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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4:21:23

김진표(가수)


[[패닉(가수)|PANIC]]
이적
김진표

[ 음반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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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0px-패닉_4집_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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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IC
정규 1집
1995.10.01
정규 2집
1996.09.01
SEA WITHIN
정규 3집
1998.05.01
PANIC 04
정규 4집
2005.12.07
<colbgcolor=#353535><colcolor=#FFFFFF> 김진표
a.k.a. JP
파일:김진표 .jpg
예명 JP
본명 김진표 (Kim Jin-Pyo)
출생 1977년 8월 13일 ([age(1977-08-13)]세)
서울특별시 중구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78kg, A형
가족 아버지 김우옥[1], 어머니 고석주[2], 누나
배우자 윤주련(1982년 8월 2일생)[3]
아들 김민건(2008년 10월 16일생)
딸 김규원(2010년 5월 13일생)
학력 숭의초등학교 (졸업)
서초중학교 (졸업)
상문고등학교 (졸업 / 21회)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 / 중퇴)
경기대학교 (중퇴)
병역 면제 (부정맥)
종교 개신교
소속 그룹 PANIC
레이블 없음
데뷔 1995년 정규 1집 'PANIC'
SNS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4]
1. 개요2. 경력
2.1. 래퍼로서의 평가2.2. 디스코그래피
2.2.1. 솔로 정규 앨범2.2.2. 관련 영상
2.3. 필모그래피
2.3.1. 영화
3. 논란 및 사건 사고4. 레이서 활동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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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래퍼, 방송인, 기업인 그리고 전 탑기어 코리아 MC, 레이싱 드라이버. 문구로 유명한 한국파이롯트 공동 대표이기도 하다. 현 쇼미더머니 공무원

2. 경력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5년에 이적(본명 이동준)과 함께 패닉으로 데뷔했다. 초창기 김진표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패닉 활동과 리바이스 CF("난 나야!")이다. 원래는 이적이 솔로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앨범 다 만들고 데뷔하기 직전에 기획사에서 김진표를 끌어들여 듀엣 결성했다. 그래서 패닉 1집 앨범에서는 김진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당시 히트곡이었던 달팽이 방송분을 보면 노래를 부른 부분도 없고 하니 색소폰을 들고 있는 것이 다이다.[5][6]

패닉은 처음에는 타이틀곡인 '아무도'가 별 반응을 불러오지 못했지만, 후속곡 '달팽이'가 빵 떠버렸다. 진짜로 앨범 끝자락 트랙에 끼워넣기로 이적 혼자 부르는 노래였는데 그게 얻어걸렸다. 그런데 방송 무대에서 할 게 없었던 김진표는 이적 옆에서 색소폰을 부는 표정연기를 맡았다.[7] 그리고 이적한테 색소폰 손싱크 한건 니가 처음일 거라며 까였다 후속곡 '왼손잡이'는 원래 앨범 수록 버전에는 랩이 없었지만 김진표를 위해서 방송 활동을 할 때는 랩 파트가 추가됐다.

이렇듯 패닉의 깜짝인기로 큰 인기를 얻고 속칭 연예인병에 걸린 어린 김진표는[8] 아래에서 서술할 이런 저런 사고와 기행을 펼치고 다니고 간간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등 패닉의 트러블메이커로 자리잡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적이 녹음실에서 '너 계속 이렇게 살면 안된다. 이렇게 가다간 내가 너를 데리고 음악을 안 할 수도 있다. 나는 너 없어도 음악 할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있냐'고 직언을 날린 것에 충격을 먹고 각성하여 본격적인 래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9] 어찌보면 김진표를 아직 뮤지션으로 살게 해준 은인이 이적이 아닌가 싶다.

이후 패닉 2집인 '밑'에서부터 본격적인 자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mama와 벌레 두 곡을 썼는데, 과격한 내용으로 인해 두 곡 모두 가사가 잘려나가 버렸다.[10]

이후에는 솔로로 데뷔했다. 1집인 '열외'는 대한민국 최초로 전곡이 장르로 이루어진 앨범으로 알려져 있다.[11] 그런데 모든 곡이 힙합 장르는 아니었다. 타이틀 곡인 Fly - 왜 그렇게 사나요와 사랑해 그리고 생각해가 낮선 장르에도 불구하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한편 N.EX.T 멤버들과 노바소닉[12]을 결성하여 밴드로도 활동하였으나, 3집 발표 이후 건강 문제로 탈퇴한다.[13] 대표곡은 오락실 펌프 최고 인기곡이었던 ' 또다른 진심'(마지막 편지: 그것조차 거짓)과 '나쁜 여자', 'SLAM' 등.[14] 다만 나쁘게 탈퇴한 게 아니라 2010년에 재결합했을 때 몇몇 곡에 참여했고(전곡 참여는 아니다), 2021년에 다시 몇몇이 모여 신곡을 발매했을 때 다시 참여했다.

언급하듯 저 부정맥 때문에 노바소닉을 탈퇴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의외로 긴 공백기 없이[15] 2003년에 솔로 4집을 내고 2년 뒤에 패닉 4집으로 복귀했으며 그 해 4.5집 겸 베스트 앨범까지 내는 등 휴식기 없이 활동을 이어가다 2006년부터 이혼 등의 문제 때문에 반강제로 휴식기에 돌입해 2008년에 5집을 내기까지 휴식을 취했다.
이렇듯 한국 힙합 1세대로서의 족적이 있으나, 본인 말로는 자기는 그냥 랩퍼지 힙합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모양. 실제로 음악 스타일도 전형적인 힙합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초중반의 커리어를 펑키한 락 혹은 발라드(패닉)[16], 헤비한 락(노바소닉)을 하는 사람들과 보냈기 때문에 다른 힙합 랩퍼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다른 음악을 한다. 그래도 가장 오래 한국말로 랩을 한 축에 들다 보니 랩에 감정을 넣는 기술은 꽤 뛰어난 편이고, 은근히 힙합적인 트랙들을 선보일 때가 있으며, 힙합 뮤지션들과도 나름 교류를 많이 하는 편. 애초에 이 사람보다 일찍 데뷔한 래퍼는 손에 꼽기 때문에 당연히 힙합 뮤지션들과 친할 수밖에 없다. 후술하겠지만 패닉 전까지는 오로지 힙합만 듣던 사람이었고. 그러면서도 PC통신 등에서 신해철과 친했던 등 패닉 이후로는 락에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졌던 모양. 노바소닉 활동도 했었고…그래서 힙합 쪽 인맥과 락 쪽 인맥 둘 다 있는 편. 다만 노래는 잘 부르는 편이 아닌 모양. 패닉 3집 발매 후 출연한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레너드 코헨의 I'm your man을 딱 한번 부른 적이 있다. 고음불가에 가깝지만 저음이 굉장히 인상깊고 딕션이 좋은 편이다. 래퍼로써는 최고의 목소리를 가진 셈. 방송 진행력도 좋아서 방송에서 탑기어나 쇼미더머니 등에서 MC로 활동하면 호평을 자주 받았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도 간간히 맡은 적이 있다.

작곡 능력은 그리 없지만 작사는 평이 좋은 편. 특히 사랑노래 가사를 말랑말랑하게 잘 쓴다. 물론 3집 앨범 JP3와 5집 앨범 Galanty Show에서는 대놓고 가사가 시궁창을 시전하였다.[17]

김진표의 솔로 앨범 3집과 'JP STYLE'은 명반으로 꼽힌다.[18] 또한 패닉 3집 역시 명반으로 꼽히는데, 이전 패닉 앨범들과 달리 김진표가 전곡의 랩을 만들며 한 축을 확실히 담당하였다.

2003년에 현대홈쇼핑 쇼호스트 출신 동갑내기 여성과 결혼했으나 2006년에 전격 이혼했다. #[19] 그 뒤 2008년에 5살 연하의 연기자 윤주련[20]과 재혼했다. 이후 아들[21]과 딸[22]을 얻고 잘 살고 있다.

이후 2009년 12월에 싱글 앨범으로 로맨틱겨울을 발표했는데, 피처링이 SG워너비 김진호이다.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했고 SG워너비 팬들에게는 김진호의 창법 변경 이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10년에 노바소닉이 Metamorphosis 앨범으로 잠시 재결합을 했을 때 랩 파트에 일부 참여했으나 일회성으로 끝났다.

2011년에는 탑기어 코리아에 고정출연하게 되며 음악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2014년의 쇼미더머니3부터 전속 MC로 출연중이다.

2015년 12월 18일 2년 2개월 만에 신곡이 나왔다. 곡명은 '산타처럼'. 곡 음원에 재규어 F-타입 엔진 배기음과 깜빡이 소리가 나온다. 곡은 브랜뉴뮤직 를 통해 나왔지만 블로그에서 브랜뉴 소속이 아니며 그냥 라이머 와 친한 사이고[23] 종종 싱글곡은 앞으로 브랜뉴를 통해 발매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좋은 가사가 생각나서 라이머에게 곡 하나만 주라고 부탁하면 80개(…)정도를 보내준다고. 거의 작곡 공장 수준이라고 한다. 곡 설명 등 출처

2019년 12월 12일 유튜브 채널 탑기어 코리아에 업로드 된 포르쉐 타이칸 영상에 출연했다. 영상

2021년 오랜만에 가수로 컴백했다. 노바소닉에 객원 멤버로 참여해 앨범 선공개 곡인 'More Money'를 불렀다.

이적에 의하면 방송 활동에 거의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듯. 돌팔매 피쳐링 후 유희열의 스케치북엔 나왔지만 라디오 스타에서 이적이 같이 나오자 했음에도 거절했고, 쇼미더머니 말고는 방송 활동을 그다지 하지 않으려는 듯 하다. 가수 활동도 복귀는 했다지만 8집은 감감무소식이고.

2.1. 래퍼로서의 평가

정박으로 딱딱 떨어지는 플로우로 인해 귀에 가볍게 들어오는 랩이긴 하지만, 재미없고 밋밋하다는 평하는 리스너들도 많은 편이다. 김진표 2집의 수록곡 중 '진표생각 1'의 훅인 '나는 싸가지가 너무 바가지 힙합바지 입고 나가지'는 지금도 김진표를 조롱할 때 종종 인용되는 가사이다. 다만 '진표생각'은 버릴 가사와 라임을 모아 만든 쓰레기통 같은 곡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싱글 발매가 아니라 앨범 발매였기 때문에 이런 구성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인도 이런 점을 알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억지라임의 황제"라고 지칭한 가사를 쓰기도 했다.[24] 영어 라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특징. 7집쯤 와서는 훨씬 유려한 라임을 선보이며 이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단어를 배치한다.

그러나 올바른 평가를 하기 위해서 상기해야 할 점은 김진표가 한국 힙합씬 초창기 랩에 있어 rhyme이라는 요소를 알리고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는 어떤 고평가를 해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첫 개인 정규앨범을 냈던 년도가 무려 1997년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당시 엄청난 혁신이었던 김진표의 랩과 라임이 하나의 기틀이 되었기 때문에 타도대상이 되어 엄청난 분석을 당하면서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25]

이현도-김진표- 조PD 시절 그들의 랩 스킬을 엉터리였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어로 랩 가사를 라임-플로우 형식으로 제대로 쓰기는 힘들다" 라는 인식이 굉장히 팽배했기 때문에, 이현도는 정말 어찌어찌 시도만 했던 실험적 상황이었고, 조PD는 유학파라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어로 쓰다가 안되면 그냥 영어랩으로 넘기기도 했다. 그런 고로 김진표의 라임 방식(이른바 단음절 라임)을 지금 관점에서야 까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금의 라임-플로우의 체계가 어느 정도 갖춰진 게 버벌진트- 데프콘- 피타입의 SNP 및 마스터플랜 때이고 그들이 이 단음절 라임을 까면서 주목받았지만, 그 모든 비판이나 현재 랩의 체계 역시 마찬가지로 김진표가 세워놓은 토대 위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20년대 유명 랩퍼인 정상수를 예시로 들어볼 수 있다.[26] 그의 대표적인 가사로 상당한 평가를 받는 계속해서 매섭게 쏘겠어 죄 속에서 날 대속해와 같은 구절을 보면 라임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은 플로우로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로 바꿔서 불러본다면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바꿔 보면 신기하게도 패닉 2집 시절 똑같이 라임이 배제되어 있던 김진표의 랩과 비슷해지기도 한다.[27] 90년대의 랩은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각설이 타령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는데[28] 패닉 2집 시절의 랩을 들어보면 일리가 아예 없는 비판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렇듯 라임이 있는 랩과 없는 랩의 커다랗고 신기한 간극을 보면 그게 아무리 초보적이라도 라임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 과감하게 라임을 핵심 요소로 도입시킨 김진표의 공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라임이라는 방법론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의 랩은 리듬감 측면에서 느낌이 전혀 달라진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랩은 기본적인 라임조차 구성이 되어 있지 않았고.[29] 그냥 가사에 Yo만 붙이고 랩이라고 우기거나 라임에 맞지 않는 영어만 쓰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전문가들도 한국어로 수준 높은 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심어주는데 크게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하곤 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기여냐 하면, 비록 이적을 좀 등에 업은 격이긴 했지만 어쨌건 꽤 이름과 명성이 있던 가수인 김진표과 97년과 98년 열외와 JP Style에서 모든 곡을 랩으로 채우고 라임으로 떡칠한 앨범을 2장이나 연달아 발매한 이후 TV 신문 라디오 등 매체마다 돌아다니면서 무조건 랩과 힙합은 라임이라고 공언하고 다니는 통에 한국 대중의 인식이 랩은 라임이 있는 것이구나 하고 자리잡게 되었다.[30] 예시로 들었던 오엔스쿨의 빅뱅이나 정상수의 랩을 라임 없이 가갸거겨고교로 바꾸면 패닉 시절 김진표의 랩과 비슷해진다는 점을 들어서 생각해 보자면, 김진표의 기여는 대중들의 인식에 라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알려준 정도가 아니라 라임이 있는 랩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면서 스타일을 혁신했다는 점에서도 '라임의 황제'라는 별명은 실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힙합계의 혁명가 중 한 명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 '열외'와 'JP STYLE'에서 보여줬던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한 프로듀싱과 치밀한 곡 구성은 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김진표의 마스터피스로 평가받는데, 리드머에서 명반 취급을 받는 4점을 받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 힙합계의 판도를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자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대표적인 표적이 되어 SNP 등 통신상에서 시작한 랩퍼들의 수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본인도 여러 가지 구설수로 인해 깨끗하지 않은 이미지, 심장 건강문제와 더불어 다른 장르에 대한 관심 등등의 이유로 인해서 금세 바뀌는 랩과 라임의 조류를 제 때 따라가지 못했기에 그 당시 받았던 엄청난 비판이 사라지지 않은 채 저질 라임의 대표주자로 남아 있다. 그 당시 비판이 정당한 부분도 많았지만 남을 깎아내려서 자기 자신을 홍보하려던 의도가 분명히 있었고, 그리고 그런 의도 속에 비판자들이 김진표가 일궈냈던 혁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기는커녕 애써 무시했었다.[31]

참고로 이제는 힙합계의 대부가 된 드렁큰 타이거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어 가사를 쓸 줄 몰랐다. 그리고 그 유명한 '난 널 원해',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의 한국어 가사를 써 준 장본인이 바로 김진표였다.[32] 이하늘과 작업한 '이리와', 조PD, 윤희중과 교류했던 '시부렁', '3 VIP', '인터뷰 2', 리사가 피처링한 '너는 니길로', 리사, 드렁큰 타이거, 리오, 다이나믹 듀오와 '폼나는대로', 드렁큰 타이거와 협업한 '푸념' 등 힙합 곡들도 꽤 많이 남겼다. 당시 교류했던 이들의 당시 위상을 보면 김진표의 급을 가늠할 수 있다.

2020년 11월 11일에 발매된 이적의 돌팔매에 한 피쳐링에서 이전보다 좀 더 유려하게 운용하는 라이밍과 플로우를 보여줬다. 쇼미더머니 진행을 하며 영향을 나름 받은 부분이 있는듯하다.[33]실제로 선배님이라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도 가끔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특유의 ~잉 하는 듯한 뉘앙스로 랩을 질질 끄는 일종의 쿠세로 인해 호불호 갈리기도 한다.[34]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힙합의 선구자들 중 한 명임은 분명하다. 다만 김진표 본인은 자신의 음악은 힙합이 아닌 팝이라며[35] 만약 어딘가에서 '힙합 공로상' 같은걸 만들어서 자신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랩과 별개로 가창력은 없다. 고음불가의 대표격.[36]반대로 그 덕에 내래이션 목소리로는 끝내준다는 평이 많다.

프로듀싱 능력도 뛰어나다는 듯. 룰라의 이상민에 의해 이상민 본인과 김진표, 이현도를 힙합계 3대 프로듀서라고 했는데, 약간 방송 컨셉을 감안해도 이현도와 같이 엮인다는 점에서 김진표의 능력을 볼 수 있다.

2.2. 디스코그래피

2.2.1. 솔로 정규 앨범

2.2.2. 관련 영상

2.3. 필모그래피

2.3.1. 영화

3.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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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이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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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6. 관련 문서


[1]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초대원장을 역임한 연극계 거장 [2] 여성학자, 한국파이롯트 창업주 고홍명의 딸 [3] 배우로 활동했지만 결혼 후 배우 활동을 중단했다. [4] 현재 비공개 계정이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을 더 많이 활용한다. [5] 왼손잡이곡도 이적의 솔로보컬곡이었지만 왼손잡이 곡으로 후속곡 활동 당시 인트로와 중반주에 김진표의 랩파트를 추가하였다. 방송 라이브 활동 한정곡 이기에 정식음원은 없다. [6] 김진표 5집 수록곡인 '폼나는 대로'를 들어보면 녹음실에 딱 3일 있었다는 듯하다. 그래도 타이틀곡과 별개로 김진표 솔로곡인 '다시 처음부터 다시'를 사실상의 타이틀로 여기는 듯 하다. [7] 참고로 김진표가 색소폰을 불줄 모르는데 폼만 잡았다고 알려져있지만, 청소년 때 잠시 영국에 살았을 적 학교 기숙사에서 Wham! Careless Whisper의 앞 부분을 연주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만큼, 나름대로 불 줄은 알았던듯. 다만 방송 무대에서 불진 않았다. [8] 데뷔 때 아직 고3, 달팽이랑 왼손잡이가 뜰 때는 갓 성인이던 시절이었다. [9] 훗날 이적은 "내가 그런 이야길 했었어?" 하면서 완전히 까먹은 듯. 혹은 웃기려고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다. [10] 〈벌레〉는 교사들의 학교폭력을 디스한 곡으로 파장을 일으켰었는데, 그의 고교 재학 당시 교사들은 "가수 한다길래 머리도 기르게 해 줬는데!" 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머리 기르는 게 뭐 대단한 특혜인 양 지껄이는 걸 봐도 알겠지만 저 당시 교사들은 학교폭력을 당당하게 자행하던 불법의 온상이었고, 김진표의 모교는 그런 시절에도 까일 만큼 막장이었던 곳이라…김진표는 모교도 그 따위인 주제에 실용음악을 하겠다고 연습하는 자신을 교사들이 "나발 부는 놈"이라고 비하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11] 최초의 랩 앨범이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 'Blex'의 검은소리 Vol.1가 아니냐는 논란이 다소 있었으나, 그건 정식으로 나왔던 앨범이 아니라 그냥 동호회 차원에서 배포했던 앨범인 관계로, 김진표 1집을 최초로 쳐준다. [12] 쉽게 말해 넥스트에 신해철 대신 김진표가 들어간 형태. 물론 음악색도 살짝 다르며 넥스트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드 락에 집중하면서 음악성이 더욱 매니악해졌다. 또한 락, 메탈을 기반으로 힙합을 제대로 결합한[49] 랩코어, 뉴 메탈 장르를 보여주었다. 다만 뉴 메탈 뿐만 아니라 김진표 대신 다른 가수를 보컬로 섭외하여 락발라드를 시도하기도 했다. [13] 이후 노바소닉에 들어온 멤버는 이현섭(래퍼가 아닌 보컬)으로, 2019년 현재는 N.EX.T의 '잠정' 보컬이다. 신해철 생전 N.EX.T Utd. 더블 보컬이었지만, 그가 의료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넥스트의 활동이 안갯속으로 빠졌기 때문. [14] 이렇게 보면 김진표도 은근히 인맥풀이 좋다. 애초에 뮤지션 입문을 도운 이적도 그렇고, 노바소닉 때의 김세황도 그렇고. 후에는 이현도하고 같이 작업한 적도 있다. [15] 사실 연 단위로 보니까 짧아 보일 뿐 2002년 11월에 노바소닉 탈퇴 후 2003년 5월에 솔로 4집을 내긴 했지만 탈퇴 전부터 이미 4집 준비 등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6] 지금이야 이적이 솔로에서의 발라드 스타일 덕에 이미지가 박혀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패닉 첫 활동 시절만 해도 사회비판적이고 펑키하고 얼터너티브한 곡을 자주 썼다. 옛날의 이적을 모르는 사람들이 '혀'나 '벌레'같은 기괴한 곡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에 대해 김진표는 이랬던 이적이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는 게 말이나 되냐며 깠다 [17]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3집이 나왔던 2001년 전후반은 인터넷문화가 막 봇물을 이루면서 사회비판 의식이 소수 마니아에서 대중 전반으로 퍼지던 시기였던 만큼 김진표를 비롯해서 당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고, 5집은 앨범 제작 기간이 김진표가 이혼 후유증을 겪었던 시기라 여러 모로 감정이 복잡했다. 이혼 후 몇 개월 만에 발표했던 싱글 '사랑 따위'는 김진표가 작사와 작곡을 다 했는데 5집보다 더 암울한 곡이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삭발하는 뮤비까지 찍었다. 근데 이 때 삭발 씬 이후 탈모가 와버렸다(…). [18] 4집 이후 발매된 리마스터링 베스트 앨범에서도 3집이 32곡 중 8곡을 차지했다. 정규앨범 수록곡이 아닌 곡과 신곡이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가장 많은 편. [19] 전부인은 쇼호스트 그만두고 셰프로 활동했다. The Institute of Culinary Education : Culinary Art, 츠지원 요리과정 수료. [20] 예능 프로그램인 애정만세 2기로 데뷔했는데, 프로그램 자체가 제대로 흥행하지 못하고, 4회만에 종영되어 버렸고, 이후 정식적으로 연기자로 데뷔해서 조연 및 단역을 오갔지만 결국 포텐이 터지지 않았다. 대학시절엔 한예종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다. [21] 2008년 10월생이다. 현재 나이 [age(2008-10-01)]세. [22] 2010년 5월 10일생이다. 현재 나이 [age(2010-05-10)]세. [23] 중학교 동창이라고 한다. [24] 힙합바지 드립은 후에 이현도의 New Classic 앨범 때 또 써먹는다. [25] 저 구절만 놓고 보면 1집 전체가 저 곡마냥 유치한 라임이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김진표가 만든 가사가 전부 저런식의 억지라임이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을 빠르게하면 다 랩인줄 알았던 당시로는 제법 신선한 편이었다. [26] 랩보다는 기행으로 유명하지만 1세대와 가까운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27]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노래도 비슷한 느낌의 랩이 있다. 그나마 힙합을 진지하게 열심히 연구한 사람들의 결과물이 그런 것이다. [28] 흑인음악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하지 않던 사람들의 경우 빠른 추임새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가수로 쿨의 김성수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윤일상이 있다. 사실 미국에서 마이키를 데려오기 이전 김정남 시절 터보 랩을 보면 주영훈도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의 음악적 지향점이 흑인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Run D.M.C의 곡을 제대로 연구한 홍서범의 김삿갓이나 위 곡을 포함해 여러 흑인 힙합을 진지하게 연구한 서태지와 아이들 정도만이 당대 흑인 음악과 유사한 편. 이마저도 홍서범은 1회성에 서태지는 애초 메탈헤드라서 흑인 음악을 깊게 연구하기는 했을지언정 오래 활동하지는 않은 데다 흑인 음악의 탈을 쓴 록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어서 듀스 정도만이 정통 힙합으로 활동한 편이긴 한데, 여기도 고작 3년밖에 활동을 안 해서... [29] 김진표와 동시기인 98년 오엔스쿨의 빅뱅이라는 노래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재즈힙합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 쓴 노래고, 아마 랩선생들이 붙어서 만들어줬을 랩의 톤과 플로우만 놓고 보자면 당시 1세대들과 비교하면 뒤떨어졌다고 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서 만들었을 저 랩들도 라임이 전혀 없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8년에 저 정도 랩이면 상당한 힙합전사 수준이기도 하다. 약간 관련없는 얘기지만 사회비판적인 가사에서 당시의 전형적인 갱스터랩의 풍조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30] DJ DOC도 97년에 발매한 4집 앨범은 사실상 라임이라고 봐줄 만한 구석이 많지 않거나 특기할 만하지 않다. 타이틀곡이자 갱스터랩으로 밀었던 삐걱삐걱에 라임이 있기는 한데 어미에 요를 붙여서 존대말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 외의 곡에서는 라임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은 노래가 대다수다. 그러나 2000년에 발매한 5집 앨범은 명백하게 라임에 신경썼다. 지누션의 경우 97년에 발매한 1집 가솔린은 라임이 없는 수준이지만 메세지만으로 완벽한 갱스터랩 말하자면 힙합 취급받았다. 후속곡인 말해줘는 라임이 있긴 하지만 삐걱삐걱처럼 어미를 어, 줘, 니, 고, 아, 을 등으로 통일한 매우 단순한 것에 불과했다. 98년 1tym의 1tym 또한 당시 힙합의 추세에 따라 뭔가 메세지적인 부분은 있었지만 라임은 사실상 테디의 간단한 영어라임뿐이었다. 대중가수의 이런 명백한 차이에 있어서 김진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1] 아이러니한 점은 조금 세대 차이가 나면서 위상도 크고 비트메이커로 돌아서서 직접적인 경쟁자의 위치가 아니게 된 이현도에게는 엄청난 존경을 표시하면서 오버에서 수준 높은 사운드를 들려주던 김진표와 조PD 원타임 등에게는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이다. 김진표는 그래도 무브먼트와 친근하고 대중음악계나 연예계에서 비중도 상당했기 때문에 좀 덜했지만. [32] 타이거 JK가 본인등판에서 김진표는 DJ 샤인의 가사만 써준 것이고 타이거 JK 본인 가사는 본인이 직접 썼다고 밝힘. [33] 발매일도 그렇고 당장 라이브하러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왔을 때도 역대급이라 평가받던 쇼미더머니 9가 진행중이었고 김진표 본인도 거기서 사회를 보고 있었다. 때문에 마지막화에서 스윙스에게 '이제 그만 도전하고 즐기기를 바랍니다.'라고 선배 플레이어로써 남기는 듯한 멘트도 했다. [34] 대표적으로 6집의 '이를 닦았나'를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35] 힙합 느낌이 나는 곡이 몇개 있다는 것은 본인도 인정하고 있지만. [36] 노바소닉 콘서트 등에서 그나마 목소리를 올리는 곡에서도 2옥타브가 넘어갈까 하며 심지어 탑기어 등에서 냈던 비명소리조차(...) 그렇게 높지 않다. 선천적으로 굉장히 음역대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 [37] 김우옥 교수가 신동엽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는데 때마침 커피 자판기가 고장났고 이에 장난기가 동한 신동엽이 다방커피를 주문하는 바람에 커피 배달을 온 아가씨가 강의 도중에 난입한 사건이다. 여담으로 8말 9초 학번들 사이에서 이런 장난을 친 선배가 있다는 전설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편. [38] 2집의 '어느 새벽, 눈을 감을 때'도 연관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 [39] 허클베리피, ZIZO, JJK 등의 래퍼가 청소년기에 이 JPHole을 통해 가사를 주고받는 등 활동을 시작하였다. [40] 지금이야 고릴라나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라디오 진행 중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당연히 여기지만 당시엔 유일하게 PC통신(천리안)을 통해 청취자 참여가 이루어진 당시로선 획기적인 컨셉이었다. 백승애라는 목소리가 이쁜 보조진행자가 PC통신 화면을 보면서 청취자들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41] 이 시기 tvN은 성인방송이나 다름없는 막장스러운 방송국이었다. 나영석 영입 이후 대박을 내며 묻힌 것. [42] 그래도 이 때 연예뉴스를 진행한 경험이 5집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 [43] 당시엔 힙합문화가 한국에서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곡마다 웻~싸이! 하는 걸 유행처럼 따라하기도 했다. [44] 김진표가 합류할 당시에는 팀명이 GM대우 Mighty Blue였다. 이후 2011년에 변경. [45] 다만 스카이다이빙은 차량의 낙하산이 안 펴지는 중대한 문제로 한 번 실패했었다. [46] 2021시즌 종료 이후 기아로 이적 [47] 더 정확히는 공룡 마스코드를 좋아해서 [48] 옛날부터 본인이 말하던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