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군정기 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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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민정청 초대 민정장관
이반 치스차코프 Иван Чистяков | Ivan Chistya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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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1]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Ivan Mikhailovich Chistya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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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9월 27일 | ||
러시아 제국 트베리현 오트루브네보 마을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트베리주 카신스키구 오트루브네보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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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9년 3월 7일 (향년 78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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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민정장관 | ||
1945년 10월 3일 ~ 1947년 4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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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3c700>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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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노농적군 | ||
1925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68년 | |||
최종 계급 | 상장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보직 | 북조선군정사령관 | ||
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2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2회) 수보로프 훈장 2등급 (1회) 적기훈장 (5회) 쿠투조프 훈장 1등급 (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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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만주 작전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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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 트베리주 오트루브네보(Отрубнево)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극동군관구 제25군 사령관에서 소련 군정의 장관이 되었다.2. 행적
전간기에 그는 1930년대까지 캅카스 등 중앙아시아에서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1936년 처음으로 극동 제92보병사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1941년까지 동북아시아에 머물렀다.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전해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45년에 소련이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작전을 실행해 남진할 때 그는 제25군 사령관이었으며 38선을 미국과 갈라먹기 위해 제25군의 10개 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다가 8월 12일에 웅기를 점령했다. 일본 제국이 항복한 8월 15일 그는 조선 인민이 해방되었다는 <치스차코프 포고문>을 발표하고 남진을 계속해 소련군은 24일까지 원산, 평양으로 내려왔다. 상관인 키릴 메레츠코프는 치스차코프를 북조선 군정 사령관에 임명했다.
소련군정의 군정장관으로 이남의 존 하지처럼 북한 지역의 실상에 큰 관심이 없다는 듯 부하들의 행패도 모르는 척 했다. 사실 전문장교인 치스차코프는 정치문제에 직접 개입을 안 했고 실질적인 군정행위는 프리모리예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시티코프 상장이 했다. 시티코프는 정치인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식인범죄단속 기동타격대를 지휘했다. 소련군정은 북한의 공산화에 반하는 행동은 철저히 막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한 조만식을 가택 연금시키고 반공 운동을 탄압했으며 심지어 소련군의 약탈에 항의해 봉기가 일어나면 한국인의 반을 교수형으로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소련 군인들이 처녀들을 겁탈하는 비행을 저질러도 그대로 냅두기도 했다. 물론 여론이 악화되자 비행을 저지른 소련군인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당시 남한이든 북한이든 미군정만큼이나 소련군정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시티코프가 괜찮은 행정능력을 선보였기 때문에 소련군정은 남한을 통치한 존 하지보다는 그나마 나았다는 평을 들었다. 군인 출신인 존 하지와 비교해 보았을 때 정치인 출신인 시티코프는 행정 관리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그 덕택에 남한보다 더욱 빠르게 민정이양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선 지주계층을 때려잡아서 진행하기는 했지만 토지개혁을 재빨리 진행시켜 민생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고 당시 남한에서 초인플레이션이 진행된 것과 다르게 소련식 통제정책으로 물가상승을 억제했다. 존 하지가 인민위원회를 활용하는 대신에 무조건 해산시켜 버리고 친일경찰과 관료를 재채용하는 삽질을 벌이는 동안 소련군정에서 인민위원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탄압이 있을지 언정 정국이 비교적 빠르게 안정을 찾아갈수 있었다. 그래서 해방 후 한동안 북한 경제가 우위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정치적인 혼란을 재빨리 잠재우고 경제정책도 합리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고 지하자원도 풍부해서 경제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도 했지만 단지 인프라가 있다고 해서 경제가 무조건 안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김일성의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을 돕고 물자를 그대로 둔 채 1947년 3월 벨로루시 군관구의 소련 육군 제28군 사령관이 되어 떠났고[2] 1968년에 은퇴했으며 1979년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