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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사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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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0000><colcolor=#fff> 닌텐도 제4대 대표이사 사장
이와타 사토루
岩田聡 | Satoru Iwata
파일:이와타 사토루 GDC.jpg
출생 1959년 12월 6일
홋카이도 삿포로시
사망 2015년 7월 11일 (향년 55세)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싯포로시립 마코마나이아키라 소학교 (졸업)
삿포로시립 마코마나이 중학교 (졸업)
홋카이도 삿포로 미나미 고등학교 (졸업)
도쿄공업대학 공학부 (정보공학 / 학사)
직책 HAL 연구소 대표이사 사장 (1993년 ~ 2000년)
닌텐도 경영기획실장 (2000년 ~ 2002년)
닌텐도 대표이사 사장 및 CEO (2002년 ~ 2015년)
소속 HAL 연구소 (1980년 ~ 2000년)
닌텐도 (2000년 ~ 2015년)
서명 파일:이와타 사토루 서명.svg
1. 개요2. 상세3. 경력
3.1. HAL 연구소
3.1.1. 입사 초기3.1.2. 대표이사 취임 이후
3.2. 닌텐도
3.2.1. 사장이 묻는다
4. 사망5. 평가6. 어록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프로그래머, 닌텐도의 제4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를 이어 2002년 5월 24일에 사장이 되었다. 별명은 ' 야쿠자'인 야마우치 히로시에 이어서 '인텔리 야쿠자'다.

2. 상세

파일:이와타_1983.jpg
1983년 HAL 연구소 입사 2년차 프로그래머. 당시 24세였다.[1]
파일:이와타_2001.jpg
파일:Iwata-2.jpg
2001년 닌텐도 경영기획실장 당시 2010년 6월 15일 E3에서
파일:이와타_2015.jpg
2015년 6월 23일 생전 마지막 사진[2]

1959년 12월 6일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그의 아버지 이와타 히로시(岩田弘志)는 홋카이도 무로란시의 4선 시장(1979~1995)을 역임했고, 본인 역시 명문 도쿄공업대학 정보공학과 출신의 엘리트다. 어린 시절 HP의 전자계산기에 흥미를 가져 신문배달 끝에 구입해서 프로그래밍을 마스터하고, 대학에 갔을 때는 이미 다 아는 것만 가르치고 있어 시시해질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컴퓨터 고수들이 모인다는 세이부백화점 전자상가에서 죽치던 와중, HAL 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대학 졸업 후 그대로 HAL 연구소에 취직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벤처기업이었던 HAL 연구소가 부모님 성에는 안 찼는지 그의 아버지는 6개월 동안이나 아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에 ' 게임은 어렵고 복잡해선 안 된다. 게임은 만인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어서 그가 닌텐도의 사장이 된 이후 닌텐도는 저연령층과 고연령층은 물론, 여성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게임을 주로 제작하여 게임인구 확대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젊은 코어 게이머들은 닌텐도의 이런 모습을 딱히 반기지 않아서 그가 취임하고 난 이후의 닌텐도 게임기 유저층 조사를 보면 초등학생층은 매우 두텁지만 이후 점점 줄어들다가 고교생 이후로는 반토막이 나고, 30대 이후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3][4]
파일:attachment/79fe8d65.png
파일:attachment/2012y08m29d_20000199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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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IMGP3562.jpg
파일:attachment/20130531200115_cs1w1_638x389.jpg
파일:external/www.nintendo-insider.com/satoru-iwata-puppet.jpg

여담으로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직접(直接)"[5]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의 상징. 닌텐도 다이렉트 등에서 자주 써먹는다. 참고로 이걸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따라하려다가 2번씩이나 포기했다. 영어 다이렉트 때는 "Directly"라고 한다. 닌텐도 스위치에 이와 관련된 이스터에그가 존재했었다.[6][7]

2013년 8월 7일 10월 29일의 닌텐도 다이렉트에서 대합주 밴드 브라더스 P를 소개하기 위해 직접 보컬로이드가 되었다.[8]

2014년 2월에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재팬 아시아, 일본 마이크로소프트 지사 대표와 함께 공동으로 자녀 보호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2014년 5월 2일에 공개된 일본 다이아몬드誌와의 인터뷰에서 닌텐도 다이렉트가 해외보다 먼저 일본에서 퍼진 큰 이유 중 하나로 니코니코 동화를 꼽으며, 처음에는 니코동에서 자기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로 꼬투리를 잡거나 조롱하는걸 꽤 복잡한 마음으로 봤지만, 이것도 포함해서 "전달하는 것이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한단 것은 이런 것인가?"라고 느끼게 되고, "이런 일을 하면 즐겁게 해 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장난기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9][10][11] 그 결과, 위에 나온 자신의 레고 3D 모형이나 역전재판 시리즈 이의 있음! 패러디한 일러스트를 채택하는 등으로 베리에이션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 기어이 닌텐도의 E3 2014 홈페이지에서는 대문부터 등장해 '직접'을 시전한다. E3 2015에서는 머펫 버전이 본인 대신에 등장했다.
파일:external/www.siliconera.com/iwata_bananas_thumb.jpg
파일:external/808eecc7f9e9c8e75e9d6951cd7b5a8a679132431f7b15aac858cfbc83c3e0de.jpg
E3 2013년 때 바나나를 들고 있는 모습도 유명한 짤이다. 동키콩 컨트리 트로피컬 프리즈 공개 당시 모습. 영미권에서는 게임의 출시일이 미루어지거나 지연될 때 하는 말 "Please understand...(이해해주세요...)"도 유명하다.

슈퍼 닌텐도 월드를 비롯한 닌텐도의 IP 확장정책은 이와타 사토루와 미야모토 시게루가 10년이 넘는 논의 끝에 내린 결론으로, 여전히 이와타 사토루의 영향력은 닌텐도에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아들 1명이 있으며, 아들 또한 아버지를 닮아 골똘히 생각을 할때마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3. 경력

3.1. HAL 연구소

3.1.1. 입사 초기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HAL 연구소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졸업 후 정식 입사. 당시부터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의 일화로 당시 후지모토 켄이라는 고교생이 자신이 만든 PC-8001용 사운드 보드와 프로그램을 들고 팔아줄 곳을 찾다가 HAL 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데, 해당 고교생이 몇 주간 힘들게 만든 프로그램을 단 며칠만에 깨끗하게 고쳐쓰고 숨겨둔 커맨드까지 발견하여 '응 지웠어' 라고 해주는 등 이 창창한 고교생이 대학생이 되어서도 '프로그래머는 다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엔지니어에 맞지 않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12]

이와타는 HAL은 물론이고 닌텐도에 있어서도 구세주같은 존재였는데 당시 패미컴의 CPU였던 모스 테크놀로지 6502는 닌텐도는 물론이고 일본 안에서도 도쿄대와 교토대의 몇 명만이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풍문이 돌았을 정도로 제대로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머가 적었는데[13], 이와타가 대학시절 30만엔을 들여 구입했던 기기인 코모도어의 PET2001의 CPU가 6502였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새파란 24세의 청년 이와타는 당시 HAL의 출자회사의 연줄을 이용하여 닌텐도에 자신을 소개하고 무언가 만들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닌텐도는 흔쾌하게 개발킷을 들려보낸다. 이와타는 그때까지 기술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던 닌텐도의 기획들을 실제로 만들어내며 소프트하우스도 못한다는 패미컴용 골프를 비롯하여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낸다. 또한 이와타가 패미컴용으로 이식한 벌룬 파이트아케이드용보다도 더 매끄럽게 움직이자[14] 오히려 닌텐도에서 배우러 왔을 정도. 당시의 노하우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수중 스테이지에 적용했다고 한다.

"프로그래머는 'No'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기획서에 적혀 있는 대로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최대한 원 기획서에 제시된 것과 가까운 모양으로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게임 제작 과정에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더라도, 프로그래머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그 아이디어는 결국 채택되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견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해보면 시행착오 끝에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었던 일도 많았다고 한다. 다만 밑에 있는 인터뷰 링크에도 있지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아니고 '주어진 시간 안에는 그렇게 만들 수 없다'는 말은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 문제로 불가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15] 실제로 그동안 다른 회사라면 구현하기 힘들다며 반려되던 여러가지 기획들을 성공적으로 구현시켰다. 이처럼 완전히 코딩덕후라 사장직에 올라서 일선에서 멀어졌을 때도 취미삼아 프로그래밍을 하려고 휴일에 혼자 출근했을 정도라고 한다. 단순한 워커홀릭일 뿐만 아니라 작업하는 속도도 남들과 확연히 달랐는데, 한 개발자는 "키보드에서 '탁탁탁'이 아닌 '드르륵' 소리가 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라는 말을 남겼는가 하면, 닌텐도가 주문한 벌룬 파이트를 개발하고 있을 때 방문한 요코이 군페이가 요청한 수정 사항을 그 자리에서 다 고쳤다라는 일화도 있다.

이와타는 MOTHER 2의 메인 프로그래머였는데, 프로그램의 문제로 2년동안 개발되다 중단된 상태에서 그는 프로그래머 겸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시 스파게티 코드화 되어 손댈수가 없는 상태가 되자 "지금 이 상태로 계속하면 3년이 추가로 걸리지만, 처음부터 다시 나와 함께 개발을 한다면 6개월 이내에 완성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고 진짜로 게임을 싹 밀어버리고 6개월 만에 당장 출시가 가능할 정도로 완성을 시켜버렸다. 다만 내부에서 추가로 6개월간 좀 더 다듬자는 의견이 나와 총 1년 만에 출시되었다.

MOTHER 2의 개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제작 체계였다. 여러 대의 컴퓨터로 작업하면서 파일을 덮어씌운 뒤에 한 명의 리드 프로그래머가 소스 코드를 전부 다 확인하고 관리를 진행했는데, MOTHER 2의 문제점은 프로젝트가 사람이 관리할 수준을 넘어버리자 해당 부분을 담당하는 리드 프로그래머가 폭주한 나머지 빤쓰런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추가는 고사하고 해당 프로그래머가 맡았던 일마저 꼬일대로 꼬이고 어셈블리어 코딩도 엉망이 되어 접근조차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 것.[16] 그래서 이와타는 아예 게임을 갈아엎고, 우선 연구실간 퀵서비스로 직접 배달되던 데이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터넷 도입, 자연스러운 업무 교류를 위한 e메일 적용, 작업자 간에 소스 코드가 꼬이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당시에는 미국에서 태동한 신규 개념이었던 버전 관리 시스템을 적용하고 사무실 인사구조부터 분할 형식으로 바꾸는 등 작업 환경부터 바꾸기 시작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때의 버전 관리 시스템에 쓰일 기본 툴의 제작을 명령하고 적용했는데, 후에 다른 게임 회사에서 "버전 관리 시스템 이런 거 어떻게 만들었냐"라고 물어보자 "이와타 씨가 미국에서 배워 와서는 갑자기 이렇게 해보자고 들이민건데 시킨대로만 했더니 된거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불법 복제 방지를 위해 게임에다 색다른 장치를 하기도 했다.[17]

반면 MOTHER 3의 프로젝트 중지를 결정한 것 또한 이와타이기도 하며, 프로젝트 재개의 계기를 만든 사람도 이와타이다. 덕분에 2006년에 MOTHER 3를 발매할 수 있었다.

3.1.2. 대표이사 취임 이후

1992년에는 HAL 연구소가 파산하면서 닌텐도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이때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HAL 연구소를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내놓은 게 '이와타 사토루를 사장 자리에 앉힐 것'이었다.[18] 그 결과 당시 개발 이사였던 이와타는 1993년 3월에 HAL 연구소의 대표이사로 취임. 하지만 사장임에도 프로그래밍에 빈번히 참여하며 여러가지 게임 개발에 관여했다.

포켓몬스터 금·은의 개발에도 도움을 줬는데, 참고로 이때 이와타 사토루는 MOTHER 2를 개발하던 중 잠깐 놀러 간 거라고 한다. 당시 게임 프리크의 개발진은 게임보이 컬러의 롬 카트리지 용량 문제로 관동지방의 배경 맵, 포켓몬 스프라이트 등을 넣을 공간이 매우 적어 관동지방을 포기하고 성도지방 하나만을 주무대로 잡으려던 계획이었는데, 용량 문제가 해결되면 관동지방을 넣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이와타 사토루가 자기 프로젝트는 할 만큼 하고 퇴근 후 남은 시간 동안 짬짬히 혼자서 열흘만에 개선된 이미지 압축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면서[19] 관동지방이 들어갈만한 용량을 확보시켜 결국 기획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20][21] 2020년 7월에 이 소스코드가 유출되었는데, 1989년에 별의 커비용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98년 즈음에 최종적으로 고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포켓몬 스타디움의 개발에도 관여했는데,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의 전투 시스템을 닌텐도 64에 이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혼자서 일주일만에 어셈블리어 코드를 해석하여 C언어로 코딩했다. 심지어 그 때는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의 영어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지휘도 동시에 하고 있었을 때였다. 금·은 시리즈가 포켓몬스터 시리즈 최대 판매량인 레드·그린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이를 그래픽을 일신하고 컨텐츠를 추가해 리메이크한 하트골드·소울실버가 시리즈 역대 최고의 완성도를 가졌다고 극찬받는 것을 보면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명운을 혼자서 좌지우지한 것이다.

또한 동료인 사쿠라이 마사히로와 주말에 취미 삼아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훗날 스매시브라더스 시리즈가 된다. 여기서도 이와타 사토루는 프로그래머 역할을 담당했다. 모두 HAL 연구소의 사장 시절에 한 일로 당연히 업무외 시간에 한 일들이다. HAL 연구소 시절 이와타 사토루의 천재 프로그래머로서의 활약에 대한 자세한 증언들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3.2. 닌텐도

2000년에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스카우트로 닌텐도에 경영기획실장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2002년, 물러나는 야마우치 사장의 부탁으로 사장이 되었다. 사실상 HAL 연구소의 사장으로 앉힐 무렵부터 후계자감으로 찍어놨던 모양이다.[22] 사장으로 취임하기는 했지만 야마우치가 퇴임하면서 회사를 이사회가 공동으로 경영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간 덕분에 회사를 혼자서 좌지우지하던 야마우치만큼의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며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닌텐도의 광고탑으로 활동했었다.사장으로서 직접 닌텐도 다이렉트에 출연하여 뽐내는 예능감은 유카와 전무에 못지않게 강력했었다.

취임 후 NDS & Wii의 폭발적 성공 때는 비교적 조용한 경영을 하였으나, 시장 상황이 바뀐 3DS & Wii U 때는 전면적으로 나서 마케팅에 열을 올리기도 했었다. 다만 닌텐도 3DS는 나름 이름을 날렸으나 Wii U는 사실상 실패작이라고 단언하고 새 콘솔을 서둘러 준비하게 되어 8세대 게임기 시장의 황혼기에 늦지 않고 발매할 수 있었다.

닌텐도를 왕조에 비유하면 창업군주의 뒤를 이은 수성군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경영자였다.[23] 실제로 2000년 입사 이후 동물의 숲 초기작을 내부에서 평가 기간 개발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원들이 게임의 상품성을 의심할 때 유일하게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며 호평을 해준 인물이며 실제로 동물의 숲은 닌텐도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이런 면모들을 보면 게임 개발자로서 능력도 우수했지만 경영자로써 게임의 가치에 대한 평가 능력이 굉장히 높았고, 이 부분이 닌텐도라는 거대한 게임회사의 수장으로 야마우치가 자리를 넘겼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와타 사토루라는 인재가 있기에 야마우치는 닌텐도의 세습 경영을 포기한 셈이며[24] 실제로 닌텐도는 Wii, DS시절 이와타의 경영 아래 다시 전성기에 돌입했다. 비록 Wii U시절 흔들렸지만, 이와타 사장의 유작인 닌텐도 스위치가 사후 1억 5천만대에 달하는 엄청난 판매량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닌텐도를 다시금 일으켜세웠다. 이처럼 CEO로서 이와타는 성공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으니 야마우치의 인재를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3.2.1. 사장이 묻는다

역대 《사장이 묻는다》인터뷰 목록

이와타 사장이 직접 닌텐도나 관련 기업의 크리에이터들을 상대로 게임 개발의 비화라든지 에피소드들을 인터뷰하는 항목. 한국닌텐도의 홈페이지에도 정식 발매한 게임을 다룬 인터뷰는 번역되어 올라왔다. 사장이 직접 직계 하부 팀에게 가서 묻기도 하고 이와타 자신의 개발 경험을 말하며 공감을 하는 등 다른 개발자 인터뷰하고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여러모로 게임 개발자 출신이어서 가능했던 컨텐츠.

게임센터 CX에선 이 컨셉을 살려서 과장사장 특집이란 이름으로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벌룬 파이트에 도전하면서 게임 개발의 뒷이야기를 말하는 등 양쪽의 컨셉을 적절하게 믹스한 느낌.

4. 사망

파일:external/iwataasks.nintendo.com/in-memoriam.jpg
<사장이 묻는다> 한 편 한 편이 그가 별세한 후에도 친애하는 우리의 동료, 친구이자 멘토인 이와타 사토루를 생각나게 한다.
- 닌텐도 <사장이 묻는다> 페이지
마지막으로 출연한 2015년 4월 1일 닌텐도 다이렉트
GDC의 추모영상

[해외통신원리포트] 일본인 울린 게임업체 사장의 죽음, 이데일리, 2015-08-03[25]

2014년 6월 건강진단에서 담관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요양을 거쳐 동년 10월 경영방침 설명회를 통해 복귀했는데, 이후 닌텐도 다이렉트에 불참하거나 살이 빠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등 병세가 나빠졌다. 2015년 E3 때는 조금 좋아진 모습을 보여[26] 팬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E3가 끝난 다음달인 7월 11일에 향년 55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임으로는 미야모토 시게루, 다케다 겐요가 거론되었으나[27] 최종적으로는 키미시마 타츠미로 결정되었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암으로 병사하기 전까지 사장으로서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자기가 치우는 마음으로 닌텐도 스위치의 개발에 앞장서서 지도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의 많은 게이머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으며 트위터에서는 #ThankYouIwata란 해시태그가 월드 와이드 트렌드에 올라가기도 했다.( #) 소니를 비롯하여 많은 게임 회사에서도 애도를 표하였고( #), 마인크래프트의 아버지 마르쿠스 페르손 등 게임계의 유명한 인물들도 애도를 표하였다. 동년 진행된 Games Done Quick에서 크로노 트리거 관련 Donation Bid 중 크로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정하는 투표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Iwata가 1위를 차지했다. Wii U용 게임 스플래툰 내의 스플래툰 광장에서는 이와타 사장을 추모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28] 더 게임 툰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만화를 올렸다.[29] 그리고 미국, 캐나다, 러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각국의 주 일본 대사관들에서도 임시분향소를 차리는 등 해외에 나간 일본 외교관들도 이와타의 사망을 애도했다.

이후 7월 13일에는 닌텐도 본사 건물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는데, 팬들은 이를 보고 이와타 사토루가 무지개 로드를 건너 천국으로 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관련 팬아트: #1 #2)

한국에서도 부고와 관련된 여러 기사가 나왔으며 그중에서도 한국일보에서 대략적인 발자취를 보도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30] 여담으로 2015년은 닌텐도의 대표적인 게임 중 하나인 마리오 시리즈가 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이와타 사토루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코드네임 NX에 숨은 뜻을 알 길이 사라졌다. 본인만 아는 정보라서 후임자인 키미시마 타츠미도 모른다고 했다. 그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NX란 이름을 함부로 정하기 난해해서 다른 이름으로 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으며, 실제로도 닌텐도 스위치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가설일 뿐이지만 닌텐도 스위치가 보여주는 포지션을 고려할 때, 거치형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를 '크로스(X)' 시킨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즉 닌텐도 크로스(Nintendo Cross)로 여기자는 뜻이다. N을 닌텐도, X를 크로스로 치환하면 아주 그럴싸한 논리가 태어난다. Wii U에서 선보였던 화면이 매립된 형태의 컨트롤러를 닌텐도 스위치로 가는 과도단계의 기기라고 가정해본다면 Wii U에서 좀 더 진화된 형태인 닌텐도 스위치를 떠올리며 이러한 코드네임을 부여했을 것이라는 점이 납득이 된다.

이후 4년이 지난 2019년 7월, 그에 관하여 일간 이토이 신문과 사장이 묻는다에서 나온 발언들을 정리한 책 《이와타 씨》가 출간됐다.[31] 2021년 6월 1일에 한국에서도 《이와타씨에게 묻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32][33]

5. 평가

"Iwata san is one of the few giants in the game industry who not only believe we needed to make games more appealing to non-gamers, but also the one who have shown us how it could be done. He will be missed by those who love video games to heart and those who want to spread their love to others."

이와타 씨는 게이머가 아닌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것을 넘어, 그 방법까지 보여줬던 게임 산업의 몇 안 되는 거장 중 한 명입니다. 이와타 씨는 진심으로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 제노바 첸[34][35]
"One of the most overused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is "unique". That's what all of us want to be, in some level or another, but very few of us truly are. Mr. Satoru Iwata is one who clearly was unique, in the fullest meaning of the word."

영어에서 가장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독특하다"(unique)입니다. 다들 어느 정도는 독특해지고 싶어하지만, 진정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이와타 사토루 씨는 그 단어에 걸맞게 정말로 독특했던 사람입니다.
레지널드 피서메이, 2015 더 게임 어워드에서 #

6. 어록

[ruby(直接, ruby=ちょくせつ)]! / Directly to you!
직접!
- 이와타 사토루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상징.
On my business card, I am a corporate president.
In my mind, I am a game developer.
But in my heart, I am a gamer.
명함 속의 저는 한 회사의 사장입니다.
제 머릿속의 저는 게임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의 저는 게이머입니다.
-2005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영상[36]
'불가능을 가능하게 보여주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혁신입니다. 제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찻잔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달리 보이듯이 말이죠.
- “게임하나 개발에 20년… 아이디어 꽃피우는데는 기다림 필요”, 동아일보, 2009-12-17
단 한 번도 아이들이 닌텐도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좋은 제품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Nintendo’s CEO Satoru Iwata played by his own rules, CNN BUSINESS, 2015-07-13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새로운, 그리고 기존의 플레이어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게임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한다.
- 11 Memorable Satoru Iwata Quotes, IGN, 2015-07-14
만약 그 게임이 정말로 흥미롭다면, 오직 그 하나의 게임만을 위해 사람들은 하드웨어를 구매할 것이다.[37]
- 출처
우리는 소니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싸운다.
- Wii Will Rock You, Fortune, 2007-06-04
어떻게 우리가 회사를 운영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닌텐도는 확고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우선적으로 '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내가 봤을 때, 다른 콘솔 회사들은 일단 자신들을 테크 기업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 Gamecube to debut Nov. 5, CNN Money, 2001-05-16
최선을 다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없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운이 좋을 때는 행운에 감사할 줄 알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반성하는 마음가짐을 회사 선배들로부터 배워왔다. 본래 행운을 잡기 위한 노력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만족하고 노력을 멈추기 마련이다.
- [닌텐도 해부] (下) 감성마케팅의 승리‥"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게 멈춰버린다", 한국경제, 2009-03-19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하면 닌텐도가 만드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생활 필수품은 아니다. 게임이 없어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지만, 그것이 꼭 비디오 게임이라는 법은 없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변신을 재촉했다. 고객의 불확실한 니즈에 빠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회사의 생존이 힘들기 때문이다.
- 단순함의 매력… 게임에 관심 없던 어른을 사로잡다, 조선비즈, 2008-12-18
엔터테인먼트란 사람을 '즐거운 의미'에서 놀랍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이 닌텐도가 가야할 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 닌텐도 신화의 주역 이와타 사토루 대표, 매일경제, 2008-06-12

7. 관련 문서



[1] 당시 MSX로 '홀인원'이나 'Hal Note' 등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었다. [2] 담관암 투병중이라서 머리숱도 적은데다 훨씬 수척하고 창백해보인다. [3] 그러나 Nintendo Switch의 출시 이후로 이런 약점도 해결되어가고 있다. 학생이 콘솔을 구입하기 힘든 현실상 10대 후반의 유저층은 매우 얇지만 일반적으로 코어 게이머층에서도 핵심으로 분류되는 20대 게이머 비율이 스위치가 출시하면서 크게 증가했다. [4] 이는 이와타 사토루 시절 기종들인 Wii 닌텐도 DS 같은 하드웨어들 자체가 성능은 물론이고 인터페이스가 일반적인 게임을 하기보다는 캐주얼한 게임에 맞춰진 하드라 제대로 된 게임을 원하는 코어 게이머들을 위한 게임이 출시되기 어려운 게임기기였으나 사토루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닌텐도 스위치는 하드웨어 성능도 준수하며 또한 컨트롤러도 Xbox 컨트롤러 듀얼센스와 같은 멀쩡한 포맷이며 일반적인 게임을 하기에 충분하게 나왔고 덕택에 일반 게임도 많이 출시되기 때문이다. [5] 일본어 발음으로는 쵸쿠세츠(ちょくせつ). [6] Hidden NES Golf game on Nintendo Switch. A tribute to Satoru Iwata [7] 닌텐도 스위치의 펌웨어가 4.0.0 으로 올라간 후에 해당 이스터에그는 삭제되었다. 그 이유는 해당 기능의 코드로 해킹을 할 수 있는 취약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8] [Nintendo Direct JP] Daigasso! Band Brothers P - Reveal Presentation [9] それからニンテンドーダイレクトというものが、海外より先に日本で世の中に広がった大きな理由のひとつに「ニコニコ動画」の存在があると思っているんです。「ニコニコ動画」では、自分が大真面目にしゃべっているところを、いじられたりからかわれたりするわけで、最初は私も正直なところかなり複雑な気持ちで見ていたんですけど、でもこれも含めて「伝えることがエンターテインメントに変わるとはこういうことか」と感じるようになり、そのうちに「こんなことをすれば面白がってもらえるのではないか」と茶目っ気をもって考えられるようになってきたんです。 [10] 任天堂だからこそできることは必ずある 市場調査では生み出せない前代未聞な商品を届けたい ――岩田 聡・任天堂社長インタビュー【後編】 [11] [3DS] 이와타 사장 인터뷰 (다이아몬드誌), 루리웹, 2014-05-02 [12] 任天堂社長・岩田さんの新入社員時代にいっしょに作ったDTMソフト, DTA STATION, 2011-01-12 [13] 당시 일본의 8비트 PC Z80을 채용한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당장 3대 기기라고 할 수 있는 NEC PC-8801, SHARP X1, 후지쯔 FM77 중에 Z80계 CPU가 아닌 건 FM77 시리즈 뿐이다. 3대 머신만큼이나 잘나갔던 MSX도 Z80계였고 마이너로 눈을 돌려도 PC고 게임콘솔이고 거의가 다 Z80계 CPU를 채용하고 있었다. 오히려 메이저급 기기 중에 6502계를 채용한 건 패미컴 뿐일 정도. 6502를 채용한 기기들 중 가장 성공한 애플 II는 일본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4] 일반적으론 아케이드용이 콘솔용보다 더 매끄러워야 정상이다! 아케이드 게임기는 장비 스펙부터 콘솔보다 앞서는데다 레이싱 게임용, 대전 게임용 등 장비를 게임 종류에 따라서 맞춤형으로 제작할 수 있지만, 가정용인 콘솔은 스펙 확장에 한계가 있고 동일한 규격의 장비가 여러 종류의 게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게임들의 콘솔판과 아케이드판 영상을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게임계 3D 열풍의 시작이었던 버추얼 파이터를 예로 들면, 1994년에 출시된 콘솔인 세가 새턴 버전이 1992년에 출시된 Model1 아케이드 버전보다 매우 뒤떨어진다. 다만 세가 새턴의 경우 설계에 오류가 있어 3D 게임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15] 사실 딱 여기가 기획자와 프로그래머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기획자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잘 모르니 프로그래머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정말로 안 돼서 그런 건지 되긴 되는데 귀찮아서(…) 그런 건지 판단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그래머도 기획에 대해 의도라든가 효용성에 대해 분간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와타는 기획자가 알고 싶어하는 구현 가능성과 작업 기간에 대해 명확하게 밝혔으니 협조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잘 지켰다고 할 수 있다. [16] 게임은 완성되었지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소스 코드의 순서가 사람이 관리할 수준이 아니어서 한마디로 심각한 커널 패닉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게임을 켰는데 정상 작동하지 않고 메인 화면이 깨지면서 초록색 화면만 나왔다고 한다. [17] [잡담] 원사운드 - 재미있는 불법복제 방지 TOP 11.jpg, 루리웹, 2015-01-11 [18] 사실상 이 때부터 야마우치 사장의 후계자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 원래 포켓몬스터 레드·그린의 이미지 압축 기술은 스프라이트의 명암을 총 4단계로 구분하는데, 이를 위해 하나의 스프라이트를 2개의 팔레트로 나누어,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은 양 팔레트에 공통으로 흑백으로 표기한 뒤, 두번째 밝기는 첫번째 팔레트에, 세번째 밝기는 두번째 팔레트에 흑색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구분한 뒤, 각 팔레트의 픽셀이 좌우 포인트 픽셀과 같은 색이면 흑색, 아니면 백색으로 다시 변환한 뒤, 완성된 팔레트 2개를 런 렝스 부호화 알고리즘으로 압축하는 시퀀스를 사용했다. 이걸 이와타 사토루는 다른 닌텐도 게임에서 사용되던 LZ 알고리즘을 이용한 새로운 압축 프로그램을 만들어 준 것. LZ 알고리즘은 순수한 런 렝스 부호화 알고리즘 보다는 압축 효율이 낮지만, 대신 보다 빠르게 이미지를 구현. 즉 스프라이트의 로딩 시간을 보다 짧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효율 측면에서 보면 어셈블리어로 재프로그래밍하며 최적화에 들일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용량 대비 효율이 높아진다. [20] 당시 카트리지 용량은 단 1MB. 절대 1GB가 아니다! [21] 최근 공개된 금은 특별체험판이 유출되면서 밝혀진 내용에는 원래 관동지방을 거대한 마을 하나로 압축해서 구현하려고 했던 흔적도 있었다. 금은의 평가가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본편의 2회차격에 해당하는 관동지방을 거의 똑같이 구현하여 플레이타임도 재미도 보장해줬다는 점이 컸는데, 이와타의 이러한 개발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2] HAL 연구소 시절 일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훌륭한 개발자였던 것만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고쳐 해결한 것도 있었던 만큼 경영자의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실무와 경영에 둘 다 능통했으니 ‘게임회사 닌텐도’ 를 창업한 야마우치 히로시의 뒤를 잇기에 충분한 인재였던 셈이었다. [23] 전임자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의 3대 사장이었지만 화투회사였던 닌텐도를 완구회사로, 이어 게임계의 거대제국으로 성장시킨 것이 야마우치이기 때문에 '게임회사 닌텐도'의 포석을 놓은 창업군주로 비유할 수 있다. 닌텐도는 야마우치 휘하에서 패미컴과 슈퍼패미컴으로 게임업계를 완전히 장악했고, 플스로 역전당한 이후부터 콘솔 시장에서는 야마우치가 은퇴할 때까지 PS2의 위상을 넘지 못했지만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완전히 집어삼켰으며,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이와타가 제2의 전성기를 이끌었기 때문에 닌텐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24] 전임 야마우치 히로시가 데릴사위로 닌텐도를 이어받았고, 그 전에도 계속 데릴사위로 가문이 승계되었다. 마침 닌텐도 아메리카의 사장인 아라카와 미노루 역시 사위인데다 그의 경영능력도 뛰어난 편인지라 그에게로 가문과 회사를 이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가족기업으로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꼈고, 이와타 사토루의 능력을 믿었기에 야마우치가 퇴진할 때 사위에게 사표를 받고 동반 퇴진하여 닌텐도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뀌게 된다. [25] 읽어보면 죽기 전 유언을 남겼다는데, 장례식을 조용히 치러달라는 거였다. [26] 사실 E3 2015 때는 인형극으로 진행해서 본인이 직접 등장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얼굴을 숨긴 듯하다. [27] 저 둘은 키미시마 타츠미가 공식적으로 사장직에 오르기 전까지 임시 사장직을 맡았다. [28] [WiiU] 스플래툰 광장 이와타 사토루 사장 추모 물결..., 루리웹, 2015-07-13 [29] [더게임툰] 故 이와타 사토루 특별편, 다스이즈게임, 2015-07-20 [30] "게임의 본질에 충실하라" 닌텐도 신화 이룩한 영원한 게이머, 한국일보, 2015-08-08 [31] [인터뷰] 전 닌텐도 사장 이와타 사토루씨의 말을 모은 책 '이와타 씨' 출간 결정!, 루리웹, 2019-06-25 [32] 한국판의 경우 책의 서문 등에서 원본과는 달리 생략된 문장들이 있다고 한다. 애당초 이 책은 이토이 시게사토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이와타 사토루를 추억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국내에서는 일종의 경제경영서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바람에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이는 문장들을 전부 생략해버린 것이 그 이유로 추측된다. 판매실적을 위해 멋대로 내용을 뜯어고치는 국내 출판업계의 민낯이 드러난 씁쓸한 사례다. [33] [일반] 편집자가 말하는 이와타씨 책, 디시인사이드, 2021-05-29 [34] Goodbye, Satoru Iwata: The video game industry remembers one of its best, Polygon, 2015-07-12 [35] 댓게임컴퍼니의 설립자이자 저니의 디렉터이다. [36] 이 발언은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발사들이 지나치게 기업화되거나 게임 내 재미를 추구하기 보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몰두하다가 게임을 망치는 사례가 계속 발생하면서 개발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37] 명작이 나올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콘솔 사(서라도 해)야겠네' 하는 소리가 도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다. 실제로 세기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은 닌텐도 스위치가 물량 부족으로 시달릴 때 스위치보다도 더 많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38] 2006년에 Wii가 발매되기 전 현 게임시장에 대해 본인의 관점을 적은 칼럼 [39] 총괄 프로듀서 명의로 스태프롤 맨 처음(1)과 맨 나중(2)에 이름이 올라온다. [40] 타카하시 테츠야의 작품인 점을 강조하며 이와타 사장의 지시로 명명되었다. 이후 제노 시리즈와의 연관성을 이어가게 되었다. [41] 금은버전에 관동지방이 구현될 수 있었던 압축 프로그래밍, FRLG의 무선 어댑터, 4세대 극장판 이후로 전통이 된 극장 내 무선통신 배포 등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해 준 거의 모든 요인들에 직접적으로 깊게 관여했다. 특히 무선 어댑터의 경우 닌텐도 DS의 엇갈림 통신의 기술적 기반이 되어 닌텐도의 사운을 크게 바꾼 기술 혁신이었다. [42] 12월 6일에 아이작이 사토루 이와타로 바뀌어 있다. [43]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 스위치와 함께 마지막으로 관여한 프로젝트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병원 안에서 원격으로 개발팀에게 피드백을 주었다고 한다. 사실 포켓몬 GO의 첫 공식 발표회 당시에 이와타가 이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했다는 걸 언급하였고 트레일러의 공개 직전 이와타를 짧게 추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발표자 중 한명이었던 미야모토 시게루 포켓몬 GO'게임인구의 확대'라는 회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또다른 한걸음이라 표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