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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1:04:04

인민궁전

파일:external/www.exclusivnews.ro/casa_poporului.jpg
파일:external/www.local-life.com/b.968_palace-of-parliament.jpg
한국어 명칭 국회궁전
루마니아어
명칭
Palatul Parlamentului
위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착공 1984년 6월 25일
완공 1997년
면적 340,000㎡
높이 86m
270m
너비 240m
연면적 33만㎡
방의 수 1,100개
층수 지상 12층, 지하 8층[1]
홈페이지

1. 개요2. 건설배경3. 건축가4. 건설과정5. 미완공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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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alatul Parlamentului(국회궁전, 현 명칭)
Casa Republicii 혹은 Casa Poporului (차우셰스쿠 당시 명칭)

인민 궁전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초대형 건물이다. 공산정권 시절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에 만들기 시작해서 그 끝을 못보고 미완성인 채 남아있다. '인민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공적 건축물로는 미국 펜타곤, 태국 신 국회의사당, 중국 지난시청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건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유명하다.[2] 또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건물로서 그 무게가 무려 410만 톤에 달한다.[3]

2. 건설배경

일설에는 북한 금수산태양궁전이 된 주석궁을 보고 무턱대고 따라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좀 복잡한 요인이 있었다. 1977년 3월 4일 리히터규모 7.2의 강진이 루마니아에서 발생했다. 피해가 특히 수도였던 부쿠레슈티 쪽에 집중되어 전체 사망자 1,578명 중 1,424명이 부쿠레슈티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또 부쿠레슈티 시내의 5층 이상 건물 중에 내진 설계를 해서 지었던 호텔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4] 이로 인해서 부쿠레슈티에 재건 작업이 활발해진 시점이었다.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이 필요해짐과 동시에 좋은 곳에 살고자 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욕심이 결합되어 탄생한 작품이었다. 이 인민궁전이 지어지기 전에 소련이 제작한 군사 지도와 위성사진을 비교해보면 인민궁전 자리가 원래는 시가지의 일부였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차우셰스쿠가 토목사업을 명목으로 부쿠레슈티의 건물들을 하도 불도저로 밀어낸 나머지 해외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지진 매몰자가 생존해 있던 상황에서도 구조 작업으로 시간이 낭비된다며 지진으로 인한 잔해를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도록 했다'는 식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지진 소식을 듣고는 국빈으로 방문하던 나이지리아에서 곧바로 귀국하고는 생존 한계로 간주되는 기간을 넘어서도 희생자들을 계속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즉 지진 수습 자체는 정상적으로 했지만, 사후 처리가 워낙 막장이었기에 이런 악성 루머가 나왔다고 해도 무리는 없는 셈.[5]

3. 건축가

건설에 관여한 설계자는 최대 700명이었는데, 수석 설계자는 당시 28세의 건축가였던 앙카 페트레스쿠(Anca Petrescu, 본명은 Mira Anca Victoria Mărculeț Petrescu. 1949–2013)였다. 독재정권에 흔히 있는 낙하산도 아니고 의외로 정상적인 콘테스트를 거쳐서 선정된 결과였다. 이 건축가는 이 콘테스트 당선으로 인해 출세길을 걷게 된다.

인민궁전 건축 공모전에서 뽑혀 유명해졌고 차우세스쿠의 도시 계획에 참여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도 했지만, 혁명 직후에는 시민들에게 차우세스쿠의 앞잡이라며 한동안 나쁜 취급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인민궁전이나 도시계획으로 인한 국민의 고충은 페트레스쿠의 잘못도 아니고, 페트레스쿠가 건축 인부들을 닦달하거나 한 적도 없었으나 그저 인민궁전의 설계자와 도시계획의 주역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끄나풀이자 악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엔 좀 사정이 나아져서 대 루마니아당(Partidul România Mare)[6] 소속 국회의원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재직했으며, 인민궁전 관련 해외 다큐나 방송 등에서 관련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으나 2013년 8월 5일에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동년 10월 30일에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4. 건설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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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1일 건설사진

부지는 지진으로 인해서 피해가 컸던 옛 도심을 기반으로 몰수 및 철거하여 시작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인민궁전 자체는 언덕 위에 지어졌는데 그 언덕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을 7km 가량을 밀어내 그동안 살던 4만 명을 강제로 퇴거시켰고, 터를 닦기 위해 성당 20곳과 유대교 회당 6곳을 포함한 1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주거 지역이 철거되었으며,[7] 인민궁전의 건설에만 국가 예산의 1/3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인민궁전과 함께 계획되어 건설된 게 인민궁전 옆에 위치하는 루마니아 학술 아카데미 건물[8] 그리고 정면에 위치하는 광장과 그 양 옆의 당원용 아파트 건물, 그리고 상젤리제 거리를 본따 만든 중앙 대로[9], 국립 역사 박물관,[10] 새 대법원[11] 등이 계획되었다.

1983년에 착공된 후 1984년 6월 25일에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이 건물을 짓기 위해 무려 7㎢나 달하는 부쿠레슈티의 구 시가지가 철거되었고, 4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당했다. 공사 현장에서는 인부 2만~10만 명과 루마니아군 병사 5,000명이 근무했는데, 이 노동자들은 서로 교대되며 24시간 내내 일해야 했다. 군인들을 건설에 동원했기 때문에 전체 건축비에 비해 인건비에 들인 돈은 별로 없었다고 하며, 이는 자유로나 북한의 상당수 건축물과 비슷하다.

거의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산을 썼지만,[12] 니콜라에 발체스쿠[13] 홀의 문에 사용하는 목재만은 콩고민주공화국(당시에는 자이르)의 독재자였던 모부투 세세 세코[14]가 선물해준 콩고민주공화국산 마호가니 나무를 썼다. 다른 목재들은 전부 다 자국산 참나무 체리나무를 사용했다. 1989년까지 들인 건축비용은 17억 5천만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는 2022년 가치로 42억 달러(약 5조 7천억 원)이다. 참고로 1989년 기준으로 루마니아의 전체 GDP가 421억 1천만 달러였으니, 차우셰스쿠는 나라 GDP의 무려 4.1% 정도를 건물 건설에 쏟아부은 것이 된다![15][16] 즉, 인민궁전을 적당한 규모로 건설하고 남는 부분을 복지와 공공서비스같은 민생에 썼으면[17] 차우셰스쿠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다는 얘기다.

5. 미완공

원래 완공 예정 기간은 1986년이었으나, 차우셰스쿠가 처형 당할 때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차우셰스쿠는 건설 현장에 방문해서 직접 지시를 내릴 정도로 이 건물에 애착(?)을 들였으나, 정작 차우셰스쿠는 이 건물을 하루도 이용해보지 못하고 1989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총살당해 죽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건설은 중지되었다.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는 대부분 완성했고 마치지 못한 부분은 외관과 정원, 내부를 꾸미는 미술품과 가구 등의 내장 정도였다.

당시에는 거액의 돈을 들여 건설했던지라 아예 안 쓰기에도 뭐했기 때문에, 명칭만 개명한 채로 그대로 쓰기로 하여 1994년부터 루마니아 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이외에는 관광과 장소 대여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건물이 워낙 거대해서 남는 공간이 많고 수리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가 민간 기업 오피스로 이용되기에도 애매해서 애물단지다.

6. 여담

7. 관련 문서


[1] 이 중 4층만 사용한다. [2] 건설 당시에는 펜타곤에 이어 세계 2위였다. [3] 때문에 매년 건물이 5~6mm 정도 땅에 가라앉는다고 한다. [4] 사실 1980년대 루마니아의 경제침체도 이러한 대지진과 연관이 있다. 부쿠레슈티 대지진이 터지기 직전시기인 1970년대 초중반은 차우셰스쿠의 기행 및 악정으로 인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고도경제성장으로 자가용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고 해외여행도 일반화되었을 정도로 루마니아인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절이었다. 대략 한국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중반 정도의 분위기였으나 오일쇼크로 수출이 줄어들며 점차 외채가 늘어나던 참이었는데 대지진으로 인한 복구비용으로 외채를 추가로 빌려야 했고, 또한 당시 미국에서 고금리 정책을 펼쳤는데 이자율도 급속히 올라가며 체감 외채는 더욱 많아졌다. 결국 1980년대 내내 루마니아는 빚갚느라 경제가 침체되었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그 후유증은 90년대 말까지도 지속되었다. [5] 이와 비슷하게 로마 대화재 네로 황제도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휴양지에서 전차를 몰고 로마로 달려가서 화재 진압을 손수 진두지휘했지만, 도시 재건 과정에서 화재로 폐허가 된 곳에다 '황금 궁전'처럼 자기 취향에 맞는 건축물을 짓는 부적절한 처사를 보이면서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와전되었다. [6] 루마니아의 극우정당이다. 1992년 총선때 처음으로 원내 진출한 이래 2008년 총선 직전까지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연립정권에 참여해보기도 했고 특히 2000년 총선에서 거의 20%에 달하는 득표를 기록했던적도 있지만 2003년을 기점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2008년 총선 때 군소정당이 되었다. 참고로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향수를 대놓고 내세웠던 정당이 이 정당이었다. 루마니아 사회민주당는 공산당 후신 정당이었지만, 까놓고 말해 차우셰스쿠를 내다버려서 처형시킨 사람들의 정당이었고, 타 우파정당들도 차우셰스쿠 처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을뿐, 역시 차우셰스쿠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대루마니아당은 그런것이 없어서 거리낌없이 차우셰스쿠에 대한 향수를 내세웠던것이었다. [7] 이 와중에 차마 밀 수 없었던 수도원 건물은 통째로 옮겼다고 한다. [8]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무식했지만 독재자의 부인이었기때문에 학술원장이었고 이 때문에 함께 건설되었다고 한다. 물론 엘레나는 이 건물을 이용해보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9] 총연장 3.5km에 폭이 92m에 달했으며, 도로 중앙 분리대에 40여개의 대리석 분수를 심으려고 했다. 물론 완성되지 못했다. [10] 이쪽은 건물의 전면만 세워졌다. [11] 부쿠레슈티 외곽에 있는 18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을 불도저로 밀면서까지 세우려고 했지만, 시공조차 하지 못했다. [12] 루마니아는 질 좋은 시멘트와 대리석이 나오는 국가이니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민궁전에 사용된 목재는 95% 이상이 루마니아산이었다고 한다. [13] Nicolae Bălcescu, 1819~1852. 루마니아의 혁명가, 역사학자, 작가. [14] 참고로 모부투는 적어도 부정부패 면에서는 세계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독재자다. 항목 참조. [15] 참고로 부르즈 할리파 건설에 든 금액의 총합이 40억 1천만 달러였으며, 롯데월드타워 건설에 든 금액은 3조 8천억 원~4조 2천억 원 정도였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쓰인 돈이 당시 한국 GDP의 1.5%, 4대강 정비 사업에 쓰인 돈이 당시 한국 GDP의 1.6%, 아폴로 계획에 쓴 돈이 당시 미국 GDP의 1.8%, 인민궁전도 능가하는 희대의 괴작 류경호텔 건설에 쓰인 돈이 당시 북한 GDP의 2.9%(이것도 미완성이라 예정보다 훨씬 적게 든 돈이며 완공되었으면 당시 북한 GDP의 5.7%가 들어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1988 서울 올림픽에 든 돈이 당시 한국 GDP의 3.9%, 마셜 계획에 쓴 돈이 당시 미국 GDP의 5.3%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겨우(?) 지하까지 합해 20층짜리 건물 건설에 이 정도 비율의 거액을 들였다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인민궁전을 지을 당시 루마니아는 2차 대전 종전 후 변함없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은 커녕 전술한 마천루를 지은 두바이, 대한민국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그런 거액을 쏟은 것이다. [16] 심지어 고베 대지진의 피해액이 당시 일본 GDP의 3.6%였다. [17] 이 당시에 예산안의 상당수를 외채를 갚는데 썼는데 그 여파로 민생 예산이 감축되어서 식량도 상당부분 배급으로 해결하고, 전기도 하루 몇 시간씩 끊기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거기에 이 시기에는 '전력난'을 이유로 평일 TV 방송 시간도 단 2시간에 불과했다. [18] 위사진에서 정면의 붉은 카펫이 깔린 위층이다. [19] 옆나라인 헝가리 수도. 양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서로 싸운데다가, 영토 분쟁이 있어서 상당한 앙숙이다. [20] 실제로 위키 문서에 따르면 "In 1990, Australian business and media magnate Rupert Murdoch wanted to buy the building for US $1 billion, but his bid was rejected."라고 쓰여있다. [21] 그래도 하도 넓다보니 50분 가량 걸린다. [22] 대부분의 큰 양탄자들은 여러 개를 이어붙였다. [23] 공교롭게도 차우셰스쿠가 가장 존경한 독재자가 바로 김정일의 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그래도 인민궁전의 경우 지상 12층 중 4개 층이 의회로 사용되고 있지만 류경호텔은 약간의 유지보수 정도를 빼면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는지라 후자가 훨씬 비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