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군인 웨이친 樂以琴 | Yue Yiq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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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2088><colcolor=#FFF> 출생 | 1914년 11월 11일 |
중화민국 시캉성(西康省) 루산현(蘆山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 야안시(雅安市) 루산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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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7년 12월 3일 |
중화민국
장쑤성
난징시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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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중국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玄武区) 항공열사공묘(航空烈士公墓) |
복무 |
중화민국 공군 공군 제8대대 (空軍第八大隊) 4항공구축대대 제22중대 (第四航空驅逐大隊第二二四隊) 제4항공구축대대 제21중대 (第四航空驅逐大隊第二一四隊) |
최종계급 | 대위→ 소령(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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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공군 소속 조종사로 중일전쟁 당시 중국 공군의 에이스 중 하나로 불리는 조종사.좌측부터 웨이친, 가오즈항, 류추이강, 리구이단. 이미지 출처
그와 함께 에이스로 불리었던 중화민국의 조종사들인 류추이강(劉粹剛), 가오즈항(高志航), 리구이단(李桂丹)과 함께 사대금강(四大金剛),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웨이친의 가족사진. 맨 앞이 웨이친.
웨이친의 본래 이름은 웨이중(樂以忠)으로 현 쓰촨성 야안시 루산현의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형제만 해도 17명으로 웨이친을 포함한 남자가 10명, 여자가 8명인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집안은 악비의 후손으로, 악비의 처형을 주도한 진회의 탄압을 피해 쓰촨 지역으로 이주하여 성씨를 바꾸었다고 알려져있다.
웨이친은 학문과 운동 모두에 탁월해 고등학교 시절에는 전국 대회에서 육상부문에 쓰촨성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으나 그의 형제들 대부분의 아버지인 웨허저우(樂和洲)의 교육 방침에 따라 의사나 교사가 된 것처럼 웨이친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야안소학교(雅安小學)와 장가산명덕중학교(張家山明德中學), 화서공동고등학교(華西協合高級中學)를 졸업한 후 지난(濟南)의 치루대학(齊魯大學)에 입학하려 했지만 입학에 필요한 자격이 부족하자 형이었던 웨이친의 이름을 빌려 1931년 치루대학에 입학했고, 이후로도 웨이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중앙항공학교 3기생 생도 기념 촬영 사진. 뒷줄 중앙이 웨이친, 앞줄 중앙은 교관 가오즈항.
형의 이름을 빌려 입학한 대학이었으나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웨이친은 대학을 그만두고 1932년 항저우의 중앙항공학교에 입학하여 항공기 조작법을 배워 1934년 12월 항공학교를 졸업해 공군 제8대대로 배치 받은 후, 중앙항공학교 교관으로 부임하다 1936년 가오즈항이 대대장으로 부임해 지휘하던 공군 4대대 산하 22중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3. 중일전쟁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고, 2일 뒤인 8월 15일. 웨이친이 소속된 4대대는 항저우에서 6기의 일본기를 격추시켰으며 그중 웨이친은 4기의 B2M기를 격추시켰다. 웨이친의 기체는 당시 중국 공군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수입한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Curtiss BF2C Goshawk) 전폭기로, 웨이친의 전용기는 2404호기였다. 이후 6일 뒤인 8월 21일에 웨이친은 상하이 근교에서 일본군의 E8N 95식 수상정찰기 1기를 격추시켜 6일 만에 5기의 적기를 격추시킨 웨이친은 중국 공군의 첫번째 에이스 파일럿으로 불리게 되었다.9월 20일에는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고 난징 인근의 20,000 피트 상공에서 급강하해 일본군을 기습하는 교전을 벌여 기종 미상의 일본군 경폭격기 한 기를 격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역사학자인 레이몬드 청(Raymond Cheung)은 일본측 자료를 토대로 파악할 시 웨이친이 공격한 기체는 카메 요시유키 중위의 D1A 경폭격기로 추정되며 카메 요시유키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기체는 급강하 해 온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 한 기에게 공격당해 쿠로키(Kuroki)라는 이름의 기총사수가 사망했으나 교전 이후 상하이의 쿤다 비행장으로 귀환했다고 자신의 저서인 『Aces of the Republic of China Air Force』에 서술했다.
4. 최후
1937년 11월 22일 4대대장 가오즈항의 사망 이후 21중대장 겸 부대대장이었던 리구이단이 4대대장으로 임명되자 부대대장 겸 21중대장으로 임명된 둥밍더(董明德)와 더불어 웨이친은 21중대의 부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탈출하는 웨이친을 묘사한 그림.
이후 12월 3일 상관인 둥밍더와 함께 2기의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에 나눠타고 난징의 비행장으로 이동해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일본 해군의 항공기들이 비행장을 공습해오자 둥밍더의 기체와 출격하여 11기의 96식 함상전투기를 상대로 교전을 벌이다 난징 인근의 치샤산(栖霞山)에서 피탄당해 탈출했으나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추락사, 또는 탈출 도중 머리에 총격을 맞아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둥밍더가 확인했는데,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웨이친은 12월 1일 난징 항공전에서 소련 항공 지원대와 함께 일본 해군 13항공대를 상대로 교전을 벌이던 중 자신의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이 고장나 12월 3일에는 둥밍더의 I-16에 탑승했고, 12월 3일에는 일본측의 교전 기록이 없으나 12월 4일 무토 가네요시(武藤金義)가 탑승한 95식 함상공격기가 I-16을 격추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웨이친이 사망 당시 탑승하고 있었던 기체도 I-16이라는 주장도 있다.
웨이친의 일화는 당시 소학교 교과서에서 언급될 정도였으나 국공내전에서의 국민당의 패배 이후 국민혁명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매장되어 잊혀졌다가 양안관계의 회복으로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 출신자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1990년대에 다시 복권되었으며, 출생지인 쓰촨성에는 웨이친을 기리는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