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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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종훈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프로 데뷔 이전
충청북도 영동군이 고향인 장종훈은 이수초등학교 시절 유도를 했지만 야구선수로 전향했다. 세광중 3학년이던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야구소년 장종훈에게는 나도 언젠가는 프로선수가 되고싶다는 꿈이 자라났다.[1] 하지만 환경은 썩 좋지 않았다. 한국에서 야구란 서울과 항구도시를 거쳐 내륙의 대도시에서 성행한 스포츠다. 충청북도는 강원도와 함께 대표적인 야구의 불모지로 통했다. 장종훈이 1983년 진학한 세광고는 전해 창단 29년만에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이라는 경사를 누렸다. 혜성같이 나타난 좌완 송진우의 활약 덕분이었다. 송진우는 장종훈이 입학한 1983년에도 팀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으로 올려놨다. 그러나 우승주역들이 졸업한 뒤 세광고는 야구 변방으로 물러났다. 장종훈은 세광고의 4번 타자로 뛰었지만 어느 스카우트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3. 프로 시절
3.1. 1986 시즌
1986년 2차 지명은 지금과 달리 무제한으로 선수를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국대회 4강에 한번도 들지 못한 세광고 3학년들은 누구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전국대회 4강 실적이 있는 선수가 우선적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제도의 희생양 이기도 했다. 이 해 한희민, 곽영진, 오덕환 등 세광고 출신들이 지명을 받긴했지만 이들은 모두 대학이나 실업야구 소속이었다. 세광고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자, 세광고 이한구 감독이 배성서 감독에게 적극 추천해 입단 테스트를 받고, 7번째 구단으로 출범한 신생 팀 빙그레 이글스에 연봉 3백만원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월급 45만원짜리 배팅볼 투수었다.장종훈이 프로 지명을 못 받은 건 당시 고졸 선수들은 웬만큼 뛰어나지 않은 이상 신인드래프트에선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종훈도 대학을 갔다면 지명을 노릴 수 있었겠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가지 못했다. 또한 장종훈은 고교시절만 해도 그냥 평범한 내야 유망주에 불과했다. 결국은 지명받지 못하고 당장 어려웠던 집안 형편 때문에 연습생으로 입단했지만, 이 일은 오늘날의 장종훈을 있게 했다.장종훈은 연습생으로 간혹 불펜 포수 노릇도 했고 훈련이 끝나면 장비도 챙기는 등 선수들을 뒤치다꺼리를 하며 틈날 때마다 훈련에 매진했다. 특유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실력을 키워나갔으며 이 훈련은 고졸 연습생 신화를 이룩하는 큰 밑거름이 되었고, 배성서 감독과 이재환 코치에게 싹수가 보이는 선수라는 인상을 주었다.
3.2. 1987 시즌
1986년 시즌이 끝난 후 장종훈은 구단 측에 연봉을 6백만원으로 100% 인상에 계약금도 6백만원을 달라며 요구했고, 그렇잖아도 창단 첫 해를 최하위로 마친 상황에서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을 위해 칼을 갈고 있던 구단에서는 '요놈 봐라? 그저 뛰게만 해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연봉 올려주고 계약금까지 달라고? 오냐 네놈부터 모가지를 쳐주마' 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재환 코치는 구단 고위층 인사에게 허리를 숙이면서 "잘만 키우면 반드시 큰 재목이 될 선수이다. 아량을 베풀어 자르지 말고 1년만 지켜봐달라" 며 통사정 했고, 이에 마음이 바뀐 빙그레 구단은 장종훈이 바란 대로 1987년 시즌 연봉을 6백만원으로 올려 주었지만 계약금은 나중에 하는 거 봐서 주는 것으로 장종훈의 방출 의사를 철회하고 정식선수로 등록시켰다.그렇게 선수 생활을 유지하게 된 장종훈은 2군에서 계속 훈련에 매진하며 기량을 키워나가던 중, 1987년 4월, 주전 유격수였던 이광길이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장종훈이 대신 주전으로 출전하게 되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빙그레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1987년 시즌 규정타석 미달이긴 했지만 2할 7푼의 타율과 8홈런, 출루-장타율 3-4할을 기록하면서 이재환 코치가 예상한 대로 가능성을 보였다.
3.3. 1988 시즌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1988) |
이후 1988년부터 풀 타임 주전으로 승격하며 각종 타격 부문에서 10위 이내를 마크했다.
3.4. 1989 ~ 1990 시즌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1990) |
이듬해인 1989년 타율 0.254, 홈런 18개(4위), 46타점을 기록하며 연습생 신화를 써나가기 시작한다.
유망주들이 고졸 후 프로 직행을 택하는 경향이 많은 2000년대 이후와는 달리 당시에는 웬만큼 기량이 있다면 무조건 대학을 거쳐 프로에 입단했기 때문에 고졸 신화로 유명했다.[2][3][4]1987년부터 1989년까지 유격수로 출장하며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일원으로 성장했고, 1988년 유격수 주전을 꿰찬 이후 1990년 28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5] 유격수로는 최초[6]로 홈런왕-타점왕을 동시에 거머 쥐었다.
3.5. 1991 ~ 1992 시즌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91) |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1992) |
하지만 고질적인 수비불안으로 인해 1991년 유격수에서 1루수/지명타자 포지션으로 이동한다. 포지션을 전환한 데는 아무래도 1989년 한국시리즈 2차전의 결정적인 실책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하기 힘들 듯.[7] 이외에도 1988년 이동석의 노히트 노런 당시 실책으로 주자를 진루시키는 등 유격수 위치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었다. 그나마 1루수로 전향해서는 유격수를 보았던 경험을 살려 병살을 잘 잡는 등의 활약을 보여줬는데, 어쩌면 전화위복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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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 유일한 2위를 기록한 출루율 부문에서 1위를 달렸던 이는 당시 36세의 나이[8]로 장종훈의 동료 이정훈과 타격왕 경쟁을 했던 장효조(.452).
최전성기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의 3년으로, 이 기간동안 홈런, 타점 부문 타이틀을 3연패했으며 연도별 주요 타이틀 및 기록을 보면...
1990년 : 타격부문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 최다타점 신기록(91타점), 골든글러브(유격수 부문)
1991년 : 타격부문 5관왕(최다안타, 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 최다안타 신기록(160개), 최다홈런 신기록(35개), 프로야구 최초 100타점 돌파(114타점), 사상 첫 100득점 돌파(104득점), 20-20클럽 달성, 골든글러브(지명타자 부문)[9]
1992년 : 타격부문 4관왕(홈런, 득점, 타점, 장타율), 사상 첫 40홈런 돌파(41홈런), 골든글러브(1루수), 최다타점 신기록(119타점), 최다득점 신기록(106득점)
등의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다.타격 부문에서 도루 부문을 제외한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에 랭크되었으며, 특히 홈런, 타점, 득점 등의 기록을 스스로 매번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30홈런도 드물던 시절에 홀로 41홈런을 기록하였으며, 이 기록은 98년 타이론 우즈의 42홈런이 나올때까지 부동의 역대 홈런 1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이 3년간 기록한 평균 성적은 타율 0.312 홈런 34.7개 타점 108개로 '홈런타자=장종훈'이라는 인식이 명백하게 박혀, 일본의 야구만화인 '4P 타나카군'을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할 때 4번타자 왕종훈이라는 제목으로 현지화할 정도였다.
특히 장종훈이 활약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은 극악의 투고타저 시기로, 이런 시기에 30~40홈런을 쳤다는 것은 1999년 이승엽이 친 50홈런과 맞먹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9년 이승엽이 50홈런을 기록한 시즌은 타고투저 베스트에 들어가므로 장종훈의 40홈런이 이승엽의 50홈런에 필적한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다만 2003년은 평년에 가까운 해라서 직접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다. 28개의 홈런을 친 1990년 시즌이 끝나고 기자들이 내년의 목표를 묻자 자신의 등번호인 35개 치는 것이 목표라 하였는데, 정말로 35개를 쳐버렸다. 1991년 시즌 후에 또 다시 내년의 목표를 묻자 이번엔 40개라 대답했고, 기어코 40개를 넘게 쳐버렸다. 1993~97년 까지의 홈런왕들은 모두 20개중반~30개초반의 홈런을 기록하였고, 20개 언저리만 쳐도 홈런타자 소리를 듣던 시절에 그 두 배를 넘겨 버렸으니...
여담으로 1990~1992시즌의 3시즌 연속 장타율 1위가 연속시즌 장타율왕의 유일한 기록이며 4시즌 연속 1위는 아직까지 없다.
3.6. 1993 시즌
그러나 1993년 시즌 전 무릎 통증으로 연습량이 부족했고,[10] 시즌에 들어와서는 허리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시즌을 보내지 못했다. 결국 17홈런이라는[11]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는데 장종훈의 93년 wRC+는 175.4로써 역대 시즌 69위를 차지한다.[12]92와 93이 비교했을때 나타나는 엄청난 투고타저로 인해 지금으로 봤을땐 어정쩡한 성적을 내고도 굉장히 준수3.7. 1994 시즌
진짜 시련은 94년부터이다. 1994년 팔꿈치에 공을 맞아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이 부상으로 인해 배트스피드가 감소하게 되어 다시는 전성기 수준으로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 때의 여파로 시즌 이후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더군다나 빙그레 전성기를 같이 이끌었던 이정훈, 이강돈의 몰락은 투수들이 장종훈을 집중 견제하는 양상으로 이어졌고, 강병철 감독이 발탁한 경험이 일천한 신인 타자들을 홀로 이끌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1990년대 중후반기 빙그레-한화의 자랑이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사라지고 믿을 수 있는게 투 수 들밖에 없어진 상황에서 장종훈은 홀로서기에 나서 타선에 혼자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래도 강석천이 함께했고, 나중에는 송지만, 이영우 등의 신인들이 활약하며 부담을 분산시켜 주기야 했지만, 여튼 이 시기를 비유하자면 8-9-9를 찍던 꼴칰 시절 김태균 급. 그럼에도 부상당했던 1994년을 제외하고는 1995년까지 타출장 3-4-5라는 스탯을 찍어왔고, 암흑기가 끝날 때까지 매년 10~20홈런씩 꾸준히 쳐왔다. 이민호나 정영기 같은, 시즌마다 각성한 선수들이 나오긴 했어도, 장종훈처럼 꾸준히 두 자릿수 홈런을 쳐 온 타자들은 없었으며 그나마 1996년 데뷔한 송지만이 이에 필적할 만 하다. 90년대 장종훈의 존재란, 단연코 이글스 타선의 한 줄기 빛이라 해도 과히 손색이 없다.3.8. 1995 시즌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1995) |
1995년 수술을 마치고 부상에서 회복한 장종훈은 타율 0.326 홈런 22개 78타점 출루율 0.424(1위) 장타율 0.562(1위)를 기록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 때는 타격왕 경쟁을 하며 9월까지 3할 3푼으로 1위를 마크했으나, 안타깝게도 김광림의 각성과 혼자 이끄는 타선, 후속 타자들의 불운, 집중견제 등으로 인해 3할 2푼으로 떨어져 2위를 하게 되었다. 홈런도 김상호의 25개에 단 3개 차이로 뒤지는 바람에 2위를 기록, 안타깝지만 출루율/장타율 1위를 기록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뛰어난 활약인 건 변함없었기에 당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그해 wRC+는 183.2을 기록하며 통산 38위에 랭크되어 있다. 여전히 그는 최고의 타자였다.
3.9. 1996 시즌
하지만 1996년 다시 부진과 부상으로 인해 90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하며 15개의 홈런과 57타점을 기록했다. 만약에 부상이 없었더라면 20홈런은 충분히 가능했던 상황이였기에 아쉬운 시즌.3.10. 1997 시즌
1997년 시즌 타율 0.293 홈런 22개 76타점, 시즌 홈런 공동 7위, 타점 6위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했다. 이 때 뭔 맛이 들렸는지 중견수로 잠시 알바간 강석천과 2년차 신인 송지만과 다시 뛰는 야구를 했지만, 소위 말하는 한화의 막장 타선 덕분에 타점 손해를 꽤나 받았다 그러면서 구단에서는 강석천, 구대성, 송지만과 연봉이 상승되었다.3.11. 1998 시즌
그리고 1998년에는 타율 0.275 홈런 17개 66타점으로 97년 보다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17홈런은 용병 치멜리스와 같은 팀 내 공동 1위이다. 작년과 똑같이 롯데와 같은 순위를 찍고 이번엔 연봉이 내려가면서 좀 욕을 먹었다. 그나마 용병으로 온 마이크 부시 덕분에 덜 먹었다.[14]이 해에 이만수에 이어서 KBO 역대 두번째로 11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3.12. 1999 시즌
한화 이글스 유일의 우승 시즌이기도 한 1999년에 그는 주로 5번에 기용되어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 외국인 선수 듀오와 함께 클린업을 구성, 타율 .284, 홈런 27개, 86타점을 기록했다. 이 해에 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과 2루타, 타점, 득점 신기록을 세우며 언론으로부터 재조명받았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율은 낮았으나 중요한 상황에서의 활약이 빛났다. 2차전 1회 선제 2타점 적시타로 4:3 승리를 가져왔고, 4차전은 1:1로 맞선 상황에서 결승 타점으로 기록되는 희생플라이를 쳐 2:1로 승리를 결정지었으며, 마지막 5차전에서도 희생 플라이로 결승타를 기록한다.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한화가 올린 4승 중 3승의 결승타가 장종훈의 것이었고, 한국시리즈에서 기록한 7타점은 양팀 타자를 통틀어 최고기록. MVP는 1승 3세이브를 기록한 구대성에게 돌아갔지만, 전체적으로 투수전 양상을 띈 한국시리즈 였기에 타선에서는 그가 제일 좋은 활약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3.13. 200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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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6일 두산 최용호를 상대로 KBO 최초 300홈런을 날리는 장종훈 |
히스토리 16 세상을 향한 만루포! '연습생' 장종훈의 '최초 300홈런'
2000 시즌에도 홈런 28개와 81타점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KBO 최초 300홈런은 덤.
3.14. 2001 시즌
2001년 시즌 4월 한달 동안 타율 - 홈런 - 타점 1위를 기록하면서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지만[15], 손목에 공을 맞고 타격페이스가 무너져 타율 0.273 15홈런 54타점으로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16]3.15. 2002 시즌
이후 체력적인 열세를 보이며 하향곡선을 탔고, 2002년에는 김태균이 유례없는 부진에 빠지자 한 동안 이영우, 송지만과 개고생했다. 이 시즌에 KBO 최초 1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3.16. 2003~2005 시즌
2003년에는 유승안 감독 취임 이후 세대교체의 희생양이 되었다. 후계자라고 불리던 송지만이 어처구니 없는 트레이드로 떠나고, 강석천을 대신하여 3루수로 뛰던 김태균을 갑작스럽게 수비 불안이 있다는 이유로 1루 수비로 옮겨 놓았다.[17] 그리하여 장종훈은 1루수 자리를 빼앗겼고, 지명타자에 기용되는 빈도가 늘어갔다. 3루 수비는 유격수를 보던 백재호가 잠시 알바를 뛰었다가 한상훈이 받았는데 수비는 좋았지만, 타격이 시망이라 기용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리빌딩 차원에서 이범호가 3루수를 맡았지만 본인은 유격수를 원해서 그렇게 2004년 한 해만 이범호를 유격수로 보냈는데... KBO 단일 시즌 유격수 실책 30개가 넘는 에러를 범하는 등 팬들마저 눈뜨고도 못 볼 수비를 보여주면서 이듬해부터 3루수에 정착시켰다.2005년 올스타전에서 은퇴 헹가래를 받는 장종훈 |
결국 2005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 9월 15일에 대전구장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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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훈 은퇴식 |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人 장종훈 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내레이션 by
안지환)
조금이라도 적은 숫자를 가져보고 싶어서 무심코 가져왔던 35번.
하지만 그 35번이, 이제는 이글스를 상징하는 상징으로 남았고, 그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중략)
연습생 신화라는 이름으로, 무명 선수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남겨주면서 한국프로야구사에 40홈런 시대라는 새로운 타격의 장을 열어주었던 장종훈.
노력했기 때문에 최고가 되었고, 노력했기 때문에 기회를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던 사나이. 이렇게 지금, 희망과 감동의 또다른 이름이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적은 숫자를 가져보고 싶어서 무심코 가져왔던 35번.
하지만 그 35번이, 이제는 이글스를 상징하는 상징으로 남았고, 그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중략)
연습생 신화라는 이름으로, 무명 선수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남겨주면서 한국프로야구사에 40홈런 시대라는 새로운 타격의 장을 열어주었던 장종훈.
노력했기 때문에 최고가 되었고, 노력했기 때문에 기회를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던 사나이. 이렇게 지금, 희망과 감동의 또다른 이름이 되어 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장타율 | 출루율 |
1986 | 빙그레 | 1군 기록 없음(신고선수 및 연습생) | |||||||||||||
1987 | 94 | 281 | .270 | 76 | 15 | 0 | 8 | 34 | 24 | 1 | 30 |
62 (1위) |
.409 | .359 | |
1988 |
108 (1위) |
344 | .241 | 83 |
20 (5위) |
4 (3위) |
12 | 57 | 53 | 3 | 43 |
95 (1위) |
.427 | .337 | |
1989 | 112 | 256 | .254 | 65 | 11 | 0 |
18 (4위) |
46 | 49 | 6 | 33 | 55 | .508 | .351 | |
1990 |
120 (1위) |
411 | .290 | 119 | 15 | 3 |
28 (1위) |
91 (1위) |
73 (2위) |
8 |
69 (2위) |
84 (1위) |
.545 (1위) |
.401 (4위) |
|
1991 |
126 (1위) |
464 (3위) |
.345 (3위) |
160 (1위) |
24 | 4 |
35 (1위) |
114 (1위) |
104 (1위) |
21 |
76 (1위) |
88 (3위) |
.640 (1위) |
.450 (2위) |
|
1992 | 125 | 431 | .299 | 129 |
28 (2위) |
2 |
41 (1위) |
119 (1위) |
106 (1위) |
13 |
106 (2위) |
99 (1위) |
.659 (1위) |
.446 (3위) |
|
1993 | 97 | 339 | .295 | 100 | 21 | 0 |
17 (3위) |
58 | 58 | 12 |
58 (5위) |
68 |
.507 (3위) |
.405 (2위) |
|
1994 | 한화 | 79 | 243 | .267 | 65 | 11 | 3 | 10 | 34 | 33 | 5 | 36 | 60 | .461 | .365 |
1995 |
126 (1위) |
420 |
.326 (2위) |
137 (5위) |
25 | 4 |
22 (2위) |
78 (5위) |
77 (5위) |
8 |
68 (3위) |
63 |
.562 (1위) |
.424 (1위) |
|
1996 | 90 | 289 | .266 | 77 | 18 | 0 | 15 | 57 | 50 | 8 | 37 | 63 | .484 | .368 | |
1997 | 121 | 427 | .293 | 125 | 27 | 1 | 22 | 76 | 74 | 15 | 63 | 76 | .515 | .385 | |
1998 | 118 | 437 | .275 | 120 | 17 | 1 | 17 | 66 | 60 | 3 | 41 | 69 | .435 | .344 | |
1999 | 126 | 465 | .284 | 132 | 31 | 2 | 27 | 86 | 80 | 4 | 54 | 93 | .533 | .365 | |
2000 | 127 | 447 | .264 | 118 | 19 | 0 | 28 | 81 | 66 | 1 | 52 |
114 (5위) |
.494 | .354 | |
2001 | 120 | 366 | .273 | 100 | 16 | 0 | 15 | 54 | 55 | 11 | 45 | 87 | .440 | .356 | |
2002 | 101 | 302 | .248 | 75 | 15 | 0 | 12 | 42 | 38 | 2 | 24 | 88 | .417 | .306 | |
2003 | 83 | 206 | .243 | 50 | 8 | 1 | 6 | 24 | 21 | 1 | 21 | 56 | .379 | .317 | |
2004 | 70 | 153 | .255 | 39 | 10 | 0 | 6 | 27 | 21 | 0 | 10 | 31 | .438 | .301 | |
2005 | 7 | 11 | .091 | 1 | 0 | 0 | 1 | 1 | 1 | 0 | 0 | 3 | .364 | .091 | |
KBO 통산 (19시즌) |
1950 | 6292 | .281 | 1771 | 331 | 25 |
340 (7위) |
1145 (10위) |
1043 | 122 | 866 |
1354 (10위) |
.504 | .377 |
[1]
중학교 시절 소년체전 우승을 경험하였다.
[2]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는 당시 프로구단의 육성 노하우와 인프라가 부족하고 특히 2군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고졸 유망주들이 기량을 갈고 닦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당시에는 FA제도도 없었고 선수생활을 10년 이내로 짧게 했는데다가 프로 선수라도 해도 대학을 나와야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한 몫 했다. 그래서 장종훈은
한국프로야구 팀의 스타선수 중 거의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
[3]
비슷한 시기 해태에서 활약한 고졸 출신
문희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임팩트는
선동열에 꽤나 가려져 있다.
[4]
실제로
윤석열이 프로야구 드래프트 환경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충암고등학교 야구부를 찾아 학생들에게 "
꼭 야구명문대학 가라"는 말을 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5]
2020년 현재 144경기 체제로 환산하면 33.6홈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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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이자 마지막. 전성기
이종범은 물론 2003년 유격수 최초로 100타점을 달성한
홍세완이나 2014년 유격수 최초 40홈런을 기록한
강정호도 홈런왕은 차지해보지 못했다.
[7]
4:2로 앞선 상황에서 그만 동점을 허용하고, 곧바로 희생타로 역전까지 당했다. 이후 빙그레는 남은 5차전까지 줄곧 해태에게 끌려다니다가 무기력하게 4연패를 당했다.
[8]
당시 선수들 평균 은퇴나이가 30대 초반이였던 걸 감안하면 장효조 또한 대단하다.
[9]
타율과 출루율까지 타이틀을 가져왔더라면
이대호 이전에 타격 7관왕도 가능했던 성적이었다. 물론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91년 시즌 당시의 타격왕은 .348의 이정훈으로 장종훈과는 불과 3리 차이였다. 출루율 1위
장효조의 성적은 .452로 장종훈과는 고작 2리 차이! 겨우 이 정도 차이로 인해 5관왕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 차이가 말 그대로 간발이었던 장종훈이라 이런 아쉬운 소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10]
매년 연습량이 많았는데 1993년 시즌 전 유독 부상이 심했을 뿐.
[11]
클래식 세부 스탯은 타출장 .295/.405/.507
[12]
2022 시즌 이보다 높은 선수는 이정후(182.5) 뿐
[13]
1997년도
쌍방울의
김기태는 wRC+가 202.6으로 역대 9위.
[14]
MLB에서 뛰던
그의 동료인데 한국에서는 다들 주목하던 용병이였다. 두산에서 뛴
타이론 우즈 보다도 주목을 받았으니 말다했다. 근데 홈런 10개치고 방출당했다. 타율이 낮았다.
[15]
프로야구 최초 통산 1,000타점 기록도 이때 세웠다.
[16]
이 당시 주장을 맡았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송유석이 주장으로 선출됐으나
이광환 감독이 투수보다는 야수가 주장을 맡아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줘서 장종훈에게 주장직을 넘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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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김태균의 3루 수비가 그리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투수들이 (김태균이 잡을 수 있을지가 불안해서) 몸쪽 공을 못 던지겠다고 했을 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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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에서도 갖은 언플을 하며 좋게좋게 은퇴했다는 느낌을 주려고 애를 썼다. 장종훈이 김태균을 격려하면서 '다음은 너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라든가, 김태균이 장종훈의 라커룸을 물려받았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포장했어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라 장종훈도 좋게 돌려말하긴 했지만 구단에 섭섭함을 표현했었고, 이 탓에 김태균은 커리어 내내 장종훈과 비교되면서 홈런을 못 친다니 김똑딱이라느니 하는 욕을 들어먹곤 했다.
[19]
그 마지막 홈런이 340호 홈런이다. 이는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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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12년 7월 15일 이승엽이 장종훈과 홈런 통산 기록과 동률이 되었다가, 2012년 7월 29일
이승엽이 341호 홈런(한일 통산 500호 홈런이다)을 기록하면서 통산 홈런 3위로 밀려났다. 이후 최정도 2020년에 장종훈을 넘어서면서 최정이 우타자 통산 홈런 1위 타이틀을 가져갔고, 장종훈은 현재 통산 홈런 7위로 밀려났다. 참고로 같은 해 최정은 양준혁의 기록마저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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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에도 나오지만 한시대를 풍미한 레전드 선수를 온전한 한타석도 아닌 1-0 카운트에서 팬들의 야유로 교체 출전시키는 몰상식한 행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