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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9:52:35

아오지 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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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북한에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탄광
3. 통일 이후 예상
3.1. 관련 문서
4. 패러디5. 같이보기

1. 개요

/ Aoji Coal Mine

북한 함경북도 경흥군에 있는 탄광. 광복 당시 행정구역은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일원이다.

'아오지(阿吾地)'라는 지명은 아우라지 동북 방언으로 ' 두 물이 만나는 곳'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것은 충청남도 천안 아우내,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와 비슷한 어원이다. 2개 이상이 어울러지다, 아우르다는 말이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 김일성이 '우리말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면서 아오지가 붙은 명칭들을 개명하며[1] 주장하던 여진어설[2] 등이 있다.

과거 백학산 남쪽의 웅기읍과 함께 경흥군의 양대 중심지로 번영했다. 하지만 정작 옛 군청 소재지였던 경흥면은 이때도 쩌리였었다. 1952년 구 신아오지리 지역에 경흥읍을 설치하고 1967년 아오지 탄광을 6.13탄광[3]과 오봉 탄광으로 분할, 1981년에 구 아오지리를 학송리로 개편하면서 공식적으로 아오지라는 지명은 북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열악한 환경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북한 정부 수립 이후로 북한 정부에 반대한 상당수 정치범들과 국군 포로들이 혹독한 환경에서 아오지에서 막장을 캤던 관계로 남한에서 정치범수용소로 악명이 높지만 1960년대 말 이후로는 정치범 수용소가 아닌 탄광지역으로 바뀌었다.

2. 상세

이곳에서는 주로 갈탄이 나오며, 이른바 함경북도 남부탄전이라는 길주-명천 지구대 일대와 함께 이곳은 한반도에서 둘뿐인 갈탄 채굴 지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탄질은 휘발분 41%, 고정탄소 31%, 발열량 6,225cal으로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매장량은 약 1억 5천만 톤으로 추정했는데 설비의 노후화로 채광을 못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미국 자유아시아방송은 함경북도 탄광 대다수가 설비 노후화와 자재 부족으로 채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가 있다. #

1936년 일제강점기에 석탄 액화 시설을 세워 인조 석유를 만드는 공업지대로 유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 당시 화학공업이 뒤떨어졌었고, 기술은 독일에게 받아왔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수소첨가기술을 이전 받지 못해서 저품질 액화석탄만 생산되었다. 1940년 상하면이 아오지읍으로 승격해 일제 말기에는 면적 205.46㎢,[4] 인구가 5만 명에 가까울 만큼 큰 읍이었다. 즉, 남북분단이 안 되고 한반도가 전부 대한민국 관할이었다면 1949년 단천읍과 함께 아오지시로 승격되었을 수도 있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저런 자원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아오지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유명하다.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 탄광과 함께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양대산맥이며, 일반인에게 있어서 인지도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 이유는 바로 1970~1980년대의 반공 교육에서 정치범수용소의 대명사로서 많이 나와서였다. 이곳에 집단적으로 배치된 국군 포로들은 광산에서 고된 노역을 하면서도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일반 인민들과 함께 살았으며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관리소라고 부르는 지금의 정치범수용소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사실 탄광 이름은 유월십삼일탄전(6.13탄전)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남쪽에서는 여전히 아오지 탄광으로 부른다. '아오지'라는 그 미묘한 어감도 이쪽이 철산 탄광에 비해 유명해지는 데 한몫했다.[5]
사실 아오지 탄광의 악명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일제 시대에 허술한 노동 안전과 동발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을 강행해 갱이 무너지는 사고가 잦았다.

해방 뒤 6.25 전쟁 직전까지 북한 내 반대파,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참가자 등을 여기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박명림은 6.25 전쟁 때 미군이 북한 지역에서 노획한 문서인 아오지 이송명부 등을 토대로 전쟁 전에도 북한 안에 조직적인 반대 세력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 밖에도 한국전 당시의 반대 세력(구월산 유격대나 치안대 관계자)을 감금하는 용도로도 써서 전쟁시 월남자들을 거쳐 정치범수용소로 드러났다. 이쪽 관련 서적에 따르면 철산 지역의 모나즈 광산도 꽤 악명높았다고 한다.

북한의 스포츠 선수들이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같은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아오지 등 탄광으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있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관련증언들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인민 루니' 정대세가 2012년 한 예능방송에 출연해 이 루머에 대해 해명한 적이 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선수들과 감독들의 지위도 과거에 비하면 높아졌기 때문에, 설령 참패하더라도 감독이나 선수들이 아오지에 가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대세의 말 또한 어느 정도는 걸러들어야 하는 점이, 정대세 자체가 토종 북한출신이 아닌 재일동포( 조총련)이기 때문에 북한 내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6] 무엇보다 한국TV에 출연하는 북한 국적[7]의 인물이 자기 나라에 대해 나쁘게 말할 가능성이 애시당초 없다는 점도 감안되어져야 한다.[8] 또한, 정대세 본인은 재일동포라는 신분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탄광행에) 해당이 안 될 가능성도 있고, 축구 외에 각 종목마다의 특성도 있기에, 정대세의 발언을 북한 스포츠 전체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정대세의 발언을 지지하는 측에서 내세우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스포츠 대회에 첫 출전해서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면 감독부터 선수까지 전부 탄광행인데 그러면 선수 씨가 마른다. 실제로는 부상, 기량 하락 등 타국 팀과 같은 사유가 아니면 각 종목 대표선수들은 대회에 계속 나온다. 그리고 애초에 거기서 운동선수 정도면 핵심계층 내에서도 최상위권[9]에 속한다. 단지 성과를 못내면 비판을 많이 받기는 한다. 북한 자체가 자아비판이나 인민재판 같이 워낙 비판을 강요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참여 의지만 있으면 참여가 가능한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이면 몰라도 월드컵은 본선 진출도 어렵다는 점이,[10] 아오지로 보낼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그렇지만 최상위권의 핵심계층이라는 이유로 탄광행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는, 후술되는 유도 이창수(공훈 체육인)의 케이스로 봤을 때 간단히 반박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무리 지금은 북한에서 부진한 운동선수들을 탄광으로 끌고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피해자가 명백히 존재했던 사건을 없었다고 왜곡하며 부정하는 행동은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단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김정훈은 아내가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와 관련된 발언을 했다가 김정은의 역린을 건드리는 바람에 숙청당했지만,[11] 이건 경기력 외적 부분이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탄광행 주장의 근거는, 국제대회에서 한국 선수한테 패배한 후 탄광에서 일하는 징계를 받았다는 증언들이다. 전 북한 유도 국가대표 선수였던 이창수는 북경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한국의 정훈에게 패배한 후 삼진 탄광에 끌려갔다.[12] 심지어 당시기준 이창수는 공훈 체육인으로 북한 내에서도 위상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나마 탄광에서 일한 기간은 단 2일이라고 했지만, 이건 이창수가 당시 북한 핵심 권력층이었던 장성택과 연줄이 닿아있었던 관계로 운좋게 탄광에서 풀려났던 케이스일 뿐이고, 아무 빽도 연줄도 없는 선수라면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또한, 아오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동교화소 수준의 처벌을 받는다는 증언이 있다. 전 북한 리듬체조 선수이자 탈북자 이경희는 "성적이 안좋으면 아오지에 가나"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한국 쪽 사람들과 만나거나 해서 성적이 떨어지면 '처벌'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김씨 일가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자기 회고록에서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부진했던 축구선수들을 강제로 감자 농사에 참여시키도록 고위 간부가 시켰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런 징계의 경우에는 작정하고 범법자로 처벌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신차리라는 뜻에서 하는 것이라서 정치범처럼 몇년씩 가두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며칠에서 몇 주 정도씩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남한에서도 스포츠 선수들에게 정신 무장이라며 지옥훈련을 시키는 일[13]이나 경기에서 패배했을 때 체벌하는 일을 북한에서는 막노동을 시키는 식으로 하는 식인데 이게 와전되어서 아오지행이 된 것이다. 다만 그냥 진다고 보내기보다는 형편없는 참패나 직전 대회 대비 성적이 크게 떨어진 경우나 가는 듯 싶다.

아오지에서 살다가 탈북한 탈북민이 밝히길 "두 다리 잘렸어도 '밥 달라'고 애걸한다"며 식량난에 제일 보급이 먼저 끊기는 곳도 아오지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

2.1. 북한에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탄광

하지만 위의 내용과는 별개로 아오지 탄광은 1967년 유월십삼일탄전 (6.13탄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이는 6월 13일에 김일성이 방문해서 현지지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바뀐 것이다. 아울러 '사적지'로도 지정되어서 대대적인 시설보수가 이루어져 현재 북한 내 탄광 중에서도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고 한다.

북한에서 김씨 일가와 관련된 사적지는 그야말로 '성지'와 같은 대우를 받는 곳이다. 그러니까 김일성이 다녀간 것을 기념해서 사적지로 지정된 곳을 강제수용소로 사용한다는 것은 북한 체제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1950년대에는 수용소로 썼을 수는 있지만 최소한 1967년 명칭 변경과 사적지로 지정된 후에는 강제수용소로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출신 성분이 안 좋거나 타지에서 추방당한 이들이 정착한 지역이라 그런지, 이곳에서 자란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배급도 제일 먼저 끊긴 지역이라고 한다. 다만 최근에는 추방을 시켜도 아오지로 보내지는 않는데, 탄광이 국경지대 근처에 위치해 있는지라 탈북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탄광의 탄맥도 이미 1980년대에 끊어진 것으로 추정돼 사실상 탄광 체험(…) 관광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으로 추정된다.

1995년 5월, 남한 사람 내지 재외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월간 '말'지에 게재된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아오지에 대한 북한 외부 인사의 방문기라는 것이다.
《참 오랜만에 학생시절처럼 밥곽을 싸가지고 기차려행을 다해보다니 호강합니다.》
그러자 2층 침대에서 잠이 든 줄만 알았던 J참사가 말을 받았다.
《네?! 지금 뭐라고 말했습니까?》
《호강한다고 했습니다.》
《호강이요? 우린 그런 말 처음 듣습니다.》
《호강이 조선말 아닌가요. 그런 말을 모르다니요?》
《우린 그런 말을 모르고 그저 <즐긴다>정도로 말하지요. 왜냐하면 우리 사회라는건 누구나 사회를 위해서 인민을 위해서 자기를 바쳐 복무하자는 생각뿐이기때문입니다. 우린 <호사>니 <호강>이니 그따위 말조차 없습니다.

(북한 입장의 아오지의 역사, 아오지가 김일성에 의해 발전했다는 내용. 이하 생략)

중학교 교원인 아버지와 유치원 보육원인 어머니, 그같은 인테리부모님과 함께 고향인 청진에서 도시생활을 즐기면 그만인 꽃다운 처녀 박옥화양, 그러나 그녀는 《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어 직장에서 받은 모처럼의 휴가를 고스란히 탄광에 바치러 왔다가 그만 눌러앉기로 했다.[14] 그대신 온 직장 총각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고…
아오지탄광에서 한생을 바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령님이 바라는 힘든 부문》에 몸을 바치고저 12년째 일한다는 김순복씨는 《수령님과 지도자선생님의 배려로…》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광산설계원양성학교에 추천되여 3년간 공부한바 있다. 그는 다른 탄광보다 수령님께서 많이 찾아오신 이 탄광에서 자손대대로 일할것을 다짐하면서 《수령님께서 다시 살아만 오신다면 이보다 더한 그 어떤 고난도 달게 받겠다.》며 흑흑 흐느껴 울었다.
하나 같이 대대손손 아오지에서 일할 것을 다짐하고 하나 같이 당에 충성 충성을 맹세하는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우는 듯 싶었다. 갈길이 먼 우리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함께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마지막으로 기업소주변을 1바퀴 돌아 보자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국방색 작업복 차림의 배낭을 메고 있는 한무리의 남녀 청년들이 줄지어 어디론가 가고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그 청년들의 잔등우에 《일》, 《편》, 《단》, 《심》, 《충》, 《성》의 글자 하나씩을 운동선수잔 등의 번호처럼 달고있지 않는가, 하긴 그들의 운을 맞추어 세우면 《일편단심, 충성》 그런 식의 말이 되는 모양이다. 내가 재미 있다는 듯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으려니 조지도원이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아마도 저 학생들은 현지답사 겸 탄광 지원하러 온 사로청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청년들일겁니다.》
하긴 북조선에 가보면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광경이긴 하다. 국방색 작업 복차림에 저마다 무언가 연장을 하나씩 든 사람들이 어디론가 줄지어가는 모습… 그러면 그들이 다 로동자이거나 농민들이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북조선 방문을 시작한 후 한참 뒤의 일이다. 그 후 알게 된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 나라에서는 매주 금요일이면 남녀로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금요로동》이라는 프로그람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그를 통해 전민 로동 계급화 운동이 실시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로동의 신성함이 강조되고 너 나 없이 국가 건설 혹은 나라살림에 몸소 땀 흘려 참여한다는 것이다.

2015년 기준 아오지에서 분리된 오봉 탄광은 아직 생산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이하게 광산 설비 투자가 부족하여 너무 설비가 낡아 나머지 탄광 중 생산이 중단된 곳이 많다고 한다. 함경북도의 100 여 개 탄광 중 가동이 되는 탄광이 2개 뿐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그 중 하나라고 한다. #

3. 통일 이후 예상

일단 학송리를 그대로 쓸 이유는 없으니 경흥군(또는 나진시와 도농통합될 경우 나진시) 아오지읍 아오지리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전술했듯이 북한판 굴라크인 아오지 탄광의 악명이 너무 크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특구가 활성화되거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나 남한의 서대문형무소같은 느낌으로 북한의 정치수용소를 대표하는 다크투어 관광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15][16]

갈탄 매장량이 여전히 상당하나, 애초부터 갈탄 자체가 효율이 나쁜 데다가 이 곳의 갈탄은 더더욱 그러하므로, 남한의 기준으로는 탄광으로써 재사용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물론 워낙에 남북 격차가 큰 지라, 통일 이후 적어도 수십년은 남북한의 경제 및 생활이 서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고 각자의 고유성을 가진 채 활발히 교류하는 식으로 서서히 통합될 확률이 높다. 이를 전제하면 통일 직후의 북한 지역은 제대로 된 경제 발전을 갓 시작하는 개도국의 처지와 비슷할 수밖에 없고, 그런 형편에선 아오지의 갈탄도 화력 발전 및 가정용 연료 등으로 굉장히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

3.1. 관련 문서

4. 패러디

보통 북한 사람들이 김씨 일가에 밉보이는 행위[17]를 한 게 보도되었다 싶으면 '아오지로 끌려간다'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쓰인다. 물론 실상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정치범수용소 신세를 벗어난 상태였지만, 너무 널리 쓰이는 나머지 사실상 대명사이자 보통명사가 된 고유명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셈.

5. 같이보기


[1] 아오지가 붙은 여러 지명은 오봉 정도를 제외하면 '은덕', '6.13', '학송(김일성 측근 이름)'과 같은 우상화 지명으로 바뀌었다. [2] 북한에서는 아오지는 여진어로 '불타는 돌', '검은 금'을 뜻한다며 선전을 하였고, 이것이 한국 학계에서도 퍼져 있다. 아마 숯을 뜻하는 만주어 어휘 yaha를 근거로 하는 추측인 듯하나 근거가 부족한 감이 있다. [3] 룡연로동자구 소재다. 원래의 아오지 탄광은 이쪽이며, 이 탄광을 끼고 번영했던 곳이 구 아오지리다. [4] 당시 청진시의 면적과 비슷했다. [5] 다만 최근에는 아오지보다도 더한 요덕 수용소 등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가 많이 알려져서 요덕 수용소가 이쪽으로 더 유명해졌다. [6] 특히, 재일동포인 정대세가 축구 외 북한의 다른 스포츠종목들 벌칙사례까지 모두 알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7] 정확하게는 한국ㆍ북한 복수국적. [8] 기본적으로 탄광관련 사항은 북한국적을 포기한 탈북자 또는 망명자들에 의해 언급된다. [9] 안 그러면 해외 경기를 뛰러 갔다가 그대로 타국 대사관으로 달려버리기 때문이다. [10] 북한은 현재까지 본선에 진출한 월드컵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단 둘뿐이다. [11] 이게 왜 숙청될 일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고용희는 재일동포 출신이기 때문에 혈통을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어서 의도적으로 비밀에 부치고 있기 때문이다. [12] 모란봉클럽 83회. [13]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을 정신 무장 시키겠다며 해병대 캠프에 집어넣는 일이 남한에서도 무려 2023년에 있었던 일이다. 스스로도 정신력이 무너져 가는 중인 해병대가 국대 선수들에게 정신력 운운할 자격이 있나는 모르겠다만, 여하간 [14] 실제로 북한에서는 무리배치, 탄원 같이 강제로 이런 직장에 배치되는 사례가 있다. 물론 다 자발적이라고 주장한다. [15]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지 북한의 북자도 함부로 말할 수 없던 군사 정권 시절에도 아오지 탄광만큼은 널리 알려져 있었을 정도다. [16] 다만 위에서 서술되었듯 최소 1967년 이후부터는 악명과 달리 혹독한 수용소로 이용되지는 않았으니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현재는 요덕 수용소가 아우슈비츠에 견줄 만큼 혹독하다. [17] 숙청,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패배(...) 등 [1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도"라는 뉴스 프로그램 패러디 코너 '통일전망대'의 오프닝곡이다. [19] 가사: "오데로 갔나, 오데로 갔나, 오데가(×2) 땅굴파고 토꼈나, 미그기 타고 날랐나, 내래 버린 아새끼래 오데로 갔나요, 쓴물 단물 다 빨아먹고, 눈물 콧물 다 짜게하고, 잡히기만 해봐라 아.오.지야요, 내 마음은 너덜너덜 걸레가 됐시요." [20] 참고로 포르투갈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7골을 넣었던 북한전을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는 단 1골도 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