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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13:14

순욱/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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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가들의 평가3. 왕좌지재
3.1. 소하로서의 역할3.2. 장량으로서의 역할
4. 토사구팽
4.1. 왕을 거부한 왕좌지재의 비극4.2. 순욱의 죽음이 불러온 파장
5. 한(漢)에 대한 충정과 관련된 의문
5.1. 부정론5.2. 긍정론
6. 인재를 보는 눈

1. 개요

파일:attachment/xunyu2.jpg
허창의 순욱 동상
순욱(筍彧): 패도 위에서 태평성대를 염원한 대정치가

순욱에 대한 평가를 모은 항목.

2. 역사가들의 평가

중국 역사가들은 조조군 최고 모사는 순욱이라 평가한다. 조조군 내에서 순욱이 가졌던 위상과 중요성은 부동의 1위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으며 곽가나 사마의는 실리만 채웠을 뿐 명분을 살리지 못한 비판이 있지만[1] 오히려 순욱은 명분, 실리 둘 다 취하였기 때문이다.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다면 조조에게는 순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2]

조조의 최고 공신이자 심복이었지만 동시에 한나라의 충신으로도 평가받는 아이러니한 캐릭터이다. 이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기는 했지만 말년에 조조와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한나라라고 하는 가치에 대한 수호 의지'는 객관적으로 인정받기 때문.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와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 이 세 사람을 조조의 모사 중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 같은 권에 넣었고, 그중에서 순욱을 제일 앞에 넣었다. 순욱에 대해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품격, 선견지명을 갖추었지만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한나라"라고 하는 가치를 두고 대립하다 조씨 정권 세력에 의해 숙청당한 것에 대한 평가로 보여진다.

배송지는 조씨가 한나라를 무너뜨린 게 순욱의 책임이라는 세상의 비난을 변호하려고 했다. 배송지는 당시와 같은 난세를 평화로 이끌기 위해, 순욱은 조조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이 일로 인해 한은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백성들은 구해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배송지는 가후가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데 진수가 순욱, 순유랑 동렬로 평가했던 것이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범엽은 순욱을 한실의 충신으로 평하여 후한서에 순욱의 열전을 따로 실었다. 범엽은 순욱이 난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위해 힘썼지만 조조와 양립할 수 없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극찬한다. 청나라 시대의 조익도 저서 이십이사차기에서 범엽이 순욱을 한나라의 신하로 열전을 실은 것을 공감했다.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목은 저서 한기에서 순욱이 조조를 전한의 건국자 한고조, 후한의 건국자 광무제에 비유하며 조조를 응원한 기록이 있으면서 조씨를 도와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비판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두목의 비판에 대해 순욱이 조조를 광무제, 한고조에 비유한 것은 단지 사가의 창작이라고 두목의 의견에 반박했다. 또한 순욱이 조조를 황제에 올려 부와 영예를 쫓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죽은 충신이라고 찬양했다.

고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그다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현은 업성(鄴城)이라는 시에서 "알겠네 이 업성 밑에 있던 순문약은 요동의 관유안( 관녕)에게 부끄러울 거야"(須知鄴下荀文若/永愧遼東管幼安)라고 읊었고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사마광을 까면서 "사마온공은 경에서는 맹자를 의심하고, 사서에서는 위나라를 황제로 칭했으며, 양웅을 성인으로 과장하고, 순욱을 왕좌지재라고 했으니, 비판할 점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흠잡지 못하는 것은 그의 행실이 상도에 맞아 비난할 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司馬溫公以經則疑孟, 以史則帝魏, 詡揚雄以聖人, 目荀彧以王佐, 可議者多, 然人不得以疵之者, 以庸行之無可議也)라고 하기까지 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무통론을 주장했고 단지 위나라의 연호만 빌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하기까지 한 혹평이지만 어쨌든 이 시대의 기록을 보면 대체로 절의를 잃은 선비의 예를 들 때 쓰인다. 한나라에 충성을 바쳤든 말든, 조조 밑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보기 영 좋지 않았던 듯하다. 조조가 황실에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정이었던 고려와 조선에게 있어 조조는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3]

3. 왕좌지재

그는 조조의 장량이자 소하였다. 조조는 처음에 순욱을 일컫어 자신의 장자방(장량)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장량이 한고제 유방의 패업에 끼친 영향과 그의 역할을 조조의 세력에 비유하면 이러한 조조의 칭찬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조조의 세력 안에서 그가 위치했던 자리와 그가 조조를 도와 이루었던 업적을 평가하면 그는 장량과 비교될 만하고, 그가 본진을 관리하며 뒤를 봐주는 역할을 맡은 점을 생각하면 그는 소하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토사구팽을 생각하면 최후는 한신과 비슷하다. 행정가 이미지만 강하지만 군략 쪽으로도 유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과 비교된다는 평가는 사리에 들어맞는다. 조조 세력에 임군한 초창기에도 종군하였으며 196년 즈음에도 종군하였다고 하는데, 위에서 언급하였듯 앞뒤를 맞추어 보면 '조조 세력 초창기 전쟁터에 종군 → 세력 성장 후 본진 관리 역할 → 여포의 배반으로 조조 세력이 멸망 직전 수준까지 몰림에 따라 다시 종군 → 세력이 다시 성장 한 후 다시 본진 관리 역할'의 흐름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조조 세력 본진을 맡는 2인자지만 세력이 크지 않을 때는 항상 종군을 했다는 점에서 군략 쪽에서도 믿음직한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사 쪽으로 순욱의 입지는 아주 확고했는데, 조조의 참모진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조의 핵심 참모인 순유, 가후, 곽가, 정욱, 진군 등등 각 분야에서 출중한 대표적인 인재들 무리에서 순욱은 이들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니, 그가 인재를 대하는 수완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실 오히려 단순히 군략과 내정을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군략 쪽이 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정가로 보기에는 치적 부분에서 크게 눈에 띄는 이야기는 없는 편. 소하는 관중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도 군량과 병력을 유방에게 꾸준히 조달했던 반면, 순욱이 후방을 책임졌던 조조군은 군량 부분은 곤란한 일이 꽤 있었다. 보급에 있어서 레전설인 소하를 제치고 당대에서 비교해도 조조군은 인육까지 섭취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보급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론 이건 정욱에 대한 정치적 모함에 가까운 일화로 보이나, 어쨌든 저런 소리가 어느 정도 돌 수 있을 정도로 보급에 곤란이 있었다는 증거라 볼 수는 있다. 이건 흔히 쩌리 취급을 받는 한복이나 도겸은 보급에 있어서 오히려 꽤나 여유로웠던 편. 원소 쪽도 상당히 쪼들렸던 것으로 보이나, 관도대전을 보면 오소 전투 이전까지는 조조 쪽이 더 쪼들린 것으로 보아 조조보다는 확실히 나았던 듯.

다만 이건 연주 지방에서 무지막지한 재앙 수준의 흉년[4] + 이후로는 서주 대학살로 서주 지역의 기반 초토화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 물자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최고 세력인 원소와의 대결을 이겨낼 때까지 다른 세력들의 견제를 생각하면서도 버텼으니 굳이 폄하할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뭐 어쨌든 최후에 순욱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록을 불태웠다고는 하지만, 외부 기록들을 보더라도 내정적 업적을 보면 내부 관리, 인재 관리에서 업적이 두드러지는 편이기는 하다.

때문에 조조 세력에서 문관직 중 조조 다음으로 가장 높은 벼슬을 받은 사람이 순욱이었다. 순욱하면 쉽게 떠올리는 상서령이라는 관직은 단순 직위 자체의 경우 (어디까지나 다른 최고위 직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지 않으나, 실권에 있어서는 행정관리를 총괄하는 수준으로 사실상 문관 최고봉 중 하나인 셈이었다. 문관의 대장군 포지션. 지금으로 따지자면 부총리 정도의 느낌. 덤으로 황제의 최측근 직위인 시중의 벼슬도 겸임하였다. 당시 중국 관직제도를 크게 외조와 내조로 나누는데 외조는 실질적인 행정실무를 포함한 행정기관이었고 내조는 황제 직속 행정기구였다. 삼국 시대 당시 내조는 상서령이 최고 권력자였고, 외조는 승상을 포함한 삼공이 최고 권력자였다. 조조의 체계 아래 승상부가 최고권력 기관이 되어 외조를 장악하고, 그와 별개로 결국 순욱은 조조의 최측근이었으므로 사실상 조조는 내조와 외조의 모든 권력기관을 장악한 셈이었다. 순욱은 승상인 조조 본인의 직계에 속하지 않는 집단인 내조의 우두머리를 맡긴 최측근 핵심이었던 것이다.

3.1. 소하로서의 역할

유방이 군사를 이끄는 동안 소하가 본거지를 담당하였듯, 조조가 군사를 이끄는 동안 본거지의 관리는 순욱의 역할이었다.

연주의 위기 상황에서 조조의 근거지를 간신히 살려내어 그것을 기반으로 천하를 평정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닫게 한 것으로 보아, 순욱이 아니었다면 조조는 원술처럼 잠시 반짝하고 끝난 군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욱이 당시의 조조의 세력은 원소의 영향력이 강하였기에 근거지가 없었다면 원소 아래의 객장으로 흡수되었을 테지만,이 경우 원소가 잠재적 위협인 조조를 그냥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원소가 스스로 조조를 내보내지 않는 한 조조의 독립은 힘들었을 것이며 형주를 얻기 전의 유비와 비슷한 신세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 직후 조조 세력은 원소의 도움으로 연명하기도 했고, 원소는 흔들렸던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던지 조조의 처자식을 자신에게 보내는 인질로 요구하는 등 조조는 한동안 온갖 수난을 겪었다.

또 관도대전의 승리 이후 조조군이 막 업성을 접수했을 즈음, 원담이 항복하고 원상이 조조에게 패퇴하자 고간 또한 조조에게 항복해왔는데, 아직 하북의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은 조조는 고간의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이후 조조가 오환으로 달아난 원상을 처리하기 위해 북방 원정을 계획하자 고간은 조조의 부재를 틈타 업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순연의 활약으로 계획이 발각되어 내응자들이 처형당했다. 이에 고간은 상당태수를 인질로 잡고 호관을 봉쇄해 기주 방면에서의 군세를 차단한 뒤 사예주를 공격하여 조조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업성 장악은 실패하였으나 사예주에서 홍농, 하동, 하내의 3군이 호응해 조조에게 매우 큰 위기로 다가왔다.

당시 고간은 원소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만일 3군을 거점으로 싸움을 장기화해 밖으로는 유표의 협공을 약속받고 조조에게 넘어간 하북의 세력을 조금씩 흔든다면 조조의 하북 평정이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이전과 악진으로 하여금 호관을 공격하게 하고 사예주에서는 종요가 고간을 공격하였으나, 이전과 악진은 호관 공략에 실패하고 사예주 3군은 고간 세력이 결국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조조 본인이 직접 나서 호관을 공략했고, 허도에서는 순욱이 하후돈과 중앙군을 이끌고 종요와 합류하였다. 사예주 3군의 반란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순욱은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했는데, 순욱의 예상대로 두기는 하동군 내부에서 반(反) 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고간이 직접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나 관서군벌 마등의 변심으로 인한 협력과 그의 아들 마초가 뛰어난 군략으로 가세해 명장 곽원을 잃어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상황이 역전되었다. 마초 때문에 사예주의 군세가 약화되었고 서쪽에서는 마등, 동쪽에서는 조조, 남쪽에서는 순욱의 협공을 받는 상황이 되자 결국 고간은 유표 세력에 망명한다.

3.2. 장량으로서의 역할

유방의 거시적 방향성을 비롯한 세력의 대소사에 장량이 큰 영향을 끼쳤듯이, 조조는 순욱과 크고 작은 많은 일을 의논하였다. 아래에 서술하듯 결국 순욱 본인이 전부 불태워버렸지만, 조조가 전장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상담을 하였다 하니 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순욱의 조언으로 헌제를 맞이한 것으로 조조는 도의적으로 크나큰 방패를 얻어, 이후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유리한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천자 옹립은 위나라 창업 기반을 마련한 조조의 패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헌제를 끼고 있으면 자신의 행동이 모두 조정의 행동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헌제의 생각이 어땠다 한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외치면 장땡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들이 쳐들어올 경우 너 역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 다른 군주들에게도 그렇겠지만, 특히 서주 대학살로 악명을 얻은 조조에게 있어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허울 없는 것이더라도 벼슬 자리를 쥐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원소 역시 주위의 책사들로부터 헌제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받았으나 본인이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어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당시 자신의 우군격인 원소에게 태위를 제수했지만, 원소는 이 자리를 반기지 않았다. 이 시기의 태위는 실권이 없던 명예직으로, 은퇴를 앞둔 명망 있는 노신들이 받던 자리였다. 결국 조조는 원소를 높이는 척 했지만, 실권이 있는 대장군 자리는 자신이 갖고 원소는 뒷방 늙은이처럼 취급한 것이다.[5] 이러한 조조의 생각을 모를 리 없던 원소는 장문의 장계를 조정에 올려 태위 자리를 거부했고, 조조는 결국 원소에게 대장군 자리를 양보했다. 대신, 자신은 사공 행 거기장군이 되었다.[6] 이후로도 조조는 끝까지 실리를 챙기고 실직을 차지함으로써 원소를 견제했다.

헌제의 옹립은 명사들의 지지를 회복하는 '비장의 카드'였다. 다만 이 비장의 카드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헌제의 명의로 다른 군웅들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한나라의 부흥의 대의로 여기는 명사들'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조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순욱은 이점을 들어 헌제를 옹립하라고 권해 그가 패자가 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협천자는 조조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조는 이후 한나라를 등에 업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속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한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조조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순욱의 도움으로 과감하게 손에 넣었다. 서주에서의 횡포로 인한 명사들의 반발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또 영천군 허현을 근거로 삼은 이상, 영천군의 명사 순욱의 건계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순욱이라는 존재감의 무게가 서주 대학살 이후 조조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조조군 세력이 약한 초기에는 항상 조조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전략 전술을 내주었지만 나중에 조조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2인자로서 본진을 맡게 되었다. 조조가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내정을 완벽하게 해내며, 조조가 중원을 통일하는 데 있어 실질적으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의 전술을 멀리 떨어진 이에게 상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본진을 관리하느라 전장에 나설 수 없는 순욱을 대신하여 조조는 순욱이 추천한 다른 인재들과 상담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 전체를 통괄하는 방침은 언제나 순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했다.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틀은 순욱이 이끌었다는 것.

이와 같이 순욱은 조조에게 수많은 답장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전쟁을 도모하는 법에 대한 헌책을 하였으나, 이 헌책을 담은 편지들은 아쉽게도 순욱이 죽기 전 모두 불태워, 관도대전 때 후퇴를 고민하는 조조에게 조언한 내용과 같이 같이 다른 기록물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모두 알 수 없게 되었다.[7]

4. 토사구팽

그의 최후는 위씨춘추와 배송지 및 후한서에서의 기록과 진수의 삼국지 정사의 기록이 충돌한다. 위씨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명백한 토사구팽이고, 진수의 삼국지 정사 역시 읽기에 따라서 좌천( 토사구팽)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 여담으로 순욱을 높게 평가한 사마광 자치통감에서 역시 자살로 적고 있으나 빈 그릇 이야기는 없고, 그냥 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었다. 평생 본거지를 지키던 순욱이 조조와 사이가 틀어진 직후에 전장으로 발령받은 후, 출정 시기에 맞춰서 사망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롭다. 뜻이 달라 지방으로 발령냈으면 그게 전형적인 좌천 패턴 아닌가?

아무튼 순욱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조조와 순욱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조조 세력이 안정적이던 와중 순욱이 전장으로 발령난 것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이때가 거의 유일하다. 간단하게 말해 적벽대전이나 관도대전에서조차 순욱은 본거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오로지 조조 세력에 제대로 된 밑천이 존재하지 않을 때나(완전 초창기), 여포-장막-진궁 측의 배반에 의해 본거지가 거의 다 홀라당 날아갔을 때만이 순욱의 종군 시기다. 사실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투에 단 한 번 종군 처분을 받은 것이다. 어거지로 해석한다면야 좌천이 아니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을 좌천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애초에 병사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더러, 순욱은 병으로 수춘에 머물렀다가 근심 속에 죽었다.고 되어있는 걸 병사하였다고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기도 하다.

위씨춘추에서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낸 것은 ' 이제 네 먹을 것은 챙겨주지 않겠다. 네 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정도로 해석된다.[8][9] 순욱의 죽음도, 순욱 본인이 죽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혹은 버림받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굽힐 수 없음을 자각하여 자결을 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조조군의 핵심 중에서도 최고 핵심인 순욱과 정치적으로 완전히 틀어진 만큼, 그대로 두기에는 조조 입장에서 신경 쓰였을 것임이 분명하다.[10] 어떻게 죽었든지 그의 퇴장은 조조의 이런 움직임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위씨춘추, 배송지, 후한서, 자치통감의 자살과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 분사로 되어있는 등 사서들의 내용이 충돌하고, 어느 쪽의 기록이 맞는지는 입증할 근거가 없기에 순욱의 죽음에 조조가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은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단 중국 사서에는 조조가 순욱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는 편이며, 일단 진수의 삼국지 정사가 진나라 때 쓰여져 조조와 사마의 일족의 치부는 왜곡 혹은 누락하는 모습을 몇번도 아니고 자주 보여 주었기에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편이다. 사실 찬합 일화 진위에 대해 어느 쪽을 믿든 토사구팽 자체는 확실하다.

그리고 순욱이 죽은 다음 해, 조조는 끝내 구석을 받고 위공이 되었으며 후일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불과 8년 후, 조비에 의해 한나라는 망하고 조위가 건국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순욱의 정치 기반이었던 영천 호족은 조씨를 버리고 사마씨를 지지하여 사마염에 의해 위나라는 망하고 서진이 건국된다.

4.1. 왕을 거부한 왕좌지재의 비극

그는 조조의 세력 강화에 있어 누구도 비할 수 없는 독보적인 공을 세운 전략가이자 정치가였지만, 조조가 위공의 작위를 받는 것에 반대함으로써 실각하고 자살했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순욱은 조조를 섬기었지만 근본적으로 한나라의 충신이었다는 것이고, 주인의 힘이 한나라의 복권에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지 그것이 찬탈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

국가의 재건을 위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신을 보좌하는, 어찌보면 역적 그 자체의 행동을 고수한 순욱을 후대로부터 현대의 역사가들에 이르기까지 하여금 충신으로 인정하고 변호하게끔 만든 이례적인 현상의 원천은 유교적 신념의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천자마저 자기 주인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그 자기 주인의 뜻에도 반대해가며 지키고자 한 것은 "망해가던 한(漢)나라"라고 하는 수백 년 된 하나의 거대한 이념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순욱 본인의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충성의 대상이었던 것.

아무튼 일단 순욱의 업적과 조조 세력 내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에 대해 살펴보면, 순욱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인재 선발의 경우 조조 세력의 정치적 역량과 사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공적 중 하나였다. 그가 수많은 인재를 천거한 것을 농담삼아 일명 '순욱 피라미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인재 선발의 기초적인 배경은 그가 속한 집단인 영천 호족 인재풀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순욱은 이렇게 명사의 조조 세력 참여를 주도함으로써 일종의 그룹을 형성하고 영천 호족들의 영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순욱은 '영천 청류파 세력'들을 '탁류파인 조조 가문'과 결합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후한이 무너지기 시작한 군웅할거 시기엔 호족들은 훗날 권력의 중추에 오르게 되는 사마씨든, 순씨든, 진군 일가든 작은 소요에도 고향을 버리고 피난가는 힘없는 사인층에 더 가까웠다. 순욱의 집안 자체도 조부 순숙 때부터 유명해진 집안이고, 어쨌거나 이들이 생존하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엔 순욱이 조조와 손을 잡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들이 특별히 독자적인 집단의식을 표출하거나 순욱의 권위를 독보적으로 여기지는 않았음을 생각하면[11] 이를 당(黨)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순욱 본인의 능력과 권력 그리고 명망을 생각하면 하나의 거대한 집단의 중심에 순욱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순욱과 그의 추천을 받은 명사들은 당대의 인텔리들로서 높은 수준의 유교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순욱이 조조가 한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이유로 조씨 일가와 반목한다면 조씨 일가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돌변할 소지가 다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후일 조씨의 위나라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순욱 본인의 자손을 비롯한 이 영천 호족들의 2세대'가 조씨와 멀어지며 마찬가지로 영천 청류파였던 사마씨를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조의 또 다른 참모 동소가 순욱에게 위공 관련 논의를 꺼냈을 때, 순욱은 충정(忠貞)을 이유로 반대했다. 조조의 권력과 순욱의 이념이 정면으로 맞부딪힌 순간이었다. 순욱의 저항은 조롱과 풍자를 기본 골자로 한 공융과는 형식 면에서 달랐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변질의 위기에 직면한 유교를 유교로 재반박했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이를 통해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낸 것은 그를 죽이는 대신 단지 실각시키는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도의 표출이었다는 해석은,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인 듯 싶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순욱이 자살한 것은 조조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저항이자 한편으로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순욱은 한나라를 지키려다 죽었다. 순욱은 그 어떤 문제가 쌓여있는 시대라 해도 모든 정치적, 군사적 행동은 한나라를 위한 의(義)와 충(忠)의 구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원천은 유교에서 나왔다. 사상적 깊이와는 별개로 파격적인 언동을 무기 삼았던 공융과는 달리, 순욱은 철저한 정도의 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세심하게 감쌌고 현실적 상황과 타협하며 본인의 생각대로 국가를 재건할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당대 정치가이자 유학자로서 정점에 다다른 사람조차 마지막에 이르러 자살 외에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품격 외에도 힘이 부족할 때의 사상이란 얼마나 무력한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강명의 삼국지 - 국교를 벗어나, 한나라의 바깥에서

순욱 사후에 조조는 실책을 거듭하며 힘을 제대로 못 쓴다. 물론 순욱이 살아있었을 때도 조조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실책을 이겨내어 더 큰 성장을 해낸 반면, 순욱 사후에는 역경을 이겨내더라도 현상유지 정도에 불과하였다. 순욱이 좀 더 오래 살아서 조조 세력의 안정성이 더 확보되었다면 사마의의 제위 찬탈이 힘들어져서 사마씨의 세상이 아닌 조씨의 세상이었을 거라는 평도 존재한다.[12]

또 재밌는 의견으로 만일 조조가 유비처럼 유씨 황족 출신이라면 순욱은 조조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는 것에도 본질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순욱의 행보를 보면 '한 황실'에는 집착하면서 한 황실의 인물들, 심지어 황제마저도 냉혹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황후를 비롯한 친인척들의 패악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조조의 동귀인 세력 축출, 즉 황제의 외척 축출에 별 다른 반응이 없었고[13] 황제마저도 자신의 주인인 조조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의 ' 한나라' 그 자체가 흔들리는 것에는 자신을 걸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하듯 순욱은 한나라라고 하는 그 가치에는 크게 충성하나, 혼란스러운 당시 천하에서 황족, 심지어 황제를 포함한 인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천하의 안정을 위한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다는 수준의 냉정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조조가 유씨 황족이었을 경우 찬탈하더라도 유씨의 한나라라고 하는 근본은 흔들리지 않는 셈이기에, 순욱은 조조의 찬탈에 대해 조조 세력에게 미칠 실리적 이익만을 따져 판단할 것이지 근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하지만 그의 식견을 생각할 때 만약 왕위찬탈을 벌였다 미래에 벌어질 참혹한 대난세를 우려해서 반대했을 수도 있다. 순욱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수도 없이 읽었을 역사서에서 이미 몇 차례고 증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수 백 년 간 난세가 계속되었고, 진시황 진나라가 무너지고 벌어진 전쟁 유린, 그리고 다행히 유방에 의해 전한이 세워지고 평화가 맞이하지만, 왕망의 찬탈로 세워진 신나라 광무제 후한이 들어서기까지의 혼란 등 그가 수도 없이 읽고 공부했을 역사의 결과물이 나와 있다.

순욱은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평한 것처럼 결실을 맺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조조 한나라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기나긴 혼란의 시작을 여는 셈이었다.

왕좌지재라는 칭호에 걸맞게 결국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왕의 위치로 올려 놓았으나, 정작 주군 조조와의 이념적 갈등으로 자신의 재능과 이상 간의 딜레마 속에서 씁쓸한 최후를 맞았다.

4.2. 순욱의 죽음이 불러온 파장

순욱의 죽음은 단순히 한나라에 충성한 개인의 비극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조를 중심으로 한 집권 세력 내부분열의 본격적인 시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향이 어마어마했다. 그 이유는 순욱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지와, 그가 대표하고 있던 정치집단이 후한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인 호족과 청류파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사를 읽던, 연의를 읽던 간에 독자들은 후한말~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유달리 반란이 잦다는 것과 그 반란이 위/오에서 어마어마한 빈도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군현제를 통해 지방 호족들에게 느슨하게나마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던 한나라 중앙정부가 실질적으로 붕괴하면서, 각 지방 호족들이 이합집산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정말로 크다.

특히 후한 말까지만 해도 아직까지 중앙 정부가 강력하게 지방호족들을 장악할 수 있을만큼 영향력이 크기 힘든 시기였다. 애시당초 군현제를 통해 지방관과 지방호족이 서로 티키타카해가면서 적절히 서로 견제와 협력을 주고 받으며, 여차하며 중앙정부의 군사력과 수도권 호족의 힘을 통해서 찍어누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연결고리가 환관 정치로 인해 완전히 박살나버렸다보니, 지방 호족들이 겉으로는 실권자와 군벌들에게 굽신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차하면 다른 인물을 옹립하면서 그들의 모가지를 수틀리면 잘라버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삼국 정립 직전 중원 최대의 세력을 구가했던 원소가 전풍, 저수 등을 숙청한 것은 원소 특유의 심각한 패권주의적 성향 탓이기도 했지만, 전풍과 저수 등으로 대표되는 지방 호족 + 유학 엘리트가 가진 영향력을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던 결과라는 해석 또한 가능할 정도니...

특히 오나라의 경우에는 아예 중앙정권의 영향력이 차단된 지역에서 형성된 호족연합정권이며, 손씨 일가는 그들 연합의 정치적 맹주로서의 위상을 가졌을 뿐,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광범위한 중원 영토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출신성분과 지역으로 뒤엉킨 인재풀을 가졌던 조조 휘하의 위나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조조가 여러 정치세력들을 자기 휘하에 둘 수 있었던 것은 협천자를 통해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정치적 명분, 그리고 수도권을 둘러싼 지방호족 및 청류파의 대표 인사이며 사실상 그들의 가장 큰 소통구 역할을 해준 순욱을 비롯한 영천 순씨 일족과 청류파 문인들을 대거 중앙 정계의 핵심인사를 등용하면서 중임한 것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본인의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조인과 하후돈을 위시한 탄탄한 조씨 일족 인사들의 활약, 항장 무인들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독점한 조조의 용인술과 본인의 막강한 카리스마를 통해서 휘하의 정치세력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순욱의 역할은 정말로 컸다. 본인의 능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탁류파에 의해 숙청 당한 유학자들이 밀려난 지역호족들을 중심으로 청류파로 부활하는 과정에서 영천 순씨 일가의 영향력이 워낙 막대했던 지라 순욱 본인의 영향력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지방호족들이 조조 휘하로 투신했고, 이들의 결속은 조위가 삼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막대한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토사구팽과 숙청을 일삼으며 법가식 통치를 지향한 조조의 통치 성향 서주대학살에서 비롯된 서주 일대 명사들의 이탈 탓인지 조위는 항상 정치적으로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있었으며 역설적으로 조위는 조조 생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끊임없이 이름난 명사들과 군사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들의 무수한 반란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 조씨 정권에 투신하여 세력을 굳히고, 중앙정권으로 진출한 지방호족 세력들의 불안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조조 정권 내에서 그들과 집권자 조조 사이의 균형을 굳혔으며, 결정적으로 출신성분 덕분에 지방 호족들로 하여금 조위가 지방 호족들을 무시하지 않으리라는 정치적 시그널 역할을 해줬던 것이 순욱이었다. 그러나 순욱이 어떤 이유로든 간에 허무하게 팽당한 뒤에 죽게 되고 나서부터는 지방호족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더욱더 활발하게 이합집산하게 되며, 조위에 대한 충성은 날이 가면 갈수록 약화되게 된다. 특히 순욱의 사망 이후부터 또 다른 정치적 명가 출신이자 호족가의 인물이었던 사마의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정계개편이 점차 진행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후한말 최고의 명가로 꼽혔던 여남 원씨와 홍농 양씨와 같은 대표적인 호족가들이 몰락한 마당에, 그 뒤를 이어 지방호족의 원탑은 당연히 청류파의 원조나 다름없던 순욱을 배출한 영천 순씨였다. 그런 순씨가 조조와 뜻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한 것은, 결국 조씨 일가를 제외한 다른 정치세력은 시다바리 노릇이나 하라는 뜻으로 비쳐졌고, 실제로 조위를 건국한 조비, 뒤를 이은 조예, 그리고 사마의에게 휘둘리다 주살 당한 조상같은 실권자들의 의도는 노골적으로 조씨 천하에 있었다. 문제는 순욱을 비롯한 이러한 청류파/지방호족/유학 엘리트의 조합을 견제할만한 친위세력 양성에 조조가 근본적으로 실패했다는데 있었다. 특히 군사력으로 이들을 찍어누를 수 있었던 항장을 비롯한 무인 집단들은, 그들의 반란 가능성과 배반에 대한 병적인 의심에 시달린 조조 덕분에 친위세력화하지 못한 채 빠르게 수명이 다해버렸다.[14] 결국 지방호족들을 컨트롤 하는 것은 조씨 혈족과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하후씨 일가, 아이러니하게도 조조가 그 젊은 시절 그토록 병적으로 혐오하던 몇몇 사돈을 위시로 한 혼맥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런저런 다툼과 후계자들의 병크, 그리고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씨 일족의 능수능란한 정치적 숙청에 휘말려 몰락했고, 이는 지방 호족들의 연립정권 내지는 혼맥집단인 진나라의 발흥과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또 다른 난세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즉 순욱의 죽음은 단순히 한나라의 멸망과 개인의 흥망과 더불어 조조 정권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은 나비효과의 시발점 중 하나였다.

5. 한(漢)에 대한 충정과 관련된 의문

5.1. 부정론

"옛날 고조는 관중(關中)을 보전했고, 광무제는 하내(河內)에 근거하여, 모두 근본을 깊고 굳건히 하여 천하를 제압하고, 나아가면 족히 적에게 이길 수 있었고, 물러나도 견고히 지킬 수 있었으니, 그래서 비록 곤경이나 패배가 있었어도 끝에는 대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산동(山東)의 난을 평정하였으니, 백성들이 귀의하여 기뻐하며 감복하지 않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수(河水, 황하)와 제수(濟水)는 천하의 요충지로 지금 비록 잔멸되어 무너졌으나 오히려 쉽게 스스로 보전할 수 있으니, 이것은 또한 장군의 관중과 하내가 되는 것이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정사 삼국지 순욱열전

전근대 시기엔 지금보다도 오히려 순욱의 평가가 좋지 않았다. 한의 충신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측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에서도 언급된 당나라의 시인 두목. 정사 삼국지 순욱전에는 순욱이 조조에게 후한의 재건이 아닌 신왕조 창건의 야심을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만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조조가 연주를 보전하는 것은 각각 한고제가 관중을 보전해 천하를 제압하고 광무제가 하내에 근거하여 천하를 제패한 것에 비하고 있다. 이는 조조더러 이들과 같이 연주를 바탕으로 삼아 천하를 얻으라고 조언한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신하의 입장이 아니라 군주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당시의 이념상 "한나라"를 지키겠다면서 천자를 겁박하고 황후를 폐하는 등의 폭거를 용인하는 것은 분명한 자가당착이다. 한(漢)에서 태어나 충성을 강요하는 유학을 국시로 공부하며 자란 영천의 명문가 엘리트인 순욱이 기존 '천자(天子)-충신(忠臣)-안민(安民)'으로 이어지는 당대 유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부정하고 '천자나 황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漢)이라는 질서가 어떻게든 유지되는 게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다는 평가들은 당시 한나라 기준으로는 동탁개혁론에 버금가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즉,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살았다는 지점에서 이미 순욱은 손씨孫氏를 추종하며 새천하를 꿈꿨던 동오의 인사들만큼이나 '한의 충신'으로 보기 어렵다. 순욱이 제세안민에는 관심이 있었을지언정 한나라에 충심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해석이다,

긍정론에서는 원소를 언급하며 한나라와 천자를 구분하는 시선도 존재했다고 하는데, 그 원소부터가 스스로도 제위에 오를 야심을 보인 역적에 불과함을 고려해야 한다. 원소는 역심을 품고 있으니 헌제의 전통성을 부정하고 이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며, 순욱이 진정 한에 대한 충심이 있었다면 원소와 같은 시선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원소와 순욱의 헌제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다른데,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헌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한황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순욱은 헌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그 권위를 복구하는데 앞장섰음에도 조조가 헌제를 겁박하는 것을 묵인했기 때문에 이것이 한황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동승 등을 위시하여 조조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천자가 밀지를 내렸다는 주장이 드러난 상태에서, 그 순욱이 천자의 밀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지 못했을리도 없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천자를 겁박해놓고도 자신이 '한'에 충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순욱이 생전에 한에 대한 충성에는 관심이 그다지 없었는데, 자신이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조조가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벗어나자 이를 제어하려다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 위공 등극 건이고, 그리하여 파워게임에서 진 순욱이 선택할 수 있었던 자신의 최후 중 가장 나은 결말이 한의 충신으로 자신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는 견해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순욱이 자료를 모두 불태워 자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부분도 근거로 삼기도 한다. 순욱이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한의 충신이었다면 자신의 저작이나 기록은 남겨서 후대에 조조의 평가를 박하게 만드는 것이 낫지, 이렇게 기록을 깡그리 없애는 선택은 충신의 일반적인 행태에 전혀 맞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이상이 현실적인 힘의 부족으로 좌절되면 으레 기록이나 유산 따위를 남겨 후대의 평가에 대한 준비를 하고 떠나기 마련인데, 이렇게 기록을 싸그리 없애는 경우는 오히려 그것이 남았을 때 자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불리하다고 생각해 인멸하는 것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조조가 정말 만고의 대역죄인이 되게 생겼고, 순욱 자신이 그것에 동조하지 못하겠어서 자살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그 대역죄인의 앞잡이였다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에 충성하려던 자신의 내밀한 기록이나 유지를 남겨 조조에게서 손절하고 자살해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선택이다. 특히나 사세삼공, 이세삼공 따위의 가문에 대한 평가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보면 더욱 더 기록을 남겨서, 자신은 조조의 역적질에 동조했던 게 아니라 조조에게 속아서 이 꼴이 났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합당한 처세이다. 순욱 정도의 인물이 이런 생각을 못하고 주군에게 버려져 비탄의 감상에 빠진 나머지 자신의 친족들에게 무책임한 기록 불놀이를 해버렸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추측이다.

즉, 순욱의 내심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으니 음모론에 불과하긴 해도, 순욱이 생전에 조조가 천자 등 당대 한나라의 질서를 유린하는 걸 묵과하고 말미에 자신의 기록을 인멸한 것은 그가 정녕 한나라 질서에 충성하는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순욱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접어두고 생각하면, 위공등극에 반대해 죽은 것 말고는 한(漢)에 충성하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한 적이 없는 순욱을 위공등극에 반대해 죽었다고 순식간에 한의 충신으로 둔갑시키기에는 그간 순욱이 조조의 휘하에서 군소리 한번 없이 한황실에 씻지 못할 대역죄를 여러번 저지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의견이다.

또한 순욱의 급작스러운 노선 변경이 온전히 한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 생각할수도 없다. 순욱이 "변란이 일어날것이다"며 집안 어르신들까지 설득하며 다같이 고향을 버렸다가 조조가 동군태수가 되자 가족을 전부 다 이끌고 연주로 다시 돌아간 것. 이게 황실에만 충성하는 사람의 행보인가?

그리고 원소에서 조조진영으로 바꿔서 대박난 문관들은 전부 연주나 예주 출신이고 순욱이랑 지인이다, 굳이 따지면 최염 정도가 예외일까? 소위 순욱 피라미드라고 일컬어지는 인맥은 이런것이다. 이후 순욱이 추천한 사람들의 명단, 그리고 조조가 예주출신이었던 순욱의 동향사람들을 전부 기용한 것으로 보아 순욱은 적어도 새로운 수도 허도 인근 예주 호족들을 중심으로 황실의 수복을 꾀하는 야망이 확실하게 있었다고 봐야한다. 순욱 피라미드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순욱은 외지의 인사나 몰락한 사족들을 천거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순욱은 조조를 바지사장으로 본 거고, 한나라에 대한 충성보다 예주, 영천 사족을 우선시한 누구보다 배타적이었고 연고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순욱이 주도하고 조조가 자초한 연,예주-사예 호족집단 사이의 결합이 결국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를 연달아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순욱을 긍정적으로 볼 순 없다.

5.2. 긍정론

황실과 황제를 구분하는 시각은 그 당시부터 있었으며, 실제로 원소가 헌제를 받아들이는데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이유도 연의처럼 "무능해서"가 아니라 헌제라고 하는 "황제의 정통성"에 회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원소 뿐만 아니라 한 황실과 헌제를 따로 구분하는 입장은 물론 대놓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당시 여럿 존재하였다. 명분상으로야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니니. 게다가 멀쩡하던 후소제 황제를 권신 동탁이 아무 이유없이 내치고 새로 내세운 황제가 헌제였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데다가, 이곽 곽사의 난을 거치며 황실의 권위마저 크게 떨어져 조조가 황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전까지는 그 권위와 정통성에 크게 문제가 있었기까지 했다. 언급했듯 원소는 아예 헌제 부정파에 가까웠고, 조조가 헌제의 권위를 그런대로 복구시키기 전까지는 아예 새로운 유씨 황제를 내세울 생각까지 있었다. 여러모로 꼬여서 실행하지는 못했지만.[15] 그렇기에 한 황실에는 충성하되 헌제에게는 충성하지 않고 어찌되었든 공식적으로는 황제이기는 하니 이 권위를 냉정하게 이용했다는 평가가 보편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동귀인과 복황후, 즉 황제의 아내들에 대해 잔혹한 대처를 한 것을 묵인한 것에 대해서도 합당한 이유가 주장된다. 순욱과 조조는 한창 외척과 환관들에 의해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겪었던 인물들이다. 실제로 단순히 저들 뿐만 아니라 조위는 전체적으로 조씨의 친인척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과 정 반대로 외척들에게는 매우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외척은 그들에게 주요 경계대상이었고, 이들이 조조세력에게 반목한다면 강력히 대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계획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그러하지 않았으니. 다만 이런 행동들에 대한 조조 입장에서의 당위성과는 별개로 조조가 그들에게 했던 행동이 과하게 잔인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기록물을 불태워 조조에 대한 비판을 흐렸다는 부분도, 헌제와 달리 조조는 어찌되었든 본인이 한 때 충성을 맹세하였던 대상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교 문화권의 수 많은 역사는 물론 이 삼국시대에 한정해서만이라도 어리석은 주군을 끝까지 모시는 것은 충분히 많이 존재하는 경우였다. 위의 헌제에 대한 설명과 달리, 조조는 순욱이 충성을 바쳤던 "개인"이었고 역적이나 다름 없는 존재가 된 그를 배신한다고 지탄받을 일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성을 바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조가 기반을 마련하고 그 기반을 물려받은 아들인 조비가 한황실을 폐하고 세운 위나라와 그뒤를 이은 진나라의 결말이 남북조라는 중국역사상 최악의 난세였다는 것을 생각해볼만 하다. 가끔 예지수준의 예측능력을 보여 주었던 순욱이 이러한 최악의 난세를 예측하여 조조가 위공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러한 난세를 열게 만들 계기를 마련해버린 조조에 대한 실망과 후세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빠질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기록을 태운것이라면 앞서 말한 순욱의 행적에 대해서도 설명이 된다. [16] 실제로 남북국시대에 중국 전체가 개판이 된 것은 이민족의 침입도 있지만 너도 나도 나야말로 한황실의 정통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세력들이 난립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황실이 남아 있었다면 이러한 난립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면 분명 순욱이 한나라의 질서를 유린하는 것을 묵과하고, 헌제라고 하는 황제를 이용하였으며, 조조에게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이 맞다. 그렇기에 그런 행동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역적이라는 평가와 이에 대한 옹호가 오랫동안 꾸준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실리적 관점에서 한과 황제를 구분해서 행동하고, 당시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혹한 행위도 상황에 따라 취하였다는 해석에 모순이 없음에 따라 보편적으로는 한과 동시에 조조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특이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역사에도 순욱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충신의 대명사가 있는데 바로 정몽주. 여기는 아예 복권을 꿈꾸는 왕을 주도적으로 폐위시킬 정도였으나 마찬가지로 나라의 멸망은 목숨걸고 막으려고 하였다. 재밌는 점은 순욱과 정몽주, 둘 다 나라의 충신이었다해도 정작 그 나라의 정통성(황제, 왕)을 무너트려서 그들이 충성하는 나라를 죽이는데 일조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이런 인식은 사실 현대인도 다를게 없는데 여당,대통령을 싫어하는 것과 대한민국,한민족을 싫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을 생각해보면 대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6. 인재를 보는 눈

파일:attachment/순욱/Example.jpg
순욱의 인재 추천 피라미드

조조가 순욱에게 "그대를 대신하여 전장에서 책략을 상담할 이가 누가 있는가?"라는 조조의 질문에 그가 추천한 이는 희지재였고, 희지재가 일찍 죽은 후 순욱이 다음으로 조조에게 추천한 사람이 바로 곽가였다. 본진을 관리하느라 전장에 나설 수 없는 순욱을 대신하여 조조가 옆에 두고 책략을 논하던 인재들은 순욱이 추천한 순유, 종요, 희지재, 그리고 곽가였다.

그의 능력은 관료의 추천에서도 빛을 내었는데, 수많은 조조군의 중역들이 발굴되었다. 순욱은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하였고, 추천받은 많은 인물들은 조조를 위하여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게다가 순욱을 필두로 수많은 인재가 줄줄이 이어져 들어온다. 이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순욱의 인재 천거를 삼국지판 다단계 마케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17]

단순히 많은 인재들을 추천한 걸로 유명한 걸 떠나서 구체적인 일화들을 보면, 조조군 위기의 순간에 적재적소의 인재를 파견해 그들 하나로 적을 곤란하게 하고 아군을 이롭게 한 일이 여러 번 있다.
또한 공융과의 논쟁에서 원소군 인재들에 대한 순욱의 비판 요소가 그들의 최후로 이어졌음을 보건데도 그의 인물 파악 능력이 탁월함을 알 수가 있다.

조조는 "순 상서령의 인물 감정은 때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신뢰할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세상이 떠날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유비에 비교될 수준의 인물 감정 능력.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 순욱이 보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주군 조조의 한 황실에 대한 역심이었다. 파악을 못 한 것인지, 알았지만 제어 가능한 범위라 믿었던 것인지, 혹은 조조가 처음에는 한 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했으나 권력에 취하며 나중에 변질된 것인지, 여러 가지 경우는 많지만 무엇이 진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 혹은 진짜 헬게이트가 열린 시기였으니 만큼 숨겨진 야심의 위혐성을 알고있다 한들 이 이상의 답이 없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 애초에 사마의는 조조 때 중신이 아니며 개국 공신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멸망에 더 지분이 많다면 모를까... 물론 임관 초기부터 촉망받는 인재로 후계자인 조비와 가깝게 지낼 정도였지만 어찌되었든 조조 때에는 크게 눈에 띄는 활약이나 업적이 많이 없다. 이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 부터 조예에 걸치며 업적을 쌓았는데, 즉 조조의 핵심 인재가 아니라 그 이후 220년에 건국된 황제국 위나라의 핵심 인재였다. [2] 유비의 제갈량, 조조의 순욱, 손권의 주유/노숙은 전부 핵심 공신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연의에서 제갈량의 라이벌로 부각되는 인물은 주유와 사마의지만, 사마의는 이들과 입장이 다르다. [3] 고려와 조선은 신하와 왕이 설전을 자주 벌여서 왕의 힘이 약했다는 오해를 받는데, 오히려 당대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정 관료제 국가였다. [4] 참고로 이건 처음 발생했을 때는 오히려 조조 세력에게 호재에 가까웠는데 여포-장막-진궁의 반란으로부터 아무리 순욱을 비롯한 측근들이 몇 개 성을 지켜냈다지만 사실상 연주의 대세는 완전히 넘어간 상황이라 조조 세력 독자적으로는 상대하기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조가 서주에서 군을 물렸다는 소식에 여포가 우물쭈물거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메뚜기 떼로 대흉년이 들면서 군사를 운영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서로 군사를 물리게 되었다. 이때 연주를 막 장악한 여포 세력이 지배를 확고히 하기는 커녕 분열되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흉년은 조조 세력에게 적들의 기세가 약해질 때까지 숨을 돌릴 기회가 되어 주었다. 특히나 메뚜기 떼로 인한 흉년 직전 우물쭈물하는 여포를 상대로 승기를 잡고자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여포에게 대패해 크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5] 대장군은 군부를 대표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실질적인 최고 명령권자로 중요한 자리였다. 태위보다 실질적인 권한은 강했다. [6] 행(行)은 낮은 직급에 있는 사람이 높은 직급을 겸임할 때 붙이는 관사이다. 반대로 높은 직급의 사람이 낮은 실직을 겸임할 때는 영(領)를 붙인다. [7] 말년에 조조와의 불화로 인해 이런 꼬접 행동을 할 만큼 상심이 컸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만일 순욱이 없애지 않았다면, 당대 최고 권력자이면서 본인의 정치적 세력도 큰 만큼, 그런대로 오래 전해졌을 것이고 도중에 원본이 실종되더라도 타 기록물들을 통해 지금보다는 정말로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집이 많이 산일되었다고 해도 후인들이 어떻게든 기록을 끌어모아 오늘날 제갈량이라는 사람의 사상과 업적 및 그 시대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순욱의 저작물은 후한 말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을 중요한 사료물이 되었을 테니 역사학적으로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8] 이문열 삼국지에서는 순욱이 빈 그릇을 본 후 조조가 '이제 그대가 먹을 것은 없다. 내가 그대에게 보낼 것은 이 빈 그릇과 같은 옛정의 껍질뿐이다.'라는 뜻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자살한다. [9]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릇을 보낸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소한 부분에서도 행간을 매우 중시하던 고대 중국에서 그러한 행동은 여러모로 오해를 사기 쉽다. 무엇보다 조조도 순욱도 빼어난 지략가였는데 그런 조조가 아무런 이유 없이 빈 그릇을 보낼 이유도, 순욱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리도 전무하다. 애초에 선의로 보낸 거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굳이 빈 찬합을 주면서 음식이라고 뻥까지 친 시점에서 엿먹이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많이 드시게! 뭐를요? 엿을? 화해하자는 시그널인 줄 알고 열었는데 꿈 깨라는 양 텅 비어 있는 찬합을 본 순욱의 심정을 이해하긴 어렵지 않다. [10] 만약 순욱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조조와 대립을 하게 된다면 조조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큰 정치적 악재가 없으며, 아무리 군부가 온전히 조조 휘하에 있다지만 적절한 명분 없이 개국공신인 순욱을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욱이 그러지 않고 자살을 택했다는 점에서 순욱은 그래도 자신의 개인적인 주군에게는 끝까지 충성심과 의리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조조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을 따라준 순욱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그의 장례를 크게 치르고 그의 넋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11] 라고는 하지만 서술하듯 본래 탁류파인 조조 가문에 많은 청류파 가문들을 끌어와 순욱은 그들의 상징적 존재이면서, 실권에서도 세력 내 2인자가 될 수 있었다. [12] 다만 말년에 순욱이 죽은 것도 자연사가 아닌 조조와의 대립에 의한 자살이므로 순욱이 죽지 않았다 한들 예전처럼 조조 세력이 잘 굴러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목숨을 빼앗지는 않아도 조조가 예전처럼 순욱에게 권력을 맡길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 그러나 순욱은 단순 참모가 아니라 조조의 한 축인 호족들의 우두머리나 다름 없다. 그런 점에서 명예직이라도 조조의 한 축을 계속 담당했다면 조조의 세력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조조도 계속 순욱을 대접하고 이로 인해 영예롭게 세상을 떠났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13] 이는 단순 순욱만의 특징이 아니라 조씨 세력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한나라의 외척뿐만 아니라 조씨 정권의 외척들도 배척하였다. 설명하였듯 순욱과 조조가 한창 외척에 의한 나라의 망조를 경험했던 이들이라 그런 것으로 보인다. [14] 당장에 위의 오자양장들이 한 지방의 군권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관중을 수비하던 장합과 서황은 하후연의 휘하였으며, 장료 또한 뒤에 하후돈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오환 토벌을 나섰던 것도 아들인 조창이었고, 형주 방면은 조인이 맡았다. 이는 조조 사후에도 기조가 지켜져서 대촉전선은 조진이, 대오전선은 조휴가 총괄하게 된다. 조조 대부터 군공이 높았던 장합이 조진 사후에도 사마의의 휘하가 되어야 했다는 것은 적어도 조조 대부터 친족 외의 장수들을 신뢰하지 못하던 기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 원래 원소는 나이도 많고 명성도 높은 유우라는 황족을 황제로 내세우려 했으나 유우 본인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 제의를 거절했고 후에는 공손찬의 손에 죽게 된다. 이 사건 또한 나비효과가 상당해서 유비, 전해, 조운같은 특급 인재들이 전부 공손찬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16] 나관중의 삼국지 소설의 기반이된 삼국지 평화에서 알수 있듯이 조조와 위나라의 악평은 절대 나관중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평가를 따랐을 뿐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에서 조조는 훨씬 잔악 무도하고 찌질하게 나오며 이를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재창조 한것이 나관중이다. [17]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었듯 연주와 예주를 연고지로 하는 귀족 중심이었을 뿐이라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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