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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2:44:29

제주 부씨

{{{#!wiki style="margin: -1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ece5b6> 탐라 국성
濟州 夫氏
제주 부씨
}}}
관향 <colbgcolor=#fff,#191919> 제주특별자치도
시조 부을나(夫乙那)
중시조 부언경(夫彦景)
인구 10,222명 (2015년)

1. 기원2. 인구3. 집성촌4. 나무위키에 등재된 인물
4.1. 17세4.2. 18세4.3. 19세4.4. 20세4.5. 21세4.6. 22세4.7. 23세4.8. 세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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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시조는 부을나(夫乙那)이다. 제주부씨(濟州夫氏)는 옛날 제주도 탐라국(耽羅國, 제주특별자치도)의 지배씨족으로서, 이들 세 성의 시조 탄생에 대하여 삼성혈(三姓穴)의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는 본래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짐승을 사냥해서 살았는데, 어느 날 동쪽으로부터 상자 하나가 바다로 떠내려 와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세 명의 미녀와 곡식의 씨앗,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이 세 명의 미녀를 각각 배필로 맞아 목축과 농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중 부을나가 제주 부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이후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들어 백제 동성왕대에 백제에 복속된다.

후손 부계량(夫繼良)은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양탕과 함께 입조하여 왕자작을 받고 부씨 성을 확고히 하였다. 부여계(夫麗季)는 탐라 장수로 신라 문무왕의 탐라 경략 때 신라군에 맞서 격렬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최후를 맞아 순절하였다. 이때 신라군에 의해 부씨 일족이 상당히 도륙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계량과 부여계의 행적은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 전혀 언급되지 않으므로, 구전이 아니라면 후대의 족보 편찬자가 창작해낸 설화임이 유력하다.[1]

이후의 상계는 알 수 없고, 부언경(夫彦景)[2]을 족보상 1세 조상으로 봉대하고 있다.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부언경
夫彦景
득시
得時
상종
尙宗
삼로
三老
유렴
有廉
제주특별자치도
세영
世榮






유성[3]
有成
경기도 연천군
민홍
敏弘
영조
永祚

2. 인구

2015년 기준으로 부씨 성의 인구는 10,536명(제주 부씨 10,222명 + 기타 314명)이다. 본관이 본관인 만큼 전체 인구 중 약 48.7%에 해당하는 5,135명이 제주특별자치도 관내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부씨가 전국에 885가구 있는 것으로 나타났었는데, 이 중 703가구(약 79.4%)가 전라남도 제주도[4]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후 처음으로 성씨·본관 조사가 시행된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총 8,565명 중 5,096명(약 59.5%)이 제주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2000년도 인구조사에서는 총 9,470명 중 4,985명(약 52.6%)이 제주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제주도에 거주하는 부씨 인구 비율이 조사할 때마다 점점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인구 수를 가진 성씨들과 비교했을 때 그나마 인구증가세가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3. 집성촌

4. 나무위키에 등재된 인물

4.1. 17세

4.2. 18세

4.3. 19세

4.4. 20세

4.5. 21세

4.6. 22세

4.7. 23세

4.8. 세수 미상


[1] 물론 탐라국이 백제 휘하에 있을 때 탐라왕이 백제 최고위 관직인 좌평급의 대우를 받을 정도로 우대되었다가 전쟁으로 인한 정세격동으로 급격히 소속이 바뀌게 된 것인 만큼 비슷한 경우에 있었던 어느 나라나 그랬듯이 내부 의견충돌이나 새로이 관계를 맺게 된 신라에 대한 저항시도가 있었다는 게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탐라국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여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고 백제 부흥군에도 참여하거나 저 멀리 일본 등에도 사신을 파견하며 활로를 모색하였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2] 조선 초에 교위와 별장을 지냈다고 한다. 증손자 부삼로(三老)가 1450년생이고, 부삼로의 장남 부유렴(有廉)이 1483년생이며, 부유렴의 아들 부세영이 1510년생이므로 부언경은 대략 1360년쯤 태어났을 것이다. [3] 후손으로 부완혁이 있다. [4] 제주도는 해방 후인 1946년 8월 1일에서야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도(道)가 되었다. [5] 독립유공자 부덕량· 부승림· 부춘화 부좌현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다. [6] 정치인 부상일이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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