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정병희인 엠블랙 멤버 출신 現 인터넷 방송인에 대한 내용은 지오(엠블랙) 문서 참고하십시오.
정병희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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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등번호 43번 | ||||
임광규 (1999~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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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희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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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흠 (2006~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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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등번호 53번 | |||||
조정권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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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희 (2003~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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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민 (2006~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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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등번호 43번 | |||||
권덕준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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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희 (2006~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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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헌 (2008~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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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헌 (2008~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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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희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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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헌 (2011) |
정병희 鄭炳喜 | Byeong-Heui J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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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83년 5월 25일 ([age(1983-05-25)]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역삼초 - 휘문중 - 휘문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2002년 2차 2라운드 (전체 12번, 한화) |
소속팀 |
한화 이글스 (2002~2005) SK 와이번스 (2006~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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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KBO 리그 야구선수. 한화 이글스와 SK 와이번스에서 투수로 뛰었었다. 구속 140km을 넘기는 속구 정통파 투수였으며 제구력과 공끝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했지만 선발투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후반기 선발 로테이션이 붕괴된 한화에서 땜빵 선발로 등판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김인식의 투수혹사 피해자 중 하나. 윤규진과 같이 2005년 한화에서 혹사의 원투펀치를 구성했으며, 이때를 끝으로 다시는 제 기량을 되찾지 못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휘문고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다. 고교 시절 시속 140km대의 공을 뿌리면서 주목받았고, 3학년이던 2001년엔 당시 2학년이던 우규민과 원투펀치로 활약하면서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었다.[1]고교 시절 활약과 속구 투수임을 인정받아 2002년 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에 2차 2라운드(전체 12순위)의 높은 순위로 지명됐다.
2.2. 프로 경력
2003년부터 프로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2004년부터 중간계투로 안착했다.2004년 시즌 초반엔 2군에서 담금질하다 5월 19일 승격, 미들맨으로 기용됐다. 시즌 중순까지만 해도 삼성 권오준, 두산 이승준과 함께 중고 신인왕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마운드 붕괴란 악재로 인해 유승안 감독의 주먹구구식 등판의 희생양이 됐다. 당시 중계, 마무리 등을 안 가리고 등판했으며 연투를 자주 했고 후반기엔 선발로까지 기용될 정도였다. 결국 등판하고 한 달 조금 지나자마자 체력이 고갈되어 버렸고, 6월 중순을 기점으로 구위가 떨어져 피홈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2] 이후로도 등판할 때마다 화염방사를 하면서 결국 33경기 65.2이닝 ERA 5.48이란 성적을 썼다.
2005년 정병희는 전지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시즌 초반부터 셋업맨으로 기용됐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정병희를 전년도 주먹구구식 등판으로 인해 관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잘 던진다는 이유로 필승조에 포함시켜 이기는 경기마다 등판, 연투를 시키고, 위급하다 싶으면 긴급 투입시키는 등의 운용을 보였다. 2004년과 같은 패턴으로 6월 중후순경부터 체력 고갈로 인해 화염방사를 하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만 해도 윤규진과 더불어 믿을맨이라 불릴 정도로 좋은 활약을 펼치던 정병희는 후반기를 기점으로 체력을 소진해 버리면서 부진, 8월 말엔 방어율이 5점대로 치솟고 말았다. 8월 말경 2군으로 내려갔다가[3] 그 달 말 다시 콜업, 부상당한 정민철을 대신하는 땜빵 선발로 나왔지만 계속 부진해 결국 6점대 방어율을 찍고 시즌을 마치고 만다. 후반기 부진으로 인해 포스트시즌 라인업에선 제외됐다. 2005년 성적은 58경기 70이닝 ERA 6.56으로, 당시 정병희의 무리한 기용으로 인해 김인식 감독의 투수 혹사론이 잠시 불었었다. 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었으니 대부분은 신경쓰지 않았지만...
2005년 11월 22일, FA 김민재의 보상선수로 SK 와이번스에 지명됐지만[4] 이후 다시는 옛날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2006년 몇 경기 등판해 화염방사를 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2008년 군입대, 2010년 제대하자마자 방출되면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이후 무엇을 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2.2.1. 혹사
2004년 정병희는 33경기(3선발)에 출전해 초반엔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붕괴된 팀 마운드의 사정으로 인해 등판간격과 투구수가 제대로 조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정해진 보직 없이 거의 무작위로 등판했다. 이런 일은 1달 만에 정병희의 체력이 고갈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신승현과 함께 2004년 피홈런 18위를 기록했다.2005년 정병희가 등판했던 58경기의 2/3은 전반기에 치중해 있으며, 중반기로 접어드는 7월 1일 당시엔 벌써 39경기에 출장해 52.1이닝 ERA 4.99를 기록, 52.1이닝은 당시 한화 투수진 중 최다 이닝을 기록했다. 또한 후반기엔 선발로 출전했다. 그가 등판한 58경기는 2005년 등판경기수 13위였다.
신기하게도 정병희의 2004년 시즌과 2005년 시즌의 패턴은 묘하게 같다. 초반 활약했다가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여름을 기점으로 성적이 하락, 이후 팀 사정으로 무작위 등판해 성적이 더 나빠진다는 것. 또한 후반기 땜빵 선발 카드로 쓰였다는 점도 같다. 계투로 등판해 연투하고 때에 따라 선발로 올려 쓰는 운용은 속칭 노예 체질의 투수라면 모를까, 정병희에겐 전혀 안 맞았다.
쨌든 이러한 2년 혹사는 전도유망하던 신인 투수가 강점이었던 구속이나 무브먼트 등이 사라지며 못 하는 투수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간엔 김인식 혹사의 피해자란 인식이 많이 있지만 알고 보면 유승안과 김인식의 합작품인 셈.
만약 혹사를 안 당했다면 5886899678의 암흑기였던 한화의 마운드에서 큰 힘이 됐을 것이다. 한화 팬들에겐 참 아쉬운 실정이다.
3. 여담
- 한화 시절, 초/중학교 야구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순회 기술지도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2005년 오프 시즌엔 FA 보상선수로 지명받았음에도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며 순회지도 행사를 끝까지 마치고 SK로 갔었다고 한다. 기사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2 | 한화 | 1군 기록 없음 | ||||||||||||||
2003 | 4 | 4⅔ | 0 | 0 | 0 | 0 | - | 9.64 | 9 | 1 | 4 | 2 | 6 | 5 | 2.57 | |
2004 | 33 | 65⅔ | 4 | 5 | 1 | 3 | 0.444 | 5.48 | 71 | 13 | 29 | 52 | 40 | 40 | 1.46 | |
2005 | 58 | 70 | 3 | 5 | 1 |
9 (10위) |
0.375 | 6.56 | 82 | 10 | 49 | 55 | 55 | 51 | 1.69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6 | SK | 8 | 8⅔ | 0 | 0 | 0 | 0 | - | 5.19 | 8 | 1 | 4 | 7 | 5 | 5 | 1.15 |
2007 | 1군 기록 없음 | |||||||||||||||
2008 | ||||||||||||||||
2009 | ||||||||||||||||
2010 | ||||||||||||||||
KBO 통산 (9시즌) |
103 | 149 | 7 | 10 | 2 | 12 | 0.412 | 6.10 | 170 | 25 | 86 | 116 | 106 | 101 | 1.58 |
5. 관련 문서
[1]
송은범이 홀로 분투한
인천동산고에게 6-4로 결승전에서 승리했다.
지석훈은 결승전에서 홈런 두 방을 치는 등 활약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지명됐다. 그리고 동기생 이동걸도 마운드를 같이 지키며 정병희-우규민의 부담을 덜었다.
[2]
2004년 정병희의 피홈런 개수는 13개였는데, 등판 상황을 보았을 때 저 정도면 많이 맞은 편.
[3]
이때 정병희의 빈자리를 대신해
윤규진이 혹사당하다가 부상을 당하고 만다.
[4]
한화에 있다가 SK로 이적한
최일언 투수코치가 추천해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