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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9:22:08

오토 카리우스

<colbgcolor=#666><colcolor=#fff> 오토 카리우스 2세
Otto Carius Jr.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9-064-06,_Otto_Carius.jpg
출생 1922년 5월 27일
바이마르 공화국 팔츠 주 츠바이브뤼켄
사망 2015년 1월 24일 (향년 92세)
독일 팔츠 주 헤르슈바일러-페터샤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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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직업 약사
복무 독일 국방군 (1940~1945)
최종 계급 중위(Oberleutnant)
서훈 내역 백엽기사철십자훈장

1. 개요2. 생애
2.1. 대기만성의 에이스가 되기까지2.2. 호랑이, 날다2.3. 종전, 그 후
3. 그의 개인적인 관점들4. 진흙속의 호랑이 국내판 번역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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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하엘 비트만, 쿠르트 크니스펠과 함께 독일군 3대 전차장 에이스 중 한 명이다.

최소 150대 이상의 적 전차와 Il-2 1기[1] # 격파하며 맹활약했다.[2] 최종계급은 중위로 전쟁 후에는 약국을 운영하다가 2015년 1월 24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탑승전차는 LT vz. 38, 3호 잠수전차,[3] 4호 전차,[4] 6호 전차 티거, 야크트티거이다.

2. 생애

2.1. 대기만성의 에이스가 되기까지

독일 팔츠 주 츠바이브뤼켄 출생이다. 카리우스의 아버지는 중고등 김나지움의 교사이자 예비역 소령이었으며, 첼로 피아노에 크게 관심이 있어 음악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마음이 바뀌어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이후에는 군인을 동경하여 헤르조그 볼프방 인문계 김나지움을 생일 직전에 졸업[5]하고 1940년, 18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왜소한 체격과 그로 인한 저체중으로 인해 입대가 2번 거부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육군에 들어가게 된다. 기계공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병과 지망을 대전차병으로 골랐는데 TO가 비질 않아 일단 보병으로 배정, 제104보병보충대대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동기들에 비하면 나이도 적고 체격이 왜소해 큰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오죽하면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수염을 기르려 했는데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서 더 큰 좌절에 빠진 적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행군 MG34 기관총을 짊어지고 가다가 체력이 딸려 동료의 부축을 받아 복귀하는 등 보병으로서는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중대장이 기갑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하는 지원자를 모집할 때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예비역 육군 공병 소령인 카리우스의 아버지[6]가 아들이 기갑병과에 들어가는 걸 극렬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적들이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서 대전차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차병들은 대부분 끔찍한 중상을 당한다는 것이었다.[7]

전차 승무원 교육을 거친 후 제20기갑사단 제21전차연대에 배속되어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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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약수 시절의 카리우스(우) 좌측의 인물은 전차장 아우구스트 델러 하사[8]

사단 특성상 체코제 38(t) 전차에 탄약수로 탑승했다.[9] 여러 번 위기상황을 맞이하면서 장갑을 뚫고 들어온 철갑탄이 파편을 일으키는 바람에 치아가 몇 개 부러지고 얼굴에 조그만 파편이 박히는 등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전차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실력과 팀워크로 전과를 달성, 1941년 8월에는 간부 후보로 추천받는다.

카리우스는 탄약수 시절을 회상하며, 38(t)는 첫인상은 좋았지만, 얼마 안가서 전차의 장갑은 심리적인 안정장치에 불과했고, 강철의 품질이 독일제 전차들보다 매우 저질이였다는 혹평을 한다. 피격을 당했을 당시 통신수 기관총구 옆에 피격이 되었는데, 포탄이 관통 당해 통신수의 왼팔이 절단된 것은 그렇다 쳐도, 장갑의 파편이 과도하게 많아, 모든 승무원들이 부상을 입은 것은 38(t) 전차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지적했다. 또한 38(t) 전차는 전차장이 포수의 역할까지 역임했는데, 이는 전투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는 요소라고 비판하였다.

이후 하사로 진급한 뒤 본국으로 돌아와 제8기 장교 후보생 교육을 받은 오토 카리우스는 1942년 봄, 다시 21기갑연대에 원대 복귀하여 한동안은 전차의 부족으로 제설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새로이 보충차량이 들어오며 자기의 소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대장으로서의 보병을 지원하는 첫 임무에서 각 전차의 조종수와 탄약수들이 식사추진을 위해 전차를 비운 사이에 소련군이 공격을 해오자 아군 보병들을 놔둔 채 무방비로 당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전차를 직접 몰아 달아났다. 아직 적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소대장 전차가 말도 없이 뒤로 움직이자 다른 소대원들도 당시 매뉴얼 그대로 전차에 탑승해 소대장 전차를 따라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대장인 카리우스의 차량을 따라갔다. 그로 인해 갑자기 아군 전차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본 독일군 보병들은 아연실색했지만 자리를 지켰다. 카리우스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깨달아 다시 전차들을 원위치시켰지만 보병들이 전차의 도움 없이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시킨 후였다(!). 전투가 끝난 후 카리우스는 그럴 거면 차라리 전차 빼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서전에서 말하길 큰 교훈이 된 경험이었다고 한다[10].

이 일로 인해 체면을 크게 구기고 본부 중대의 공병 소대장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이후 파데보른의 장교클럽 관리관 역할을 맡게 되는데, 때마침 중대원들과 종종 술자리를 열던 제502중전차대대 제2중대장과 의기투합하여 합류한다. 자칫 그대로 독일군 장교 A로 사라질 뻔한 카리우스에게는 하늘이 주신 기회. 마침내 신형 중전차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티거 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자 전설의 시작이었다.

2.2. 호랑이,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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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거 전차 전차장 시절의 카리우스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11]으로서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에 대한 부대원들의 첫 반응은, 티거가 최초로 보급될 당시 그들의 티거에 대한 인상인 '고놈 참 딥다리 못 생겼다.'에 버금갈 정도로 안 좋았다. 한마디로 '이렇게 허약하게 생긴 멸치같은 새퀴가 대장 노릇하며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였다.[12] 그러나 이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며 모두를 순식간에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502 중전차대대 2중대의 경우 중대장들이 너무 자주 바뀌거나 혹은 지휘력에 문제가 있어[13] 카리우스가 한동안 중대장 대리로 사실상 지휘를 책임졌으며 중위 진급후에는 중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카리우스가 당시 소위였는데도 불구하고 소대장 겸 중대장으로서 행동할 수 있던 이유는 다른 소대장들은 부사관이었기 때문으로 본래 독일군은 개전 이래 만성적인 장교 부족으로 부사관이 소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덕분에 소련군은 오토 카리우스를 직접 지목하면서 "그 녀석을 소련군에게 넘겨주면 소련군 보병 30명을 취향대로 골라서 포로로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선전방송을 독일군 보병에게 확성기로 외칠 지경이었다. 내용도 말이 안될뿐더러 소련군이 며칠 동안 계속 떠들어대자 제대로 열받은 독일군은 야포로 확성기를 날려버렸다. 정작 카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무시했지만, 보병들이 시끄럽다고 포병을 불러 부쉈다 한다. 게다가 이 선전방송은 마르나파 전투 한참 전의 상황이므로 해당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는 얼마나 오토 카리우스의 값어치가 높아졌는지 모를 지경이다. (후술하겠지만) 오토 카리우스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오토 카리우스 소유의 지도판을 분실했는데 이걸 습득한 소련 육군 장교가 내가 오토 카리우스를 죽였다고 증거품으로 지도판을 제출했고 이 장교는 소련에서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선전방송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토 카리우스가 병원에서 들었다고 한다.

제502중전차대대가 주로 동부전선의 북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발트 3국에서의 지연전에서 활약을 펼쳤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전투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14]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군 IS-2 17대, T-34-85 5대, 도합 22대를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 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1개 전차여단을 격파해버렸다. 이 전투는 당시 소련군의 기습으로 전선이 무너지고 독일군 전체가 공황에 빠져서 도주중이던 상황에서, 전장에서 탈출하던 한 연락장교[15]로부터 단편적인 정보만 전해 듣고 카리우스의 독자 판단으로 본인의 중대만 이끌고 반격에 나서 아무 손실 없이 적 1개 전차 여단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무너진 전선을 틀어막은 것이다. 특히 이 소련군 전차여단은 스탈린의 이름을 딴 제1이오시프 스탈린 전차 여단이었고 심지어 전투후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된 이 전차여단의 여단장은 레닌 훈장까지 받은 장교였다고 한다.

더 무서운 점은 소련군 전차부대의 집결지를 발견했을 때 카리우스의 2중대는 티거 8대가 가용했지만 지형이 좋지 않아 기동할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티거 여러 대가 기동하면 서로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자신과 알베르트 케르셔 상사[16]의 단 2대만으로 돌진해 근접전을 벌였다. 나머지 중대 전차 6대는 주변의 감제고지로 이동해 소련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어찌나 신속하게 파괴해버렸는지 이 선발대는 후속부대에 무전으로 경고도 보내지 못했다.[17] 결국 뒤따라오던 본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당했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마르나파 전투를 미하엘 비트만의 빌레르 보카쥬 전투와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빌레르 보카쥬는 영국군이 제대로 정찰도 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우연히 적의 행군대열 측면에 위치한 비트만이 기습을 가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직접 격파한 영국 전차는 8대, 그것도 티거를 잡기에는 화력이 형편없는 크롬웰 전차나 아예 무장도 없는 포병관측반용 M4 셔먼 스튜어트 경전차가 상당수였다. 흔히 알려진 27대는 중대원 전부가 올린 전과를 합산한 것이다. 물론 이 일격으로 독일군의 빈틈을 노린 영국군의 대규모 포위기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니 전략적 효과는 충분했지만 이른바 원맨 쇼의 상황은 카리우스쪽이 더 높다. 당장 IS-2는 티거를 쉽게 잡을 수 있고 T-34-85도 티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카리우스가 상대한 전차 수도 비트만의 27대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4~50대로 훨씬 많았으며, 해당 전투지역에는 늪지대가 많아서 가뜩이나 무거운 티거가 제대로 기동전을 펼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르나파 전투의 전술적 난이도가 더 높다.

마르나파 전투도 경험이 부족한 소련군이 경험이 풍부한 독일 전차 승무원들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털린 전투라고 보면 된다.[18]

오토 카리우스도 38(t) 전차를 몰던 초창기 시절 승무원들이 물자를 구하기 위해 전차를 떠난 상태에서 습격을 받았고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도 못하고 도주하다가 정신차리고 보병과 함께 반격하여 격퇴한 전적이 있다. 즉 경험이 부족한 소련군이 오토 카리우스와 똑같은 실수를 범했고 결국 전차여단의 괴멸이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몇몇 전투에서 구식 큐폴라를 가진 티거들이 큐폴라에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전차장이 부상을 입곤 했는데, 오토 카리우스도 마침 흡연을 하려고 고개를 숙인 틈에 큐폴라에 직격탄을 맞은 적이 있다. 덕분에 전사할 위기는 간신히 넘겼으나 머리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관자놀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마르나파 전투가 끝나고 이틀 후인 1944년 7월 24일 자신의 전차에서 하차한 후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모터사이클이 피격되어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19] 하지만 중상을 입은 것치고는 회복이 빨라서[20] 두 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티거를 운용하도록 약 반년동안 파데스보른 전차병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가는 1945년 3월 8일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아크트티거와 함께 서부전선의 영미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부품 공장이 위치한 도시를 나치가 상실한 탓에, 안그래도 고비용이었던 야크트티거는 더이상 생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소수의 결전병기였다. 카리우스는 처음에 얼마남지 않은 야크트티거를 자신이 지휘하게 된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마치 무너지는 제국을 구하기 위한 어벤저스가 된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곧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의 단점들을 체감하게 되었고,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야크트티거의 128mm 주포의 화력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을 표했다. 실제로 전쟁 말, 바이데나우 동쪽 고지를 점령하려는 작전에서 야크트티거로 집 뒤로 황급히 숨은 미군 전차를 보고 포탄 신관을 지연식으로 설정한 후 포격해서 집을 관통하고 격파했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지언정 어쨌든 독일에게 남은 거의 마지막 결전병기 야크트티거 부대를 이끌고 분전하던 카리우스였지만, 이미 군인과 민간인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쳐서 제대로 된 전투조차 진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전투를 계속하는 카리우스에게 시민들이 욕설을 하며 항의까지 하는 사태까지 초래되었다. 결국 1945년 4월 15일에 미합중국 육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그의 전쟁은 끝났다. 전쟁 기간동안 주로 티거를 사용해서 약 150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전차 격파수는 당시 독일군 전차 에이스들 전체에서 168대를 기록한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에 이은 2위였다. 이 전차 격파수 기록에 대전차포 격파수 같은 다른 기록과 공인되지 않은 기록을 포함한다면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비인가 기록은 다른 슈퍼 에이스들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전설의 에이스인 만큼 독일군의 유명인사들도 많이 만났고 이를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회고록을 읽어보면 동부 전선을 바쁘게 오가던 발터 모델 원수의 명령을 직접 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고[21][22]

잘츠부르크에서 하인리히 힘러 SS장관에게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에게 받아야 했었지만, 전쟁통이라 바빠서 힘러가 대리했다. 최전선에서 패색이 짙어진 전황을 몸소 느껴왔던 카리우스는 힘러와의 만남을 통해 이 전쟁에 조금이라도 희망이 남아있는지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힘러에게 실전도 모르는 주제에 허풍만 일삼는 나치 지도자들의 광신성, 그리고 국방군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무장친위대의 특별대우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했는데 의외로 힘러는 솔직하게 현실을 인정했지만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부조화에 대해서는 국방군의 탓을 했다. 전황에 대해서는 신무기가 완성돼서 적을 쓸어버릴 테니 버텨달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다만 힘러 본인도 그럴 수 있으려면 적어도 1년 동안은 전선이 유지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신무기 운운하며 전세역전을 논하는 것은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매우 비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마침 잘츠부르크의 힘러 본진억서 신무기 개발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당시의 오토 카리우스는 이같은 힘러의 발언으로부터 실낱같은 희망을 얻었다고 한다. 한편, 비인간적인 줄 알았던 힘러가 의외로 웃기는 양반이어서 비쩍 마른 카리우스에게 연회장에 있던 뚱뚱한 장군을 가리키며 '이 사람 몸무게의 절반만 따라가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힘러는 카리우스에게 친위대로의 전군을 권하였으나 카리우스는 거절. 힘러는 카리우스에게 편의를 제공하라는 내용의 증서를 써주는데 이 증서는 전쟁 말기의 카리우스가 유용하게 사용한다.

나르바 공방전에서는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23]의 전투단과 함께 작전을 짜며 소련군에게 반격했으며 무장 친위대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의 사단장 프리츠 폰 숄츠와 만나 협력을 약속하여 노르트란트 사단의 나르바 공방전을 도왔다.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 후 잘츠부르크를 관광하고 열차에서 머무르는 동안 SS 제4기갑 군단장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와 자주 전화하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제502 중전차 대대로 복귀 신청을 하기 위해서 베를린까지 가는데 친위대 장교들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야보[24]의 습격 방송을 듣고 굴다리로 대피한 일화와 미 육군 항공대 폭격기들이 장교들과 함께 방문했던 로이나 합성석유 공장을 향해 융단 폭격을 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감상평은 "설명을 들은 대로 공장에 스파이가 있어야 저걸 재건 기간에 맞춰 박살내지"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그도 전차 지휘관답게 연합군의 항공 전력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전차가 아무리 뛰어나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2.3. 종전, 그 후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도 겨우 스물 셋의 젊은 나이였던 카리우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약학을 전공하고 약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약국을 차렸다. 전장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전차를 기리는 뜻에서 ' 호랑이 약국'[25]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가 되어서도 계속 운영하였다고 한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2011년부터는 약국 운영자를 따로 뽑아놓고, 자신은 파트타임 근무를 했다.

전쟁 회고록으로 1960년《진흙 속의 호랑이(원제 Tiger im Schlamm)》가 발매되었으며 , 일본의 유명 감독이자 밀덕후로도 널리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책을 바탕으로 동명의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국내에는 '진흙 속의 호랑이'란 제목으로 2012년 11월 출간되었다.[26]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독일군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참여한 인물들이 영웅시되고 있는 것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정확히 말해 아주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일선에서 싸운 장병들보다 특별히 영웅시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일선의 장병답게 생생한 전장 묘사와 전차 운용에 대한 기록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점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27] 그의 생전엔 외국인들도 직접 독일로 날아가서 대화를 해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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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약국을 운영하던 모습.
말년까지도 자신이 티거에 탑승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1992년에 있었던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 독일 연방군 레오파르트1 전차는 승무원에 대한 배려가 티거보다 떨어진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회고록의 한 챕터 제목은 '티거 찬양'이며, 서방 전차의 공격력과 장갑, 기동성의 밸런스가 티거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났다고 썼다.[28] 물론 앞서 언급한 구식 큐폴라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비판한다.[29] 그리고 자신이 초반에 탑승했던 38(t)에 대해서는 상당한 혹평을 하였다. 비록 독일군 지휘부는 해당 전차가 3호 전차보다 조금 아래라고 평하고 애용했지만 카리우스가 탑승한 시기에는 이미 일선용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데다가[30] 2인용 포탑을 써서 전투효율이 안 좋았으므로 실제로 이런 문제를 겪은 카리우스의 입장에서는 쓴소리가 안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차량에서 근무하던 도중 부상까지 입었다.

회고록에서 묘사되는 카리우스의 전쟁기는 동부전선의 최전선인만큼 무시무시한 일 투성이지만, 계속 진흙탕에 빠지는 등 비전투 사고를 일으켜서 정비병들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라고 불렸던 고문관 티거 전차장 헤르만 상사의 일화나[31] 지휘력이라곤 쥐뿔도 없는데다 민간인 여자나 건드리는 무능한 상관 폰 슐러 대위에 대한 가차없는 디스 등 여러모로 군필자라면 공감하며 쓴 웃음을 지을 만한 군 생활 에피소드도 많다.여담으로 사병들이 카리우스를 부르는 별명은 타고 나갈 때마다 해먹는다고 '퀴벨바겐 귀신'이었다2013년 러시아인과의 인터뷰에서는 종전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전우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우선 나치당원들부터 혼내주는 것이 목표였단다.
<colbgcolor=#666><colcolor=#fff> 파일:attachment/오토 카리우스/O-M.jpg
타미야제 티거1 프라모델을 들고 있는 오토 카리우스
오른쪽 사진에서 같이 사진 찍은 사람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자서전 진흙속의 호랑이를 무단도용, 각색 해서 만화로 그렸기 때문에 미야자키 입장에선 저작권 해결을 위해서 독일에서 당사자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오토 카리우스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만화를 봤을지는 모르지만, 전쟁의 참상을 보여줬던 자서전과는 다르게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단점인 나사빠진 전쟁병기를 향한 오덕질과 뜬금없는 미소녀의 등장으로 괴작이라 평가받는다.

월드 오브 탱크 이름을 딴 훈장이 있다. 2012년 9월에 월드 오브 탱크의 베타테스터 한 명이 이 사람의 집을 방문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약간의 심장 질환을 빼고는 정정했다고. 3시간 조금 넘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실제로 전 세계 각지의 밀덕들이 위와 같이 선물을 보내와서 창고에도 가득 있다고 한다. 더불어 자서전에 사인을 해달라고 많이 보내와서 힘들었다고 한다원 글 삭제로 다른 링크 첨부함

2013년 4월 4일 날짜로 약국에서 근무 중인 카리우스에게 사인을 받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2015년 1월 24일에 향년 92세로 라인란트팔츠의 허슈바일러-페터스하임에 있는 개인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3. 그의 개인적인 관점들

카리우스는 독일군과 가장 악착같이 싸운 주적 소련군에 대해서 의외로 상당히 높게 평가했는데, 전후 자서전에서 소련군과 소련인들은 적이지만 훌륭한 애국자들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32] 소련 국민들의 헌신이나 소련군의 감투정신은 독일군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적이니까 '끈질기다' 식으로 낮춰 표현했지만, 독일인이 같은 일을 했으면 애국적이고 용감하다고 표현했을 것이라고, 또한 소련군 병기에 대해서도 호평이었다. 특히 독일제 전차 구동계의 낮은 신뢰성을 까면서 전차를 고장낼 확률이 낮은 숙련된 조종수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소련 전차의 우수한 신뢰성[33]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련 전차, 특히 신형 스탈린 전차의 강력한 공수주 성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다만 자서전 첫장에도 나와있듯이 독일군 참전자들은 모두 다 전쟁범죄자 취급받고 미군이나 소련군에 빌붙은 자들이 애국자 취급받고 있다며 격한 분노를 나타내고 있고,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독일 국방군 슈츠슈타펠에 대해선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적으로 만난 소련군은 이렇게 극도로 칭찬한 반면, 미군에 대해서는 미군 30명이 소련군 5명보다 못 싸운다고 기록했다. 포병이나 육군 항공대를 안 부르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답잖은 겁쟁이들에다, 전장에서도 민가를 빌려서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려고 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바보들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기록상으로는 대전차포와 전차가 많이 했어도, 그건 전후 결과론일 뿐, 카리우스가 현장에서 겪을수 있는건 미군 전체가 아닌 미군의 부분적 모습들 이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올만 하다.[34] 이를 반증하는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같은 전쟁영화를 보고는 실제로 '저렇게 잘 싸운 미군들도 존재하겠지만 내가 본 미군들은 결코 저렇지 않았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게다가 독일군과 실제로 맹렬하게 싸웠던 소련군의 감정과 달리 미군은 독일군을 실제 자신들의 경험이 아니라 상부의 악의적 선전에만 근거해 맹목적으로 증오하고 학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미군이 일처리 하나는 똑바로 한다고 칭찬한 적도 있다. 일례로 소련군 포로가 수용소에서 탈출, 난동을 피우고 있는데 협상 중이던 미군에게 막아달라 요청하니 군인들이 가서 잡아간 걸 보고 효과적으로 일을 해냈다고 놀라워했다.

그의 저서는 전형적인 국방군 무오설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자기의 개인적 경험만으로 국방군 전체를 변호하려 들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국방군이 저지른 몇몇 범죄에 대해서는 인정하나 자신의 대대에는 나치 당원도 있었고 반나치주의자도 있다는 식으로 개인적인 몇몇 경험을 회고하며 그것을 근거로 국방군=나치 등식은 성립하지 않으며 국방군은 기본적으로 군대일 뿐이라는 식으로만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신랄하게 비꼬는 투로 자신이 프랑스에서 실수로 기관총 사격장에 들어온 마을 농부의 닭을 '즉결 처형'했다가 상관에게 크게 혼쭐이 나고 군에서 배상해주어야 했던 일화를 언급하며 '이게 니들이 말하는 전쟁범죄라면 전쟁범죄겠지'하고 비아냥대고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쉽게 반박된다. 나치는 90퍼센트 이상의 지지율을 얻어 집권했고, 독일 국방군은 복무신조부터가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는, 즉 군대가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고자 맹세하지 않고 정권의 독재자에게 충성을 서약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프랑스에서 겪었다던 일은 단순히 독일 국방군이 모두 나쁜 놈이다라는 1차원적인 명제에 대한 반박일 뿐, 국방군이 자행한 수천만 단위의 학살을 정당화하지도 않고, 국방군이 나치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현장에 있던 그의 역사관은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단순한 관점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많은 군대들이 그렇겠지만 그도 후방의 안전한 보직들, 특히 허풍을 일삼는 선전선동 담당 보직이나 나치 간부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경멸을 드러내고 있으며, 많은 대대원들이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치와 국방군을 분리해 나치의 광신자들을 욕하면서도 하인리히 힘러 같은 인물의 매너에 속아서 막상 만나보니 악랄해 보이지 않았다는 감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오토 카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의 나치당에 대한 나치 독일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적 해석 처럼 자신의 이익이 보존되는 한 나치 독일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고 이들의 악행에 눈을 감았던 대다수의 나치 독일 시기 시민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카리우스는 전방부대에서 겪은 일을 고려해보면 전쟁범죄를 저지른 부대와 떨어져 있고, 자신이 속해있었던 부대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참작은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대의 수많은 자료로 입증된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본 적이 없으며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은 나치당에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이유로 국방군을 나치와 분리하여 생각하고, 국민이나 군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등 국방군 무오설을 주장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특이한 당시 독일 군인으로서의 관점들을 볼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미군에게 항복했을 때 '미군+독일군이 연합해 소련군을 막겠구나!'라고 기대한 적이 있다고 나오는데, 카리우스뿐 아니라 당시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고위층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독일의 상층부는 전쟁범죄 때문에 용서받지 못했지만[35] 카리우스의 저서에서는 당시 자신이 항복을 하러 간 부대의 장교와 항복에 관해 협상을 하러 갔을 때 미군 장교가 혹시 독일군과 연합군이 힘을 합쳐서 소련을 물리칠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 부대원들을 잘 데리고 있으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36]

4. 진흙속의 호랑이 국내판 번역 논란

2012년에 처음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의 번역자는 이동훈인데, 오역이 상당히 심하다. 대신 함께 번역된 티거 피벨이 별책부록이니 관심있는 사람은 구매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6호 전차 티거 항목 참조.[37]

논란이 지속되자, 이동훈은 "해당 번역본이 오역이 심하다 하지만 이는 독일어 원판이 아닌 영어 번역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어 번역판 자체 오역문제에 따라 생긴 문제라 볼 수 있다."라고 변명하지만, 오역을 지적한 사람은 원판과 영어판의 문제는 접어두고 영어판을 번역한 결과물 자체가 엉망임을 지적했을 뿐이므로 상당히 뜬금없는 변명이다. 심지어, 원래 이 책은 독일 현지에 거주중인 한국인 독일어 번역가에게 발주하려 했던 것을, 이동훈이 "오토 카리우스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번역본 감수도 한 바 있으므로 영어판을 중역해도 아무 문제 없고, 그 독문 번역가는 밀덕이 아니라서 군사용어에 무지하므로 내가 해야 한다."고 길찾기에 이간질을 하여 따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더더욱 욕을 먹었다.

결국 독자들의 여러 비난을 받고 도서출판 길찾기에서는 더 이상 이동훈을 쓰지 않기로 했다. 또한, 2014년 12월에 정발 하인츠 구데리안의 회고록도 많은 이들이 출간 전부터 "또 이동훈 시켜서 중역본 발번역한 거 아니냐?"며 묻는 통에, 길찾기 직원들이 "이동훈도 아니고, 독어판 원서를 직역한 것이니 안심하라."고 답변하며 진땀을 빼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2023년 4월, Tiger im Schlamm 제5판에 (진흙속의 호랑이, ISBN 978-3-00-037404-3)준거한 독일어 원전을 과거 전격전의 전설, 한스 폰 루크의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를 번역한 진중근, 그리고 그와 함께 근무했던 김진호가 완역한 독일어 완역본이 길찾기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파일:진흙속의 호랑이.jpg
기본 번역본, 독일어 원전(原典), 독일어 완역


[1] 1943년 말, 포수 크라머 하사와 작정하고 계획 총 2발 사격했고, 2번째 포탄을 명중시켜 격추 시켰다. [2] 이는 전 세계 전차 에이스 중 2위에 해당하는 순위이다. 참고로 1위는 같은 독일 국방군 소속 쿠르트 크니스펠이 차지했다. [3] 기갑병과로 들어가 훈련을 받을 때 탑승한 적이 있다고 한다. [4] 죽기 직전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4호 전차의 전차장으로 배속받았다고 말했다. 자서전엔 어떤 전차의 전차장으로 탔는지가 언급이 되지 않아서 그가 4호 전차에 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인터뷰에서 4호 전차의 포탄으로는 T-34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단포신이던 초기형을 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그 형식이 어떤 것인지는 그 당시 서류나 사진이라도 발굴해내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를 것이다. 카리우스 본인도 사망해서 물어볼 수도 없는지라 진실은 저 너머에. [5] 독어 위키피디아 https://de.m.wikipedia.org/wiki/Herzog-Wolfgang-Gymnasium [6]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참전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상장 흑장과 검 1급 전공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소집되어 재복무했으며, 무사히 생존했다. 참고로 카리우스의 동생 볼프강 카리우스 또한 기갑부대 소대장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고, 카리우스 일가는 종전 1년 뒤에 다시 만나게 된다. [7] 사실이다. 당시 전차들은 대부분 철갑유탄을 사용했기에 피탄 시 승무원의 사망률도 높았고, 화재가 발생한 차량에서 탈출하지 못했다던가 하면 말 그대로 구워진다. 2차대전 기록사진 중 격파된 전차에서 온몸이 숯덩이가 됐거나 신체 어딘가가 없는 시신을 끄집어내는 사진이 많다. 현용 전차병 전투복이 일체형인 이유도 이것 때문. [8] 델러 하사는 카리우스가 소대장이었을 때,전차호에서 자신의 4호 전차를 꺼내는 작업을 지휘하다가 부츠가 눈에 미끄러지며 전차 앞에 넘어졌는데, 이를 눈치채지 못한 조종수가 그대로 전진해버리는 바람에 다른 승무원들이 황급히 제지했지만 허벅지가 궤도에 깔려 즉사하였다. [9] 2차 대전 초기 10개 사단 중 3개 사단(6, 7, 8기갑사단)에 이어서, 1940년 후반에서 41년 사이에 추가 창설한 4개 기갑사단(12, 19, 20, 22기갑사단)은 독일의 전차공급능력 문제로 체코제 전차로 무장했다. 다른 사단들도 기갑사단의 확대개편 과정에서 전차 정수를 절반까지 줄였다. [10]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은 훗날 카리우스가 기갑중대 중대장이 되었을 때, 부중대장에 의해 거의 똑같이 재현되었다. 자세한 것은 야크트티거 문서의 '512 중 대전차자주포 대대' 각주를 참고할 것. [11] 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 [12] 델차이트 상사와 제프 리거 상사가 이렇게 노가리를 깠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는 전우가 됐고 종전 이후에도 매번 만났다. [13] 대표적인 인물이 폰 슐러이다. 무전수 쇼트로프가 그의 뻘짓에 열받아 욕설을 퍼붓고 폭행을 시도하다 구금된 사례도 있고, 슈트라흐비츠 작전을 시원히 갈아마시고 백작에게 신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다만, 그 상황이 백작의 부재중에 발생한 일이라 군법회의는 열지 않았다. [14] 여기서 오토 카리우스는 IS-2 전차를 처음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티거 2를 소련군이 노획한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군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발포를 망설였다고 자서전에 서술했다. [15] 이 사람은 당연히 카리우스가 적진으로 가는걸 말렸는데 무시하고 반격하러 가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전장에 뒤따라 왔다가 경악하게 된다. [16] 1916년 3월 29일 출생, 2011년 6월 12일 사망했다. 바이에른 출신,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인물로 케르셔 역시 10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하여 격파 순위 12위의 에이스이다. 전후 카리우스가 보증을 서서 자녀들과 취업하여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 카리우스는 케르셔의 집안사정을 보고 충공깽했다고 한다. [17] 소련군의 대부분은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전차에서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18] 나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우로, 독일군이 티거를 정차해두고 마을로 들어갔다가 소련군한테 티거를 노획당하는 사건도 생긴다. [19] 이때 몸무게가 39kg까지 빠진다. 이미 카리우스는 그 전에 4번이나 부상을 당했고 이 때는 다리 1발, 등 4발, 왼팔 1발, 목 1발의 총 7발의 총상을 입었는데 살아남았다. 오토 카리우스를 죽이려던 소련군 장교가 독일군이 오는 걸 알고 급히 쏘다 한발은 빗나가고 한발은 경동맥을 피해갔다. 저서 진흙속의 호랑이에 따르면 그가 이 사건 이후 총을 맞았을 때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총을 맞을 당시에는 흥분하고 탈진했으며, 과도한 출혈로 총알이 몸에 피격될 때의 힘만이 느껴졌을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20] 팔다리를 맞은 건 그렇다고 쳐도 몸에도 4발이나 맞았는데 기적적으로 급소를 비껴맞았는지 신경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21] 전략 예비대인 티거 중전차 대대인 데다가 본인이 굴지의 티거 에이스이니만큼 모델 입장에선 최중요 전략 카드 중 하나였을 테니,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소련군을 분쇄하기 위해 절찬리에 마구마구 굴렸을 것이다. [22] 나르바 전역에서는 '태어나서 그렇게 호된 질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할 만큼 혼이 나기도 했다. 발터 모델 문서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자신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사병들을 최대한 배려하는 동시에 장병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지휘관인 장교들에게 매우 엄격한 성격이었다. 카리우스 또한 당시 중위계급으로 중대장을 맡고 있었으니(...). 하지만 카리우스는 모델 원수가 전장의 장병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는 것과 그 또한 장병들에게 너그러웠던 유능하고 책임감 강한 지휘관임을 언급하며, 루르 고립지대에서도 모델 원수의 지휘를 직접 받았던 만큼 그의 최후를 굉장히 안타깝게 여겼다. [23] Hyaz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 1893.7.30 ~ 1968.4.25. 최종 계급 예비역 중장이다.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이다. 슐레지엔의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원래는 승마에 능해 1914년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로 지명됐으나 하필이면 그해 전쟁이 터져 장교로 종군하다 막바지에 포로가 돼 프랑스 육군이 그를 파르티잔으로 오해하여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교로서 종군하였다. 12회의 전상을 입으며 프랑스 침공을 비롯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키예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나르바 등 격전지에서 싸웠으며 종전 후 시리아 육군 고문으로 지낸후 서독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2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출신의 육군 영관급 장교 에른스트 폰 슈트라흐비츠와는 먼 친척관계라고 하며 현재도 슈트라흐비츠 가문은 잘 유지되고 있다. [24] 공격기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의 약자이다. [25] 현재는 대대적인 홈페이지 개편을 거친 상태로, 카리우스 생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으며 carius를 검색해도 조회되는 것이 없다. [26] 정식으로 광고한 것은 아니나, 워낙 유명하고 약국을 운영한 탓에 연락이 쉬웠던지라 저서를 보내면 친필 서명을 해주기도 했다. # 카리우스에게 서명받는 방법을 국내에 알린 것은 이 사람으로, 덕분에 다른 팬들도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타 참전자들과도 직접 연락하고 서명 수집, 인터뷰 등을 하는 사람. [27]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현지인들의 유대인 습격에 대해서는 수정의 밤 사건과 연관지어 조금이나마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긴 하다. 그리고 힘러의 친위대로의 전군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다. [28] '소련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넘는 무기 체계를 선보였다'며 제외. [29] 그 때문에 자신이 죽을 뻔했으니 당연하다. 그리고 자신이 이 일을 겪었다면 다른 전차장도 마찬가지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없을리는 없을터. [30] 3호 전차보다 조금 아래라는 평을 받았는데 3호 전차는 개량을 통해서 성능향상이 가능했지만 이건 그것도 안되는 물건이었다. [31]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는 소련 최고의 칭호로 게오르기 주코프, 바실리 추이코프, 이반 코네프 같은 장성들이 수여받은 칭호였다. 하도 무능해서 적에게 이로운 행위를 했다고 붙은 비아냥 대는 의미의 칭호인 셈. 마치 무다구치 렌야를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훈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원이라고 부른 것과 비슷하다. [32] 실제로 영국군의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와 병사들이 나눈 대화를 영국 정보부가 감청한 내용을 담은 책 '나치의 병사들'을 보면, 독일군 장교와 병사들은 소련군에 대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야수처럼 싸우며, 매우 강건하다."라고 열렬히 칭찬했다. [33] 셔먼과 T-34를 비교하면서 T-34의 낮은 신뢰성을 까는 경우가 많으나 독소전에 한정한다면 상대인 독일의 티거와 판터 전차들은 자력으로 전략 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구동계의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약 1500km의 전략 기동 후 전투가 가능한 T-34의 신뢰성은 독일 전차에 비하면 굉장히 우수한 축에 속한다. [34] 실제로 미군도 프로파간다에 가려져서 그렇지, 비효율적인 면모가 적지않은 군대였다. [35] 유명 전범 이외에는 ' 탈나치화'를 거쳐서 그대로 활동한 인물들도 꽤 많다. 2차 대전 이후, 서독 군부나 정보부에서 근무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나치 경력이 있음에도 미군은 별로 문제삼지 않았고, 그들과 협력해서 소련을 상대로 공동 대응을 해왔다. 심지어 나치 고위 간부인 하인리히 힘러의 딸, 구드룬 부르비츠가 1962년부터 1963년까지 서독 연방정보국(BND) 직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독일의 나치 청산도 그리 철저히 된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미국도 반공주의 성향 때문에 나치 청산에 별로 열심이지 않았다. 소위 '탈나치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저한 과거사 청산이 아니었고, 많은 참전자나 전범들까지도 나치를 대충 잊고는 카리우스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살았다. [36] 영국의 처칠도 같은 생각을 했으며, 미국의 적지 않은 군사, 정치 방면의 상층부 인사들도 소련의 잠재력과 정치사상을 위협적으로 느끼며 예방 전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패튼은 동부전선에서 150개 사단의 독일군들을 보며 장비와 연료를 제공하고 영미군과 합쳐 싸운다면 3개월안에 소련군을 내쫓아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했다. 물론 영국과 미국은 국민 정서 탓에 다시 전쟁을 벌이기는 힘들었고, 저런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서방 연합군에서도 주류는 결코 아니었다. 당장 처칠의 언싱커블 작전에 대해 버나드 몽고메리를 비롯한 영국군 장성들은 매우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패튼의 소련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뜯어 말리느라 오마 브래들리는 진땀을 흘려야 했으며 해당 문제로 아이젠하워와 논쟁을 벌인 끝에 패튼은 제 3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37] 참고로 그림이나 사진의 해상도가 많이 떨어진다. 초판 인쇄본이 1943년 버전이니 해상도가 떨어질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