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8-26 20:58:31

인수브리아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전초전
사군툼 공방전 론 강 전투 한니발의 알프스 등반
히스파니아 전선
키사 전투 에브로 강 해전 데르토사의 전투 베티스 고지의 전투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바이쿨라 전투 일리파 전투 수크로 반란 카르테이아 전투
이탈리아 전선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 게로니움 전투
칸나이 전투 1차 놀라 공방전 실바 리타나 전투 2차 놀라 공방전 3차 놀라 공방전
1차 베네벤툼 전투 1차 타렌툼 공방전 2차 베네벤툼 전투 실라루스 전투 카푸아 공방전
1차 헤르도니아 전투 2차 헤르도니아 전투 누미스트로 전투 카누시움 전투 2차 타렌툼 공방전
페테리아 전투 그루멘툼 전투 메타우루스 전투 크로토나 전투 인수브리아 전투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 전선
릴리바이움 해전 데키모마누 전투 시라쿠사 공방전
아프리카 전선
우티카 전투 바그라다스 전투 자마 전투 }}}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기원전 203년, 형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려던 마고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북이탈리아의 인수브리아에서 로마군에게 저지된 전투.

2. 배경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참패한 뒤, 하데스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이 로마군의 영향력에 들어갔다. 마고는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본국에 지원군을 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능한 한 많은 갈리아인을 모집하여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고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돈을 받았고, 하데스에서 찾은 모든 금과 은을 몰수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해봤지만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하데스로 귀환했을 때 도시에 들어가는 게 허용되지 않자, 도시의 최고 관리들을 유인하여 십자가형에 처한 뒤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떠났다.

이후 미노르카 섬에서 겨울을 보낸 그는 기원전 205년 봄 그동안 용병으로 끌어모은 보병 12,000명과 기병 2,000명을 이끌고 30척의 군함과 여러 척의 수송선과 함께 지중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여름 제노바에 기습 상륙하여 단숨에 점령한 뒤, 리구리아 부족인 에판테리아 족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갈리아 키살피니아에 살아가는 갈리아인들을 설득했다. 당시 갈리아인들은 한니발 바르카의 전설적인 활약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기에, 한니발의 동생이 자신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열광하여 자신들을 핍박하는 로마에 맞서고자 기꺼이 가담했다.

마고는 리구리아와 갈리아 키살피나의 족장들을 소집한 뒤, 자신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여기에 왔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리구리아인들은 즉시 따랐지만, 로마군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갈리아인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비밀리에 보급품과 용병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마고는 섣불리 남하했다가 훨씬 더 많은 로마군의 역습을 받기 보다는 여기서 입지를 다져놓아야겠다고 판단하고, 그해 내내 제노바에 남았다.

한편, 카르타고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에트루리아 총독 마르쿠스 리비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합류한 뒤 마고가 남하하는 길을 막았다. 그러나 리구리아인과 갈리아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마고를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그해 내내 수비에 전념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 군인과 군자금을 지원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던 라틴 도시들이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고 했기에, 새 군인을 모집하기가 빠듯해졌다. 기원전 204년 새 집정관으로 선출된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는 에트루리아에 이동하여 마고가 이 지역의 여러 도시를 선동하면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그 역시 마고가 있는 제노바로 함부로 이동하지 않았다.

3. 전투 경과

기원전 203년, 로마는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법무관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제노바로 진격했다. 그러다가 인수브리아(현재 밀라노 인근)에서 마고의 군대와 마주쳤다. 당시 마고에게는 21,000명의 군대와 7마리의 코끼리가 있었으며, 로마군은 4개 군단 35,000명에 달했다. 마고는 병력이 열세한 데다 갈리아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거라고 보고, 갈리아 신병들과 몇 마리의 코끼리를 후방에 배치해 퇴로를 열어두게 하고, 카르타고인과 코끼리들을 최전방에 배치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강력한 공세에 굳건히 버텨서 여러 차례의 공격을 모조리 물리쳤다. 이에 바루스는 3천에서 4천 가량의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고는 코끼리들을 최전선으로 이동시켰고, 로마 기마들은 코끼리를 보고 공포에 질려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 기병들이 혼란에 빠지자, 누미디아 기병들이 출격해 로마 기병들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사방으로 도주하게 했다. 이후 코끼리들은 최전선의 로마 보병대를 공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여기까지는 마고의 생각대로 되었지만,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가 후방에 있던 2개 군단을 투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코끼리들은 투창 세례를 받고 대부분 죽었고, 남은 코끼리들은 매우 흥분해 날뛰다가 카르타고군의 전열을 흐트러놨다. 로마군은 이 틈을 타 총공격했고, 카르타고군은 심한 압박을 받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고는 후방에 있던 갈리아인을 출격해 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게 한 뒤,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제노바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힘겨운 전투를 치른 데다 기병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추격하지 못했다.

4. 결과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이 전투에서 5,000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마고가 허벅지에 창이 찔려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반면 로마군은 2,300명의 병사를 잃었고 수많은 이가 중상을 입었으며, 3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전사했다. 특히 기병대가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될 수 없었다. 그 후 마고는 제노바에서 농성하다가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아프리카로 귀환하다가 지중해 해상에서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그가 이끌었던 군대는 아프리카에 상륙한 한니발에게 가세하여 자마 전투에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