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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15:34:11

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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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파목(起翦頗牧)
백기 왕전 염파 이목


파일:염파.jpg
봉호 <colbgcolor=#FFFFFF,#191919>신평군(信平君)
(嬴)
(廉)
(頗)
최종직위 상국(相國)[1]
고향 불명[2]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1. 개요2. 생애
2.1. 《사기》의 기록2.2. 염파의 활약
3. 평가4. 기타5.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 명장.

흔히 노익장(老益壯)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나, 워낙 늙어서도 출중했기 때문에 그럴 뿐 실제로는 젊은 시기부터 손에 꼽는 명장이었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장수인 동시에 정치가로서도 안목을 갖춘, 문무겸비의 인물이었다.[3]

2. 생애

2.1. 《사기》의 기록

사기》 <조세가>에서는 그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 혜문왕 16년(기원전 283년), 염파(廉頗)가 장수가 되어 진나라를 공격해 석양(昔陽)을 빼앗았다.

조 혜문왕 20년(기원전 279년), 염파(廉頗)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조 혜문왕 23년(기원전 276년), 조나라가 누창(樓昌)을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의 기(幾) 땅을 공격하게 했으나 빼앗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에 염파가 장수가 되어 기(幾) 땅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했다.

조 혜문왕 24년(기원전 275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방자(房子)를 빼앗은 다음 그곳에 성을 쌓고 돌아왔다. 다시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조 효성왕 4년(기원전 260년), 염파가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장평(長平)에 주둔했다. 같은 해 조나라는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趙括)을 대장으로 삼았다.

조 효성왕 15년(기원전 249년), 위문(尉文)의 땅에 염파(廉頗)를 봉하고 신평군(信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장평대전의 패배로 초토화된 조나라를 노리고 동쪽의 연나라가 2군과 전차 2천승[4]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출격시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율복을 잡아서 죽였으며, 경진과 악한은 사로잡았다.

조 효성왕 16년(기원전 248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연나라를 포위하였다.

조 효성왕 18년(기원전 246년), 연릉(延陵)을 지키던 조나라의 장수 균(鈞)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나와 대장 신평군(信平君) 염파와 합류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

조 효성왕 21년(기원전 243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조왕이 악승(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지고 도망쳤으며,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본기>가 아닌 <세가>에서 이 정도로 방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인물은 드물 것이다. <세가>의 기록 외에 별도로 인상여 조사, 이목의 <열전>에서도 그의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허나 본인의 열전인 <염파인상여열전>에서는 누락된 기록이 많아, 위에 있는 <조세가>의 내용을 참고해야 한다.

2.2. 염파의 활약

전국칠웅 가운데 손꼽히는 강국이면서도 진(秦)나라와 인접한 지리적 약점 탓에 빠르게 쇠락한 조나라의 운명이 그의 인생 역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염파가 활약하던 시기, 조나라는 무령왕(武靈王)이 시행한 호복기사 개혁의 결과로 영토와 국력이 크게 신장된 상태였고,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원군,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인상여와 염파가 버티고 있을 적엔 진나라도 쉽사리 조나라를 건드릴 엄두를 못냈다. 그 시기 진나라의 왕이 바로 전국시대 최고의 정복군주로 이름높은 소양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서쪽으로 이웃한 진나라는 착실히 성장을 거듭한 반면 조나라의 전성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인상여, 조사와 같은 인재가 하나둘 세상을 떠난 가운데, 염파는 혼자 힘으로 진나라의 거침없는 동진을 막아내야만 했다.

70대의 염파가 진나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 장평의 전장에서, 그는 수비를 굳히고, 진군의 보급을 유린하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나라 조정은 염파를 뒷받침하기는커녕 진나라의 뇌물 공세와 유언비어에 넘어가 그를 해임한다.[5] 이후 염파의 후임으로 부임한 조괄은 명장인 아버지 조사의 이름이 무색하게도 진나라 최고의 명장 백기의 유인책에 휘말려 글자 그대로 개박살당했다. 본인도 전사하고 조나라의 거의 전 병력 45만여 명을 잃는 참패를 당한 것이다. 염파의 능력 및 망국 크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일화.[6]

멸망 직전까지 몰린 조나라는 탐스러운 먹잇감이었고, 평소 앙앙불락하던 동쪽의 연나라가 침략을 개시했다. 이 당시 연나라는 대군을 동원했는데, 신뢰도가 낮은 《전국책》에서는 연나라가 무려 60만명을 동원했다고 서술했고, 《 자치통감》에서는 전차 2,000대를[7]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당연히 과장되어 있겠지만 조군에 비해서는 몇배나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침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나라군의 규모는 사기에서는 알 수 없으나 전국책에서는 염파가 8만, 악승이 5만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사기의 비율대로 줄여보자면 당시 조나라군은 4만 5천의 규모로 20만 대군을 상대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쪽이건 호왈백만으로 추측되지만.[8]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온 연나라군은 오히려 염파한테 걸려 역관광 크리를 받았다. 심지어 2년 뒤엔 염파의 부장이었던 악승이 연나라 수도를 포위할 지경에 이르러 연나라는 조나라에게 영토를 넘겨주고 평화조약을 맺는다.

다시 염파는 전성기가 오나 싶었으나 조나라 도양왕(悼襄王)은 염파가 늙었다는 이유로 해임하고 악승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겼는데, 결국 빡돈 염파는 후임인 악승의 부대를 공격해버렸다. 이유야 어떻든 얄짤없는 반역 행위이니 염파는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으로 망명해 버렸다.

이후 진나라는 신나게 조나라를 두들겨 패는데, 멸망의 위기에 몰린 조나라는 결국 망명간 염파를 다시 불러들이고자 했지만 그의 귀환을 꺼린 곽개가 훼방을 놓는다. 이때 염파의 노익장에 얽힌 유명하며 처절한 일화가 나온다.

조도양왕은 염파를 쓰고 싶어도 워낙 고령이라 주저하는 마음이 일었고, 결국 사신을 보내 근황을 살펴보게 했다. 염파는 도양왕의 속셈을 눈치채고 건재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한 말의 밥과 열 근의 고기를 먹고[9] 한바탕 말을 달리며 무력 시위(?)를 했으나, 곽개가 사신을 먼저 매수했기 때문에 도양왕에게는 염파가 뭇 늙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건강이 쇠락했다는 보고가 들어갔고, 아니 이 시절 할아버지들은 한 끼에 고기 10근씩을 먹었다고? 결국 도양왕은 염파도 세월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불러들일 생각을 버렸다.

염파는 결국 위나라에서 중히 쓰이지 못하고, 초나라로 갔으나 결국 쓸쓸하게 늙어 죽고 말았다.
「我思用趙人。」
「나는 조나라 병사를 부리고 싶다.」
《사기》 < 염파인상여열전>에 기록된 염파의 유언

3. 평가

염파의 기록을 보다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성격이 굉장히 솔직하고 화끈하다는 점이다. 또한 재주에 걸맞게 자부심도 대단했던 모양으로 이는 겨우 세 치의 입을 놀린 것이 무엇이 공이냐면서 인상여에게 시비를 걸다 데꿀멍 부형청죄(負荆請罪)의 고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인상여가 염파를 피해다닌 것이 개인의 감정보다 국가의 대사를 위한 일이었음을 전해들은 후 크게 뉘우치며 회초리를 지고 인상여를 찾아가 벌을 내려달라며 사죄하는 진솔한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솔직하고 화끈한 면 때문인지 <염파인상여열전>과 당대 기록을 본다면 정치력이 부족한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물론 '기전파목' 중 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간신의 모함으로 숙청당했지만, 같이 숙청당한 백기와 이목과 비교해보아도 염파의 성격은 확실히 화끈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하는 《사기》 <염파인상여열전>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화끈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
(인상여가 화씨지벽 사건 이후 왕의 신임을 받고 난 이후)
「我為趙將,有攻城野戰之大功,而藺相如徒以口舌為勞,而位居我上,且相如素賤人,吾羞,不忍為之下。」
「나는 조나라 장수로 성이나 들을 공격해 싸워 대공을 세웠는데, 인상여는 혓바닥을 놀려 지위가 나보다 위에 있게 되었으며, 또 인상여는 본디 천한 출신이기에 나는 부끄러워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
宣言曰:
염파가 선언했다.
「我見相如,必辱之。」
「내가 인상여를 보면 반드시 욕보이리라.」
廉頗之免長平歸也,失勢之時,故客盡去。
염파가 면직되어 장평 땅에서 돌아와 권세를 잃었을 때, 옛 손님이 모두 떠났다.
及復用為將,客又復至。
다시 쓰여 장수가 되자 손님이 또다시 이르렀다.
廉頗曰:
염파가 말했다.
「客退矣!」
「손님들은 꺼지시오!」
客曰:
손님이 말했다.
「吁!君何見之晚也?夫天下以市道交,君有勢,我則從君,君無勢則去,此固其理也,有何怨乎?」
아아! 당신은 어찌 판단이 느리십니까? 무릇 천하 사람들은 시장에서 장사하듯이 사귀니, 당신이 권세가 있으면 내가 당신을 따르고, 당신이 권세가 없으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원망하십니까?
趙孝成王卒,子悼襄王立,使樂乘代廉頗。
조효성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조도양왕(趙悼襄王) 조언(趙偃)이 즉위하자 악승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했다.
廉頗怒,攻樂乘,樂乘走。
염파가 노하여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다.
廉頗遂奔魏之大梁。
염파도 마침내 위나라의 대량(大梁) 땅으로 달아났다.
출처 : 《사기》 <염파인상여열전>

인상여와는 결국 화해하여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손님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10] 염파는 장평대전 당시 억울하게 경질당하였으니 염파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못할 것은 아니었다만(...) 이러한 일화들에서 보여지는 솔직한 면 때문에 '정치'를 잘 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같은 '기전파목'의 일원인 왕전 이목이 지휘하는 조군을 꺾지 못했지만, 정치를 굉장히 잘해서 결국 초나라를 멸망시켰고, 편안한 노후를 보낸 것과 대조되는 행보이다.

또한 진(영성)/통일 과정 항목과, 중국 쪽 위키에 적혀있는 내용으로는 조나라에서 쿠데타가 무려 11번이나 일어났기에 조왕의 입장에서 그를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저 11번에 달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은 장군이 아니라 조나라의 왕족들이었기에, 왕권이 불안정했다는 뜻은 될 수 있어도 조나라 군부가 강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당시 정황으로 추론하자면 염파는 선대 왕인 효성왕에 의하여 권세를 잃었으나 재기용되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상국의 자리까지 올랐었는데, 이로 인하여 염파는 해임되자마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후임인 악승을 공격할 정도의 군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도양왕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악연이 있으면서 구국의 영웅이고, 군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염파가 두려웠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게다가 기록에서 엿보이는 염파의 화끈한 성격까지 고려하면...

여기에 더해 조나라를 떠날때의 판단은 정말 크나큰 실수였는데 물론 염파의 입장에선 왕이 자신을 숙청하는 상황이긴 했다. 허나 염파는 왕에 의해서 군권을 빼앗기자마자 자국 군대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그 전의 실책들은 사소한 성격 문제였다고 치고 넘어 갈 수 있으나 내전까지 치른 것은 너무나 큰 실책이었다.[11]

물론 도양왕의 행태는 당시 구국의 영웅인 염파에게 할 행동이 아닌 졸렬한 처사였고, 유목왕은 곽개의 모함을 듣고 염파를 끝까지 내친 것을 보면 염파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들을 종합해보면 염파가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주 쫓겨다닌 이유는 모함도 모함이지만 정치력의 부족도 한 몫 했으리라는 의견도 있다.[12]

4. 기타

염파의 망명은 그의 뒤를 이은 조나라의 마지막 명장 이목이 참소를 받아 유명을 달리한 사건과 더불어 결국 조나라가 헤어나올 수 없는 막장으로 굴러떨어진 직접적인 계기라 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황충의 연로함을 우려하자, 염파는 80이 넘은 나이에도 을 한 말씩 먹고 고기도 열 근씩 먹어서 모두가 두려워했다며 큰소리치는 대목도 바로 염파가 식욕으로 건재함을 과시한 대목에서 유래했다. 덕분에 중국에서 나이 든 사람이 노익장을 과시하면 황충, 혹은 염파라고 부른다.

5. 미디어 믹스

5.1. 킹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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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만화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

정석적인 염파 상, 인상여와의 문경지교도 간접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조사의 장례에서 노구를 이끌고 힘겹게 걷는 인상여에게 등을 내어주고 걸어가는 장면은 이 만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 주변에서 문경지교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인해 더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조를 지키는 유일한 벽이자, 장평에서 진을 막는 거대한 벽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조괄과 교체되었을 때,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맡기라고 큰소리치며 방방 뜨는 조괄을 보자 왠지 몹시 왕명을 거역하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라는 웃픈 독백을 하기도 한다. 결국 조괄은 오래안가 목이 잘려지지만....

이후 한단 포위전에서 복귀하여 한단을 지킨다. 수성이라 크게 전선에 나서지는 않고 본인도 그것을 못내 아쉬워 하지만, 포정이 위기에 처했을때 등장만으로 병사들을 제압하며 여전한 실력을 선보였다. 백기가 귀향간 이후 분노하여 성벽을 넘어 침범해 들어온 왕흘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무인대 무인으로서 깊은 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완전히 죽음을 각오한 왕흘이 한끗차이로 염파를 제압하고, 이에 염파는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나 염파를 죽이면 진이 이로워 진다며 왕흘은 그냥 떠난다. 그때 아무리 무를 관철시켜도 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염파 역시 비슷한 결과가 올것이라는 복선을 남긴다.

왕흘이 결국 죽긴 하나, 염파 본인도 중상이었기에 한동안 전선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며 한단이 다시 위기에 처한다. 그때 신릉군과 춘신군의 지원군, 이담의 죽기를 각오한 수성으로 한단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붉은 삼협을 조의 군사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평원군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나, 삼협은 스스로 나라를 떠돌기로 결정하자 아쉬워한다.

진 소양왕이 죽고 연나라가 느닷없이 조를 공격해오자 이목과 함께 막아서는 모습으로 또 등장한다.

5.3.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49.jpg
삼국지 12,13,14

삼국지 12 PK에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무/지/정 95/90/73/39 병과는 기병. 전법은 철벽.

좋은 능력치에 비해 전법이 약간 아쉬운데 위에 있는 장평대전과 극신을 물리친 일화를 반영해서 철벽을 준 것 같지만, 정작 노익장의 시초인 사람의 전법이 노당익장이 아닌 게 옥에 티이다. 그 때문에 코에이는 염파빠들에게 까인다.[13]

인상여와 문경지교의 일화가 있음에도 친애무장으로 설정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이벤트로 나온다. 전용 일러스트까지 있다.

삼국지 13에서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 95, 무력 90, 지력 77, 정치 39이며 특기는 훈련 7, 순찰 8, 위풍 3, 분전 5, 공성 8, 견수 8, 일기 6, 호걸 5에 전수특기는 순찰이다.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 A, 궁병이 B에다가 중신특성은 호단맹진, 전법은 조운과 같은 투지호장이다. 물론 조운만큼은 아니지만 전법이 전법인지라 PK에서는 야전에서 혼자 무쌍을 찍어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만화 킹덤이 일본에서 히트했고, 상술된 킹덤의 염파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포스의 무인으로 나오는지라 그 영향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5.4. 왕자영요

탱커 영웅으로 등장한다.


[1] <염파인상여열전>의 기록으로,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후, 신평군으로 봉해지면서 함께 임시 상국에 올랐다. [2] 혹자는 중산군(中山郡) 고현현(苦陘縣), 그러니까 현대의 허베이성 딩저우(定州)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3] 천자문》에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고 있다. [4] 20만 대군을 뜻한다. [5] 이때 내심 조나라의 왕이었던 효성왕도 염파가 지구전을 하는데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6] 한편 백기 역시 지나치게 큰 전공을 세우는 것을 우려한 승상 범수가 훼방을 놓아 조나라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7]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전차 한대에 보병이 최소 30, 보통 70~100명이 편제되므로 대략 15만 가량의 병력. [8] 사실 사기의 숫자 기록 자체는 어느정도 걸러서 보거나, 비율만 보는 것이 옳은 것이 이 연조전쟁 이전 조나라군이 입었던 피해는 장평대전에서 포로 45만 사망, 진나라 장수 가 조나라군 9만 섬멸 등등으로 피해가 말도 안되게 크기 때문. [9] 시대마다 오락가락했으나 점차 양이 줄어드는걸 감안하면 쌀 한 말을 대충 계산해도 최소한 20㎏ 이상, 현대인의 쌀 1인분의 양(150g) 기준으로 계산하면 대략 133인분 이상이고, 중국 전통식으로 계산한 근대로라면 약 5,960g, 현대인의 삼겹살 1인분(200g) 기준으로 계산하면 무려 29.8인분이다. 굶어 죽은 귀신도 이 정도 양은 도망가겠다 [10] 원문에서는 손님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전혀 나와있지 않은데 세간에는 염파가 이 충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넓게 썼다고 왜곡한 미담이 알려지기도 했다. 중화권에서 발행된 만리중국사라는 역사만화에서는 한술 더떠서 염파가 이 손님의 말을 듣고 손님들을 잘 대해주기로 결심하는데, 그 이유가 평소에 잘해주다가 기회가 되면 도구로 써먹고 버리기 위해서라고 묘사했다. [11] 쉴드를 좀 치자면, 염파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백기도 유배당해서 죽었으니... [12] 물론 같은 '기전파목' 중 하나인 이목조차 곽개를 필두로 한 간신의 모함에 죽은 것을 보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13] 그런데 이는 순전히 밸런스 탓일 수도 있긴 하다. 실제 인 게임에서 노당익장을 가진 장수는 죄다 궁병인데 이 전투력 35% 상승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는 궁병의 기본 전투력 자체가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책정된 수치일 확률이 높다. 문제는 염파는 병과가 기병인데 기병 + 노당익장을 줘보면 가뜩이나 높은 기병(특히 호표기)의 능력치가 폭등을 하고 방어력 35% 상승의 효과도 받게 되는데 이게 4코로 100초가 지속된다는 말도 안 되는 사기성을 보여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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