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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5:39

조엄(조선)

趙曮
1719년( 숙종 45년) ~ 1777년( 정조 1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 매제이자 신정왕후의 증조부이다.

2. 생애

1719년 종1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아버지 조상경(趙尙絅)과 어머니 부평 이씨(富平 李氏) 이정태(李廷泰)[1]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738년( 영조 14) 식년시 생원시에 3등 64위로 입격하고 #, 정8품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재직하다가 1752년(영조 28)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 # 이듬해 정6품 사간원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1763년 조선 통신사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고구마를 국내에 최초로 들여왔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동래부사 강필리에게 고구마 종묘를 가지고 달려가 고구마 재배에 대한 정보를 전수하고 이듬해 1764년 부산 앞바다 영도에서 고구마를 처음으로 재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본인이 대마도에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해사일기(海槎日記)에 고구마의 재배법과 보관법 등 각종 정보들을 담음으로써 국내의 고구마 재배는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현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조선의 구황(救荒) 작물 도입에 큰 역할을 했으나, 목화를 들여온 분에 비해 언급이 덜되는 편이다.[2]

천일야사에서 묘사한 조엄의 고구마 재배기. [3]

영조 조선 통신사 일본에 다녀왔는데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 전투 중 하나인 다대포진성 전투의 기록을 우연히 접하고 조정에 알려서 다대포진성 전투를 알렸다.

사후 조엄의 증손녀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면서, 조만영, 조인영 형제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도정치가 열리게 된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에 그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조엄 밤고구마라는 브랜드가 있고 조엄로[4]라는 도로명이 있다. 서원주 역세권

[1] 1687년(숙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0위로 입격하였으며 #, 종5품 대구부판관(判官)을 지냈다. [2] 아마 풍양 조씨 세도 정치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3] 영상에서는 드라마적 각색이 크게 이루어졌기에 고구마 도입과 통신사 행렬의 구체적인 방문 과정은 해사일기를 참고하는것이 낫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신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특히 조선과 일본같은 대등한 외교적 관계의 국가끼리는 속으로 멸시할지언정 외교관을 함부로 하지도, 함부로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고구마 도입은 재배를 위한 조엄의 노력과는 별개로 해사일기에선 한 문단으로 끝날정도로 쉽게 이루어졌으며 외교적인 문제가 벌어지지도, 조엄이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4] 지정초등학교에서 원주기업도시로 진입하는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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