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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2:31:40

경복궁 응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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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응지당
景福宮 膺祉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건축시기 1867년 (창건)
1888년 (중건)
1995년 (복원)
파일:경복궁_응지당.jpg
<colbgcolor=#bf1400> 응지당[1]
1. 개요2. 용도3. 이름4. 역사5. 구조6. 여담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침전 강녕전의 보조 건물로 강녕전 서북쪽에 있다.

2. 용도

당초엔 단순히 경성전, 연생전보다 약간 격이 낮은 보조 침전이나 접견소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9년 6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소장중인 《경복궁중건일기》가 번역, 공개되면서 정확한 용도가 드러났다. 바로 식사를 데워 수라상에 올려 들이던 중간 부엌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과 강녕전 간 거리가 꽤 있어 상을 가지고 오는 동안 음식이 식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음식을 한 번 더 데울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3. 이름

'응지(膺祉)' 뜻은 '복(祉)을 받는다(膺)'이다. '膺'은 원래 '가슴'이란 뜻으로, '마음', '받다'로 의미를 확장해서 쓰기도 한다. |《서경》 - 〈필명〉을 보면 강왕이 "주공, 군진, 필공의 마음을 합해 바른 도에 이르렀기에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잘살며, 오랑캐까지 모두 의지하니 나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 했다.

현판 글씨는 1995년에 운암 조용민(趙鏞敏, 1926 ~ 2017)이 쓰고 각자장[2]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4. 역사

조선 전기에는 없었고 1867년( 고종 4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었다. 그러나 1876년( 고종 13년)에 화재를 입었고 1888년( 고종 25년)에 재건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기 위해 해체, 이전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있다가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5. 구조

※ 반대편에 있는 연길당과 구조가 거의 같다.
파일:응지당 배치도.png
<colbgcolor=#bf1400> 응지당 내부 구성도

6. 여담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나무판에 글자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 [3]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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