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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11:03:21

앙굴리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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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전의 내용3. 평가
3.1. 대중문화에서

1. 개요

Aṅgulimāla

불경 중 앙굴리마라경[1]의 등장인물로 희대의 살인마이자 석가모니의 제자다. 앙굴리말라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한자로는 앙구마라(央仇摩羅)ㆍ앙구리마라(鴦窶利摩羅) 또는 지만외도(指鬘外道) · 일체세간현(一切世間現) 등으로도 표기된다.

2. 경전의 내용

본명은 아힘사카(Ahimsaka)로 '해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도적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심하던 아버지가 일부러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꼬살라국의 법정직원이었던 아버지 바가와의 아들이었다. 앙굴리말라경에 따르면 12살 때부터 따까실라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머리가 좋고 명석했던 만큼 스승 마니발다라(摩尼跋陀羅)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스승의 아내를 건드렸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는 경전에 따라 구체적인 정황이 좀 다르다. 너무 머리가 좋은 앙굴리말라를 다른 제자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스승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것도 있고 진짜로 스승의 아내가 유혹을 했으나 거절당하자 분풀이로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있다.

처음에는 스승은 소문을 믿지 않고 오히려 아힘사카를 믿었으나 계속 소문이 돌자 마침내 스승이 분노하여 사람 1백 명을 죽여 손가락 1백 개로 목걸이를 만들면 도를 얻는다는 거짓 가르침을 내렸는데 이것은 앙굴리말라가 지독한 악업을 쌓아 도리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악의였다. 앙굴리말라는 스승의 거짓 가르침을 믿고 손가락을 모으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이렇게 사람을 죽이다 보니 어느새 99명을 살해했고[2]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든 자'라는 뜻인 '앙굴리말라'라고 불렀다. 코살라국왕 파세나디는 어린 시절의 앙굴리말라를 종종 만났는데 그를 순수하고 선한 이라고 여겨서 그가 이런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보고 이 희대의 살인마를 붙잡고자 군대까지 동원하였으나 실패했다.[3]

앙굴리말라는 '이제 한 명만 더 죽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자기 어머니마저 죽이려는 패륜을 시도하려는 뜻을 품었다. 석가모니는 신통력으로 앙굴리말라를 관찰하여 이런 사정을 알아차리고 마을 사람들과 제자들의 제지에도 개의치 않고 앙굴리말라를 제도하기 위해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앙굴리말라는 어머니를 죽이려다 석가모니가 보이자 칼을 들고 대신 죽이려고 쫓아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빠르게 뛰어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4] 앙굴리말라는 격분하여 "겁쟁이 수행자여! 멈추어라!"라고 화를 내었지만 석가모니는 여전히 앙굴리말라보다 앞서 가면서 "난 이미 멈추어 있다. 멈춰야 하는 자는 너다."라고 일축했다. 이에 의문이 생겨 그를 쫓는 것을 멈추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앙굴리말라에게 석가모니는 다시 한번 이렇게 말했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으니(ṭhita)[5]
모든 존재들에게 영원히 칼을 내려놓았음(daṇḍa)이라.
그러나 그대는 생명들에 대해 자제가 없으니(asaññato)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이 한 마디에 깨달음을 얻고 앙굴리말라는 그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를 풀어서 버린 뒤 칼과 활, 화살을 버리고 살인을 멈추고 석가모니의 제자로 들어갔다. #

앙굴리말라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된 후 코살라국왕 파세나디는 앙굴리말라가 석가모니를 해치고자 한다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동원하여 석가모니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한 광경을 보고 석가모니는 파세나디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군대를 데리고 왔는가 물어보았다. 이에 파세나디는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말라가 석가모니를 해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그러면 만일 앙굴리말라가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누구도 해치지 않는 수행자의 삶을 지내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파세나디는 그러면 그를 자신의 왕궁으로 초대하여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줄 거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때는 살인마였던 그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수행자의 삶을 산다는 말이 의심스러워 앙굴리말라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간다. 앙굴리말라가 있는 곳에 도착한 파세나디는 그가 정말로 앙굴리말라가 맞는지 확인한 뒤 그가 수행자로서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 너그러운 심성을 가지고 사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의심을 버린다. 그리고 앙굴리말라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자원을 아낌없이 베푼다고 했지만 앙굴리말라는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하니 괜찮다고 사양한다. 이에 파세나디는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실로 정복하지 못할 자를 정복하시었고,
다스릴 수 없는 자를 다스리시었으며,
난폭한 자를 조용하게 만드시었고,
사나운 불과 같아서 꺼버릴 수 없는 자를 꺼버리시었으며,
저희로서는 창과 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자를 잘 다스리시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십니다!

라고 말하며 크게 감탄한 뒤 왕궁으로 돌아간다. 파세나디 왕으로써도 앙굴리말라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기수급고독원 안에서 조용히 수행만 하며 지낸다면 그를 더 잡을 이유가 없기도 했고 프랑스의 불교학자 앙드레 바로(André Bareau)는 이를 당시 석가모니 부처와 국왕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불간섭'의 불문율에 따른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어느 날 앙굴리말라가 걸식을 하던 도중에 산고(産苦)로 괴로워하는 임산부가 수행자인 그를 발견하고서 자기 고통을 없애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앙굴리말라는 예전에 살인마였던 자신에게 편안한 생명의 출산을 기원하는 임산부의 당부를 받고 몹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석가모니가 있는 수행처소로 도망치듯 달려와 임산부의 부탁을 스승 석가모니에게 전했다.

석가모니는 앙굴리말라에게 말했다. "너는 급히 그 임산부에게 달려가서, ‘나 앙굴리말라는 단 하나의 생명도 손상한 일이 없으니 그 공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한 해산을 하라.’고 말하여라.". 가르침 받은 내용에 앙굴리말라가 놀라자 석가모니는 "너 앙굴리말라는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 이후로 단 하나의 생명도 해친 일이 없지 않느냐."고 알려주었다. 앙굴리말라는 곧바로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성자의 경지에 올랐다. 곧바로 임산부에게 달려가서 석가모니가 일러준 대로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 이후로 생명 단 하나도 손상한 일이 없으니 그 공덕으로 고통을 여의고 편안히 생명을 낳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임산부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건강한 아기를 출산했고 앙굴리말라가 임산부에게 던진 말이 불교 진언(眞言)의 시작이라고 전한다. # 이후 앙굴리말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죽음을 가져오는 자'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호하는 자'로 바뀌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앙굴리말라가 탁발을 하러 가던 중 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돌을 던졌다.[6] 그러나 앙굴리마라는 저항하거나 도망치려는 기색 없이 이것도 과보라고 받아들이며 그들이 던진 돌을 맞아 열반에 들었다.[7] 이 소식을 들은 부처는 비록 악인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는 것에 감탄하며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평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해친 자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었다니"라며 놀라워했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많은 악을 행한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법했다. 물론 깨달음을 얻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지을 수 없게 된다고 해서 예전에 지었던 과거의 업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영향을 받으며, 그 업의 결과는 필연적인 것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천신도 심지어 석가모니 부처와 같은 붓다조차도 그 결과를 막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가르쳤다.

〈테라가타(장로게경)〉라는 불경이 앙굴리말라가 남긴 것이라고 한다.

3. 평가

일부 엄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악인 미화 논란에 놓일 수도 있는 이야기라는 지적도 있다. 악역이나 민폐를 끼친 인물들에게 선한 마음이 있다거나 및 불쌍한 면이 있다고 묘사하면 가차없이 악인 미화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8]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엄벌주의에 의거한 주장이다. 앙굴리말라 이야기의 핵심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니 벌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그 악인이 과연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참회했는가\'에 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일국의 군대도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깽판을 치던 대악당이었지만 깨달음을 얻어서 마음 속에 있던 모든 살심(殺心)을 버렸고 앙굴리말라의 껍데기만 보고 달라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복수로써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는데 이 부분에서 예전 같으면 백 명이 덤벼도 못 당할 괴력을 휘두르면서 사람들을 해치던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초주검에 이르러 다 죽게 된 앙굴리말라를 향해 "지금 기분이 어떠냐."라고 물었고 앙굴리말라는 "나는 아무 후회가 없습니다.\"라며 둘 다 돌을 던진 사람들을 향해서 아무 원망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다른 전승에서는 앙굴리말라가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그것을 다 받은 다음 죽지 않고 석가모니에게 초주검이 된 꼴로 돌아왔는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석가모니가 앙굴리말라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수행자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고 있는 것이다. # #

악역이나 민폐를 끼친 인물들에게 선한 마음 및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하면 가차없이 비판 및 미화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은 적어도 석가모니와 앙굴리말라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는 제자 앙굴리말라를 향해서 "너는 나에게 귀의해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 과거의 죄가 모두 씻어졌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아힘사까, 참아내야 한다. 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그것은 네 과거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 스스로가 나서서 앙굴리말라가 불쌍하다고 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앙굴리말라는 이제 내게 귀의해 내 제자가 되었으니 그의 죄가 모두 씻겨 사라졌다. 너희도 더 이상 이 사람을 원망하지 말라"고 한 적도 전혀 없다. 파세나디 왕의 입장에서도 앙굴리말라가 더 이상 바깥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사원 안에서 수행만 하고 있는 한에야 딱히 그를 더 이상 처벌할 이유가 없었기도 하고 실제로도 앙굴리말라는 석가모니 부처에게 귀의한 뒤에 죽는 순간까지도 아무런 문제를 저지르지 않았다.

악인 미화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앙굴리말라가 자신이 행한 죄과치고는 너무 편하게 죽었다고 분개할 수 있지만 어떤 방식의 죽음이든 앙굴리말라는 죽음을 맞았고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을 향해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면서 돌을 던지던 사람들에게 성질을 부리지도 않았고 하다 못해 자리를 떠나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그 돌을 다 맞고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앙굴리말라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분명한 잘못임을 인정했다는 것이고 죽어가는 순간에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당장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법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끝까지 잡아떼거나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종교에 귀의해서 구원을 받고 거듭났다며 종교 시설을 돌며 간증이랍시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분명히 앙굴리말라의 태도는 이들과는 명확하게 다른 점이 있다.[9]

사형/존폐 논란 항목에서 보듯 처벌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지 범죄자에게 복수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법륜스님은 누누히 강조한다. 실제로 앙굴리말라 이야기를 들어 "그 사람은 나름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마음이 편해졌다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하는가? 참회하면 죄가 사라지느냐? 사람의 마음은 회개나 참회를 해도 습관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법륜은 그것은 복수하고 응징하는 관점에서 처벌을 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는 상대방이 잘못을 하면 꼭 응징을 해야 하고, 응징 중에서 가장 강한 방법이 죽이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세속의 논리이지 수행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예수"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10]라고 했는데, 신이 보기에는 너는 악인이니까 햇볕 안 준다, 너는 옳지 못한 일을 했으니까 비를 안 준다 이러지 않는다. 즉, 신은 사람들이 말하는 도덕적, 윤리적 잣대를 차별하는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자신의 잘못을 들먹이면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자리를 피해버리는 일이 없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죄과에 어울리는 고통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죽음은 죽음이고,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앙굴리말라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피하거나 저항하는 일 없이 다 받고 죽었다는 대목에 앙굴리말라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핵심이 있다.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새 사람이 되었는데 왜 나를 다들 욕하고 따돌리느냐. 나는 억울하다"며 욕하지 않고 앙굴리말라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든 얻지 않았든 자신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겪는 천시와 돌팔매질로 인한 죽음 모두가 과거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서 받아야 하는 인과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한편 다른 관점에서의 비판도 존재하는데 앙굴리말라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에 대한 의견이다. 본인들은 출가하기 전의 앙굴리말라에게 가족 및 주변인을 잃은 피해자의 입장이고 그렇기에 분노할 수도 있다지만 앙굴리말라에게 돌을 던진 시점에서 이미 보복 차원의 사적제재이며 심지어 이때의 앙굴리말라는 출가해서 제자가 된 만큼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승려에게 해를 가한 행위라는 점이다. 즉, 전자든 후자든 결과적으로 사적인 감정으로 생명을 해한 업 및 승려에게 해를 가한 업을 지었는데 왜 후에 돌을 던진 사람들이 그 업에 대한 댓가로 벌을 받는 묘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게 비판점이다. 실제로 이 의문점은 BTN에서 방영했던 원빈 스님의 <청춘토크쇼 절친> 시즌 2에서도 수요 소재로 사용된 바가 있다( 5화, 6화).

이 이야기는 현실 역사의 전범 미화와는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종교적 이야기인 만큼 평범한 인간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담을 수밖에 없다.

앙굴리말라가 산고로 괴로워하던 임산부 앞에서 말해 그 임산부가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했다는 일화에서 앙굴리말라가 말한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고의로 뭇 삶의 생명을 해친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그대와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이라는 말은 진언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하며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해산에 임박한 여성에게 앙굴리말라 숫따(Aṅgulimāla Sutta)를 들려 주어 순산을 도왔다고 한다. 코코넛 나무 조각이나 질그릇 등 다산과 생식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그 임산부 주변을 빙 둘러 싸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동남아시아 신화에서 '피에 굶주린 인물'과 '다산' 모티브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해석된다. 폭력(살인 포함)과 출산 모두 '피를 흘리는 것'을 수반하며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앙굴리말라가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는 과정을 수반하는 출산과 관련하여 살인자에서 치유자로 이미지가 전이되는 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3.1. 대중문화에서

인도의 평화운동가 사티쉬 쿠마르는 석가모니와 앙굴리말라의 이야기를 소재로 <부처와 테러리스트>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은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

앙굴리말라 이야기를 어그로 시리즈로 패러디(?)한 단편만화가 있다. # 이 패러디 만화를 그린 사람은 현직 스님으로 석가모니판 둠 코믹스로 유명한 그 작가가 맞으며 대반열반경이나 데바닷타 등의 패러디 만화도 그렸는데 읽어보면 만만치 않다(...).

세인트 영멘에서 붓다는 손가락 몇 개가 잘리더라도 처자식을 위해 야쿠자 업계에서 손을 씻겠다는 류지를 보고 앙굴리말라를 떠올렸다. 대략 어두운 과거를 짊어진 FF 주인공같은 아이인데 99개의 손가락을 모으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서 손가락을 모아 목걸이로 만들었고 자기도 손가락을 잘릴 뻔했는데 늘 하던 대로 조금 꾸짖었더니 그대로 자신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바탕은 무척 착한 아이였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수타페 툰니룻 감독으로 2003년에 앙굴리말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하필 태국에서는 이 영화가 "불교의 가르침과 역사를 왜곡하고 불교 경전에서 찾을 수 없는 힌두교와 유신론적 영향을 도입했다"고 20개 단체에서 상영 금지 요청이 들어왔고 태국 영화검열위원회는 "이 영화가 불교의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았다"며 이들의 상영 금지 요청을 기각했지만 일부 폭력적인 장면이 삭제되고 영화의 슬로건도 바뀌고 나서야 검열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태국에서 이 영화는 "액션도 별볼일 없는데 너무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혹평만 듣고 흥행에는 실패했다. # 극중 앙굴리말라 역을 맡은 배우는 피터 노파차이 차이야남(Peter Noppachai Jayanama)[11]이다.


[1] 팔리어 경장 중 맛지마 니까야의 일부. 한자로 된 경전도 존재하는데 중국 유송(劉宋)의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abhadra)가 435년에서 443년 사이에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이라는 제목으로 한자로 번역하였다. 줄여서 앙굴경이라고도 한다. # [2] 스승이 100명이 아니라 1000명을 죽이라고 했고 모은 손가락도 99개가 아니라 999개라는 전승도 있다. [3] 앙굴리말라의 악행이 앎과 삶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한 칼럼도 있다. # [4] 앙굴리말라의 달리기 속력은 달리는 이나 코끼리, 마차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5] 해치려는 마음을 멈추었다고 해석된다. [6] 전승에 따라서는 대신 패싸움에 휘말려서 맞았다고도 한다. [7] 죽지 않고 초주검으로 목숨만 부지한 채 살아 돌아왔다는 전승도 있다. [8] 불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고 "악인도 회개하고 참회하면 구원을 받고 성인(부처)이 될 수 있다"고 교리에서 강조하지만 이건 악인에 대한 미화라기보다는 "저런 악인도 회개하고 참회하면 구원을 받고 성인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선인은 어떻겠느냐?"라고 해서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로 귀의하는 것을 강조하고 권장하기 위한, 한마디로 일종의 역설을 사용한 강조 표현이다. [9] 예언자 세례 요한은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태오의 복음서 3:8)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0] 마태오의 복음서 5:45 [11] 1973년생으로 태국-독일 혼혈이다. 1999년에 데뷔하여 여러 드라마에 출연했고 앙굴리말라는 그의 영화 데뷔작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최근작이 2023년에 개봉한 시티시리 몽콜시리 감독의 영화 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