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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20:19:55

젝스키스/해체


파일:젝스키스 로고.svg

은지원
이재진
김재덕
장수원


{{{#!folding [ 전 멤버 ]

[ 유닛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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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반 목록 ]
||<tablebgcolor=#ffffff,#191919><tablecolor=#000000,#FFFFFF><width=25%> ||<width=25%> ||<width=25%> ||<width=25%> ||
정규 1집

학원별곡
(1997.04.15)
정규 2집

Welcome To The Sechskies Land
(1997.11.01)
정규 3집

Road Fighter
(1998.07.15)
스페셜 3.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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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0.30)
라이브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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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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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믹스 앨범

2016 Re-ALBUM
(2016.12.01)
20주년 기념 앨범

THE 20TH ANNIVERSARY
(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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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F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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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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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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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합 토토가2 Yellow Note
제이워크 옐로우키스 사건 사고

1. 해체와 경과2. 멤버들이 직접 밝힌 해체 이유3. 대학원 논문에서 설명된 젝스키스의 해체4. 2000년 해체 당시에 나온 정보들
4.1. 젝스키스 해체 기자회견 전문4.2. DSP
4.2.1. 이호연4.2.2. DSP 직원
4.2.2.1. DSP 관계자4.2.2.2. 김기영4.2.2.3. 기타
4.3. 가족
4.3.1. 김재덕 어머니와 여동생4.3.2. 장수원 어머니4.3.3. 장수원 어머니2
4.4. 은지원, 강성훈 듀엣 시도
5. 불화설6. 최종 정리
6.1. 각자의 입장 요약6.2. 입장을 통한 해체 원인 정리6.3. DSP 책임여부
6.3.1. DSP에 비판적인 입장
6.3.1.1. 저예산 뮤직비디오6.3.1.2. 팬덤 동원력6.3.1.3. H.O.T.와의 끊임없는 비교6.3.1.4. 젝스키스 4집의 인기가 하락했다고 볼 수 있는가6.3.1.5. DSP와의 결별 과정
6.3.2. 위 비판의견에 반박하는 입장
6.3.2.1. DSP와의 결별 과정 - 소속사 이적 시도는 이재진 개인의 입장이었음6.3.2.2. 무조건 소속사 탓으로 돌리는게 맞는가?6.3.2.3. 젝스키스 4집의 인기는 이전에 비해 하락했다고 볼 수 있다6.3.2.4. 젝키 팬덤은 왜 이렇게 강제해체 당했다는 루머에 집착했는가6.3.2.5. 일부 멤버들의 그룹 활동 의지 결여 및 빈부격차6.3.2.6. 정작 자신들 문제는 SM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있어6.3.2.7. DSP와 이호연 사장이 아니었으면 없었을 젝키의 성공6.3.2.8. 계약서가 없는 점

1. 해체와 경과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 중 가장 뒷말이 많았던 해체다. 요약하자면 팬덤에 의해 강제로 해체 당했다는 루머가 널리퍼졌었고,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하면서 다시 심해졌다. 그러나 멤버 본인들조차 강제해체가 아니라고 수차례 증언한 바 있다. 해체를 하자는 멤버와 하지 말자는 멤버로 나뉘었고, 해체를 하자는 멤버가 과반수여서 이쪽으로 결론이 나게 됐다. 그 원인으로는 소속사와의 불화, 음악적 방향이 다른 등 멤버 개개인의 의향 차이, 소속사 대우에 대한 불만, 정상에서 끝내고자 하는 마음 등이 꼽힌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00년 5월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갑작스럽게 해체를 발표했다. 별다른 조짐없이 이뤄진 해체인터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당시엔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훗날 방송에서 수차례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고, 아래 목차에 그 내용이 정리되어있다.
이 당시 해체의 충격으로 젝스키스 팬들은 패닉 상태에서 시위를 벌이며 젝스키스 해체를 반대했지만 대부분 미성년자인 팬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던 터라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때 팬들이 보낸 목소리가 전해져 카메라 출동에서 연예부로 배치받게 되었던 MBC기자 (現 고발뉴스의) 이상호기자가 MBC의 10분짜리 아침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을 통해 팬들이 주장하는 기획사의 의혹 및 팬들과 기획사와의 갈등에 대한 내용을 취재한 것이, 4부작에 걸쳐 방송되었다. 보러가기 1 보러가기 2 보러가기3 이상호 기자의 취재 기록 회고

다만 나무위키의 이상호 기자 문서에서 보듯이, 이상호 기자는 취재 과정 중 왜곡이나 과장을 하는 경우가 수차례 있어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위 영상도 무조건 100% 진실로만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보도를 계기로 이호연은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결과는 무혐의처분이 나왔다. 이 프로 자체가 젝키 팬들의 제보로 시작됐으니, 소속사 사장을 경찰조사까지 받게 만든 젝키 팬들의 위엄이다ㄷㄷ 이상호 기자가 몇년후 후일담이라고 글을 올렸는데, 이상호 기자의 말이 맞다면 무혐의 처분을 받긴 했지만 탈세와 관련해선 따로 국세청에 수억원의 추징금을 냈다고 한다.

한편 2000년대 초 연예계 비리가 만연하던 시절, 검찰이 연예계 비리를 때려잡는다고 2002년부터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고 그 결과 메이저 기획사 뿐 아니라 중소 기획사, 방송국 pd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대표적인 예가 SM 이수만, 김광수, 서세원이었다. # 김광수는 심하게 털렸고, 이수만도 해외에서 도피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때 DSP 이호연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젝키 팬덤이 주장하는 것 처럼 DSP가 악의 소굴이라면 이때 심하게 털렸어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젝스키스의 해체와 관련해선 큰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조영구 차 파손 사건이다. 젝스키스의 마지막 콘서트를 취재하던 조영구 리포터의 차를 팬들이 이호연 사장의 차로 오인하여 박살내버렸다. 그것도 차종이 고급 세단인 그랜저 XG로, 산 지 보름도 안 된 것이었다고 한다.[1] 뿐만 아니라 차 안에 있던 조영구씨의 옷가지나 소지품 등도 도난당했다. 기사, 기사

이로 인해 현장에서 몇 명의 팬들이 경찰에 잡혀 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조영구가 차마 학생들을 처벌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차비까지 줘가며 집에 보냈다고 훗날 토크쇼에서 밝혔고[2], 이후 팬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조영구에게 사과를 하고 조영구도 용서를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팬들이 십시일반으로 보상금을 모금하기도 했으나 모금한 인원이 20여명이었고,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모은 돈인지라 액수가 적어 조영구 측에서 거절했고[3], 보상은 젝키 소속사 이호연 사장에게 받았다고 한다. 당시 수리비 견적이 1,100만원이 나왔고, 1,100만원 전액 이호연 사장이 보상했다고 밝혔다. 기사 당시 그랜저 XG의 신차가격이 2~3,000만원 쯤 할 때였으니, 저 정도 수리비면 아예 갈아엎은 수준이었다. 기사

참고로 신서유기에서 은지원이 "조영구형은 더 좋은 차로 보상을 받아놓고 피해자 코스프레만 한다"고 격하게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사실 이 발언은 은지원이 전후사정을 자세하게 알지 못한채 뱉은 매우 경솔한 발언이었음이 밝혀졌으므로 엄하게 조영구씨를 비난하지는 말것. 오히려 조영구씨는 팬들을 모두 용서했고, 보상은 젝키 소속사에 부탁하여 따로 받아낸 것이다. 만약 조영구씨 측에서 강경하게 나왔으면 일이 커질 수도 있는걸, 어린학생들이 벌인 일이라며 본인이 다 감수한 것이다. 애초에 무고한 사람의 차량을 반파시키고, 차 안의 물건까지 도난했던 이 건은 젝스키스 팬들이 벌인 흑역사가 맞다. 만약 조영구씨가 제대로 처벌을 요구했으면 진짜 일이 커질 것을 다 혼자서 덮고 넘어간 것이다. 어쨌든 이후 은지원도 라디오스타에 출연하여, 자신의 오해였다며 조영구씨와 따로 연락을 하면서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됐다고 발언했다.

젝키가 재결합하면서 당시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었던 이호연은 세력화된 젝키 팬들에게 과거 일에 관해 각종 쌍욕과 패드립을 엄청 먹었다. 나아가 일부 팬들은 "젝키가 과거 이런 일을 당했다"는 내용의 글을 각 커뮤니티에 활발히 올렸다. 젝키 데뷔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신규 입덕한 애들도 그 말에 따라 "개호연새끼 뒤져라"는 등의 소리를 외치고 있고, 기존 팬들은 그걸 보고 즐거워했다.[4] 문제는 과거에 이런 일 당했다고 욕하는 것들 중 맞는 말도 있지만, 상당 부분이 과장되거나 틀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선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를 참조 바란다. 특히 해체의 경우 멤버들이 직접 발언한 것들을 보면 강제로 해체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2016년에 젝키가 재결합하자 DSP가 강제로 해체시켰다는 글을 인터넷에 퍼뜨렸다. 멤버들이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일부 팬들은 DSP와 이호연이 뒤에서 강제로 발언하게 했다거나 오빠들이 너무 착해서 거짓말 치고 있다는 둥의 소리를 하는데 어불성설이다.[5] 심해진 소속사와의 불화, 하고 싶은 음악적 방향이 다름, 정상에서 내려오자는 마음 등이 작용해 멤버들 중 해체를 하자는 파가 있었고, 결론적으로 해체 쪽으로 의견이 모이게 됐다.

이전에 없던 '아이돌 팬덤'이란 것이 생기며, 90년대 당시 DSP는 SM과 함께 큰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들어온 돈에는 그만한 책임도 따르는 법이다. 팬들은 좋게 말하면 진심으로 나쁘게 말하면 반쯤 미쳐서 젝스키스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돈이 벌린거지 이런 상황인데 3년만에 팀이 해체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젝키가 해체하면서 각종 사건들이 터지며 좋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갔다. 이는 인기 아이돌 그룹이 갑작스럽게 해체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이 여파로 이후의 연예 기획사들은 일정기간 활동의 공백을 두면서 개인 활동이나 유닛 활동 등으로 어느 정도 암시를 준다든가 계약 기간을 연장하지 않고 멤버들이 알아서 흩어지게 하는 등, 아이돌의 해체를 공식화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젝키가 드림콘서트라는 한국 최고의 무대에서 수많은 관객에 둘러싸여 해체를 하는 것은 극적이고 타인이 보기엔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그만큼 젝키 팬들의 감정도 격앙됐다. 훗날 후배 아이돌들이 해체하듯이 최대한 충격을 피하고 시간이 흐르며 그냥 흐지부지 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면, 일련의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젝키의 해체 소동을 보고 이후 아이돌 기획사의 모습이 바뀐 측면이 커서, 당시의 DSP를 온전히 탓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해체가 대중들과 팬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2016년 젝키의 재결합이 큰 화제를 몰고 온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사건 이후로 아이돌 그룹의 해체를 알릴 때는 정말 소리소문없이 공표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냥 해체가 아닌 계약 만료라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해체를 언급하거나, 멤버들이 직접 손편지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알리는 식으로 최대한 차분하게 해체를 마무리하는 풍토가 생긴 것.

2. 멤버들이 직접 밝힌 해체 이유

젝키 해체는 큰 사건이었고, 이후 16년동안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할 때 마다 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각종 방송에서 멤버들이 해체에 대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팬들 일부는 아래 발언들을 부정하며 이호연 DSP가 뒤에서 억압해 강제로 내뱉는 거라 하는데, 신빙성이 없는 말이다. 애초에 이호연은 뇌졸중으로 2010년 이래 계속 거동이 불가능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었다. 이호연이 쓰러진 뒤 아내가 대표이사에 취임하면서 기존 직원들이 대거 쫓겨나거나 나갔다. 그래서 현 DSP에 젝키 시절 직원은 거의 없다. 게다가 DSP 자체가 오늘 내일 하는 암울한 처지인데, 그 정도 권력이 있을리 만무하다.

2.1. 은지원

젝스키스의 리더였기도 하고, 해체 이후 가장 방송활동이 활발했던 만큼 해체에 대해 언급한 바도 제일 많다. 시간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2001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해체될 즈음 기획사에 불만이 많았던 건 사실이에요. 원하는 음악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생활에 지친 거죠. 어차피 젝키로 영원히 갈 수는 없었고, 인기 절정에서 헤어지자는 공감대가 형성됐어요. 솔직히 해체 때만큼은 HOT 뒤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기획사 역시 같은 생각이었겠죠."

"기획사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지만 어찌됐건 젝키는 멤버와 기획사가 합의해서 해체됐어요. 하지만 HOT는 다르잖아요. 계속하겠다는 멤버들의 의지가 강하고 아직 상품성도 있다고 봐요. 지난 2월 콘서트 때 몰려든 팬들 보세요. 4만명의 팬들이 잠실주경기장을 꽉 메웠는데 그들의 힘을 간과해선 안되죠. HOT는 그대로 남아줬으면 합니다."

해체설이 나도는 HOT의 강타, 문희준이 같은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에서 솔로로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과 달리 은지원은 전 기획사와 거래를 끊었다. 대신 자비를 들여 새 기획사 G프로덕션을 차렸다. “기획사에 대한 불만이 해체의 이유였는데 혼자 살겠다고 옛 기획사와 손을 잡는 건 배신 아니냐”는 반문이다.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의리 빼면 시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2001년 3월 22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2008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젝스키스의 음악이 자기가 하고 싶던 음악이 아니어서 힘들었었다는 뜻을 내비쳤다.
▲결국 젝스키스로 데뷔했잖아요.(이)
= 전부 H.O.T 때문이에요.

▲무슨 말이죠.(김)
= 하와이에서 함께 온 (강)성훈이 하고 데뷔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H.O.T가 인기를 모으면서 제 모든 계획은 무너졌죠. 4명을 추가해서 젝스키스로 데뷔했으니까요. 그렇다고 H.O.T가 밉진 않아요. 사실 전 요즘도 '젝스키스' 멤버들 보다 H.O.T 생각이 더 나요. 요즘도 (문)희준이를 보면 '짠한' 마음이 들어요. 동병상련이랄까요.

젝스키스 활동이 싫었겠어요.(이)
= 제 의견을 정말 (손가락 마디를 보이며) 요만큼도 안 냈어요. 어차피 제가 하고 싶었던 음악이 아니었으니까요. 단 1%도 안 보여드렸죠. 솔직히 거부하기에는 판이 너무 커졌죠. 젝스키스가 그렇게 잘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젝스키스' 멤버 중에 혼자서 활동하면서 구심점이 되고 있어요.(김)
= 처음에는 팬들이 절 얼마나 욕했는데요. 저 때문에 '젝스키스'가 해체됐다고 믿고 계세요. 다들 재결합 하기를 원했는데 그것도 제가 막았다는 얘기도 나왔죠. 당시 멤버들 의견이 통일이 안됐어요. 아쉽죠. 그래도 지금은 추억으로 남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다시 나왔다가 잘 안되면 가지고 있던 추억도 없어지는 거잖아요.
2008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08년 9월 1일 방송된 놀러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은지원은 이내 “과연 언제까지 젝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 서로 생각했다”며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말로 해체 이유를 밝혔다. 젝키의 해체는 아이돌 그룹의 현실이었고 한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던 셈.
뉴스엔미디어 기사 내용 중

2011년 1월 22일 방송된 KBS 2TV '백점만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젝스키스 활동 당시 리더인 내가 먼저 팀을 해체하자고 말을 꺼냈다"며 "대중들과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박수를 받고 있을 때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다른 멤버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을 꺼내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에 리더인 내가 총대를 메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은지원은 "서로 잘 되기 위해 해체를 한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젝스키스 은퇴 무대에서 눈물 흘리는 팬들을 보며 더해볼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 팬들마저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해체를 결심했다"고 당시 심경을 고백했다.

2011년 2월 28일 방송된 밤이면 밤마다에서는 계약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은지원은 "젝스키스는 계약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계약이 있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고 말해 출연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은지원은 중간 탈퇴하면 쓴 돈을 내고 나가야 했냐는 질문에 "계약이 없으니 그럴 이유도 없었다"며 "언제든지 나가도 되지만 나갈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탁재훈은 "문을 열어놓고 밖에서 저격수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져 웃음을 자아냈다.
티비리포트 기사 내용 중

2012년 2월 28일 승승장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젠가는 우리가 헤어져야 될때가 온다. 하지만 인기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해체하는 것 보다는 최고로 잘되고 있을때 그만두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멤버들과 상의해보니 전원 동의를 해서 일이 그렇게 진행됐다고 한다. 누구 한명이라도 반대를 했으면 해체를 안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3월 29일 땡큐에서는 해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상진 아나운서의 계약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상진은 “회사를 나오면서 여러 곳과 접촉이 있었다”며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만난 지금의 소속사가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인간적으로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계약금은 없지만 오히려 믿음이 갔다”고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도 결혼도 해야하고 집도 마련해야하기 때문이다”며 “하지만 믿음으로 구두계약을 했고, 계약서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함께 출연한 은지원은 “나랑 똑같은 경우다. 젝스키스 활동 당시 계약서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좋은 출발 위해 계약서는 써라”고 조언했다. 이같은 말에 오상진은 “사람과의 신뢰로 이뤄진 곳에 동료로 들어가게 됐지만, 계약서는 써야 될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일보 기사 내용 중

2013년 4월 30일 QTV 20세기 미소년에서 해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 정산 금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발언을 보면 딸랑 2억을 벌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 참조. 2015년 tvN 현장토크쇼 TAXI 방송을 보면, 당시 수입이 대부분 회사에서 부모님에게 바로 전달돼서 멤버들이 모르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잘 모르고 한 말일 수 있겠다.
은지원은, 자기는 젝키 활동 당시 오히려 돈을 많이 썼다며, 그때 막 철없고 연예인병도 있어서 말도 안되는 명품을 사곤 했다고 한다. 이에 토니안이 "내가 알기로 얘네 수입 괜찮았다"고 말하자, 은지원은 "해체까지 다해서 한명당 2억씩 벌었을걸?"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멤버 당 2억씩이라 치면 회사에서 12억을 준거니까, 우리는 되게 많이 벌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2013년 4월 30일 QTV 20세기 미소년 3화에서

2013년 12월 10일 방송된 미소년 통신 은희상담소에서 은지원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장수원: 그쪽(소속사)에서 저희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은지원: 참 직설적이야. 그게 아니라 우리는 재계약이고 뭐고를 떠나서, 해체하자라고 이야기 했어.
장수원: 그쪽(소속사)에서 강제로 (해체를) 시킨 것은 아니에요. 저희끼리 생각이 있었던 것을 그렇게 한거지, 그쪽에서 '해체해'라고 하진 않았어요.
은지원: 근데 나는 회사 책임도 있다고 봐. 지금에서야 10만장 나가면 대박이라는데, 4집 50만장 나갔다고 "망했어" 이러면 누가 하고 싶겠어. 나는 김 빠지는거지. 그러면서 "더 망가지기 전에 빨리 박수칠 때 떠나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거지. 그래서 (멤버들에게) 얘기를 해보고 또 그 얘기에 동의를 해서 진행이 됐던 것 같아.
2013년 12월 11일 QTV 미소년 통신 은희상담소에서

2016년 4월 16일 무한도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회사에 불만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음반 판매량이 옛날보다 좀 덜 나왔을 때 너네 망했어, 망했어 근데 그게 망한 수치가 50만 장이고.. 너무 화가나더라고요. 그럼.. 뭐.. 끝났다는데, 해체하자. 뭐 이렇게 해서 좀 욱한 게 제일 컸던 것 같아요."
2016년 4월 16일 MBC 무한도전에서

2016년 6월 1일 라디오스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회사의 직접적인 사장님( 이호연)과의 관계가 아니라 저희랑 가깝게 붙어있는 매니저와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기억이 나요."
2016년 6월 1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

2017년 5월 25일 MBC 라디오 미쓰라의 야간개장에서 DSP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7분 25초~18분 28초)
미쓰라 진: 혹시 몇년 계약이신지
은지원: 3년 계약이요.
미쓰라 진: 이 나이대 가수들이 장기 계약을 안 좋아해요.
은지원: 저희는 좋아해요. 있을 때 없고 갈 때 없고 하게 되면 (웃음)
미쓰라 진: 저희는 짧게 짧게만 계약을 하게 되더라구요 . 저희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거고, 저희가 나가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길게 하는 것 보다 짧게 짧게
은지원: 저희 젝스키스 활동 당시에는 계약이 없었어요. 계약이 없고 "서로 믿음 하에 하자"였는데, 믿음이 없었죠.(폭소) 일단 그런 취지에서 계약서가 없었어요, 정말 아버지와 아들 개념으로 이렇게 쭉... 그랬죠?(폭소)

"아버지와 아들" 개념은 이호연이 계속 밀었다고 보인다. SS501이나 카라의 경우도 멤버들이 이호연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편 계약서를 안 쓰는 방식의 경우 연예계에서 종종 보이긴 하지만, 은지원 말대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젝키의 경우 그 믿음이 깨지면서 해체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서로 신뢰가 깨진 상태에서 계약서까지 없으니 상황이 더 악화됐었다. 핑클도 계약서를 쓰지 않고 활동했는데, 핑클의 경우는 그 믿음이 나름 유지돼서 별탈이 없었다. 멤버들이 DSP를 나갈 때도 감사인사를 전하며 원만히 끝맺었다.

2.2. 김재덕

2013년 3월 13일 라디오스타에서 김재덕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fN_-PIiqLdo&feature=youtu.be&t=2m53s
MC가 “해체는 멤버들이 원했다. 특히 재덕이와 지용이가 주장했다.”는 담당 매니저의 2000년도 인터뷰에 대해 김재덕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김재덕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자신은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가족이었고 영원할 줄 알았다. 해체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울었고 끝까지 반대를 주장했다.”고 말해 당시의 심경을 전했다. 하지만 각자 음악색깔이 다르다 보니 하고 싶었던 음악이 달라서 해체하게 됐다고 밝혔다.
젝스키스 당시 잘사는 멤버들(지원, 성훈, 지용)에게 김재덕이 따돌림을 당했다는 루머에 대해 MC들이 물어봤다. 김재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시 자기가 사투리가 쎄서 강성훈이 오해한 것 뿐이라고 밝혔다. 처음에는 강성훈이 자기 때문에 젝키를 안하려 했다고 한다. 재력의 경우 은지원, 강성훈, 고지용이 잘 살았다고 답했다. 고지용 부모님은 금은방을 하셨다고 한다. 이들은 돈이 많아서 명품을 애용했고 똑같은 옷을 잘 안 샀다고 한다. 그리고 맨날 이니셜을 새겨서 팔찌랑 목걸이를 만들고, 금색이면 티가 난다고 거기다 백금을 씌워서 사용했다고 답했다. 이어서 해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멤버들이 좀 배고팠으면 해체를 안하지 않았을까, 더 끈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워낙 금은방하는 부모님도 있고 친척 중에 대통령도 있으니…

2013년 6월 11일 20세기 미소년에서 김재덕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김재덕은 은지원에게 "형, 사실은 우리 때가 지금 때 같았으면 해체하지 않고 각자의 음악 스타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 시대가 그게 아니었잖아. 무조건 함께였잖아. 함께가 아니면 안되는 시기였으니까. 그러니까 좀 아쉽지. 그때 해체하지 않고 원하는 음악들을 할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거란 생각이 들어."라고 말했고, 은지원은 "그러니까 진짜 그게 안돼서 마음이 아프다."라고 답했다.

2013년 12월 11일, QTV 미소년 통신 은희상담소에서 계약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DSP 후배 김재경이 정말 계약서를 쓰지 않고 활동했냐는 질문을 하자, 김재덕은 “계약서가 없었다. 주는 만큼 믿고 받았다”고 인정했다. 이에 대해 김재경은 “근데 왜 재계약을 안 하셨냐”고 반문했다. 해당영상

2015년 1월 27일 현장토크쇼 TAXI에 출연했을 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덕은 “저는 그때 반대했다. 정말 많이 반대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반대하긴 했지만 회사 사람들도 있고 멤버들도 있으니 그 의견이 그렇게 전해지진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장수원은 '형은 해체랑 동시에 부산으로 내려가야 되니까 그렇게 반대했겠지'라고 대꾸해 웃음을 자아냈다. 김재덕은 이에 대해 “아니다. 그때는 우리가 평생 함께 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반대했지만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2016년 4월 16일 무한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사실 계속 (해체를) 반대를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 당시 저희가 활동도 같이 했지만, 스무 살, 스물 한 살 한창 놀 때잖아요. 게임도 같이 하고, 놀기도 같이 놀고 항상 거의 뭐 가족보다 더 친하게 지냈었는데, 이게 한 순간에 갑자기 없어지는 거잖아요. 헤어지는 거잖아요, 일종의..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고 했을 때는 제 스스로 조금 그때 당시에는 못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2016년 4월 16일 MBC 무한도전에서

2.3. 이재진

2005년 엠넷의 한 방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래 '중략' 부분과 '후략' 부분이 편집되어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데, 다른 멤버들의 발언과 맞추어 봤을 때 해체를 하자는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좀 많은데 나한테는.. 가깝게는 우리가 해체했을 때.. 원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해체가 아니었고, 회사와의 결별이었는데 회사에서 해체를 시켜버린 거지.[6] 도망갔지. 그때 그냥 끝까지 도망갈 걸..(중략) 또 나는 이제 그 다른 친구들 이제 그 의견들을 되게 많이 들어주는 편이고..하도 그러니까.. 확고하니까..나도 어쩔 수 없이.. (후략)
2005년 엠넷의 한 프로그램 에서

2016년 4월 16일 무한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재진의 잠적 때문에 해체가 한달 미뤄졌다는 사실은, 여태까지 다른 멤버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해체를 하기로 한 날짜가 원래는 4월이었어요. 근데 제가 도망갔었어요. (해체를) 하기 싫어가지고.. 저 때문에 좀 연기가 됐었어요. 잠수 탄 거.. 그렇게까지 반대를 했었어요. 제가..
2016년 4월 16일 MBC 무한도전에서

2016년 4월 23일 무한도전에서는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하셨다는 점을 밝혔다. 전술한 부모님의 인터뷰에서 " 해체 얘기는 작년 연말부터 나왔어요. 그때 엄마들끼리 모여서 사장님한테 '해체 하려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해라' 고 얘기하곤 했어요. 애들이 인기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이가 벌어졌으니까요."라고 말한 것과 완전 상반되는 내용이다. 부모님들 입장도 갈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진은 "두 분 다 돌아가신지는 꽤 됐다"며 "2005년에 아버지 돌아가셨고, 2008년에는 어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털어놨다. 또 그는 "젝스키스 은퇴했을 때 많이 원망하셨었다. 부산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도 하셨다"며 씁쓸해했다.
2016년 4월 23일 MBC 무한도전에서

이재진의 위 발언은 앞에 서술된 다른 다수의 멤버들의 강제로 해체당한 것은 아니라는 발언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어서, 이재진이 거짓말을 한 꼴이 된다. 그러나 해당 방송을 정확히 보면 이재진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엠넷이 중간을 편집해 왜곡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방송을 정확히 보면, 해체 대한 내용 이후 이재진은 분명 "또 나는 다른 친구들 의견을 되게 존중하는 편이고, 하도 그러니까, 확고하니까, 어쩔 수 없이" 라고 말하는데, 앞 뒤 부분을 잘라버려 내용이 이어지지 않아 위 발언이 그냥 확 지나가버린다. 위 발언은 해체를 하자는 멤버들의 의견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진은 분명 해체 당시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말했는데, 엠넷 측에서 자극적 방송을 위해 나머지 발언을 그냥 편집해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다른 멤버의 발언과 이재진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해체에 대한 의견이 갈린 와중에 이재진은 해체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점은 2016년 무한도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재진은 해체를 막기 위해 지방으로 도망쳐서 잠수를 탔다고 밝혔고, 그 때문에 해체 예정일이 한달 넘게 미뤄졌음을 고백했다. 멤버들은 이 사실을 이날 방송을 통해 알게되어 매우 놀라워했다. 이재진과 다른 멤버 의견이 갈린 점은 2016년 10월 17일 일간스포츠 인터뷰에서도 다시 확인됐다. #

2.4. 강성훈

2000년 해체 직후 마지막 음성사서함 메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안녕하세요. 젝스키스 강성훈입니다.. 여러분 소식 듣고 저희 6명 모두가 마음이 아파서... 성훈이가 대표로 여러분께 메세지를 띄웁니다.

우선적으로, 갑작스럽게 해체 선언을 하게 된 점에서 정말 죄송스럽구요. 저희 6명의 마음은 모두 그래요... 저희가 젝키라는 그룹 이름으로 여러분들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점에 조금 더 나은 모습의 변신을 위해서 이렇게 활동을 마감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4집까지 활동하면서 여러분의 사랑에 정말 감사드리구요... 앞으로 저희 6명 모두가 좋은 모습으로 자기 생활에 충실할 것을 오늘 여러분께 약속드리고 싶습니다. 많이 우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저희가 이렇게 메세지를 남기는데 좀 걱정이 되는데요... 조금만 더 여러분들이 저희 모두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구요...

아직 저희가 드릴 선물이 하나 남아 있어요. 젝키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20일 드림콘서트에서 여러분들과 만나길 바램이예요... 잠실주경기장에서.. 저희 모두가 여러분들과 만나고 싶어서 합의하에 꼭 한번 하자고 매니저 분께 말씀드렸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일정이 잡히게 됐습니다. 그날 우리 서로 만나서... 좋은 모습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정말 죄송스럽구요.. 여러분의 행복과 좋은 나날이 가득하길 6명 모두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이 주셨던 사랑,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2000년 해체 직후 마지막 음성사서함 메세지

2001년 솔로 활동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하였다.
각자 더욱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한 ‘발전적인 해체’ 였지만 막상 마음이 그렇질 않더라구요.
(솔로활동은 언제부터 추진됐는지라는 질문에)음… <젝키> 활동 내내 생각을 많이 했죠. <젝키>만의 음악 색깔은 있었지만 멤버 개개인이 다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깐요.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다 스페셜 앨범 내면서 솔로 활동에 대해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됐구요. 어떤 구성이면 <젝키> 팬과 대중성을 동시에 안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었죠. 하지만 해체 당시는 가수 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고 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음악 생활을 안 할 수도 있었거든요. 근데 해체 이후 힘든 생활을 하면서 음악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여러 곳에서 제의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에 대해 알아봤죠.
2001년 인터뷰에서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팬들은 (이호연을) 안 좋아하지만 DSP사장님이 젝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

2015년 5월 19일 EBS 리얼극장에서는 해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레이션: 팬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훈씨는 해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 강성훈: 정상에 있을 때 해체를 하자고 멤버들하고 최종적으로 좋게 합의가 되었었어요. 근데 그 당시 '쟤네 해체했잖아' 이 말 듣는게 너무 두려웠던 것 같아요. '더 이상 젝키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듣는 것이 버틸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해당영상 12분10초부터

2016년 4월 16일 MBC 무한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정도일때 쯤에 해체를 해야지, 그래도 어떻게 보면 팬들한테 더 실망을 안 주는 격이 될 수도 있겠구나. 정상에 있을 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좀 더 잡혔던 것 같아요.
2016년 4월 16일 MBC 무한도전에서

2016년 6월 1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핑클과의 차별을) 많이 느꼈죠. 솔직히.. 그때는..
(김구라의 '나갈 때 순순히 놔줬어요?'라는 질문에)저희는 계약서가 없었어요. 서면 계약이 없었어요. 그냥 구두계약..
2016년 6월 1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
2016년 6월 25일 부산 팬미팅- 2000년 2월 28일 콘서트에 부른 솔로곡 약속은 해체할 것을 알고서 만든 곡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미 2000년 콘서트 이전에 해체가 기정 사실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1999년 연말시상식 즈음에 본격적인 해체 이야기가 대두되었다는 부모님의 증언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DSP는 해체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인 1999년 말에 DSF 4기를 모집하였다. 물론 해체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 것이지, 해체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니 소속사로서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다만 자사 가수의 팬들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해체 이후 팬들은 DSP의 비리라며 투서를 보냈고, 그 내용에는 탈세 목적의 음반판매량 축소, 팬클럽비 유용, 구타, 노예 대우 등이 담겨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상호 기자가 취재해 방송을 내보냈고, 결국 DSP 이호연 사장은 경찰조사를 받게된다. 하지만 경찰조사 결과 무혐의처분이 나왔다(다만 이상호 기자의 말에 따르면 탈세와 관련해선 나중에 국세청으로부터 수억원을 추징당했다고 한다). 즉, 팬클럽비 문제의 경우 법적으로 문제될 건은 없었다고 보인다. 실제로 해체 이후 팬클럽 회원들에게 소정의 물품들이 지급됐다. 팬들 입장은 그 물품 퀄리티가 떨어졌으며, 큰 반발을 당하니 그제서야 지급한 것 아니냐고 한다.

2.5. 장수원

2013년 12월 11일 QTV 미소년 통신 은희상담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쪽(소속사)에서 저희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쪽(소속사)에서 강제로 (해체를) 시킨 것은 아니에요. 저희끼리 생각이 있었던 것을 그렇게 한거지, 그쪽에서 '해체해'라고 하진 않았어요."
2013년 12월 11일 QTV 미소년 통신 은희상담소에서

2014년 1월 7일 방송된 비틀즈코드3D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사에서 해고당한건 아니고 멤버들 간 하고 싶은 음악적 색깔이 맞지 않고 회사랑 갈등도 있어서 해체했다."

2015년 1월 24일 방송된 세바퀴에서는 해체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99년도 말이 해체 이야기가 오고가던 타이밍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멤버들이 음악적으로 하고 싶은 장르가 달랐던 점이다. 회사와 약간의 트러블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약간의 빈부격차도 있었던 것 같다.[7]

2015년 1월 27일 현장토크쇼 TAXI에 출연했을 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수원은 해체를 썩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다들 그런 분위기로 가고 있어서 자기가 나선다고 상황이 바뀔 것 같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런 장수원의 말을 듣고 김재덕은 '얘는 관심이 없다'고, 강성훈은 분위기 맞춤형이었다고 회상했다.

2016년 4월 16일 무한도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에 뭐 그렇게 해체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2016년 4월 16일 MBC 무한도전에서

2016년 6월 1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희가 생각했을 때는 저희에 대한 회사의 관심과 사랑이 좀 약간 핑클쪽으로 넘어가지 않았나.. 그런 것도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2016년 6월 1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

2.6. 고지용

(단독 인터뷰)젝키 고지용, 해체 관련 말문 열어!

젝스키스 고지용 군과 함께 그룹 해체와 관련된 자신의 생각과 항간에 떠도는 음반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다음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스타이야기) 젝스키스 해체는 사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언제 이 결정을 내렸으며 재결합 가능성은 없는가...
(고지용) 사실상 4집을 시작하면서 결정을 내렸다. 우리 멤버 전원이 4집까지 오면서 음악적 한계에 부딪혔었다. 힘들었었다. 누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우리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소망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슷한 음악을 계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멤버 중에는 가수보다 다른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다. 다만 시기를 놓고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멤버들끼리 다시 합칠 가능성은 미안하지만 없다.

(스타이야기) 중간에 베스트음반과 5집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고지용) 그런 것에 대해 모른다. 우리가 알기로는 우리의 해체사실이 중간에 모 언론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이를 무마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베스트 앨범은 나올수 있겠지만 5집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2000년도 인터뷰 # #

3. 대학원 논문에서 설명된 젝스키스의 해체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논문[8]에서는 젝스키스의 해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품성의 쇠퇴

이 연구의 조사대상자 중 음반판매량 6위를 차지한 젝스키스는 2000년 5월 18일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1997년 결성된 젝스키스는 그 해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했고 4대 통신 네티즌이 뽑은 97최고 신인그룹상, KMTV 97최고 신인그룹상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 후 1999년 12월까지 활동하는 동안 4장의 음반을 냈으며 모두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했다. 음반 활동 이외에 영화 "세븐틴", 뮤지컬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CF, 라디오 DJ 등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결국 데뷔 4년만에 그룹이 해체되었다.

6명으로 구성된 젝스키스는 같은 소속사의 핑클에 비해 차츰 음반 판매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같은 수입을 벌어들이더라도 멤버수가 많기 때문에 각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상대적으로 적다.

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CF출연을 많이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수입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1억원을 받더라도 한 사람당 1천만원도 돌아가지 않는 결과이므로 노력한 것에 비해 수익이 적다.

상품성의 쇠퇴는 곧 이윤발생이 적어진다는 의미이므로 매니지먼트사 <DSP>로서는 같은 조건에 상품성이 더 좋은 핑클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젝스키스의 상품성 쇠퇴로 인한 위기관리전략으로 택한 것이 해체였는데 이 해체의 과정을 보면 그 속에서도 상업적인 전략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젝스키스의 해체설은 1999년 12월부터 나돌기 시작했지만 <DSP>에서는 해체하기 1달 전까지도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있었다. 해체설이 있던 1999년 12월 당시 PC통신의 팬클럽 게시판의 내용을 보면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해체가 기정사실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팬클럽 게시판에 올라온 팬들의 글 내용>[9]

- 4집이 나왔을 때 이번만은 100만장 넘을 수 있을꺼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지금 4집이 70만장 이상 팔렸는데 기획사 측에서 35만장이 팔렸다고 억지주장을 한다는 소문이 있더라구요.

- 핑클의 비디오 CD는 괌에서 찍은 미발표 뮤비가 세 곡 있답니다. 우리의 2억 뮤비는 어디 있나요? 우리 젝키가 번 돈으로 만들었다는 뮤비 언제 한번이라도 제대로 신경 써 주신 적 있나요?

- 지금 사장님은 자신이 키웠던 잼이나 뮤와 같은 그룹으로 젝키를 만들려고 노력하시고 계시더군요. 막판에 어절 수 없는 삼류가수 아이돌 가수의 비화쯤으로 젝키를 남게 하려고...

2000년 1월 3일자 <스포츠서울> 신문에 해체기사가 보도된 적 있었으나 이 때도 <DSP>는 해체하지 않는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5월 18일 <DSP>는 해체를 위한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러한 해체선언과 해체부인에서 매니지먼트사의 상업적 논리를 볼 수 있다. 최고의 인기를 지니고 있는 가수가 은퇴나 해체 선언을 하게 되면 마지막 음반 판매량이 증가하게 되는게 보통이다. 젝스키스의 경우 해체보도가 나갔던 2000년 1월 초는 그들의 4집 활동이 마무리될 즈음이다. 이 때는 아직 마지막 음반을 준비하지 않은 단계이고 당시 활동하던 4집은 이미 팔릴만큼 팔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 당시 해체를 하게 되면 젝스키스의 해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상업적 이득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4개월 동안 고별음반작업을 하고 공식적으로 2000년 5월 18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팀해체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신문이나 통신으로 해체설이 나돌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자체적으로 해체합의가 된 상태였지만 앨범작업 등 '해체의 상업화'를 위해 해체설을 강력하게 부인했던 것이다.

마지막 해체 음반에서는 댄스가수인 젝스키스의 이미지와는 달리 해체라는 분위기에 맞춰 앨범컨셉을 잡았다. 1집부터 4집까지의 발라드 히트곡과 신곡으로 발라드 기획음반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콘서트 실황비디오, 콘서트실황 VCD를 더블 CD로 발매하는 등 기존에 젝스키스가 가졌던 모든 상업적 가치를 상품화시켰다. 기획음반에 들어갈 신곡도 마지막임을 강조하는 곡으로 만들어졌다.

<BYE>

bye...

Maybe I remember, 흰눈 내리던 날 어디선가 나를 보는 그대 눈빛

가득 이슬 맺힌 그대 외면한 채, 돌아서는 날 보고 싶지 않았죠.

언제나 날 지켜줬어요 누구보다 날 걱정했죠

나 더 멀리 날 수 있도록 용길 줬죠

그런 그댈 보내야 해요 맑은 그대 두 눈에

이젠 더 이상 나의 눈물을 보이기 싫어 그댈 위해

<중략>

함께 했던 추억만큼은 우리 잊지 말아요

그대와 함께 행복했어요 사랑해요

그대만은 부디 행복하세요

다만 우리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해줘요.

팀해체 1주일 후 기존 젝스키스 멤버 중 가장 많은 팬들을 확보해 핵심 역할을 해왔던 리더 은지원과 싱어 강성훈이 2인조로 거듭난다는 내용이 통신 게시판에 올랐다. 이들은 2001년 1월초 첫 앨범을 발표한다는 계획 아래 이미 앨범작업에 들어간 상태라고 밝혔는데 팀이름도 젝스키스로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로 따지면 2인조 젝스키스의 새로운 탄생이 아니다. <DSP>는 젝스키스의 멤버가 많았기 때문에 인기에 비해 이윤창출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룹에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은 멤버를 탈퇴시킨다면 수적인 팽창에서 오는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멤버의 퇴출에서 오는 그룹 이미지의 손상은 오히려 더 상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상품성이 쇠퇴한 그룹을 일단 해체시키고 난 후 다시 그 중에서 상품성이 좋은 멤버만을 골라 젝스키스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시킨 것이다.

<DSP>는 상품성의 쇠퇴라는 위기를 해체전략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해체 과정 속에서도 창출할 수 있는 최대의 이윤을 창출해 '해체의 상업화'를 이루었다.

4. 2000년 해체 당시에 나온 정보들

4.1. 젝스키스 해체 기자회견 전문

97년 4월 15일 '젝스키스'로 방송활동을 시작한 저희들은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함께 음악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 5월 18일 오늘 저희 '젝스키스'는 공식활동을 마감하고, 가요계 은퇴를 알리려고 이렇게 모였습니다. '젝스키스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 속에서 지난 4집 앨범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멤버들 각자 은퇴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고, 가장 좋은 모습일 때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특별한 사건도 누구의 설득도 없이 결정을 내렸습니다. 항상 시간에 기는 스케줄과 힘든 음반 작업의 반복,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스트레스로 지난 3년간 남보다 힘든 성년식을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젝스키스'를 사랑하고 격려해주는 팬들과 믿음과 우정으로 서로를 감싸준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값지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젝스키스'가 있게 해주신 제작자와 작곡가 작사가 분들 그리고 저희와 함게 동고동락한 매니저형들 그리고, 많은 방송 관계자와 기자 여러분에게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젝스키스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또 이렇게 이별을 알리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젝스키스 리더 은지원

4.2. DSP

4.2.1. 이호연

2000년 8월 3일 스포츠조선 금요초대석에서
Q. 젝스키스의 신화도 그 연장선상인데?

A. 하와이에서 2명, 국내에서 4명을 찾아내 구성했죠. 처음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으니까 그림이 썩 괜찮더라구요.처음부터 히트에감이 있었어요. 방송을 타기 전 PC통신에서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대단했지요. 앨범을 내놓았는데 상상외였어요. 한 앨범에서 `학원별곡' `폼생폼사' `연정' `기억해 줄게요' 등 4곡이 빅히트를 했어요. 한 앨범에서 4곡 히트는 드문일이라 더욱 놀랐어요. 본인들이 열심히 했어요. 해체할 때까지 말다툼을 하거나 싸운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Q. 결국 젝스키스는 해체됐는데?

A. 너무 아쉬웠어요. 이 문제는 본인들과 부모들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갈 길이 있고 정상에 있을 때 자리를 떠나겠다는 거였죠. 일부 팬들은 저의 입김 운운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아요. 사업가의 입장에서 보면 제가 해체를 할말한 이유가 없어요. 끝까지 가고 싶었지요. 젝스키스의 해체는 이 사업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일로 기억될 겁니다.
이호연 사장은 “3년간 연예활동을 펼치면서 많이 지쳤다. 또 데뷔 당시에는 10대들이었지만 이제 모두 20대에 접어든 만큼 각자에게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아 해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http://www.izm.co.kr/artistRead.asp?idx=28756&artistidx=281&bigcateidx=1

일단 '사업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해체를 할 말한 이유가 없다'는 말은 맞다. 당시 젝스키스 인기가 이전에 비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가요계 전체에서 놓고 봤을 때는 여전히 최상위권의 그룹이었다. 그렇다고 해체 쪽으로 돌아선 멤버들을 설득해 그룹을 존속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별로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라디오스타에서 은지원은 해체의 원인이 이호연사장과의 관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다만 강성훈은 2015년 러빙헨즈에서 '팬들은 (이호연을) 안 좋아하지만 DSP사장님이 젝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라고 말하며 이호연의 공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지막이 안 좋았다고 언급하였다. 이재진은 2005년 싸이월드 방명록에 호연이란 이름의 팬이 글을 남기자 '호연이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바 있다.

기타 멤버들이 해체 이후 이호연 사장에 대해 언급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은 2013년 DSP 페스티벌에 참석해서 공연을 펼쳤다. 은지원은 "사장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장님은 늘 우리가 무대를 하면 뒷편에 서서 함께 해주셨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다"라며 "사장님 덕에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며 "의리"를 외쳤다. 이어 김재덕 역시 "이호연 사장님의 빠른 쾌유 바란다"고 덧붙였다. # # 김재덕은 O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가 있기까지 DSP라는 기획사가 있었고, 또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출연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상 22초부터 기타 김현중의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 #에서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라고 말한 바 있다.
2016년 DSP 측이 멍청하게 언플했다가 욕만 먹은 기사에서는 "불같은 성격의 이 대표는 젝스키스 해체 과정에서 일부 멤버들과 감정적으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나간 일. 측근은 “이호연 대표의 눈물은 젝스키스에 대한 반가움과 미안함, 고마움 등이 뒤섞인, 그야말로 교차하는 만감의 표현이 아니겠느냐”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호연은 201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말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로 6년째 누워있었다. 그냥 기자의 상상과 소스를 제공한 직원의 생각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대중들은 이런 기사를 보고 "앞에 실컷 딴 이야기 쓰다가 궁극적 목적은 마지막 줄에 있네."라고 받아들인다. 앞 부분 내용의 경우, 이호연이 젝스키스를 키운 것은 맞으니[10] 병문안 좀 오라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얘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었다. 결국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YG와 계약 소문 들리던데, DSP랑 계약하자"는 기사로 비춰진다. 하지만 현재 DSP 위상만 봐도 젝키가 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최다추천 댓글을 보면 허위이거나 과장인 루머가 많은데, 일반인들은 이번 기회에 그걸 보고 믿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참조.) 이호연 상태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 줄도 모를텐데, 6년째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만 엄청 먹었다. 즉, 아무런 이익이 없고 피해만 생긴 언플이었다.

4.2.2. DSP 직원

4.2.2.1. DSP 관계자
D기획 한 관계자와의 대화 내용
Q. 젝스키스에 관한 사실을 듣고 싶어서 왔는데....

A. 공식화된 기사가 전부이다.
Q. 게시판에 올라온 여러 가지 의문은....?

A. 조그만 사실에 살을 붙여서 팬들이 과장을 한 것이다. 일단 젝키 팬들은 젝키가 해체를 했으니까 여섯 명을 하나의 그룹으로 좋아했다가 해체가 돼서 기사를 보고하는 것인데... 멤버 중에 두 명은 내년에 나온다.
Q. 언제?

A. 내년 초가 될 것 같다.
Q. 확정된 사실인가?

A. 그렇다.
Q. 어떻게 여섯 명에서 두 명으로 줄인 이유는?

A. 그것은 우리가 줄이려고 해체를 한 게 아니라 해체를 하고 나서 얘들의 향후 계획을 듣고 그것을 수렴해서 계속 가수 활동을 하겠다는 멤버 둘이 남게 돼서 듀엣을 하게 된 것이다. 듀엣을 시키려고 고의로 해체를 시켰다는 소문이 있는데 인터넷이라는 것은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이다. 심지어는 잭키 팬들이 어떤 일까지 하냐면 인터넷에 우리 D기획 관계자라고 해서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11] 그리고 인터넷에서 퍼왔다고 한다. 심지어는 기자가 올린 글처럼 해서 문체를 베껴 써서 비리가 어떻다느니, 음반 판매가 어쩌느니....뭐도 모르고 통신을 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사실로 믿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좋게, 발전적으로 애들이 10대에 가수를 시작해서 지원이 같은 경우는 나이가 제일 많은데 23살이다. 솔직히 남자면 자기 미래를 이미 설계하고도 남았을 애들인데 이때까지 가수활동 빡빡하게 하느라고... 아직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냐, 다른 것을 둘째치고 계속 음악을 하겠다는 애들이고. (여섯 멤버 중에 아닌 사람도 있다.) 공부를 하겠다고, 연예활동에 지친 멤버들은 계속 공부를 할 것이고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려고....... 솔직히 4년 정도 활동을 했으면 10대 댄스그룹으로 시작했는데 인정을 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국내 가요계에서는 댄스 가수가 4년, 5년씩 활동을 하는 것은 한계라고 본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들이 해체를 한 것이지 ....
Q. 그럼 멤버 개인이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보였기 때문에..?

A.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의 팬들이 하는 말이다. 우리야 기획사 입장이니까 그들 마음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우리 앞에서는 아니라고 해도 속으로는 무슨 생각하는 지 모른다. 특정 멤버가 활동을 하기 싫어해서 가수 활동을 접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해체 얘기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해왔던 거다. 그런 걸로 문의가 많이 온다. 기자들, 방송국...,. 우리는 젝키가 해체한 마당에, 또 우연히 드림 콘서트때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알아본 결과 주동을 한 팬은 젝키팬이 아닌 걸로 밝혀졌다. 차를 부시고 우리 팬클럽 애들 아니고 팬클럽과는, 임원들은 전혀 관련이 안 되어있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매스컴에서 자꾸 안 좋은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져서 이미 팬들과 아쉽지만 이별을 한 상태인데 자꾸 그걸 들춰서 해체와 연관을 지으려고 한다. 기사화 시켜서 이슈화하고 싶은 건 이해를 하는데 왜곡되게 표현을 하면 팬이나 본인들은 기분이 나쁘다.
Q. 팬클럽 관리는?

A. 지상 팬클럽, 인터넷 팬클럽이 있다. 비공식 팬클럽이 있긴 하다. 팬클럽 관리팀이 있다.
Q. 음반 수익은?

A. 당연히 멤버들과 회사에 일부가 온다. 멤버들한테 (수익이) 가야지 노래를 불렀는데...
Q.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A. 인터뷰를 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우리는 조용히 있다가 나중에 여섯 멤버들이 어떻게 나오는 것만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Q. 팬들의 오해를 풀어줘야 할텐데...

A. 팬들의 오해는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 때문에 더 생긴다. 많이 흥분한 상태고 젝키가 해체를 했다고 해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팬들은 해체라는 것을 인정 안 하려고 한다. 사실도 아닌 글이 통신에 올라오는데 지금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Q. 사장이 이호연씨? 지금 어디에 계신지...?

A. 계시다. 지금 사무실에. 손님 만나고 계신다. 그리고 이렇게 올 때는 미리 전화를 하고 약속을 하고 와라.
4.2.2.2. 김기영
2000년 8월 티비넷 잡지 인터뷰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Q. 팀 해체의 근본적인 원인은 뭐였나요?

A. 그건 저도 정확히 몰라요. 아니, 멤버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매니저가 모르면 누가 아나요? 그건 멤버들이 가장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저도 표면만 봤을 뿐이고, 내막을 자세히 몰라요.
Q. 해체 소식을 멤버들에게 알려준 건 누구였죠?

A. 물론 저였죠. 해체 전전날인가 사장님께 전달을 받고 멤버들에게 연락을 했어요. 기자회견을 하려고 하는데 너희 모두 참석을 해야 의미가 있다구요. 멤버들도 수긍을 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읽은 글은 멤버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의논해 작성한 것입니다. 모 작가가 다듬어 썼구요.
Q. 팬들의 주장은, 젝키 멤버들이 전혀 원하지 않았던 해체였다고 하던데요.

A. 정말 어이가 없어요. 해체는 멤버들이 저희보다 더 원했던 일이었어요. 특히 재덕이와 지용이가 가장 바랬구요. 그리고 애들 자체가 아무런 의욕이 없었어요. 연습도 잘 안하고, 방송도 힘들어 하고. 네.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네요. 의욕 자체가 없었다는 거 말예요.
Q. 해체 얘기는 작년 연말부터 나왔다면서요? 그리고 팬들은 '핑클'을 키워주기 위해 '젝키'를 죽인 거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A. 네. 연말 시상식을 즈음해서 얘기가 나왔어요. 그걸 두고 팬들은 '핑클' 홍보 때문에 젝키를 소홀히 한거라고 하던데, 그런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기획사와 매니저들은 젝키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홍보 했어요. '젝키' 망신 당하지 않게 하려고 방송사랑 음반사 쫓아 다니면서 한군데라도 좋은 상 받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세요? 지들이 힘이 딸려 자꾸 떨어지는 걸 어떡해요. 저희도 영문을 몰랐어요. 왜 그렇게 인기가 떨어지는지 말예요. 그리고 '핑클'은 가만히 둬도 인기가 오르는데요. 굳이 홍보 안해도 자기들끼리 잘 하더란 말입니다. '젝키' 때문에 애 쓴 기획사 노고 생각한다면 그런 말 하면 안돼죠. 그리고 이번 드림 콘서트 보고 저는 팬들이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평소에는 응원하러 잘 나오지도 않더니 그 날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모였는지. 그 날따라 해체한 게 너무 아깝더라구요. 평소에 그렇게 많이들 왔다면 해체 안했을 수도 있죠.
4.2.2.3. 기타
2016년 6월 1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해체에 대해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젝키 멤버 간 사이는 좋았고,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본인들과 가장 가깝게 붙어지내던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와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이재진은 2013년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멤버 중 자기랑 재덕이만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한테 맞고 살았다고 발언한 바 있다. 빈부에 따른 차별 대접을 한 것으로 보인다.[원문]

한편, 2013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김재덕의 발언에 의하면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가 멤버들의 (군기를 잡고자) 스스로 엎드려 뻗치고는 내 잘못이라면서 멤버들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했는데, 그때 번개 같이 이재진이 한 대 때려서(...) 놀란 나머지 멤버들이 이재진을 말렸다고 한다. 깨알 복수 성공?

참고로 젝키 팬덤은 이 매니저가 젝키의 소녀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주장한다. 그 피해자들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손녀도 있었다고 하는데 해당 내용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에 갔는데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가 사인받고, 사진 찍으며 왔다갔다하더라. 경호팀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어르신 손녀딸'이라고 하더라. 김 전 대통령의 손녀였다. 순간 날 보더니 '할아버지, 저 사람 아는 사람이다'고 하더라. 알고 보니 영화 <세븐틴>이 개봉했을 때, 대한극장에서 저지선이 무너져 내게 맞았던 학생이었다. 순간 대통령과 영부인이 쳐다보는데 어쩔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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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반대입장은 다음과 같다. 물론 때린 것이 사실이라면 잘못됐으니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아래와 같은 막장 상황에서 물리력이 행사되지 않고는 도저히 통제가 안되었을 것이다. 마치 가만히 있는데 맞았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위 김대중 대통령 손녀 일화도 원문을 보면, 저지선이 무너져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당시 아이돌 팬덤 문화가 막 생겨나던 시점이었고, 이런 면에서 매우 후진적이었다.
2014년 12월 18일 해피투게더에 장수원이 출연했는데, 과거 활동 당시 집앞에 팬들이 항상 몇백명 있었다고 한다. 당시 팬들은 모자를 가져가거나 몸을 만지곤 했는데, 한 멤버는 남자의 중요한 부위를 너무 세게 잡혔던 적이 있다고 밝혔다. 자기 것인 마냥 잡고 안 놨다고 한다.
2016년 6월 1일 라디오스타에서 김재덕의 말에 따르면, 젝키 활동 당시 팬들이 2시간 동안 자신의 차를 계속 쫓아왔고, 결국 경찰서에 울먹거리며 들어가 도와달라 했다고 한다.
2016년 4월 23일 무한도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한 극성 팬이 자신들 밴에 몰래 매달렸다고 한다. 그 상태로 고속도로를 달렸고, 뒷차가 경적을 울려 알아차렸다고 한다. 하마터면 대형사고로 이어질뻔 했다.
이외 은지원도 자기가 게임 중독이 된 이유는 당시 팬들이 집 앞에 수백명이 지키고 있어 밖에 나가질 못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응답하라 1997에서 코믹하게 그려졌는데, 당시 H.O.T. 팬들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기사

4.3. 가족

4.3.1. 김재덕 어머니와 여동생

부모와 멤버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우선 각 멤버들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모두 핸드폰을 꺼놓거나 집 전화기도 자동 응답기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해체 후 상당한 충격을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도피'였다. 쏟아질 팬들의 전화공세 때문이기도 하다. 어렵게 연락된 멤버 둘 중 한 명은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기자'라는 말에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도 해체 이유를 모른다"면서 서둘러 여동생에게 수화기를 넘겨줬다. "그의 여동생은 '오빠가 너무 불쌍하다. 얼른 제대로 된 해체 이유가 밝혀졌으면 좋겠다.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생만 많이 한 모습이 안쓰럽다.'"고 말해 기자회견문이나 기획사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었다.
2000년 8월 티비넷 잡지 인터뷰
해당 인터뷰의 어머니는 김재덕의 어머니이다. 젝스키스 멤버들 중 여동생이 있는 멤버는 이재진과 김재덕, 강성훈 세 명인데, 당시 김재덕만이 아버지와 서울에서 따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4.3.2. 장수원 어머니

여러차례 접촉을 시도한 끝에 멤버들 중 한명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해체 사실에 대해 연거푸 한숨을 쉬며 "아들이 하고싶은 일이라 내버려 뒀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말했다. 이하는 그녀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Q. 해체한 이유가 뭔가요?

A. 해체 얘기는 작년 연말부터 나왔어요. 그때 엄마들끼리 모여서 사장님한테 '해체 하려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해라' 고 얘기하곤 했어요. 애들이 인기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이가 벌어졌으니까요.
Q.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A. 사장님이 밤 늦게 애들을 부르곤 했어요. 어떨 땐 새벽 2시 넘어 부르기도 하고, 자고 있는 애들 깨워서 불시에 나오라고 하는 거에요. 애들이 새벽에 불려가서 뭘 배우겠어요? 자꾸 애들 정서에 맞지도 않는 이상한 걸 막 하게 하고 그러니까 애들도 싫어하죠. 신인 때야 아무말 못하고 불려가고 했지만 인기를 좀 얻고나니 반항도 하고 그러는거죠. 그걸 가지고 기획사에서는 건방지다고 하고. 그러면서 매니저랑 사이가 안좋아지고 사장님 눈 밖에 나기 시작한거죠.
Q. 팬들 말로는 돈을 제대로 못받았다고 하던데. 인세도 안주고 말예요.

A. 돈이요? 많이 못벌었죠. 애시당초 계약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인세도 마음대로 주는거죠.
Q. 계약이 없다뇨?

A. 다른 가수들은 계약서를 쓰잖아요. 그런데 얘들은 그런 게 없었어요. 음반이 팔리면 한 장당 얼마를 준다느니, 수입은 어떻게 나누다느니 그런 계약 말예요. 물론 계약금도 없었죠.
Q. 그럼 돈을 얼마나 번거예요?

A. 모르겠어요. 얼마 못벌었죠.
Q. 매를 맞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인가요?

A. 에이∼ 그건 아니에요. 매를 맞고 그냥 있나요?
Q. 가수로서 미련을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A. 기획사에서는 더 이상 미련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해체를 결정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들이 좋다고 하니까 내버려 뒀는데, 안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미련 많이 가지고 있죠. 어차피 '젝키'야 처음부터 지원이랑 성훈이 이렇게 2인조로 하려던 거니까 걔네들은 다시 '젝키'로 나오겠지만 다른 애들은 기획사에 남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차피 계약으로 묶인 게 아니니까 자유로운 몸이죠. 의리를 생각해서 남을 수는 있어요.
Q. TV에서 '젝키' 해체 문제를 다룬건 알고 계시죠?

A. 네. 방송이 미뤄졌던 걸로 알고 있어요. 엄마들이 입을 안열어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거죠. 엄마들이 한마디만 해주면 뭔가 나올 것 같은데, 누가 함부로 방송에 나가 그런 말을 하고 싶겠어요? 그리고 성훈이와 지원이는 기획사에 계속 남아있을 거니까 엄마들끼리 쉬쉬 하기로 한거죠. 기획사에 남아있는 애들한테 피해가 되니까. 그리고 '젝키'의 주요 인물이 그 둘이니까 뭐든 두 멤버가 주축이 되잖아요.
Q. 다른 기획사에서 '젝키'를 스카웃 하려고 하지 않나요?

A. 그런 제의도 있었죠. 다른 기획사에서는 스카웃 조건이 '6명 모두' 였어요. 그런데 성훈이와 지원이가 듀엣으로 나올거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죠.
Q. 요즘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A. 다들 평범하게 지내죠.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그런데 하나같이 가수에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2000년 8월 티비넷 잡지 인터뷰
우선 이 인터뷰의 내용으로 보아 해당 인터뷰의 어머니는 고지용 아니면 장수원의 어머니로 보인다. 왜냐하면 은지원 강성훈을 객체로 언급하였으며, 전술했듯이 김재덕의 어머니는 이미 같은 잡지에서 따로 인터뷰를 짤막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재진 어머니는 무한도전에서 알 수 있듯이 해체에 대해서 완강하게 반대를 하였는데, 해당 인터뷰의 어머니는 해체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위 인터뷰에서 아들이 가수가 좋다고 하니까 내버려뒀으며 여전히 젝키 멤버 활동에 미련이 있다고 한 점을 비추어 봤을 때, 고지용이 아닌 장수원 어머니로 볼 수 있다. 고지용은 젝키 활동 당시 자서전에서나 인터뷰에서나 늘상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언급해왔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에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위 인터뷰에서는 아들이 '젝스키스 멤버 활동에 미련이 있다.'고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는데, 실제로 십수년이 지난 방송에서 장수원은 당시 속으로는 썩 해체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이 인터뷰에 의하면 해당 젝스키스 멤버는 여전히 DSP 잔류 여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멤버는 장수원이 유일하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는 장수원 목차에 있다.

4.3.3. 장수원 어머니2

팬클럽 사이트에 올라온 인터뷰 - 다만 본 인터뷰는 출처가 불명확해 신빙성에 의문이 든다.
젝스키스 멤버 중 한 어머니와의 전화 인터뷰가 있었다. 젝스키스의 해체 이후로 젝스키스 팬들과의 아픔 이외에 어머니들의 아픔도 무시할 수 없다. 여러 가지 루머가 생기면서 젝키 멤버들의 집에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신문과 방송의 오보로 팬들이나 어머니들의 불만이 많다. 젝스키스의 해체 이유는 많은 설이 있었다. 어떤 이유들인지 문제의 대성 기획사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어머니에게 직접 들어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걱정을 하신 바 젝스키스가 해체를 했지만 다음 일이 진행 중이고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하시기가 힘드시다는 것.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는 통화였다. 어떤 나쁜 소문이 있다 하더라도 젝키 멤버들의 보다 나은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셨다.
Q. 멤버들과 전화를 하고 싶은데 젝키가 억울한 것이 있을 것 같아서...

A. 그걸 어떻게 풀 수 있느냐...
Q. 지금 젝스키스 팬들이 서명운동이 한창인데...

A. 서명 운동 해가지고 대성을 이긴다는 보장이 어디있냐....
Q. 젝키 해체의 이유

A. 첫째는 멤버 중 한 명이 안 한다고 한 것도 있고 둘째는 스케줄은 많은데 수입이 영 아니고 셋째는 돈도 잘 안 주면서 애먹이고 그런 이유겠지.
Q. 월급으로 받으셨나?

A. 수당으로 받았다.
Q. 해체한다는 말은 언제 들었나?

A. 멤버 한 명이 안 한다고 해서, 그 멤버가 누군지는 모른다. 사장한테 그 얘길 들었다. 만나서 들었다.
Q. 명예회복차원에서 보도를 하고 싶다.

A. 명예회복이 쉽게 될까 모르겠다.
Q. 둘이 듀엣 설은?

A. 사장 혼자 신문에 냈다. 부모들은 허락을 안 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Q. 이호연 사장이 젝키에게 함부로 한다던데 들은 사실이 있는지..

A. 안 봤으니 모른다. 우리는 일 한 것 돈으로 달라고 전화를 하면 겨우 늦게 준다. 우리 애가 계속 활동할지 안 할지 모르는데 대성이 어떻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Q. 팬들한테는 ....?

A. 기다리라는 말 밖에..
Q. 음반비리에 대해서는 아시는 것 없으신지

A. 그런 얘기는 엄마들 보다 팬들이 더 잘 안다. 엄마들은 몰라도 팬들은 조금만 말라도 한 눈에 알더라.
Q. 대성이 잘 못해주나?

A. 예를 들어서 스케줄은 많이 뛰고 돈은 못 받고...
Q. **군은 계속 활동하고 싶어하는지?

A. 계속하고싶어 한다.
해당 인터뷰의 어머니 역시 은지원 강성훈을 객체로 언급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은 계속 젝스키스 멤버로 활동하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보아 해체 반대파 멤버( 이재진, 김재덕, 장수원 중 한 명)의 어머니인데, 장수원의 어머니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해당 인터뷰의 젝스키스 멤버는 DSP에서의 활동여부가 불투명한데, 이재진 김재덕은 해체 직후에도 수개월 동안 DSP에 잔류했으며, 고지용은 학업으로 진로를 정했기 때문이다. 기사에서도 해체 직후 장수원만이 진로를 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해당 기사 한편, 이호연이 언급한 젝스키스 활동을 거부한 멤버는 가장 적극적으로 해체를 주장한 은지원으로 보인다.

4.4. 은지원, 강성훈 듀엣 시도

한편 2000년 당시 은지원과 강성훈이 듀엣으로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은지원, 강성훈 듀엣 시도 문서 참조.

5. 불화설

일각에서는 멤버간의 불화설이 원인으로 대두되었으나 무한도전이나 기타 방송에서 멤버들이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보면, 항상 6명이 몰려 다니며 재미있게 놀았다, 다른 팀에 비하면 우리는 사이좋게 지냈다는 등, 멤버들 사이에 있었던 불화라고 얘기하는 거라곤 슈퍼맨 배트맨 중 누가 더 강한지, 혹은 음식으로 다툰 수준이 전부다. 즉, 싸워도 친한 친구끼리 장난식으로 티격태격한 수준이였으며 대부분은 별 시덥잖은 이유가 원인이였다는 의미. 당연히 금세 화해했다고 한다. 게다가 해체 후에도 꾸준히 교류하고 활동을 지원하는 등 사이가 좋다.

젝스키스의 해체는 소속사와의 마찰, 정상에 있을 때 멋지게 끝내고 싶은 마음 등이 작용해 해체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4집 활동이 끝날 당시 멤버들이 DSP를 나와 당시 힙합 전문인 모 기획사로 소속사를 옮기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13] 그런데 카더라에 의하면 당시 컨택했던 힙합 전문 기획사가 바로 현 YG였다고 한다... 물론 그때는 YG의 위상이 이 정도로 높지는 않았던 시절이다. 원래 해체 전에 젝키 한마당이라는 콘서트를 준비중이라고 하거나 핑클과의 합동 공연에 대한 소문이 도는등, 나름의 스케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점에서 보아 해체 결정은 꽤 급박하게 이뤄졌던 듯.

은지원은 2001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룹활동은 젝키 친구들이 다시 모이는 것 말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인터뷰

장수원은 2015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Q. 젝스키스 활동이 그립나?

A. 물론이다. 그때 인기가 그립다기 보다는 그 시절, 여섯 명이 함께였던 때가 그립다. 물론 당시에 스케줄도 정말 많고 바빴지만, 차안에서 멤버들끼리 수다 떨면서 스케줄 하러 갔던 게 꼭 소풍가는 기분이었다. 놀면서 일하는 기분이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정말 재밌었다.
2015년 1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 최종 정리

6.1. 각자의 입장 요약

6.2. 입장을 통한 해체 원인 정리

일단 일부 팬들이 퍼뜨리는 "강제로 해체 당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해체를 하자는 멤버와 하지 말자는 멤버로 나뉘었고, 최종적으로 해체를 하자는데 결론이 모이게 됐다.

2016년 10월 17일자 일간스포츠 기사에 이에 대한 멤버들의 발언이 나왔다. #
-해체 당시를 떠올려 볼까요?

지원 "3.5집과 정규 4집까지 성적이 나쁘진 않았지만 이제부터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참 인기 많을 때 해체하는게 맞다고 생각했고 물론 동의하지 않는 멤버도 있었고요."

재진 "동의 못 했어요. 동의하지 않은 채로 해체됐죠.(웃음)"

지원 "과반수가 문제에요. 과반수 이상이 동의를 해 해체했어요."

성훈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해체하지 않았으면 지금 이 자리도 없었고 더한 특별함도 없었겠죠."

이재진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것이 무한도전에 이어 다시 확인됐다. 과반수가 해체에 동의를 했다고 하므로, 은지원, 강성훈, 고지용, 장수원의 4명과 김재덕, 이재진의 2명으로 입장이 갈렸을 것이다.

해체를 원하는 멤버가 다수였던 것은 맞지만, 은지원, 강성훈, 이재진, 장수원은 회사와의 갈등이 있었음을 밝혔다. 회사와의 불화는 과도한 스케줄이 원인으로, 젝스키스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멤버들이 반항도 하고 예전처럼 말을 안 따라주면서, 매니저와의 감정적인 대립과 갈등이 생겼다. 이 점의 대표적인 예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멤버들의 잠적 사건일 것이다. 이런 사건들 이후 더욱 관계가 나빠졌을 것이다. 물론 소속사가 과도한 스케줄을 잡은 것이 원인이었다고는 하지만, 멤버들의 잠적으로 인한 스케줄 펑크를 수습하고 복귀 후의 뒷처리를 하던 소속사 직원들도 화가 쌓였을 것이다.[16]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어머니 인터뷰의 뉘앙스상 계약서가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수익문제에 대한 갈등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세바퀴에서 회사가 핑클과 차별을 했냐고 질문했을 때 장수원은 즉답을 피하고 단지 회사와 갈등이 있었다고 했는데, 라디오스타에서는 '당시 소속사의 관심과 사랑이 핑클 쪽으로 옮겨가지 않았나 싶다'고 밝혔고, 강성훈도 이를 거들었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각자 하고 싶은 음악적 방향이 다른 문제도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 말고 이상적인 이유도 분명 있었다고 밝혔다. 훗날 방송에서 '언젠가는 우리가 헤어져야 될때가 온다. 하지만 인기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해체하는 것 보다는 최고로 잘되고 있을때 그만두자'라는 마음이 있었다고 발언했는데, 이를 방송용 멘트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7] 실제로도 정상에 있을 때 해체함으로써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는 16년후 재결합할 때 대중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것으로 증명된다.

해체에 대한 멤버별 입장을 정리해보면, 이재진은 지방으로 잠적해버려 해체 기자회견을 무산시킬 정도로 완강하게 반대했다. 김재덕은 해체에 반대하긴 했지만 이재진 만큼은 아니고, 해체로 결론이 나자 수긍하고 따랐다. 장수원은 속마음은 그렇게 해체를 하고 싶진 않았다지만, 자신이 반대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속마음 또한 적극적으로 반대를 주장할 정도는 아닌, 즉 해체를 원하지는 않았으나 이재진은 물론이고 김재덕보다도 확실히 해체 반대 의지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정상에 있을 때 내려오자는 입장으로 해체 찬성파였다.

여기까지는 멤버들의 증언이 있는 부분이다. 나머지 해체에 대한 정확한 일은 당사자만이 알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설령 당사자들을 모두 불러 앉혀 취조한다 해도,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기억하고 있는 당시 모습이 각자 다를 것이다. 아무튼 멤버들 발언 이외의 일은 추측이 들어갈 수 밖에 없고, 서로의 의견이 갈릴 수 밖에없다. 이 밑은 그에 대한 서술이다.

6.3. DSP 책임여부

6.3.1. DSP에 비판적인 입장

젝스키스는 지금까지도 갖고 있는 트라우마가 크게 3가지 정도가 있는데, 모두 H.O.T.와 관련있으며, 이에 대한 DSP의 책임도 적지 않다.
6.3.1.1. 저예산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가 저렴하기로 유명했다. 라이벌인 H.O.T.는 멤버들의 비주얼과 적절한 스토리를 조합하여 드라마틱한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반면[18], 젝스키스는 멤버들의 비주얼에 의존한 단순한 뮤직비디오가 대다수였고, 배경도 소속사 옥상이나 폐창고, 심지어는 노래방(...)에서 찍기도 했다.[19] 4집 활동 곡 '예감'이 그나마 스토리를 첨가한 뮤직비디오였으나 스토리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다.[20] 라디오스타에서 강성훈의 말에 의하면, "저희는 뮤직비디오에 한이 있어요" 데뷔곡이었던 학원별곡과 폼생폼사는 뮤비가 두 개씩 존재했는데, 퀄리티는 처참한 수준이고, 2집에서는 타이틀곡 기사도를 비롯한 그 어떤 곡도 뮤직비디오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4집 타이틀 곡 Com'Back은 진원석 영화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김규리(당시 김민선)를 주인공으로 섭외하여 나름 해외 촬영에 헬기까지 동원한 액션극으로 촬영했지만 공개되지 않고 4집 수록곡인 Summer in Love의 뮤비로 바뀌어 콘서트에서 공개돼버렸다.
6.3.1.2. 팬덤 동원력
DSP는 젝스키스 팬덤의 화력을 드림콘서트 기준(2000 제외)으로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젝스키스는 4차례의 대규모 콘서트를 진행했는데, 총 48,000석으로 2000 드림콘서트 때의 48,000명과 일치한다. 사실 H.O.T.의 팬클럽이 각종 콘서트에 수 만~10만 이상 단위가 올 때, 젝스키스 팬덤은 1만 명 정도 밖에 오지 못했다. 물론 1만 명도 적은 규모는 아니나, 이 규모마저도 H.O.T. 로 인해 늘 2위였다. DSP는 젝스키스 팬덤에게 앨범 판매량과 팬들의 숫자는 비례하지 않다는 핀잔을 대놓고 준 바 있으며, 2000년 드림 콘서트 때 김기영은 젝스키스 팬덤을 두고 평소에 이렇게만 왔어도 해체 안 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젝스키스 팬덤의 동원력이 해체 원인의 하나로 보여질 수 있으며, 젝스키스 또한 이러한 부분에 있어 압박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특히 팬덤 동원력은 최근 은지원(2016 콘서트 원래 1회만 하려 함, 장수원(2016 막콘에서 전성기 때도 올림픽체조경기장 채우는 것도 힘들었다고 발언)은 팬덤동원력에 자신이 없어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DSP의 미숙한 팬클럽 운영 및 관리가 책임이 크다. 그 당시 공개방송은 기획사에서 티켓잡고 팬클럽에 푸는 식이었는데, SM은 원래 비공식 팬클럽이었던 Club H.O.T. 를 공식 팬클럽으로 흡수하여 15만 명으로 확장할 만큼 체계적인 관리를 하였다, 반면에 젝스키스 팬덤은 DSP에서 제대로 주는 팬클럽 혜택이 없어 공식 팬클럽인 DSF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에 그 당시에 팬덤이 많았던 게장꿀타파, 백합질식파, 난향월태 등 수많은 개인 팬클럽에 의지했다. DSP의 실수는 SM처럼 그러한 개인 팬덤을 공식으로 못 끌여왔고 해체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DSF 4기를 뽑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식 팬클럽인 DSF가 운영되지 않았던 2000년 드림 콘서트 때 48,000명에 이르는 팬덤이 몰려들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6.3.1.3. H.O.T.와의 끊임없는 비교
김기영은 젝스키스를 두고 불우한 2인자라고 불렀으며,[21] 은지원의 발언에 의하면 회사에서는 50만 장을 판매해도 망했다고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러나 당시 50만 장도 적은 것이 아니고 중박 이상에 속하며 이 50만 장이라는 수치도 축소 혐의가 있는 수치이다. DSP는 1집 때부터 끊임없이 음반축소를 이행하였는데, 4집 판매량이 반토막났고 9월 이후 한 장도 안 팔렸다는 언플 등의 그 과정과 결과를 보았을 젝스키스가 기가 죽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음반 판매량을 지속적으로 축소 발표하고 중박 이상~대박의 성과를 두고 망했다고 몰아간 기획사의 책임은 무시할 수 없으며, 기획사의 이러한 행태는 젝스키스의 사기 진작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집이 망했다는 기준은 당연히 H.O.T.와의 비교일 수밖에 없다. 4집이 9월 한 달채 안 되는 기간에 7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달성한 것으로 볼 때, 최종적으로 최소 8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이 정도 수치는 대박에 속하는 수치이다. 음반판매량을 제대로 집계해도 H.O.T.의 음반판매량을 이기기 어려운 마당에 오히려 누락된 결과물을 접했을 때는 의욕이 꺾일 것이다.

다만, H.O.T.의 음반판매량은 절대적인 거대 팬덤 크기의 측면이 높지, 대중적인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H.O.T. 4집에서 1위를 한 곡은 I Yah! 한 곡으로 후속곡이었던 환희, 투지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반면 젝스키스의 후속곡이었던 예감은 조성모를 상대로 치열한 1위 다툼을 벌이면서 가요 프로그램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했다. 물론 이것은 젝스키스 팬덤이 조성모보다 거대했던 측면도 있으나, 예감이 대중적으로도 반응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봤을때 애매한 부분은 있었다. 대중성으로는 조성모를 따라갈수 없었으며, 팬덤의 규모로는 H.O.T.를 따라갈 수 없었다. 애당초 3.5집의 성공은 당시 마니아적인 팬덤이 아니라 엄청난 대중성을 확보했기 때문으로 4집의 대중성이 3.5집 만큼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22] 설령 젝스키스 4집의 판매량이 120만 장이 맞더라도 H.O.T. 조성모의 음반 판매량을 뛰어넘는 수치는 아니다.

이것이 부각됐던 게 재결합 후 라디오스타 출연 때였다. 이번에는 H.O.T.를 이길 수 있도록 양현석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에 MC들이 정확한 지적을 하였다. H.O.T.는 아직 재결합도 안 했고, 실체도 없는데, 무슨 이기고 지냐고... 이는 젝스키스가 아직도 H.O.T.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지만 이것을 H.O.T.와의 대립구도를 의식하고 있다거나 트라우마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해석이다. 이 발언을 한 것이 라디오스타라는 예능프로이며, 이재진이 이 발언을 했을 때 다른 멤버들이 모두 쓰러져 웃은 것으로 보아 그냥 예능성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재결합 이후 젝스키스는 여러 인터뷰에서 '현재 진행형' 아이돌임을 꾸준히 강조하며 앞으로의 활동을 더욱 기대해달라 부탁했다. 기사링크1 "예전에는 반짝 스타가 강했다면 요즘 아이돌 그룹들은 장수하는 편이에요. 빅뱅도 10년 넘게 정상을 차지하고 있고 엑소 같은 친구들도 오래 함께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토대로 저희 역시 저희가 해왔던 노하우를 접목 시켜서 현재진행형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실제로 멤버들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면 H.O.T.도 컴백해서 다함께 콘서트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등 지금은 각 팀의 멤버가 서로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니안과 김재덕이 동거하며 아끼는 사이인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고, 문희준과 은지원 또한 같이 목욕탕에도 가는 사이라고 한다. 히든싱어 강타 편에서는 패널로 은지원과 강성훈이 출연하여 같이 노래방에도 가며 강타가 젝스키스의 최고 힛트곡인 커플을 부르기도 했다고 밝히기도 하는 등 서로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3.1.4. 젝스키스 4집의 인기가 하락했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반대 입장은 어느 유저의 글을 링크하면서 1999년에 H.O.T. 4집과 젝스키스 4집이 뮤직뱅크에서 맞붙었고, H.O.T.가 압승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명백한 악의적인 왜곡이다. 우선 1999년 H.O.T.는 4집 활동에서 음악캠프 인기가요에만 출연했기 때문에 뮤직뱅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또한 발매 시점도 젝스키스가 H.O.T.보다 2주 앞섰다. 그리고 H.O.T. 4집의 인기가요 첫 1위 날짜는 10월 3일이다.

젝스키스는 컴백 활동으로 인기가요에서 9월 12일, 9월 19일, 9월 26일 3주 연속 1위를 달성하면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서 자동 차트 아웃하였다. 즉, H.O.T. 4집 타이틀곡인 아이야가 인기가요에서 1위를 달성한 시점은 젝스키스가 트리플 크라운 달성 이후이기 때문에 두 팀은 맞붙은 적이 없다.

그리고, 이후에도 두 팀은 맞붙은 적이 없다. 11월에 H.O.T.의 후속곡 투지의 경우 sbs와 소속사간의 마찰로 sm소속가수들이 sbs에 출연을 거부하는 바람에 인기가요에 출연하지 않았다. 1999년 당시 두 팀의 국면을 국민일보 10월 초 기사에서는 젝스키스가 데뷔 초에는 H.O.T.와 100만 장 가량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라이벌이라 불리기에 부족했으나, 컴백 활동으로 40만 장으로 좁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10월 초 기사에서 언급한 H.O.T.의 판매량은 9월의 판매량을 의미하며, 9월 H.O.T. 4집의 판매량은 1,100,000만 장이었다.
반대 입장은 일간 스포츠의 양일간 60만 장, 스포츠 투데이의 2주차 70만 장이라는 보도에서 과장된 부분이나 언플로 점칠된 부분을 끝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결국 반대 입장은 6, 70만장을 보도한 언론이 아닌 다른 언론으로 음반판매수치 과장을 보도한 뉴스를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정작 그 뉴스에서는 젝스키스라는 그룹명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반대입장은 근거로 제시한 뉴스에서 음반판매 과장의 대상으로 지목된 핑클이 젝스키스와 같은 회사라는 이유로 젝스키스 역시 과장이 있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같은 회사라고 해서 젝스키스 역시 과장이었다고 볼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이러한 논리 구조는 전형적인 삼단논법의 오류이다. 2, 4주차 70만 장이라는 수치가 언플의도가 있었다면 2주와 4주치 음반판매량이 같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핑클처럼 계속 부풀렸을 것이다. 또한 길종화처럼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단순히 언론이 과장한 것 뿐이라고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일관했을 것이나,[23] 젝스키스 4집 판매고에 대한 공식입장은 젝스키스의 인기가 하락했고, 반품이 엄청난 게 주원인이라는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러나 젝스키스 4집의 반품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호 기자의 보도 외에도 당시 여러 음반사이트에서 젝스키스의 음반판매량이 12월에도 2, 3위에 집계되어 있다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정 젝스키스 4집이 반품이 있었다고 보고자 한다면 그 근거를 대길 바란다. 반대입장은 이상호 기자가 왜곡 보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전체적으로 문제 삼는데 이 역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이자, 삼단논법의 오류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추측보다는 직접적인 근거를 갖고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이호연이 받은 무혐의 무죄가 아니다.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일 뿐이다. 이호연은 이미 경찰조사 단계에서 젝스키스 멤버의 부모들에게 수천만원씩 전달에서 경찰이 조사에 난항을 겪은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애시당초 세무조사는 음반판매량 축소 의혹과 팬클럽 비용 착취가 그 대상이었다. 이상호 기자가 이 사안을 굳이 언급 않더라도 위의 두 개가 세무조사의 주대상이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 젝스키스 4집은 음반판매량 3위 무리인가?

우선 반대입장이 신뢰하는 한겨레 보도에서 젝스키스가 조성모와 H.O.T.보다 뒤쳐져있다는 주장의 진위를 알아보자. 이 주장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9월 한 달동안 젝스키스 4집이 35만 장 팔렸다는 것이 주요 전제이며 그 원인은 팬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이전보다 하락했다는 것이다. 한겨례 보도상 팬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지 않다는 것은 9월 한 달 판매고가 35만 장이라는 것이 전제이다. 젝스키스가 4집에 이르러서 인기가 하락했다는 한겨례의 보도는 김기영이 해체원인 중 하나로 주장한 인기하락과 일치한다. 주지하듯이 김기영은 젝스키스의 전담 매니저였으며, 젝스키스와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인물이다. 주지하듯이 1999년 젝스키스 공식판매 순위는 16위로 35만 장이다.

15위- 룰라/기도: 38만 장
14위- 신화/TOP: 38만 2천 장
13위- 박지윤/가버려- 38만 5천 장
12위- 김건모/부메랑: 45만 장
11위- 임창정/러브어페어: 48만 장
10위- 김민종/비원: 48만 7천 장
9위- 양파/아디오: 49만 장
8위- 이승환/그대는 모릅니다: 53만 7천 장
7위- 엄정화/몰라: 54만 3천 장
6위- 김현정/ 되돌아온 이별: 57만 장
5위- 핑클/ 영원한 사랑: 60만 장
4위- S.E.S./LOVE: 65만 장
3위- 유승준/ 열정: 81만 9천 장
2위- H.O.T./아이야: 140만 장
1위- 조성모/슬픈 영혼식: 200만 장

이 집계대로면 젝스키스의 인기는 1997~1998년에 비해 형편없이 추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DSP는 젝스키스의 인기하락이 해체의 주원인이었음을 언론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언론에서는 젝스키스가 인기 절정에 해체했다고 표현하였다.

1999년 하반기 당시 젝스키스가 음반판매량에서 다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H.O.T. 조성모와의 접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두 가수와의 비교일 뿐 다른 가수보다 못하다는 근거는 오직 축소혐의가 짙게 반영된 위의 음반집계일 뿐이다. 객관적인 4집의 성과를 보자. H.O.T.의 경우 9월18일 콘서트에서 문희준이 추락사고로 허리부상을 당해 약 2주간 방송 컴백이 미뤄졌다가 10월2일 MBC 음악캠프로 방송활동이 시작되었고 SBS 인기가요에는 10월 3일 컴백과 동시에 1위를 하였다. 젝스키스 4집은 8월 29일 SBS 인기가요로 방송활동이 시작되었고, KBS 뮤직뱅크에서는 8월 31일 컴백과 동시에 1위를 하였다. 컴백과 동시에 1위를 달성한 것은 젝스키스가 시기적으로도 H.O.T. 보다 앞섰으며, 이러한 기록은 젝스키스가 최초이다.

그리고 젝스키스는 조성모와의 지상파 1위 다툼에서는 치열한 접전 끝에 근소하게나마 우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후속곡인 예감은 언론에서도 컴백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파악하였으며, 예감 활동 당시 무려 삼성에서 젝키폰을 계약할 정도였다. 그리고 젝스키스 4집은 12월에도 꾸준히 음반사이트에서도 순위 2, 3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판매량이 좋았으며, 도매상들도 젝스키스 4집의 반품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젝스키스 4집은 1999년 단일 앨범으로 지상파 1위 횟수가 11회로 전체 2위에 해당되며, 1999년 전체로는 지상파 1위 횟수가 16회로 전체 1위이다. 젝스키스 4집은 인기가 하락되었다고 볼 근거가 전무하며, 오히려 다방면에서 젝스키스는 자신들의 신기록을 갱신하였다. 이러한 객관적인 정황에 DSP의 축소 의혹이 강하게 반영된 35만 장이나 50만 장을 신뢰해야 할 이유가 없다. 반대입장은 젝스키스 4집 판매량이 이틀만에 60만 장, 2주차에 70만 장, 4주차에도 70만 장으로 시간적 흐름에 자연스럽게 부합한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젝스키스 4집 4주차까지의 판매량초반 2주 동안 팬덤으로 인한 폭발적인 판매량과 그 폭발세가 멈춘 이후 2주간의 정체기반영한 것이다. 즉, 이는 사실에 부합하는 음반판매량인 것으로 젝스키스 4집은 충분히 3위에 들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절대 무리가 아니다. 요컨대 객관적으로 젝스키스는 1999년 4집 활동에서 자신들의 기록을 다방면으로 갱신하였다. 그리고 지상파 가요프로그램에서는 주로 같은 1위 후보였던 조성모를 상대로 우위를 확보하였다.

또한 반대입장은 젝스키스가 1999년에 등장한 다른 가수들보다 음반판매량이 앞설 리가 없다고 재단하였다. 15위부터 3위까지 혹은 8위부터 3위까지의 음반판매량 순위에 든 가수들보다 젝스키스가 높을 리가 없다는 판단에 대한 근거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 가수들을 대박가수니 명곡이니 지칭하면서까지 젝스키스를 그들보다 낮게 보면서 정작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위의 1999년 음반 순위를 반대입장의 신뢰수치인 50만 장의 기준으로 8위부터 3위까지의 가수들을 보자.

1999년 젝스키스 음반판매량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대중적인 인지도와 팬덤의 크기가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보다 낮다고 볼 수 있는가? 주지하듯이 젝스키스 당시의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의 기준은 음반판매량이 절대적이며, 본상은 그해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들을 선발하며,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에게 대상을 수여한다. 위의 순위에 든 가수 가운데 1999년 당시 이 시상식에서 본상을 수상한 가수는 엄정화, 김현정, 핑클, SES, 유승준, H.O.T., 조성모 그리고 젝스키스 밖에 없다. 최종적으로 젝스키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식적으로 55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만일 젝스키스 4집이 35만 장이나 50만 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렸다면 상기한 가수들과 나란히 본상을 시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젝스키스 4집의 판매량이 컴백 활동만으로도 70만 장의 판매고를 달성했다는 기사를 신뢰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한 가수 가운데 1999년 지상파 1위 횟수는 젝스키스가 가장 많았다. 1999년 젝스키스 4집 활동의 성과에 비추어 볼 때 35만 장, 50만 장, 85만 장 이상 중에 어느 것이 4집의 판매고에 부합할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젝스키스는 1999년 당시 조성모를 상대로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반대입장은 한겨례의 보도가 다수의 보도들에 수치에 비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직접적인 근거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젝스키스가 H.O.T., 조성모에 비해 음반판매량이 저조하다고 해서 다른 가수들보다 인기나 판매량에서 저조했다고 볼 근거는 한겨례의 9월 판매량 35만 장과 최종 판매고가 35만 장이라는 집계일 뿐이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그 35만 장이라는 수치는 축소혐의가 짙다. 그리고 일간 스포츠와 국민일보, 스포츠 투데이에는 발매 4주차까지의 예감 활동 이전에 7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50만 장은 젝스키스 3집보다 20만 장이나 낮다. 그러나 젝스키스 4집은 3집보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4집의 성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겨례의 보도와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이었다. 한겨례의 보도를 맹신할 수 있는가?

여러 면에서 자체 기록을 갱신하여 객관적으로 최대치의 성과를 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H.O.T. 보다 음반이 덜 나갔다고 망했다고 몰아가는 DSP를 정상이라고 볼 수 있는가? H.O.T. 의 반이라도 투자라도 했는가? 드라마형 뮤직비디오는 H.O.T. 말고도 유승준, 조성모 등 이미 98년무렵부터 일종의 유행이 시작되었다. 물론 젝스키스도 뒤늦게나마 99년에 시도를 했지만 그 퀄리티는 턱도 없이 낮았다. 또한, 팬덤 문제는 김기영이 해체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음을 푸념하였다. DSP는 팬클럽 관리를 잘 하지도 못했으면서 평소 많이 오지도 않았다면서 팬덤의 탓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이 오지도 않았다는 팬덤의 규모도 거의 기본 1만 명으로 H.O.T.에 이어 두번째로 큰 규모였다.
6.3.1.5. DSP와의 결별 과정
원래 젝스키스는 해체가 아니라 DSP와의 결별을 원했다는 이재진의 발언, 타회사의 6인 전원 이적 제의, 해체 이전 은지원과 강성훈 듀엣 논의, 듀엣은 회사와의 합의라는 은지원의 발언, 나가고 싶어도 마음 대로 DSP를 나갈 수 없었다던 은지원의 회고 모두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를 종합해서 볼 때 젝스키스는 회사와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아 이재진의 발언처럼 처음에는 회사와의 결별을 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적 시도에 대해서는 이재진 외에 언급한 멤버는 없지만, 언급이 없다고 해서 이것을 이재진이 거짓말한 증거로 볼 수는 없다. 이재진은 분명 우리가 원래 원래 원했던 것은 해체가 아니라 회사와의 결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은 우리를 멤버의 일부일 것이라고 단정하나, 그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오히려 문맥상 일부가 아닌 전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른 멤버들이 이재진이 언급한 '이적 시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이재진의 발언을 신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반대 입장은 이재진의 이적 시도 발언이 사실이라면 방송에서 언급했을 법도 하나, 그렇지 않음을 부정의 논거로 든다. 그러나 이적 시도를 언급했던 당사자인 이재진도 이후 방송에서 이적 시도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았으며, 다른 멤버들도 굳이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반드시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당위성도 없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그림을 보고 싶을 뿐이므로 지나친 추측은 지양해야 한다.[24]

분명한 팩트는 이재진이 우리는 원래 회사와의 결별을 원했다고 언급한 것이다. 즉, 젝스키스의 단체 이적 시도가 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일부 멤버라는 추측이 근거없이 미리 내려놓은 결론에 입각해서 판단한 자의적인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지원이 해체를 생각한 계기는 회사가 망했다고 몰아간 것이 계기이고 그 시점은 가족과 DSP에 의하면 1999년 연말 시상식 즈음이다.

이 두 사안은 별개로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이재진의 발언에 의하면 이적 시도의 주체는 우리이며, 은지원이 언급한 해체 원인에서 해체를 가장 먼저 거론한 멤버는 은지원 자신이다. 주체(우리와 은지원)와 논의(이적과 해체)가 다르다. 따라서 당연히 두 사안이 거론된 시기 또한 별개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엄연히 주체와 논의가 다른 사안을 굳이 근거없이 엮여서 보려고 하니, 모순투성이고, 억지로 맞추려다가 자의적인 추측이 생기는 것이다. 시기가 다르므로 당연히 사건의 선후관계는 분명히 해야한다. 여기까지가 팩트이다. 따라서 본 입장에서는 이러한 팩트를 전제한 후에야 젝스키스의 이적 시도가 해체 논의 이전에 있었다고 추측한 것이다.

한편, 젝스키스의 이적 시도는 여의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재진의 발언이 재조명 되는 이유는 젝스키스는 계약서 없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정식 계약서 없이 활동했던 이른 바 구두계약이었다. 기획사에서 젝스키스의 상표권을 신청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만약에 멤버들의 의지로 어느날 갑자기 훌쩍 다른 기획사로 6명이 모두 이적해 젝스키스로 활동을 이어갔을 경우 법적으로는 애초에 계약서가 없으니까 회사측은 계약기간 문제나 젝스키스의 이름을 사용하는 문제 등에서 클래임을 걸 수가 없었을 것이라 한다.

즉 법적으로만 보면, 해체를 하지 않았으면 회사를 옮기든 독립 회사를 차리든 해서 젝스키스가 활동하는데에 법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실제 실행했다면 이적료 문제에 난항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해체를 원하는 멤버도 있었는데, 당시 부모님들 인터뷰를 보면 타 소속사의 영입 조건은 6명 전부 옮기는 것이어서 어려웠다고 한다. 물론 계약서가 없으니 법적으로는 이적료 없이 옮겨버릴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이호연이 가만히 두고봤을리 없고, 아마 이수만이 jtL 막아버렸듯이 방송활동을 다 막았을 것이다.

상도덕상으로 봐도 방송가에서 젝스키스 쪽을 탓하며 이호연 편을 들어줬을 것이다. 사실 이재진이 소속사 변경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하더라도, 냉정하게 어떤 소속사가 이걸 들어줄지 의문이다. 오래된 그룹도 아니고 3년 활동한 그룹을 말이다. 아무튼 현재는 계약서가 없는 덕분에 재결합과 관련하여서 전 소속사의 동의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2000년 당시에는 20대 초반의 인기 절정이었을 때니 이적료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16년이나 지난 지금 와서는 계약서가 없는 마당에 이적료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병신 짓일 것이다. 참고로 소속사 후배였던 클릭비는 당시 클릭비 팬들의 아우성으로 계약서를 작성해 활동 했으며, 결국 재결합은 다시 소속사로 돌아와서 했다. 21세기에도 소속사와 아이돌 그룹의 관계가 그렇지만, 20세기는 아이돌 그룹을 키운 소속사가 해당 아이돌 그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행사한 시대였다. 해체 이유에 대해 일각에서는, 일부 멤버가 소속사와 결별을 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젝스키스라는 브랜드를 타 소속사에서 못 쓰게 하기 위함+멤버들의 사후 연예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도 했다.

결국 연말 즈음에 은지원을 필두로 하는 정상에 있을 때 해체하자는 해체파와 이재진을 필두로 하는 해체 반대파가 나뉘어졌으나, 4:2 과반수로 해체하기로 합의되고 마지막 콘서트를 진행하였다. 한편, 해체 논의와 듀엣 논의는 동시에 행해졌는데, DSP는 은지원과 강성훈만 남을 것을 요구하였고, 이 때문에 이 즈음에 있던 타소속사의 이적제의도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0년 젝스키스는 5월 18일 해체를 선언하였고, DSP는 해체 당일 은지원과 강성훈 듀엣을 언론에 일방적으로 내보냈다. 해체 직후에 은지원, 강성훈은 듀엣을 하기로 하고 이재진은 안무가 및 프로듀서, 김재덕은 작곡가, 고지용은 학업에 충실, 장수원은 DSP 잔류 여부를 분명히 결정 하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적어도 8월 이후 은지원, 강성훈은 듀엣 제의롤 거절했고 김재덕, 이재진도 DSP를 완전히 나온 것으로 보인다.

6.3.2. 위 비판의견에 반박하는 입장

6.3.2.1. DSP와의 결별 과정 - 소속사 이적 시도는 이재진 개인의 입장이었음
이건 입장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위 의견은 명백히 거짓말을 써놓았고, 이는 허위루머 유포에 해당한다

젝키 팬덤 측은 2000년대부터 강제해체 당했다는 루머를 매우 많이 퍼뜨렸는데, 멤버 본인들이 수차례 강제 해체가 아니라고 밝힌 상황이다 보니 그 행동을 계속 하는 것이 우스운 꼴이 됐다. 이에 방향을 바꾸어 저런 식의 사실 왜곡으로 해체 이유를 퍼뜨리는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속사를 옮겨서 젝스키스를 계속 하려고 했다'는 입장은 이재진 개인 입장이지 멤버 전원의 입장이 아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 방송에서 수없이 해체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재진 외에 그런 발언(다 같이 어느 소속사로 이적해 젝키를 하려고 함)을 한 멤버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젝스키스를 계속 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 의견을 가졌었다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더 떨어지기 전에 해체를 해야지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는 격이 된다고 했으며, 은지원은 젝키 시절 자신이 하고 싶던 음악과 전혀 맞지 않아 힘들었음을 밝히기도 했었다. # 젝스키스를 계속 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 입장인데 어디서 "소속사를 옮겨서 젝키를 계속 하자"는 의견이 멤버 전원에게서 나오겠는가.

물론 이재진이 '우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전술한 멤버들의 발언을 봤을 때 다수는 아니었다. 위 비판 입장은 이에 대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말아야 하며 '우리'는 멤버 전원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오히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 이런 논의를 일으킨 것 자체가 위 팬들 입장이다. 엄연히 젝키를 계속 하는 것에 부정적 발언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우리"를 멤버 전원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 위 팬들 입장이야 말로 근거없이 엮여서 보려고 하니, 모순 투성이고, 억지로 맞추려다가 자의적인 추측이 생기는 것이다.

팬덤의 이런 행동은 '젝스키스 멤버들은 해체에 책임이 없으며, 소속사가 젝키를 강제해체 시킨 것이다'는 결론으로 어떻게든 짜맞추려 하는데서 출발한다고 보인다. 이런 식의 믿음은 해체 당시 조영구 차를 파손하는 등의 소동으로 잘 나타난다. 훗날 멤버들이 당시 상황에 대해 털어놓았고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팬들은 여전히 강제해체 당했다는 식의 글을 인터넷에 퍼뜨리고 욕설까지 한다. 2016년만 해도 그런 글들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이재진이 2005년에 한 한마디인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좀 많은데 나한테는.. 가깝게는 우리가 해체했을 때.. 원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해체가 아니었고, 회사와의 결별이었는데 회사에서 해체를 시켜버린 거지."라는 말에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재진의 이 말 자체가 다른 멤버들의 발언과 상충된다. 전술한 다른 멤버들의 수많은 발언들을 보자. 분명 다른 멤버들은 해체를 하자고 제안을 하고 그것에 동의를 했으며, 회사가 해체를 시킨 것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다. 이렇게 다른 멤버와 상충되는 발언 하나를 두고 저런 추측을 사실로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시 한번 상기할 점은, 이재진이 혼자 유독 심하게 해체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이재진 혼자 지방으로 잠적하는 바람에 해체 기자회견이 한달 미뤄졌는데, 그 사실을 나머지 멤버들은 2016년 무한도전 촬영일까지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날 무한도전을 보면 이재진의 이 발언 이후 은지원은, '이재진 없었어도 이재진 빼고 해체 기자회견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재석이 곧 '그게 네가 할말이냐. 분위기 좀 잡자고.'라고 말하며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긴 했다. 하지만 뼈있는 농담이었다고 보인다. 뼈가 있는 말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릴 것 같은데, 각자 보고 판단하기 바란다. 160416일자 편의 40분 경이다.

게다가 부모 입장도 마찬가지로 갈렸다. 이 문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재진 부모는 "해체하면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는 말까지 하며 해체를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부모들은 해체하려면 빨리 해체해달라고 회사에 요구하는 상황이었다(이는 냉정히 말해, 집안 빈부격차에 따른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재진이 끝까지 해체에 동의하지 않으며 나머지 멤버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던 점은 위 2016년 10월 17일자 신문 인터뷰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

2015년, 2016년 방송에서도 매번 해체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데, 만약 위 의견이 사실이라면 멤버들이 그런 얘기를 했을 것이다. 내용 자체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소재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한 멤버는 없다.[25]

은지원과 강성훈이 계속 남아달라는 DSP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해서, 이재진의 입장과 같다고 볼 수는 없다.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 거절한 시점은 이미 해체가 확정된 혹은 거의 결정된 상태였다. DSP가 그 제안을 한 시점에 이미 나머지 4명 멤버들은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성훈과 은지원이 이후 솔로를 할 생각으로 DSP 제안을 거절했지, 젝스키스를 계속 하려고 DSP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6.3.2.2. 무조건 소속사 탓으로 돌리는게 맞는가?
위 비판 의견은 회사에서 4집이 망했다며 해체로 몰아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은지원이 이어서 한 말을 보면, 회사의 말에 화가 나 자기가 욱해서 해체로 나아간 면이 있다고 밝혔다. 무한도전에서는 그 말을 하기 전에 "어린 나이에 회사에 불만이 좀 많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 위 의견은 저런 회사의 발언 때문에 강제해체를 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뉘앙스의 말인데, 그렇게 몰고갈 건수가 아니다. 99년 9월 젝스키스 H.O.T.가 4집을 동시에 내며 맞붙었는데, 당시 H.O.T.한테 밀린 것은 맞기 때문이다. 젝스키스의 탄생한 이유 자체가 H.O.T.때문이었고, 데뷔 전 연습생 때부터 벽에 ‘타도 H.O.T.’를 붙이고 있었다. 데뷔 이후에는 H.O.T.가 휴식기에 들어갈 때 젝키는 휴식기 없이 바로 앨범을 연달아 내며 쫓아갔다. 해당영상 6분 20초부터 그렇게 해서 3.5집 커플로 처음 H.O.T.를 이겼고, 소속사도 H.O.T.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기를 가졌고, 그 사이 잘나가는 프로듀서를 섭외해 4집을 공들여 준비해서 H.O.T. 4집과 정면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니 다시 격차가 벌어졌다. 소속사로서는 힘이 빠질 수 밖에 없고, 망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멤버들이 20대 초반 애들이니 소속사에서 그럴수록 기를 살려줘야지, 왜 망했다는 반응을 보였냐고 탓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를 살려줬으면 칭찬 받을 일이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소속사에 해체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기획사도 엄연히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다.

"만약 소속사에서 4집 흥행에 대해 멤버들에게 아무 말 안했으면 해체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랬으면 해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해체에는 멤버 개인의 의지, 빈부격차 등 여러 이유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목차들을 참고.
6.3.2.3. 젝스키스 4집의 인기는 이전에 비해 하락했다고 볼 수 있다

위 의견은 젝스키스의 4집 인기가 이전에 비해 하락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그에 대한 각종 논거를 댄다. 그러나 하나씩 따져보면 논리에서도 팩트에서도 잘못된 점이 많다.

1999년 9월달 가요계 격돌에서 젝스키스가 H.O.T.에 확연히 밀린 점은 당시 언론 기사에서도 확인이 된다. (기사) 조성모는 20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고 H.O.T.도 140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는데, 젝키는 뒤로 밀려 주춤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소속사로서는 실망스러울만 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어느 커뮤 유저가 증언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링크 또한 당시 H.O.T.와 젝키가 가요프로에서 맞붙으면, 인기의 척도인 ARS 투표에서 너무 심하게 차이가 벌어지며 젝키가 졌다는 글이 있다. 링크 위 의견에 따르면 젝스키스 갤러리에 올라온 해당 글은 사실관계가 잘못됐다고 한다. 하지만 일정 시기에 직접 맞붙은 적이 없을 뿐, 음반판매량 ARS 수치 등에서 크게 밀렸다는 것이 팩트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DSP가 젝스키스를 망했다고 몰아갔다’고 써놓으며, 과장되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사실관계를 호도하고 있다. 이런 서술의 목표는 ‘젝스키스는 불쌍하게 강제해체 당한 것이다’는 허위루머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함에 있다고 보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최대 이윤이 목표인 기업 입장에서 실망스런 성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위 주장은 명백히 신뢰성이 부족한 수치를 사실인 마냥 왜곡하고 있다. 젝키의 4집 판매량이 실제로는 80만장이라면서, 멤버들이 증언한 50만장도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근거라고 드는 것이 젝키의 컴백 직후 나온 홍보 목적의 언플 기사인데, 이는 전혀 믿을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언론 기사로 판매량을 과장하는 문제는 지상파 뉴스에서도 문제가 다뤄질 정도였다. 영상 영상에서 문제된 가수 중 하나가 핑클인데, 핑클은 젝키와 같은 소속사였다. 젝키 역시 같은 식의 언플을 해줬을거란 근거가 된다. 위 의견이 들고온 기사 원문을 읽어보면, 오늘날 시각에서는 유치할 정도로 홍보 목적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뉴스에서 젝스키스가 직접 언급이 안됐다'며 자료 자체를 부정하는데,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한 판매량 과장이 만연했다는 팩트는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즉 단순히 홍보성 언론 기사의 수치로 판매량이 80만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공식 판매량은 30만장이고, 멤버 본인들의 증언조차 50만장으로 80만장에 턱없이 못 미친다. 위 의견의 논리대로면, 젝키 말고 다른 가수들도 자기 판매량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하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외 해당 뉴스 방영 날짜가 1999년 6월 말로 젝스키스가 몇개월이나 휴식기에 있던 시점이었다. 젝스키스가 아닌 당시 활동하고 있는 가수를 대상으로 보도하는 것은 이상할게 전혀 없는 부분이다.

이상호 기자의 당시 보도의 경우, 무혐의 처분이 나왔다는 사실이 해당 보도의 신빙성을 깨뜨릴 수 있다. 그 내용대로면 처벌이 당연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상호 기자는 나무위키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이후에도 수차례 왜곡 보도를 한 바 있다. 다른 신빙성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회사 측에서 부모에게 수천만원을 전달한 것을 무슨 악행마냥 서술해놨는데, 앞뒤 사실관계를 보면 다툼이 있던 정산 금액을 지급한 것이다. 이전 언론보도에서는 콘서트 비용을 못 받았다고 부모가 증언하는데, 경찰조사 결과는 받은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반품 문제의 경우도 회사 측에선 분명 반품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위 주장은 이상호 기자가 반품이 없다 했다고 항변하는데, 무혐의 처분이 나왔으며 당시 이상호 기자의 여러 발언들이 거짓말로 밝혀진 상황에서 그의 말을 무작정 진실로 주장하는게 맞는가? 그 보도를 봐도 몇몇 음반 판매상의 인터뷰를 따온 것일 뿐이다. 그걸로 반품량이 없다 단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실무에서 앨범 판매량 집계방식을 봐도, 주요 음반 유통사의 국내 출하량에서 반품량을 제외한 수치를 기준으로 집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오히려 반품이 없는게 비정상적인 상황인 것이다.

당시 경찰 조사 결과 무혐의가 나온 것을 두고 "무혐의는 무죄가 아니다.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일 뿐이다."라고 반박해놨는데, 이는 법률 지식 없이 사실을 왜곡한 수준이다. 무죄와 무혐의 둘다 피의사실이 범죄를 구성하지 않거나,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경우에 성립하게 된다. 결국 범죄로 처벌되지 않는다. 큰 차이점이라면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서, “무혐의 처분”은 검사가, “무죄 판결”은 판사가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마치 뒤가 구린데 빠져나온 것 같은 서술을 하는 것은 사실왜곡 수준이다. 오히려 검사가 법정에서 논의를 해 볼 가치도 없다고 판단해서 사건을 그대로 종결해버린 것이니 무죄 판결보다도 확실한 무죄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경찰관의 답변은 이렇다. # # 여기 젝스키스 팬이 작성해놓은 글에서도 법률지식 없이 무작정 회사와 이호연을 비난하고 있다.[26]

80만장이면 99년도 음반판매량 중 3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기사 수많은 명곡과 히트친 가수들이 쏟아져 나온 99년도에, 젝키 4집이 3위에 해당할만큼의 위상이었나? 절대 다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위 의견은 젝스키스가 99년도 3위에 해당하는 가수임을 외치며 각종 자료를 끌고 오는데, 그런 식의 자료라면 다른 가수들에게도 그대로 통용된다. 해당 차트에서 젝키 위에 있는 가수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지 않았는가? 그들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위 의견을 반박할 간접적인 증거 자료로, 해체 이후 DSP를 나와서 솔로 음반을 발매했을 때의 성적을 들 수 있다. # 은지원은 약 9만장, 제이워크는 약 12만장, 강성훈은 약 13만장을 팔았다. 설마 이것도 DSP가 조작했다고 말할 것인가? 물론 솔로 활동은 그룹에 비해 판매량이 낮아지기는 하지만, 위 의견의 주장대로면 솔로 음반만 말도 안되게 판매량이 폭락한 것이 된다. 그것보다 위 의견이 주장한 수치가 과장됐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인 황선업 음악 평론가는 당시 H.O.T.와 젝스키스 중 젝스키스의 팬이었다고 인증하면서도, 4집에 대해서 만큼은 부정적 의견을 냈다.

조악하다는 평에 대해 동의했는데, H.O.T.가 작곡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시도하긴 했지만 아티스트로서의 역량이 모자랐다고 평했다.

또한 음반판매량 축소 문제의 경우, 당시 자신의 경험상으로는 축소가 아닐 수도 있다 생각했다고 발언했다. 당시 강남 우성상가의 음반매장에 방문했는데, 젝스키스 4집은 진작에 구입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게 주인 아저씨가 자기한테 "젝스키스 4집 이만큼이나 가져다 놨는데 한장도 안 나간다. 어떻게 된거냐.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반품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론은 이것이다. 젝스키스는 인기가 많은 그룹이었지만 팬들의 과장이 심하다. 젝스키스 해체 후 솔로 음반 판매량을 봐도 그렇다. 4집 공식판매량인 35만장은 축소신고 되었다고 볼 여지가 없는건 아니지만, 멤버들이 직접 증언한 50만장이 거짓말이라면서 실제로는 80만장 판매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6.3.2.4. 젝키 팬덤은 왜 이렇게 강제해체 당했다는 루머에 집착했는가
2016년 젝키의 재결합 이후 각 유명 사이트에 젝키가 강제해체 당한 것이라는 루머 글이 수없이 올라왔다. 마치 아이돌 팬의 영업글 마냥 조직적이기 까지 했다. 그러나 젝키 본인들이 방송에서 수차례 강제 해체가 아니라고 답한 상황이다. 2005년 이재진의 발언도, 2016년 5명 멤버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해체에 대한 인터뷰를 함으로써 의문이 풀렸다. # 이에 강제해체에 대한 집착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관련 나무위키 문서를 단체로 몰려와 훼손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문서훼손을 이유로 관리자에 의해 편집제한이 걸리자, 토론으로 넘어와서는 수많은 다중계정을 사용하며 해당 내용을 지우려 했다. 토론에서 다중계정을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여론 호도로서 영구차단 사유다. # # #

생각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은지원과 관련한 문제다. 젝키 해체 이후 일부 팬덤은 은지원을 해체의 주범으로 몰며 "은지원 빼고 젝키 사랑해" 같은 말머리를 조직적으로 달 정도로 공격했다. 은지원도 인터뷰에서 자신이 젝키 해체의 주범으로 몰리며 욕을 많이 먹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은지원이 해체에 찬성한 멤버이긴 하다. 이에 은지원을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강제해체 당했다는 루머를 어떻게든 유지시키려고 한 것 아닐까. 은지원은 젝키 멤버 중 가장 많은 팬덤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머를 만들고 온갖 욕설을 한 것이 이러한 이유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다른 어떠한 이유라도 그런 행동이 옹호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은지원이 말한 해체 이유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누구를 탓하고 저주하며 싸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은지원은 해체 이유 중 하나로 "젝키와 음악적 방향이 달라 힘들었음"을 뽑았다. 이는 변명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였다. DSP 이호연 사장은 하와이에 있던 은지원과 강성훈에게 힙합 듀오를 만들어 데뷔 시켜주겠다며 한국으로 데려왔다. 인생의 기로에 서 있는 10대 후반 나이에, 하와이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가수 데뷔에 올인하는 것은 매우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호연 사장은 갑자기 말을 바꾸어 6명 멤버의 아이돌 팀으로 데뷔시키겠다고 하였다. H.O.T.의 성공을 보고 트렌드가 바뀌었음을 인지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은지원과 강성훈 입장에서는 황당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강성훈은 2명 아니면 회사 나가겠다고 강하게 반발하기까지 했다. 이에 젝키 활동 중 음악적 방향이 안 맞아 힘들 수 밖에 없었고, 애초에 말을 바꾼 것은 이호연 사장이다. 그렇다고 이호연 사장을 비난하기 힘든 것이, 만약 이호연 사장의 그런 결단이 없었다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젝스키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이 흘러간 것이지, 누구를 욕하고 저주할 문제가 아니다.

기타 언급한 해체 이유도 일리가 있다. 매니저와의 감정적 대립, 회사와의 불화가 실제로 있었다고 증언했고, "언젠가는 우리가 헤어져야 될때가 온다. 하지만 인기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해체하는 것 보다는 최고로 잘되고 있을때 그만두자"라는 발언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다. 젝키가 16년이나 흘러 재결합 했는데 이런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인기가 떨어져 해체한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화려하게 내려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6.3.2.5. 일부 멤버들의 그룹 활동 의지 결여 및 빈부격차
사실 냉정히 말해 인기 멤버들의 솔로 욕심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젝키와 음악적 성향이 달라 힘들었다는 내용은 전술한 바와 같이 멤버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몇번 있다.[27] 현실적으로 말해 수입 면에서도 멤버별로 6분의1로 나누면 파이가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솔로를 하면 자기가 다 먹을 수 있었다. 이는 훗날 여러 아이돌들의 해체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해왔다.

당시 소속사와 갈등이 있었던 점은 맞지만, 각자 하고 싶은 음악적 방향과 솔로 욕심 또한 있었다. 이런 이유들이 합쳐져 해체 하자는 의견으로 모였다.

그리고 인기가 많아지며 멤버들 행동을 통제할 수 없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2000년 초 해체한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해체 배경은 무엇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멤버들에 대한 관리가 여의치 않았다’는 점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해 12월30일 열린 KBS가요대상때의 일이다. 6명의 멤버중 3명이 생방송 2시간전까지 사전 연락없이 리허설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한동안 매니저들과 방송 스태프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 중 1명은 5분전에야 나타나 하마터면 방송 사고를 낼 뻔했다. 이 사건 외에도 지난 98년 11월에는 역시 일부 멤버들이 잠적해 라디오프로 2개를 펑크내는 등 그동안 몇차례에 걸쳐 멤버 관리에 허점을 노출시켰다." 잠적 사건의 경우 훗날 멤버들이 밝힌 바 있다. 영상 기사 당시 인기가 많아지며 머리가 커져서 소속사 말을 안 따라주기 시작했다고 한다.[28]

세간에는 멤버 집안의 재력 차이에 따라 해체에 대한 찬반 여부가 갈렸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은지원 강성훈 고지용이 금수저, 장수원이 중산층, 이재진 김재덕이 흙수저로 알려져있다. 실제로 재결합 전에 나온 발언들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선 완전히 인정하고 있다. 대놓고 "멤버들이 다들 배고팠으면 해체 안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2013년 3월 13일 라디오스타 김재덕 편: 젝스키스 당시 잘사는 멤버들(지원, 성훈, 지용)에게 김재덕이 따돌림을 당했다는 루머에 대해 MC들이 물어봤다. 김재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시 자기가 사투리가 쎄서 강성훈이 오해한 것 뿐이라고 밝혔다. 처음에는 강성훈이 자기 때문에 젝키를 안하려 했다고 한다. 재력의 경우 은지원, 강성훈, 고지용이 잘 살았다고 답했다. 고지용 부모님은 금은방을 하셨다고 한다. 이들은 돈이 많아서 명품을 애용했고 똑같은 옷을 잘 안 샀다고 한다. 그리고 맨날 이니셜을 새겨서 팔찌랑 목걸이를 만들고, 금색이면 티가 난다고 거기다 백금을 씌워서 사용했다고 답했다. 이어서 해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멤버들이 좀 배고팠으면 해체를 안하지 않았을까, 더 끈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워낙 금은방하는 부모님도 있고 친척 중에 대통령도 있으니…
2013년 3월 여성동아 이재진 인터뷰: "젝스키스 멤버들 중에는 집안이 부유해서 씀씀이가 큰 친구들도 있었지만 해외 공연 갔다 오면서 면세점에 들르면 걔네들이 뭘 사는 건지, 그게 좋은 건지 어떤 건지도 잘 몰랐죠. 이제는 알아도 돈 아까워서 잘 못 사요(웃음).” 젝스키스 활동 당시에는 멤버들 간의 가정 형편이 극과 극으로 갈려 젝스키스의 ‘부익부 빈익빈’ 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빈익빈에 속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재진이었다. 돈 쓰는 맛을 요즘에서야 알게 됐다는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빈부격차가 해체이유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다. 금수저 멤버의 입장에선 DSP의 대접에 불만이 있고 그렇다고 돈을 엄청나게 주는 것도 아닌 상황이면 젝스키스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후 솔로로 데뷔한다 해도 그 리스크를 감수할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반면 흙수저 멤버의 입장에선 젝키 해체는 큰 데미지로 다가온다.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부모님들 입장도 갈렸는데, 빈부격차가 요인이라는 점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2016년 무한도전에서 이재진이 밝힌 바를 보면, 이재진 부모님이 오히려 절대 해체해서는 안 된다며 결사 반대했다고 한다. 해체했을 때 많이 원망하셨었다고 하며, 부산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도 하셨다고 밝혔다. # 반면 전술한 다른 부모님의 잡지 인터뷰를 보면 "해체 얘기는 작년 연말부터 나왔어요. 그때 엄마들끼리 모여서 사장님한테 '해체 하려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해라' 고 얘기하곤 했어요. 애들이 인기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이가 벌어졌으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다.


6.3.2.6. 정작 자신들 문제는 SM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있어
위 비판 의견은 뮤직비디오 퀄리티가 안 좋은 점, 팬클럽 관리가 안 좋은 점 등에 대해 성토하며, 이런 점들이 해체로 몰고 갔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교 자체가 H.O.T. SM엔터테인먼트를 기준으로 보고 있는 측면이 크다. 젝스키스 멤버들 문제에서는 "왜 DSP는 SM의 H.O.T.랑 비교해서 멤버들 기를 죽였냐"고 성토하면서, 정작 자신들 문제인 팬클럽 대우나 뮤직비디오 퀄리티에서는 SM의 H.O.T.랑 비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위 비판 의견의 입장이 여기다 서술한 내용을 보면, 먼저 젝스키스 및 젝스키스 팬덤을 H.O.T.와 H.O.T. 팬덤의 규모와 비교한 쪽은 DSP쪽이라고 한다. DSP는 해체 직전에도 팬덤에게 핀잔을 준 바 있으며, 심지어 김기영은 해체 이후 인터뷰에서 2000 드림 콘서트만큼 팬들이 왔으면 해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푸념하였다고 한다. 회사 측에서 H.O.T.와 끊임없이 비교를 하기 때문에 젝스키스나 젝스키스 팬덤 역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불만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시점에서 팬덤이 DSP에게 하던 행동을 보면, 회사 측에서 그런 발언이 나오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이미 DSP와 팬덤 간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이다. "미친 개호연 새끼 뒈지는 날 우리젝팬들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핀다."는 문구로 회사 사장 이름을 대놓고 욕하며 활보하고 다녔다. 사진 오늘날 "개수만 새끼, 개양석 새끼, 개진영 새끼" 등 문구를 들고 활보하면 과연 회사 반응이 어떨까. 해체날에는 조영구 그랜져 새차를 반파시켜서 사장이 1100만원을 물어줬다. 당시 그랜져 새차가 2000만원 할때다. 기타 핑클에 대한 안티활동 #과 사이버테러 # 등도 심했고 회사에 대한 유언비어 유포도 심했는데, 그것을 처리하는 소속사 직원들 화도 쌓여갔을 것이다. 팬들이 항상 자료로 쓰는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 방송을 보면 당시 사무실 경호회사 직원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고 있다. "18일..농성을 부리고 여기에다 계란 세례나 밀가루, 식초 이런 것들을...난동을 부려가지고...."[29]

추가로 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전술한 김기영 매니저의 해체 이후 인터뷰를 두고, 팬들은 싸가지 없이 말했다는 점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물론 싸가지 없게 말한 것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윗 문단에서 서술된 바처럼 이미 팬덤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상황이었다. 저런 수모를 당한 상태인데 좋은 말이 나올리가 없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DSP가 악의적으로 저예산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팬클럽 운영을 미숙하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게 DSP의 능력이었다. 젝스키스의 큰 성공은 자신들도 기대 밖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문제는 DSP가 아이돌 기획사 중 하위권 능력이라면 욕할만 하겠지만, 당시 아이돌 기획사 중에서는 최상위권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교 대상 자체가 SM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 그렇다. 당시 SM이 선구자적인 역할로 전술한 빼어난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 아이돌 기획사 전체를 놓고 보면 DSP 능력은 최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SM을 따라했지만 실패한 가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중에서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의 성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기사

그게 무슨 상위권의 실력이냐 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젝키의 정산 금액이나 대우 문제에 있어 자꾸 오늘날 엄청나게 성장한 아이돌 시장을 떠올리는 점이 문제다. 당시는 업계 1위인 SM조차 순이익이 97년도 2억, 98년도 9억원, 99년도 31억원, 2000년도 12억원 하던 시절이었다. # 이런 SM보다 DSP가 가진 환경이 더 열악했다. 말이 대형기획사지 당시 건물 한층을 쓰고 있었고 직원 수도 적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팬 관리와 마케팅ㆍ정산까지 모두 수기하는 것이 20대 여성 한명 몫이었다. 그 직원이 멤버들 밥도 해줬다. #
6.3.2.7. DSP와 이호연 사장이 아니었으면 없었을 젝키의 성공

물론 DSP가 처음부터 완벽한 회사는 아니었고, SM에 비해선 미흡한 측면이 있던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대 최대 규모의 팬덤인 H.O.T.를 상대로 젝스키스가 라이벌로 성장한 것은 누가 뭐래도 DSP의 능력 덕분이다. 이런 DSP의 능력에 해체 책임을 모두 뒤집어 씌우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젝키 팬들이 인터넷에 쓰고 다니는 글을 보면 '젝스키스는 멤버 본인들 매력으로 성공한거지, 소속사는 1도 해준 것이 없다'라는 내용이 많은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금 아이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점을 잊고 있는 듯 하다. 아이돌 멤버 뽑는 것, 유명 작곡가한테 좋은 노래 받아오는 것, 공개방송 출연을 요청하는 것 등 모두 소속사의 몫이다. 오히려 DSP가 아니었으면 당시 SM의 독주에 누가 제동을 걸었을지 의문이다.

우선 그 정도 수준되는 멤버들이 한 팀에 모인건 DSP와 이호연 역할이 컸다. 2016년 라디오스타 방송을 계기로 팬들은 강성훈이 젝키 멤버를 구성한 것이지 이호연은 젝키를 만든 것에 기여한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데,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전혀 아니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하와이에 가서 직접 데리고 왔다. 이호연 사장이 하와이의 클럽 사장과 친분이 있어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참조)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이호연이 이주노와 형 동생 하는 사이로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0] 김재덕의 경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사실 강성훈이 뽑기 싫어했다. 즉, 강성훈이 젝키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젝키의 뮤비 퀄리티가 안 좋긴 하지만, 비싸고 좋은 작곡가를 많이 섭외해서 겨우 3년 활동인데도 명곡들이 많다. 해체 후 16년이나 지나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지만 오늘날 들어도 좋은 노래가 많아 세트리스트를 충분히 채웠다.[31] 이에 대해 팬들은 작곡가가 곡을 만든거지, 소속사랑 사장이 한게 뭐냐고 욕하는데,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가 좋은 작곡가로부터 대박날 수 있는 곡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 능력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성공이 결정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게 블랙스완 같은 희대의 망곡을 주면서 못 띄우는 것만 봐도, 소속사 사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외 이호연 까는 용도로 '젝스키스라는 이름 조차 MBC PD 은경표가 지어줬는데 이호연은 한게 뭐냐'는 말이 많은데, 그 MBC 은경표 PD가 이호연 인맥이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을 스카웃 했을 때, 이호연이 하와이에 간 이유가 은경표 PD랑 놀러간 것이었다. 사장이랑 친분이 두터우니 고민을 거듭해서 젝스키스라는 퀄리티 좋은 이름을 지어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지어줄 리도 없었다.

애시당초 데뷔하자마자 H.O.T.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요 방송에 출연한 것은, DSP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의 DSP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데뷔하자마자 무려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푸쉬를 받았다. 당시 지상파 3사가 전부고 케이블 방송이 거의 없었던 시절 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푸쉬 능력이다. 경희대 논문[32]을 보면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같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활동은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연 프로그램이나 음반활동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DSP> 소속의 젝스키스가 1998년 7월, 3집 앨범을 낼 때 핑클이 데뷔했고, 1999년 8월에 젝스키스 4집 앨범 발매와 맞추어 클릭B가 데뷔했다. 그리고 젝스키스의 경우도 데뷔 앨범은 1997년 5월 14일에 발매되었지만 첫 방송 출연은 그보다 한 달 전인 1997년 4월 15일에 있었고 1집 발매 직후부터는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젝스키스가 데뷔 전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당시 이 매니지먼트사에 MBC 라디오와 KBS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탤런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소현, 이본, 오현경은 연기와 MC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에 소속 가수들을 홍보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물론 실력도 없는 가수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출연시키면 말도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었다 싶을 때 다양한 홍보채널을 이용하고, 그랬을 때 이왕이면 같은 소속사 연예인이 진행하거나 출연하는 프로에 함께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방송가의 일종의 관행이기 때문이다."(DSP 사장) 이처럼 이미 다른 스타를 통해 방송가와 인맥을 쌓아 놓은 기존 매니지먼트사들은 그 회사의 신인을 홍보할 때 기존의 스타를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홍보방식은 방송사와 매니지먼트사 양측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방송사에서는 스타를 섭외해야 할 필요가 있고 매니지먼트사에서는 신인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끼워팔기'라는 기존 스타를 활용한 홍보방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 논문에 나온 다른 내용을 보면, "젝스키스가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됐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초이자 혁명적인 방법이었다.

데뷔 이후에도 최고로 인기있던 프로그램들에 젝키가 무수히 많이 출연했는데, 소속사의 파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케줄을 매우 빡세게 돌려 원망을 들었지만, 그렇게 쉴 새 없이 앨범을 내며 몰아부쳐 H.O.T.를 따라잡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2011년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이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 영상의 6분 20초부터 나온다.

여기서 은지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여러 사람들이 H.O.T.와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데뷔초에는 인기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기가 너무 벅찼다. 콘서트를 하면 계란 후라이였다."고 한다.[33] 하지만 H.O.T.는 활동 후 휴식기가 길었던 반면, 젝스키스는 쉬지 않고 1년에 2~3장 씩 앨범을 내며 활동해서 팬을 늘려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34]

근본적으로 DSP 자체가 거의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당시에는 이호연 대표가 건재할 때고, 그 덕분에 젝스키스 역시 성공하는데 큰 힘을 받았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35] 2016년 라디오스타에 젝키가 출연했을 때 해체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자, 사장님과의 관계 때문은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6.3.2.8. 계약서가 없는 점
젝키 팬들은 DSP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로 DSP를 욕한다.

하지만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상호 신뢰가 형성됐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지 계약서가 없었다는 사실 만으로 깔 것은 아니다. 당시 DSP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연예계에서 계약서 없이 활동하는 일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SM 이수만이 당시 H.O.T.와 세밀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새로운 모습이었다.[36]

심지어 최근까지도 계약서가 없는 사례는 자주 보인다. 아바엔터테인먼트의 민효린, 채정안, 한지민, 채시라 등이 계약서 없이 활동했으며 #, 문근영은 나무엑터스와 10년 가까이 계약서 없이 활동했고 #, 송지효도 씨제스엔터테인먼트와 계약서 없이 활동했으며 #, 이효리도 B2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그냥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 #. 2016~7년 S.E.S.의 재결합 앨범도 SM과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이루어졌다. 다 신뢰를 바탕으로 계약서 없이 활동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법적으로 봐도 서면계약서를 의무화 할 수 있는 조항은 없다. 하도급 계약이라면 서면으로 계약을 안 한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하도급 계약이 아니다. # 그리고 연예인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 # DSP의 경우도 핑클과는 계약서 없이 활동했어도 서로 사이가 좋게 끝났다.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당시 신인으로서 받기 힘든 좋은 대우를 해줬다고 말했다.

팬들은 2000년 피자의 아침 방송을 근거로 이 문제를 비판하는데, 상당히 잘못된 내용이 많다. 우선 전술한 바와 같이 연예인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 이후 변호사가 "설사 근로 기준법을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백보를 양보해서 가정을 한다하더라도 민사상으로 볼때에도 이 고용 연예인들 중에는 미성년자가 있습니다. 근데 이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어떤 계약 행위를 원칙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미성년자들이나 또는 고용연예인들은 어떻게 보면 그런 경험이 없다거나 또는 그 인기를 유지하거나 자신의 연예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상당히 궁박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그 무경험이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서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를, 즉 계약을 맺은 경우에는 그것이 구두 계약이든 서면 계약이든 이것은 법률상 무효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이호연 사장이 일일이 멤버 부모님들을 찾아가서 안심시키고 허락을 맡고서 데려왔다.[37] 또한 당사자의 경솔, 궁박, 무경험을 이용했다고 하여 계약이 무효라는 민법 104조가 있긴 하지만, 명백한 위법행위를 입증해야만 해서 판례를 보면 이를 통해 승소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 훗날 멤버들이 밝힌 이야기를 보면 이 조항이 적용될 정도의 삶을 산 것은 전혀 아니다.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근본적으로 계약서가 없는 것이 무조건 가수에게 불리한 것인가? 2000년 6월 16일자 피자의 아침 방송에서 이상호 기자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추궁하자, DSP 측은 멤버들이 계약에 묶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소속사에서 나가고 싶어도 계약서에 발목이 붙잡혀 나갈 수 없는 아이돌의 사례는, B.A.P 동방신기 등 무수히 많았다. 반면 젝스키스는 본인들이 해체를 결정하고 데뷔 3년만에 소속사를 나가겠다고 하자, DSP에서 놔줬다. 이후 솔로활동도 전 소속사의 별다른 방해 없이 이루어졌다. 일부 팬들은 방해를 해서 성적이 안 좋은거라 주장하는데 그런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당장 음방이나 예능에도 잘만 출연했었다.(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특히 장수원, 김재덕이 해체 이후 결성한 제이워크를 보면, Suddenly라는 곡으로 흥했지만 당시 계약한 소속사에서 제대로 활동을 안시켜주고 계약도 안 풀어줬다. 그래서 20대의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못하고 흘려보내야 했다.

이호연 사장이 정말 악마같았으면 노예계약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당시 젝키에게 해준 대우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도 얼마든지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던 시기였고, 이를 통해 5년이고 10년이고 소속사에 묶어놓을 수도 있었다. 젝키 팬들이 맨날 근거로 드는 2001년 7월 시사매거진 2580 보도내용을 보면, 노예 수준의 계약서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아이돌 그룹 가수들의 음반 인세가 100원도 채 되지 않았고(SM이 100원으로 H.O.T. 멤버당 20원이었다고 함), 계약금도 없이 10년 가까이를 소속사에 묶어버리기도 했다.

특히 아이돌이 훗날 활동하는데 있어, 전 소속사와의 계약서와 상표권은 심한 걸림돌이 된다. 이 문제는 신화, 하이라이트(구 비스트), H.O.T. 등 여러 아이돌이 겪은 문제다. 그러나 젝스키스는 계약서가 없었고, 회사 측에서 상표권도 신청하지 않았다. 이에 2016년 재결합하는데 있어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YG와 잘만 계약해서 젝스키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 점에 있어 젝키 팬들은, DSP가 젝키 해체 이후 "젝스키스" 상표권을 수차례 등록신청했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퍼뜨렸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DSP 측에서 젝스키스 상표권을 등록 신청한 사실 자체가 없다. 어느 이상한 중소기업에서 1997년에 젝스키스 상표권을 등록신청했다가 거절당한 내역만 존재한다.[38]

이호연 사장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계약보다 신뢰를 더 중요시하는 거죠. 신뢰가 무너지면 계약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끼와 감각을 갖고,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유대를 가질려고 해요. 그런 유대관계 속에서 창작활동을 해야 결과물도 좋아진다고 봅니다.” # 물론 어디까지나 사업가인 사람이니 저 말을 100% 선의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저렇게 잘만 굴러가면 효과가 좋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핑클과는 계약서 없이 저런 식으로 끝까지 잘 흘러갔다. DSP를 나갈 때도 매우 원만히 나갔다.

결론은 이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쌍욕할 건수도 아니라는 말이다. 조사 결과 엔터테인먼트 업계 특유의 사정이 있어, 계약서 없이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꽤 많기도 했다. 연예인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는 부분이다. 물론 소속사에 유리한 측면도 있으니 소속사를 전적으로 옹호할 생각도 없다. 결국 실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봐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선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를 참조 바란다. 넉넉하게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젝키 팬들이 퍼뜨린 내용은 그 과장과 허위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39]


[1] 지금도 그랜저는 국산차중 상위급인 고급차에 속하지만, 당시의 위상은 더 고급차로 통하는 차였다. 2019년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출고된 지 보름된 제네시스 G80을 박살내버린걸로 보면 된다(...)으악 당시에 방송분에서 조영구의 얼굴을 보면 멘탈이 아주 박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냥 허망하게 차만 바라볼 뿐. [2] 정식으로 보험처리를 하려면 일단 학생들을 처벌해야 했는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3] 달랑 스무 명밖에 모금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학생 팬 스무 명 가량이 보상금을 모아 전달한 것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후에 조영구 본인이 놀러와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20명 밖에 모금을 안했다고 직접 말했다. 그리고 조영구씨는 금액과 무관하게 학생들이 모은 돈이라 차마 받기도 그랬다는 듯. [4] 요즘 악플에 대한 고소와 처벌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점을 봤을 때, 위험 수준의 글도 상당히 많이 보인다. 회사 대표로 있는 부인이 고소 할 수 있기는 하다. [5] 이호연은 2010년 뇌졸중 이후 식물인간처럼 계속 누워만 있고, DSP는 오늘 내일 하는 상태다. [6] 이 발언 때문에 일부 팬들은 이재진이 훗날 솔로 활동을 할때 DSP로부터 방해받았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러나 아무 근거없는 허위사실이다. 이재진은 상황 자체가 방송활동이 없는게 당연했다. 2005년 4월달에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따고 9월달에 훈련소에 입소했기 때문이다. 이런데 DSP가 막았다고 퍼뜨리는 것은 매우 악의적인 행동이다. 솔로 활동 방해 여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7] 이 때 장수원은 핑클과의 차별 관련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8] 김정은,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9] 참고로 이는 허위루머가 상당히 섞여있다. 자세한 사항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10] 팬들은 이호연과 DSP는 젝스키스에게 해준 것이 없고 오로지 멤버들 능력으로 떴다고 주장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지금 아이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잊은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DSP와 이호연 사장이 아니었으면 없었을 젝키의 성공' 목차 참조. [11] 이런 글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 오늘날 시점에서는 주작 수준이 떨어져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이런 것이 먹히던 시절이었다. [원문]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매니저들에게 맞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그땐 왜 재덕이랑 저만 맞았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멤버들은 다 집에 가고, 연습실에 남아 있는 아이들만 꼭 매니저한테 별 일 아닌 일로 혼나고 얻어맞고 그랬죠." [13] 아이러니하게도 16년 후 이 소문은 사실티 되어버린다. 당시에야 그냥 헛소문이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일이 어떻게 되다보니 정말 현실이 되어버린 것. [14] 이 발언에 대해 김재덕은 사실이 아니라고 전면 부정하였다. [15] 이는 이호연이 부모들에게 언급한 사실과 정반대이다. [16] 김재덕은 잠적 사건에 대해 당시 인기가 많아지며 거만해졌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영상 기사 [17] 뭣보다 4집 활동 후 앨범 판매량이 전보다 줄었다는 이유로 "너희들 이제 망했다."라는 소리를 회사 관계자가 내뱉는 판이었다. 멤버들로서는 '앞으로는 내리막만 남은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 법하다. [18] 홍종호, 김세훈 등 당시 최고 주가를 달리던 뮤직비디오 감독들이 맡았고, '아이야'는 뉴욕 촬영까지 했다. '우리들의 맹세'는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만화가 천계영이 참여한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었을 정도. [19] 심지어 젝키 최대 히트곡인 '커플'은 사무실 문짝을 배경으로 찍었다고 한다. 강성훈이 라디오스타에서 이를 토로하며 치를 떠는 모습이 그야말로... "옥상이 뭐야 우리는... 사무실 문짝이 뭐야" [20] 카더라에 의하면 로드파이터 뮤비는 감독의 사비로 찍었고, 그 뒤로 뮤비 촬영에 쓰라고 은지원의 집에서 돈을 보태주었는데 이를 DSP에서 먹었다는 루머가 있다...고 여기에 오랫동안 서술되어 있으나 전혀 사실무근의 말이다. 이게 사실이면 개막장 소속사겠지만, 전혀 증거가 없다. 단지 어떤 감독이 로드파이터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기네 회사에서 비용을 다 부담해 뮤비를 찍고 싶다고 DSP에 연락을 했을 뿐이다(출처: #). 놀랍게도 그 감독이 YG 뮤직비디오 전담 감독인 서현승이다. 뱅뱅뱅, 판타스틱베이비, 내가제일잘나가 등 1억뷰 이상의 뮤비를 다수 보유한 감독이다. 해체 16년 후 젝키가 YG로 오게 됐으니 사람 인연이란 것이 참 희한하다. 참고로 김재덕과 이재진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 계기가, 양현석이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비디오를 보고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이후 둘은 이주노 소속사 연습생으로 있었는데, 이호연이 그 소속사로 찾아와서 젝키 멤버로 픽업해갔다. [21] "팬클럽 분포도는 '계란 노른자'였다. 흰자(H.O.T 팬)가 고루 퍼져 있으면 노른자(젝스키스 팬)가 그 사이에 있고. 난 젝스키스에게 '불우한 2인자'라고 했다. 활발히 활동했지만 대상을 받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다음 해에는 핑클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또 넘어가고. 기사링크 [22] 젝스키스는 3.5집 활동을 마감하면서 한 번도 H.O.T.를 넘어선 적이 없다면서 4집에서는 이겨보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23] 길종화는 언론을 탓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책임회피이다. 이미 몇몇 방송에서 핑클 멤버들에게 밀리언셀러 돌파 축하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핑클 2집이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였다는 기사가 쏟아졌으며, 100만장 돌파 기념으로 첫 콘서트를 개최한 거라고 밝힌 소속사 최측근의 인터뷰 등으로 볼때 팬들이 60만장이란 판매량에 의구심을 가지는게 당연하다. 핑클의 공식 음반판매량도 탈세를 목적으로 축소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소방차 정원관 1999년 방송에서 자신들의 인기에 비해 터무니 없는 음반판매량을 의심한 바 있다. [24] 이재진의 발언을 신뢰한다고 해서 해체를 주장한 은지원 등의 멤버들의 발언과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은지원 등은 해체로 생각이 전환된 것은 분명하며, 이적 논의는 해체 논의가 있던 1999년 연말 이전으로 보인다. [25] 다른 곳의 일부 팬들은 이에 대해 DSP와 이호연의 압박 때문이라는 말을 하지만, 설득력이 별로 없다. 이호연은 6년째 식물인간급으로 말도 못하는 상태로 누워만 있고, DSP는 쇠퇴해서 자기 앞가림 하기 바쁘다. 단적으로 젝키가 YG로 이적할 때, DSP에는 인사 같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무시했다. 그렇게 해도 걸리적 거릴 것이 없음이 현실이니 말이다. 특히 은지원은 해체 직후 이호연이 정정한 시절 때 조차, 전술한 바와 같이 DSP에 불만이 있었음을 신문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26] 검사와 경찰의 관계조차 모르고 있다. [27] 원문: ▲젝스키스 활동이 싫었겠어요? ▲ 제 의견을 정말 (손가락 마디를 보이며) 요만큼도 안 냈어요. 어차피 제가 하고 싶었던 음악이 아니었으니까요. 단 1%도 안 보여드렸죠. 솔직히 거부하기에는 판이 너무 커졌죠. 젝스키스가 그렇게 잘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기사 [28] 사실 해체 문제 등에 있어 드라마에 나오는 것 마냥 '젝키 멤버들은 선, DSP는 악'으로 구분짓고 보려고 하는 점은 문제다. 이제는 팬들도 나이가 있어서 겪었겠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젝키 멤버들은 당시 겨우 만 20살 넘은 잘생기고 끼많은 어린 애들이다. 각자의 욕심도 있고 인기가 많아지며 거만해지던 측면을 부정할 수 없고, 소속사로서도 서서히 통제가 안되어 갔다. [29] "DSP가 젝스키스 팬덤을 자극한 것은 해체 4달 전에도 있었으며, 그 1998년부터 종종 있어왔다. 다만, 젝스키스 팬들의 위와 같은 행동들은 해체 전후의 일이다. 시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그 행동들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라고 위 비판의견이 여기에 적었다. 맞는 부분도 있지만 핑클에 대한 행동은 99년부터 있어왔다. 해체 4달전에 나온 해체 기사는 팬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99년말부터 멤버들에게서 해체 이야기가 나와 해체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호연에 대한 욕설도 해체 콘서트로 갈수록 심해진 것이지, 유언비어 유포나 '뻑큐 씹탱 개호연' 정도 욕설은 해체 이전에도 있어왔다. # # # 해체 전후로 강도가 매우 심해져서, 오늘날 같으면 바로 고소미 먹을 유언비어나 # 다음과 같은 현수막 문구들이 있었다. # D.S.P 두고 보자 / 개좇십창 창녀 썅클 / 썅클은 창녀래요 / 뻑큐 씹탱 개호연 / 이호연 죽여라 / 창녀 핑클 / 이호연 너 나랑같이 죽자 / 이호연 너의 정력에 무릎을 꿇는다 / 이호연 제삿상에 옥돼지 머리 놔주마. / - 호연씨 사랑해요. 당신의 효리가 - / 이호연 너의 그녀들을 찾으려면 창녀촌으로 오너라 / 나는 개호연이다 나는 미친놈이다 나는 오늘 뒈졌다 속보 6월18일 2시 이호연 젝키팬에게 맞아 사망. [30]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참조 [31] 수록곡 중에서도 명곡들이 많다. 뫼비우스의 띠 같이 '이게 젝키 노래였어?'라고 하는 곡들도 상당수 있다. [32] 김정은,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33] 계란 후라이는 하얀색 H.O.T 팬들 사이에 둘러싸인 노란색 젝스키스 팬을 비유한 것이다. [34] 아무튼 팬들 입장에선 음악방송이며 각종 예능에서 거의 1년 내내 젝키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에 익숙한 일부 올드팬들은 재결합 후 젝키의 신곡 활동이 2~3주란 소리를 듣고 적응 못하고 있다. [35]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 [36] 명확한 계약없이 엿장수 맘대로 주는 식에 비해서는 진일보한건 맞지만 정산 비율 자체는 소속사쪽에 많이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 문제는 점차 곪아오다가 동방신기때 제대로 터졌고 동방신기가 반토막 난 다음에야 제대로 된 비율을 산정한 표준계약서 체제로 넘어갔다. [37] 컴백 자서전 강성훈 어머니 부분: "저 가수가 될래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화에 나는 몹시도 당황했었다. 한국에 있어도 불안했을 텐데, 미국에서 가수제의를 받았다는 말에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늘 아들을 믿었던 나는 무작정 반대만을 할 수는 없었다. 성훈이에게 가수가 될 것 을 제의했다는 기획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걱정과는 달리 DSP는 평판이 좋은 기획사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것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의 이호연 사장님을 만나면서였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훈이는 재능이 많은 아이입니다. 키워보고 싶습니다." 한시름 놓긴 했지만, 사실 성훈이의 첫방송을 보기 전까지 마음속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 김재덕 아버지 부분: 서울에 올라가서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차마 말릴 수 없었다. 부모로서 특별히 잘해 준 게 없이 때문에 저 좋아서 하겠다는 데 말릴만한 명분이 없었다. 더욱이 사장님께서 함께 부산에 내려오셔서 "염려하지 마세요, 좋은 가수로 키우겠습니다"하는 바에야.. [38] 여기 에서 검색 가능하다. [39] 참고로 몇몇 젝키 팬들은 계약서 없으면 아무 권리 주장 못하는 것 아니냐, 법적인 어떤 구제수단도 없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상식 이하의 반박을 하곤 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구두계약도 엄연히 법적으로 보호받는 계약이다. 단지 계약서가 있으면 법정에서 입증이 쉬울 뿐이다. 만약 계약서 없는 걸로 아무 권리가 없다면, 앞에서 말한 유명 연예인들이 계약서 없이 활동할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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