 하려고 예술충 꼴 값을 떤다고 해석해도 된다. 그런식으로 영화를 망친자들은 많았고 실제로 이 시리즈의 제작진들도 2편의 저조한 완성도를 보고 있자면 이런 비평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한번쯤은 그래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있는데, 이 영화에 대해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일단 그 조커만을 바라는 구원 자체가 정말로 아서에게 구원이 맞는지는 둘째치고, 이 결말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작중 나오는 극단주의자들인 조커 지지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었다는 얘기와도 같은 것이고,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이 영화 시리즈의 위험성에 호들갑을 떨었던 자들이 우려하던 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극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폴리 아 되 이후의 고담은 이제 자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렸기에 배트맨이 등장할 당위성이 갖춰지므로 조커만 사용한 개별적인 작품임에도 나름 제 역할을 다 한 셈. 거기에 이 시리즈를 조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담에 살고있는 소시민 아서 플렉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잘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작이 바닥에서 출발해 상승해서 조커가 되는 스토리라면, 본작은 거꾸로 조커라는 정상에서 바닥으로 처박히다 못해 완전히 매장당하는 스토리로, 완벽한 산 모양 곡선을 이룬 피카레스크 영화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믹스의 조커는 정체불명에다가 다른 이유 없이 미친놈이기에 미친놈인, 혼돈 악이었기에 정체가 온 나라에 알려지고 불쌍한 사연으로 인해 악해진 아서 플렉은 애초부터 조커가 될수 없기에 그를 치워버리고 이후 나올 조커의 정체와 과거를 다시 정체불명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도 외적으로 호평을 받기도 한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호평이 많다. 특히 주연인 호아킨 피닉스는 전작에서 이미 오스카 상을 받았는데, 속편에서는 그걸 뛰어넘었다[4]는 반응이 지배적일 정도로 또 하나의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후술하듯 뮤지컬의 남발이라는 연출이 전반적으로 혹평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이외의 연출이나 화면 구성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일부 연출은 전작과 대비를 이루기도 하므로 두 편을 모두 본 관객은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또한 촬영과 연출, 음악은 물론, 미술과 의상도 크게 호평받았다. 혹평 측에서도 본작의 미장센 및 영상미 만큼은 훌륭하다고 할 정도.

4.2. 복합적 평가

이 영화는 명백히 전작이 있는 영화이므로,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전작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평가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는 전작과는 너무 다른지라 혹평을 내리는 관객들이 많다.

또한 어찌됐건 조커라는 캐릭터를 사용한 것도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이다. 호평 측은 고담이라는 광기의 장소와 그 속에서 고뇌하는 소시민 아서 플렉을 중점으로 보며 사회가 개인을 부수는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불호 측은 "저렇게 진행할 거면 조커라는 이름은 왜 썼느냐?"라고 비판한다. 조커라는 이름을 빼고 보면 특출난 강점이 없는 보통의 사회 비판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호불호 요소는 이미 전작에서 보여준 감독의 연출로 이미 드러났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작에서도 감독 토드 필립스는 코믹스에서는 캐릭터 및 모티브 정도만을 가져왔고 오히려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 같은 영화에서 더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었다. 그나마 전작에서는 늘 움츠러들던 아서 플렉이 흑화하는 감정선과 조커의 탄생이 주 내용이라서 이 문제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2편은 전작을 정면 부정한 덕에 이 호불호가 더 강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조커 또는 아서 플렉의 마무리를 짓는 영화라고 하기에도 전개가 미묘하다. 전작만 봐도 충분히 서사적으로 마무리가 깔끔하게 지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4.3. 혹평

조커라는 이름을 내걸어 영화를 보러 오게 했으면서 정작 '조커를 보러 온 시선들을 메타적으로 비판하는' 안티 플롯 영화를 보여주었다.

호평 요소인 고찰에 대한 부분이 과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사회의 안전망이 무너진 현실의 씁쓸함, 상징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개인, 미쳐 돌아가는 책임을 아서 플렉 한 명에게 미루는 고담 등 모든 요소가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오히려 불쾌함을 불러일으킨다. 전작도 비슷했지만 마지막에 아서가 조커가 되어 폭발하던 순간의 카타르시스로 만회한 것에 비해 본작은 극중 내내 텁텁한 먼지를 씹는 느낌이 들게 한다. 게다가 어설픈 성관계 장면, 대놓고 간수가 아서를 패고 나체로 물고문하는 장면들을 삽입해서 보는 이를 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슈퍼 빌런'이 된 조커의 광기 넘치는 폭주를 기대했다가 배신당했다는 평도 간간히 보인다. 이걸 관객의 일방적인 실망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애초에 예고편 연출부터가 대놓고 그런 기대를 유도했다. 심지어 조커와 할리 퀸이 추종자들의 환호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춤을 추며 법원에서 나오는 예고편의 마지막 장면은 정작 본편에는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1차, 2차 예고편에서 전부 등장한 장면이기도 하고, 전작에서는 혼자서 추던 계단 춤을 이번에는 할리 퀸과 함께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대한 사람들을 낚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아서의 망상 속 장면으로라도 처리될 여지가 있음에도 결국 나오지 못했다.

호평으로 나오는 "결국 사람들은 조커에만 관심 있었지 아서 플렉에는 관심이 없었다."도, 결국 그럴 거면 왜 조커라는 이름을 달고 영화를 만들었냐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조커라는 제목을 보고 조커에 대한 영화를 기대하며 극장에 온 관객들을 비난하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아서가 아닌 조커를 보러 온 너희는 잘못되어 있고 그저 죽이고 불타는 걸 보고 싶은 광기에 차있다"는 식의 계몽하려는 메시지로 해석되는 것과 동시에 이 영화에 대한 불호 의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처럼 비쳐져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물론 상업영화라는 장르에서 흥행을 위한 어느 정도의 포장은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그 또한 배급사의 실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관객에 대한 '기만'이 되면 곤란하다. 이 영화는 조커가 주인공이 아님에도 조커가 주인공인 척했고, 심지어 영화에 나오지 않는 장면까지 매 예고편마다 집어넣어 광고했다. 조커가 주인공이라는데 조커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해야 옳을 일이다. 하물며 일부 호평에서는 이 영화를 차라리 예술영화로 분류해야 한다고까지 하는데 이러면 이 '기만'은 더더욱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아서에게 관심이 없지 않다. 오히려 그의 과거사와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과 슬픔, 분노에 크게 공감을 표했다. 행위 자체에 찬성하지는 않아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또한 이해했기에 아서의 조커가 이전과는 상당히 이질적임에도 이건 조커라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애초에 1편의 마지막에서 아서는 조커라는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관객들에게 조커가 곧 아서 플렉이라 보여지도록 완성된 캐릭터다. 2편에서 갑자기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해봐야 1편에서 완성된 캐릭터를 목격한 관객에게 있어서 당연히 거부감이 든다. 이렇게 전작의 결과물을 부정하는 해체주의 안티 플롯을 내세우면서 관객들이 아서에게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그냥 아전인수식 해석에 가깝다. 즉 1편의 관객들은 그 아서의 암울한 삶을, 정도는 다르지만 역시 고달픈 일상의 한 조각을 할애해가며 1시간 이상 지켜본 끝에 그가 조커야 되어야 할 당위성을 인정했던 것인데 2편의 전개는 애초에 1편을 왜 지켜봤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들게 만든다.

호평 측은 아서가 사실은 그저 인정과 애정만을 원했지 조커가 되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았다고 반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서가 결국 이를 자신의 일부라고 받아들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람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존재만이 될 수가 없고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게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아이덴티티에서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일종의 결함으로 인식되는 요소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원했던 것만이 그 사람의 진정한 구성 요소라고 부를 수 없으며, 아서 플렉은 조커가 비록 달갑지 않은 뭔가라 할지라도 결국은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틀림없는 그의 아이덴티티의 일부가 되었고 그렇게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데 1편의 서사 끝에 조커를 받아들인 아서를, 갑자기 사실은 이걸 원한 게 아니었다며 기존으로 되돌리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은 전편에서 캐릭터의 서사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전면으로 부정함으로써 캐릭터 자체를 퇴화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퇴화시키는 건 같은 인물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시리즈물에서는 결코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부분이다.

애초 시리즈물에서 후속작은 전작에서 이어지며 설정을 공유하는 구조를 띠는 게 기본이다. 조커라는 캐릭터를 완성시킨 결말에서 갑자기 조커를 부정하는 전개로 뒤집는다면 관객들 입장에서는 설정파괴로 느껴질 위험이 크고 당연히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후술할 지루한 연출과 지나친 뮤지컬 남발로 인해 이 영화 내용에 납득할 만한 몰입감도 크게 하락하면서 그 거부감은 더욱 심화된다. 이는 관객들의 태도와 작품의 의도만을 논하면서 정작 그 내용물로 관객을 설득시키려는 노력이 매우 게을렀다고 평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1편에서 아서 플렉을 조커라는 빌런이자 분노의 상징으로 완성시켰지만 후속작에서는 조커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존재할 필요조차도 없게 됐다. 1편에서도 아서 플렉은 기존의 조커와 이질감이 강하기는 했으나 배트맨 세계관의 요소가 잘 어우러졌기에 재해석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지, 2편은 배트맨 세계관과 전혀 상관없는 나약한 범죄자를 향한 조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할리의 부추김 속에 변호사까지 해임하며 의기양양하던 흉악범 빌런이 무너지는 계기는 '고작' 게리의 하소연이고, 그 직후 아서는 곧바로 공개적으로 조커이기를 포기해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대놓고 '조커'를 제목으로 썼고, 심지어 부제에서든 포스터에서든 아서의 존재를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애초에 고담시는 '배트맨'의 활동무대로서 창조된 장소다. 즉 그 디스토피아적 막장 설정은 어디까지나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가 빌런들을 찾아내어 응징하는 배경으로 필요성이 인정되어 수용된 것이고, 배트맨이 없이 조커가 단독 주인공인 전작에서는 그 역할을 아서 플렉이 고담의 부조리 속에서 조커로 각성함으로써 대신하였다. 그런데 아서 플렉이 그 조커조차 되지 못한다면, 1편의 그 암울함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고담시 자체를 수용할 어떠한 동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캐릭터 이전에 그 배경의 존재의의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다. 반대로 1편과 별개로 2편만 떼어놓고 생각하면 영화 안에서 비판한다는 고담 사회의 문제가 뭔지조차 희미해진다.

1편에 과몰입한 사람들을 향한 일침이다 혹은 관객들에게 극단주의자들인 조커 지지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지 않냐는 주장도 커다란 모순을 내포한다. 정작 1편에서 평론가들이 현실에 대한 악영향을 우려하여 낮은 평점을 줬을 때 커다란 반발이 터지지 않았던가? 이는 당시 평론가들의 저평가 기준이었던 현실 영향력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비판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제는 현실 영향력을 영화 평가에 적극 적용시킴으로써 1편을 저평가한 평론가들이 옳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는 불호를 표하는 사람들을 사회의 잠재적 위험요소로 간주함으로써 불호 의견을 아예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행위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정작 대미라 할 수 있는 법원 폭파 씬, 이어지는 차량 탈출 씬은 '조커의 추종자들이 아서 플렉을 버렸다'는 호평마저 어색하게 만든다. 오히려 아서야말로 자신을 구원해 줄 일말의 가능성을 추종자들의 존재에 심취해 발로 걷어차놓고, 한 순간에 공개적으로 조커 포기를 선언하면서 그 추종자들을 내팽개쳤을 뿐만 아니라,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구해보려는 이들로부터 제 발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즉 '추종자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만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상징하며 그 맹목적인 믿음에 허를 찌른다'는 호평의 논리대로라면, 반대로 '조커인 척하며 조커를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심지어 마지막까지 조커를 포기하지 않는 관객들을 매몰차게 내팽개쳐버렸다'고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문제다. 관객이 메인 캐릭터를 기대하며 몰입하는 것과 영화가 자신을 소비해주기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해 준 관객을 내팽개치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문제일까?

혹평 측과 호평 측이 동시에 비판하는 요소는 바로 뮤지컬이다. 대놓고 뮤지컬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나와서 자꾸만 극의 맥을 끊어 먹고 지루하다는 지적이 많다. 더 타임스는 감독인 토드 필립스가 후속작은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마음을 바꾼 대신에 뮤지컬이 탄생했다며 비꼬았다. 전작은 어디까지나 리얼리즘에 가까운 극 영화였는데 이번 작은 성격이 확연히 달라졌으니 괴리감을 크게 느끼는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감옥과 법정으로 한정된 공간적 배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도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류의 법정영화로 2시간을 끌고 간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반론이 무색하게 감옥과 법정 밖 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게 정극 사이의 공간을 채우느라 고심했다면 굳이 13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필요했는지도 의문.

웹진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주제나 메시지는 뚜렷하거나 훌륭하지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비판이 많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팀 그리어슨은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평을 했으며, 필름 아일랜드 매거진의 셰인 맥케빗은 전작과는 다른 매력이 있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라고 평했다. 더 가디언은 전편처럼 거칠면서 진지한 분위기는 있지만 지루한 작품이라며 비판했고, BBC는 조커에 대한 신화의 해체 작업이 대담하기는 하나, 짜증스러울 정도로 교만할 뿐만 아니라 확실히 재미는 없다고 평했다. 실제로 메타스코어와 로튼토마토 신선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 이는 더 마블스 등 논란요소가 있었던 최근작들보다도 낮은 지수다. [2] 그나마 개봉 3일차인 2024년 10월 3일 기준으로 CGV 에그지수 63%, 메가박스 평점 6.8에 비해 롯데시네마는 평점 7.9로 선방하는 양상인데, CGV나 메가박스의 경우 각각 플래그십 특별관인 아이맥스, 돌비시네마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관람한 관객들이 많은 반면 롯데시네마는 일반관 위주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특별포맷으로 비싼 돈 주고 볼 물건은 아니다'라는 데 인식이 모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3] 물론 아서에 극히 공감하고 어떤면에서는 동치하면서 그의 행복을 어떤식으로라도 바라기에 그가 조커가 되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며 '조커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의 당연한 권리'하다고 생각했던 관객에게 이게 배신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평가이기도 하다. 1편은 어디까지나 그래도 앞으로를 기대하는 일종의 '해피엔딩'이라고 볼 소지도 있었는데 2편에서 이 시리즈는 희망이 없는 비극이라고 선을 그어버렸으니 말이다. [4] 특히 법정씬에서 폭발하는 연기가 매우 명연기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