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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7:02:36

압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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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압슬.jpg

1. 개요2. 시행 형태
2.1. 한국2.2. 중국2.3. 일본2.4. 서양
3. 압슬이 표현된 콘텐츠

1. 개요

압슬()은 죄인의 바지를 벗겨 바닥에 꿇어앉힌 상태에서 무릎과 허벅지 위에 벽돌이나 무거운 물체를 올리거나 널판지를 깔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서 압박을 가하는 형벌이다.

당하는 사람은 큰 고통이 지속하여 가해지는데다 도구를 이용하면 집행자가 계속 힘을 쓸 필요도 없기 때문에 편리하면서 자백도 잘 받아낼 수 있는 훌륭한 고문법으로 쓰였다.[1] 한국이나 일본 기록을 보면 "맞아도 자백하지 않던 놈이 압슬을 하니까 자백하였다."는 기록이 적잖다.

문제는 후술되었듯 워낙 고통이 큰 고문법이다 보니 시행하는 도중 죄인이 부상 및 극한의 고통에 의한 쇼크로 죽어버릴 확률도 높았고, 설령 살아도 무릎 관절과 다리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박살나서 남은 평생동안 걷는 것은 고사하고 자력으로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될 수 있었다. 이러면 신체 활동을 할 수 없으니, 전근대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는 이미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된다. 또한 유교 사회에서 다리가 완전히 불구가 되면 제사에서 절을 할 수가 없고, 조상에게 효도를 할 수도 없으며 제사를 못 지내니 상속도 받을 수 없었기에 그대로 폐인이 되는 혹독한 형벌이었다.

2. 시행 형태

2.1. 한국

고려 말부터 시행된 기록이 있으며 도자기 조각, 유리조각이나 사금파리가 널브러진 바닥 위로 죄인의 무릎 오금 사이에 굵은 나뭇가지나 기와 조각을 넣고 꿇어앉힌 뒤에 무릎 위에 널판지를 깔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타서 뛰거나 밟는 형식으로 실시되었다. 조선 태종 연간에 1차 시행에 2명이, 2차 시행에 4명이, 3차 시행에 6명이 올라타는 식으로 규정했는데 실제로 압슬은 기본 고문인 신장으로 정강이를 치는 형문을 여러 차례 집행한 이후에 시행하는 고문인 만큼 죄인이 대부분 2차 압슬까지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기에 3차까지 시행한 사례는 드물다.

워낙에 잔인한 고문이었던 만큼 영조 연간에 낙형과 함께 폐지되어 형문만 합법적인 고문 방식으로 남았지만 그 시대가 다 그렇듯 비공식적으로는 자주 행해졌다. 이런 비공식적인 집행의 경우 당연히 위에 서술된 방법 그대로가 아닌 변형이 가해져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무릎 밑에 추가로 사금파리 같은 이물질을 더 넣고 밟아버린다던가...

사극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의 고문 하면 주리틀기부터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주리 틀기는 명에서 수입되어 온 비공식 고문법으로 조선 초기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압슬이 본래 영조 연간에 폐지되기 전까지 형문, 낙형과 더불어 조선 시대 추국에 사용되던 정식 고문이었다.

고문 중에서도 워낙 가혹하고 후유증이 심각했기에 조선에서는 압슬형의 적용 대상을 중죄인만으로 적용하였고, 어린 아이와 노인에게는 압슬을 가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모든 고문과 형벌이 그러하듯 형벌을 적용할 수 없는 대상에게 불법적으로 시행하는 일이 있었다. 기축옥사 당시 동인 강경파 이발(李潑)의 가족들이 연루되어 심문을 받을 때, 무려 이발의 여든 살 넘은 노모에게 장형, 열 살짜리 아들에게도 압슬을 시행하여 결국 노모와 아들 모두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영조 즉위 직후인 영조 1년(1725년), 압슬형의 참혹함을 실제로 참관한 영조가 공식적으로 압슬형을 폐지하였다.

2.2. 중국

문헌상으로는 북위 선무제 연간에 돌을 사용해 불법적인 고문을 가하는 사례가 많기에 이를 자제시키라는 상소가 올라온 기록이 있는 만큼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온 고문으로 보인다.

2.3. 일본

이시다키(石抱き, '돌 끌어안기')라는 이름으로 시행했다. 빨래판같이 윗 부분이 뾰족한 각목을 여럿 합쳐놓은 판 위에 죄인을 꿇어앉힌 후 한 개당 약 45kg의 무게에 달하는 석판을 하나씩 올려놓는다. 석판은 5장부터 시작하는 게 기본이었고 심하면 10장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어 거의 500kg의 무게에 달하기에 당연히 여기에 눌린 무릎뿐만이 아니라 빨래판에 찍히며 으스러진 정강이도 시원하게 피떡이 되어 박살난다.[2]

2.4. 서양

서양에서도 비슷한 형이 있다. Peine forte et dure (Law French for "forceful and hard punishment") 라고 한다. 동양의 압슬형은 허벅지를 압박하는 형태지만 서양은 전신 특히 가슴을 압박하여 고문을 가했다. 죄인을 바닥에 눕히고 사지를 묶어 움직일 수 없게 하고 위에 문짝 같은 판을 얹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얹거나 사람이 올라타서 가슴을 압박해 숨을 쉴 수 없게 하거나 갈비뼈를 부숴 자백을 받아내는 형태. 대부분은 자백용 고문으로 행해졌지만 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한 예도 있다. 압사형이라고 부르는게 적절하다.

이런 사형의 예로는 유명한 것은 1586년 잉글랜드에서 성 마가렛 클리스로(St. Margaret Clitherow)의 처형. 잉글랜드 헨리 8세 치하에서 성공회(영국국교회)가 만들어지면서 가톨릭이 금지되었는데, 그녀는 여러 가톨릭 신부들을 숨겨주고 집에 신도들이 모여 비밀미사를 올렸다. 가톨릭 신부를 집에 숨겨주었다는 혐의를 받자 자백을 거부했지만 자식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유죄를 인정하고 처형당했다. 치안관이 고용한 4명의 거지들이 대신 집행하였다.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널린 돌밭에 눕히고 자기 집 대문 문짝을 떼어 몸 위에 덮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 압사로 사망. 1970년에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성공회 치하 잉글랜드의 로마가톨릭의 순교자이자 성녀로 시성되었다.

그 외 코끼리나 말의 체중으로 밟아 죽이는 형태도 있고 베트남이나 몽골에서도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3. 압슬이 표현된 콘텐츠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심지어 그 이전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주리틀기가 남발되는 관계로 압슬형의 경우 실제로 조선 시대에 정식으로 집행된 고문 방법임에도 표현되는 매체가 극히 드물다. 주리틀기야 워낙 많이 알려진 데다 연기와 화면 조정을 통해 보정하는 게 가능하지만 압슬은 시행 과정에서의 실수로 인해 진짜 다리가 눌리는 경우 배우 몸이 완전 망가지는 불상사가 터질 가능성이 있어서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여러 국문 장면에서 나오기는 한다. 문제는 압슬이 말 그대로 사람을 죽거나 불구로 만드는 형벌인데, 국문에서 압슬을 당한 사람들이 그 다음에 멀쩡하게 움직이는 묘사가 많다.

[1] 곤장이나 채찍 등 때리는 방식의 고문은 상대가 기절하면 일단 멈춰야 한다. 기절한 사람을 계속 때리면 자백 전에 죽을 수 있으니까. 즉 꾀병을 부려서 고문에서 벗어나기도 쉽다. 꾀병을 부려 고문 때 덜 맞는 비법이 죄수들 사이에서 돌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그리고 꾀병을 부려서 두들겨 맞는 고문은 잘 넘긴 죄수가 꾀병이 통하지 않는 압슬을 당하고 결국 자백했다는 기록도 있다. [2] 이 고문을 받는 도중 피범벅이 되고 정강이가 박살이 나 반병신이 되었는데 이에 황홀해하며 고통을 받아들이는 성향이 좀 아스트랄의 영역을 보여준 여인이 있어서 사면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3] 장희빈에서의 고문 장면은 초기에는 야외 대형 조사실에서 진행되는 장면도 있었지만 후기에는 주로 실내 소형 조사실에서 진행되는 장면이 많았다. [4] 로미오가 흑견 측의 승리를 선언하려는 심판을 막으며 줄리엣 페르시아와의 기마전을 신청했는데 대결 중에 로미오가 실수로 줄리엣의 가슴을 만지고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바람에 백묘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로미오는 리더 자리를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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