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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0:32:45

망탁조의

망탁조의
莽卓操懿
[[신나라|
]]
왕망
王莽

( BCE 45 ~ CE 23)
[[후한|
]]
동탁
董卓

( CE 130s ~ 192)
[[위(삼국시대)|
]]
조조
曹操

( CE 155 ~ 220)
[[서진|
]]
사마의
司馬懿

( CE 179 ~ 251)

1. 개요2. 구성원3. 재평가?4. 선양 받은 후 황제에 대한 행적5. 이후 거론 사례들6. 기타

1. 개요

莽卓操懿

중국 역사상 한나라 이후부터 조위 때까지의 4명의 역적을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의 4명을 말한다.[1] 이 네 명의 성 대신 이름을 따온 것이 망탁조의다. 당나라 사람 조인(趙璘)의 저서 《인화록》(因話錄)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2] 《송사》(宋史)[3]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조정에 출사해 봉록을 받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린 자들로, 왕망은 선양의 시조,[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찬탈(簒奪)의 시조'로 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 동탁은 제위를 노렸으나 그 전에 죽으면서 실패했고, 조조와 사마의는 생전에 황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명분 때문에 그런거지 자기 자손들[5]이 황제가 될 수 있게 해놓아서 후일 황제로 추존되었다. 조조는 아예 '나는 오히려 주문왕을 따르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며 자신 스스로가 황제가 되지는 않겠으나 후대에 결국 조씨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역심이 없는 순수한 발언이라고 보기엔 이미 조조가 헌제를 수없이 겁박하였고, 순욱이라는 희대의 명신이자 조조 자신이 "나의 장자방"이라 스스로 불렀던 인물을 숙청하면서까지 위왕에 오르는 야욕을 보였으므로 의도는 명확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황제의 자식을 회임한 후궁 동귀인을 죽이고, 복황후를 죽였으며, 복씨 소생 아들들까지 죽인 행위는 결코 신하의 행위라 볼 수 없다. 또한 왕망과 조조는 구석까지 하사받아 최강의 권신으로 군림했던 바가 있다.

원술은 뽑히지 않았다. 다른 네 명의 경우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황제를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냈으며, 이를 통하여 이전까지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조를 교체한 데 비해, 원술은 지방 군벌로서 자의로 황제를 참칭하였기에 자기 지배 지역 바깥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저런 식으로 황제 놀음 하다가 다구리 맞고 죽은 인물이 수두룩해서 이런 급 떨어지는 놈들까지 일일히 넣기엔 여백이 부족하기도 하고...

이 구성에서 실제 찬탈은 못한 동탁을 빼고, 실제 찬탈을 도모한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桓溫)을 추가하여 망조의온(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6] 그 외에 양기(梁冀), 홍공(弘恭), 석현(石顯) 등 한나라의 간신 이름을 적당히 배합해 기현망조(冀顯莽操), 망탁공현(莽卓恭顯)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정된 경구가 아니고 단순히 인명을 나열하는 것이기에 문헌에 따라 구성이나 어순이 다양한 편이다.[7] 그러나 홍공, 석현과 양기는 간신이였으며 황제의 권위를 우습게 보고 국정을 농단해 패악을 부린 것은 맞지만 최소한 역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망탁조의와 같이 엮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다.

후세 사람들에게 이 '망탁조의' 4명은 역적에 대한 기준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이에 사문난적과 함께 왕조 시대 동아시아에서 정치적 욕설의 투탑(...)을 이루기에 이르러, 맘에 안 드는 누군가를 역적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정작 현대 중국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으며 한국에서만 종종 쓰이는 단어이다. 구글에 莽卓操懿로 검색해봐도 대부분 한국어 자료만 나온다. 웨이보에 망탁조의를 치면 검색결과가 존재하지 않고 바이두에 망탁조의를 쳐봤자 3페이지가 끝인데 이들 중 일부분은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는 칠성보검 에피소드가 나오고 네이버의 지식인 사이트 포지션인 바이두 지식인 사이트에서 망탁조의 쳐도 검색결과는 없다. 아무래도 중국 역사에서는 역적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망탁조의를 안쓰는 것 같다.[8]

2. 구성원

2.1. 왕망

.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유자영에게 형식적인 선양을 받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는 이미 유자영을 즉위시킬 때부터 가황제와 섭황제를 칭하고 그렇게 부르게 했으며 신나라를 세우고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각지에 반란세력들이 난립하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경시제 유현의 공격을 받아 장안 점대에서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으며[9] 머리는 완에 효수되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백성들이 머리를 때리고 를 잘라 베어먹었다. 그리고 평제의 황후였던 왕망의 딸 황황실주( 효평황후 왕씨)는 26세에 불타는 건물 속에 들어가 자살했고 왕망의 조상들과 친척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으며,[10] 일족들은 모두 몰살되는 등 끝이 매우 좋지 못했다. 망탁조의 중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에 오른 인물이자 후한 이전 사람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 등에도 등장하지 않는다.[11]

2.2. 동탁

. 동탁은 후한 십상시의 난 직전 권력자였던 대장군 하진의 호출을 받고 수도 근처에 있다가, 십상시의 난으로 하진과 십상시들이 싸우다 모두 죽은 사이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접수한다. 이후 당시 황제였던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폐위한 소제는 이유를 시켜 시해했고, 양주자사에 불과했던 동탁 자신은 스스로 상국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각종 학정을 일삼았다.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후한 역대 황릉을 도굴하는 등 나라를 다스린 게 아니라 그냥 털어먹었다. 압권은 아무 고을이나 찍어서 자기 병력들을 풀어 마음껏 노략질하게 한 것. 당시 화폐였던 오수전 돈이라는 게 많기만 하면 장땡인 줄 알고 조폐창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댔는데, 이 중에는 돈인지 쇳조각인지도 모를 저질 화폐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때문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그냥 이 당시 중국의 화폐 경제가 이 인간 때문에 작살나고 물물교환 경제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결국에는 동탁의 첩과 놀아나면서 불안해하던 여포[12] 사도 왕윤의 사주를 받고 동탁을 살해했다. 이후로는 그간 저질러온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2.3.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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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는 이각에게서 도망친 헌제를 옹립하고 조정을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넣어 황실을 매우 약화시켰고, 결국에는 위왕까지 올라 그 아들 조비 위나라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다. 실제로 역사가들의 평가 역시 조비는 이미 아버지가 깔아준 판에 오르는 걸 좀 앞당겼을 뿐이며, 실질적인 찬탈자는 조조라고 못박고 있다.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옹위한 후 황제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며 협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에 연좌되었다는 이유로 황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던 동귀인이나[15] 황제의 아들을 둘이나 낳은 복황후마저 시해하고[16] 그 자리에는 자기 딸을 밀어넣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17]

물론 조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관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조조의 패악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고 더불어 동귀인의 경우 임산부는 출산 전까지 죽이지 않던 인류의 불문율을 어기고 그것도 한황실을 보호한다는 인간이 황제의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더 평가가 나쁘다. 조선시대 기준이긴 하지만 임산부는 출산 후 젖먹일 기간까지 100일을 더 주고 죽이는 것이 보통이고, 임신한 상태에서 바로 죽이는 것은 간통하여 임신해 후계자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궁녀 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보면 질이 나쁘다는 혹평은 피할 수 없을 듯. 더군다나 복황후는 아예 대놓고 황후 신분으로 죽였고 그 복황후의 두 아들도 죽였는데 이는 정실 황후의 아들들, 즉 차기 황통을 이을 황제의 적장자 내지 적자들을 죽인 셈으로 웬만한 권신들도 저정도 짓은 못하거나 했다가 목이 달아나는 경우가 많은 걸 감안하면[18] 심각하다. 심지어 황제가 임산부니까 조금만 기다리자고 애걸을 했는데도 무시한 것. 이건 그냥 누가 봐도 황제에게 후계자가 있으면 나중에 조씨가 황제 자리 뺏는 데 방해가 될 게 뻔하니까 트집 잡힌 김에 어거지로 죽인 거라 역적질 말고 다른 설명을 붙일 수가 없는 행위다.

재미 중국인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사마의가 위를 건설한데 미친 영향은 조조가 한을 재건한데 미친 영향보다 미미하기 때문에 사마의는 도둑놈이라고 말한다. 물론 조조와 사마의 자체를 비교하자면 창업 군주로서 사마의가 조조보다 딸리는 건 사실이다. 조조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과 이각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20여 년 동안 안정시켰던 건 큰 공헌이며, 사마의에게 조조만큼의 군공이 없었음은 분명하다.[19]

그러나 조조는 여러 실책 한계로 통합된 중국을 건설하는 데 실패했기에 한을 재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재건의 과정과 재건에 명분을 제공한 이념은 어디까지나 광무제부터 시작된, 올곧은 사인층이 정국을 주도한다는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헌제 또한 많은 역할을 했음 또한 부정할 수가 없기에 그걸 조조 혼자서 다 이룩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사마씨가 황제를 구속하고 황제의 죄없는 충신들과 친족들을 죽인 만행을 저지른 건 사실이고 그 과정의 피해자는 물론 조씨 황실이었으나, 그건 사실 다 이미 조조가 만든 선례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것이기에 남탓만 하긴 어려운 문제다.

또한, 말년에 갑자기 기존 황제가 받던 특전과 같은 것을 누리고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에 크게 집착하고 한 황실의 권위를 최대한 망가뜨리려는 모습( 헌제의 금교전을 대놓고 사용하거나 헌제 앞에서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등)을 보였다. 이건 누가 봐도 사실상 아들이 황제로 쉽게 추대되게끔 멍석을 깐 것이다. 훗날에 조조를 따라 찬탈의 길을 걸은 후배는 사마소, 유유, 소도성 등 여럿이 있으나, 이런 행태는 필요하지도 않고 유치한데다 황당한 게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아무도 본받지 않았다.

이후 항우의 20만명 학살사건인 신안대학살 이후 400여년만에 벌어진 대규모 학살극인 서주 대학살과 원소군 투항병 생매장 사건,[20] 여포군을 공격할 때 벌인 팽성 학살 등 여러 학살을 일으켰다. 스탈린에 버금가는 각종 강제 이주정책[21]의 시행 등 중원 쟁패의 결과를 떠나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 행위를 많이 했고, 자신의 최고 공신이자 모사 중 하나인 순욱마저 위공의 구석을 받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함으로서 찬탈의 뜻이 있음을 인증한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이 재능은 있어서 여러 뛰어난 업적을 세운 건 인정할만 하다. 장씨 3형제가 일으킨 황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고, 동탁이 황제를 납치해 장안으로 갔을 때에는 한의 재건에 대한 생각을 보여줬다. 또한 동탁이 불태운 낙양을 자신의 아들 대에서 복구하게 기반을 다진 점, 이미 망해가는 상태인 한의 간판을 유지했다는 점, 영제 때문에 어지러워진 중원과 화북을 평정하고 안정하게 만든 점에서는 확실히 그냥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 왕망, 동탁보다는 낫다. 사마의도 사실 일평생 제갈량의 북벌만 막다가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거라서 허나 이와 같은 업적을 인정해도 결국 역적 취급을 피하진 못하고[22] 그로 인해 자신의 라이벌인 유비 촉한정통론에 힘이 많이 쏠려 있다.[23] 이런 연유로 명나라 등 후대 왕조들은 역대제왕묘에서 볼 수 있듯이 촉한의 주요 인물들을 전한 후한 황제들과 함께 배향하는 식으로 촉한을 한나라의 연속된 정권으로 인정해 촉한을 정통으로 보았다.[24]

2.4. 사마의

司馬. 사마의 또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여 두 아들 사마사 사마소[25]의 대를 지나 결과적으로는 그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조위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세웠다. 다만 사마의의 경우 본인은 그냥 권력만 잡았고[26] 따로 한 것이 없었으며 실제 권력 독점의 작업은 첫째 아들이, 제위 찬탈의 작업은 둘째 아들이 주도해 행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다. 물론 권력을 잡던 때 그의 나이가 70을 넘긴, 목숨이 오락가락할만한 나이였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런데 정작 사마의의 유언은 "나라에 충성하라."였으나 그 자식들이 말 안 들은 것 때문에 끼였으니 좀 억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러 자식들을 위해 자신은 충성을 바치는 식의 연기를 했다는 의혹도 강하며, 이 부분은 조조도 비슷하게 지적받는 부분이지만 아무도 속지 않은 조조와 달리 사마의는 본심을 추측하기가 힘들다. 역적인듯 역적 아닌 역적 같은 자.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고 짧은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그의 사망 이후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거쳐 서진은 천하 통일 이후 3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고, 삼국지보다 더한 혼란기인 오호십육국시대가 발발했다.

뒷날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창업군주 석륵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 대화를 하던 중 서광이 "폐하께서는 그 덕이 한고제와 하은주의 삼왕을 능가하니 가히 그 덕이 헌원에 버금가시옵니다!"라고 칭송하자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시에 이미 역적으로 인정되던 왕망과 동탁은 빼고 조조와 사마의를 디스한 것이다. 물론 석륵은 후조는 물론 오호십육국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몇 안되는 명군으로 꼽히는 황제이기는 하다.
짐이 만일 한고제와 같은 큰 인물을 만난다면 즉시 고개를 숙이고 절한 뒤 북면하여 신하의 자리에 서서 한신이나 팽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오. 만약 광무제와 같은 인물과 한시대에서 만난다면 중원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천하를 한번 겨루어 볼 것이오. 하지만 그 중원의 사슴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대장부가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 조조, 조비)나 사마중달 부자(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처럼 고아나 과부[27]를 속이며[28]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심지어는 사마의의 먼 후손인 동진 진 명제 왕도에게 사마의 일가의 찬탈 과정에 대해 듣고는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晉)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라며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출처: 진서(晉書) 제기 1권 선제기)

3. 재평가?

유교에서는 () 사상이 매우 중요시되었으나, 근현대 이후 전통 질서가 무너지고 동아시아의 유교 중심 사고방식이 완화되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받던 망탁조의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4. 선양 받은 후 황제에 대한 행적

재미있게도 이들 전원이 선양받은 선대 황제를 죽이지는 않았다.

왕망이 폐위한 유자영은 왕망 때에는 유폐되었긴 해도 살아 있었고[41] 조비가 폐위시킨 헌제 사마염이 폐위시킨 조환은 천수를 누린데다가 한술 더떠 사후 황제로 추봉되기까지 하였다.[42] 환온이 내친 사마혁 또한 천수를 누렸고, 사마덕종 또한 환온이 아닌 유유에게 죽는다. 이는 이들이 충신이거나 역성혁명을 일으킨 선구자여서는 당연히 아니고 정치적으로 이것이 유리하다는 분위기가 그당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위해서는 전 황제를 죽여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선양 후 전 황제를 죽이지 않는 관습은 망조의온 시대뿐만이 아니라 고대시대부터 망조의온 시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요순시대의 선양도 전황제의 피가 흐르지 않은 상태에서 선양이 이루어졌고, 연나라왕 쾌 또한 살아 남았다가 제나라의 침공으로 자살했으며, 그외에는 삼국지보다 고대에 선양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

동탁은 직접 제위를 선양받지는 않았는데, 황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는 절대 아니었다. 동탁은 황명을 밥먹듯 거절해가면서 양주자사 자리를 지켰다. 황제였던 소제 유변을 자기마음대로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다 헌제 유협을 박아넣은 데다가 그 유변마저 나중에는 이유를 시켜서 독살했다.[43]

그러나 동진 공제 사마덕문 유송의 고조 유유가 죽이면서 그 후의 왕조는 송태조가 대인배적 행동을 할 때까지 무조건 선양 후에 이전 왕조의 황제를 죽여버리게 된다. 이후의 왕조를 보면 명나라는 멸망 당시 숭정제가 먼저 자살해버려 해당 사항이 없고, 남명은 청나라의 명령과 관계없이 영력제 오삼계에게 살해당했으며, 청나라가 멸망 후에도 선통제 국민정부에게 우대 받은 역사가 있다. 심지어 만주국 패망 후 신중국의 공민으로 살 때도 저우언라이 총리의 보호를 받아 문혁의 광풍을 맞지 않았다.[44]

5. 이후 거론 사례들

삼국사기, 고려사에서 보이는 왕건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 '오직 망·탁의 간사함만이 보인다(唯看莽卓之姦)'는 표현이 나온다. 신라 경애왕을 폐위시키고 경순왕을 즉위시킨 견훤을 왕망과 동탁에 견주어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 원신라 지역 상주 출신, 신라 대장군이란 뜻인 도통을 끝내 칭하는 기이한 행태 등으로 신라의 신하란 꼬리표가 약점이긴 했으되 공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백제왕이었고 그 신분에 맞게 행동했으며, 국제 사회에서도 고려, 거란, 중국 오대 왕조를 비롯해 당당한 백제왕으로 대우 받았다. 일본에게 보낸 사신도 사실 견훤의 사신이 거부당한 이유는 옛 백제와 일본 사이 인연을 강조하면서 은근슬쩍 원군을 기대했기에, 이걸 간파하여 부담스러워한 일본이 거부한 측면이 더 강하다. 한편, 그러는 왕건도 신라가 견훤에 의해 약해지거나 무력화될 때마다 신라를 압박하는 등 사실 그다지 충신으로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45][46]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들을 까는 부분이 끝도 없이 많다. 업적도 많고 조선왕조의 처지로 봐도 그럭저럭 정당화가 가능한[47] 조조나 사마의보다는 왕망을 까는 드립이 넘치는데, 왕망에 비유해서 까니까 어떻게 왕망에 비교할 수 있냐고 화를 내면서 반박하는 부분도 있을 정도다. 심지어 조광조도 사후 왕망 소리를 들었다.

위안스카이 또한 신해혁명 직후 혁명 진압을 위해 청조에 기용되었을 때 황족 중 하나로부터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는 평을 들었다.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는데, 청조로서는 당시 북양 신군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기용 없이 혁명군의 진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결국 그냥 선양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다. 당장 청 황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나마 존중을 해준 건 북양군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적대하던 혁명 세력이었다. 오히려 그 전 왕조인 명나라의 오삼계와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 편이다.

6. 기타

망탁조의 중 유일하게 삼국지 인물이 아닌 왕망 혼자만 게임에서 등장하지 못했다. 독자적인 게임에서 출연하기도 뭣한 게, 애초에 신나라 시대나 동한 건국사 자체가 그다지 인기 있는 소재도 아니고. 그나마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할 수도 있는 추측을 해 볼수는 있지만, 신나라 자체가 게임 등 미디어 믹스에서 인지도가 꽤나 저조한데다가 신나라 소속으로 등장한 고대무장이 없기 때문에 등장할진 미지수.[48]

망탁조의 중 왕망과 조조는 자신의 가족들이 황실과 혼인해서 외척의 형태로 권세를 공고히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정작 각각 왕망/조조의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혼인한 구 황실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도 묘한 공통점이다. 가령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왕씨는 전한의 태후로서 전국옥새를 감추고 끝까지 선양을 반대하고, 왕망이 한나라의 제도를 고쳐도 자신의 궁정에서는 고치지 못하도록 저항했다. 또한 왕망의 딸인 효평황후 왕씨 또한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전한이 멸망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황녀라는 호칭도 거절한 채 칩거하다가 왕망이 몰락할 때 자신도 한 황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조의 딸인 헌목황후 조씨 또한 효원황후 왕씨처럼 전국옥새를 내주지 않으며 선양에 반대하고, 남편인 헌제가 폐위된 뒤에도 끝까지 남편을 보필하며 후한 황후로서 삶을 마쳤다.


[1] 사실 사마의는 조위의 역적이지만 일생의 절반 이상을 한나라 시기에 보낸 인물이다. [2] 《인화록》권 5 : ... 而莽, 卓, 操, 懿以降, 行滔天之心, 援此為法, 尤可悲也. 출처 [3] 《송사》권 409 : ... 而大奸之必還, 莽, 卓, 操, 懿之禍, 將有不忍言者. 출처 [4] 흔히 말하는 임금이 임금에게 선양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아닌, 타의적인 강제 선양을 말한다. 다만 순 역시 요에게서 억지로 왕위를 빼앗은 거라는 말도 있긴 하다. [5] 조조의 아들 조비,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 [6] 다만 동탁은 찬탈만 못했을 뿐이지 실제로 저지른 전횡과 악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7] 홍공과 석현은 한원제 시기 환관으로 황제의 신임을 받고 문고리 권력으로 세도를 누렸다. 시기상으로는 '공현망(홍공, 석현, 왕망. 이상 전한)기탁(양기, 동탁. 이상 후한)'이다. [8] 또 다른 원인은 한간. 망탁조의 이 4명의 경우, 적어도 한족 내에서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출현한 4명의 역적에 불과할 뿐이지만, 한간의 경우 말 그대로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니 이들의 악행이 더 크게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망탁조의는 마지막인 사마의로부터도 1800년은 족히 되는 먼 옛날이기도 하고. 비교하자면 한국인들에게 한반도 내에서 권력 투쟁 과정에서 고려왕조를 찬탈한 이성계나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보다는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 을사오적에게 훨씬 더 큰 악감정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 [9] 항우도 공을 세우기 위해 다섯 장수들이 다섯 갈래로 찢었지만 왕망은 훨씬 더 처참했다. [10]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왕씨의 능은 이때 무사했으나, 곧 들이닥친 적미군에 의해 친척들과 같은 수모를 당하는 걸 피하진 못했다. [11] 왕망같은 놈이라든가 왕망보다 더한 놈이라든가 같은 욕설로 언급된다. [12] 초선은 삼국지연의의 창작인물이다. [13] 이쪽은 연의에서 묘사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했더니 하도 기름기가 많아서 불이 며칠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14] 원소의 숙부였던 원외가 태부로 있었는데 원소가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자 분노하여 원외를 비롯한 원가 일족을 주멸했다. 이에 그 문하생들이 복수를 한 것이다. [15] 연의의 영향으로 '동귀비'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귀비라는 직위는 한참 후에나 나온 것이고, 후한의 내명부는 황후-귀인-미인-궁인-채녀의 5등급 체제라서 귀인이 훗날의 귀비에 해당한다. 나관중 시대에는 귀비가 신설되고 귀인은 하급 후궁으로 밀려났으므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색한 것이다. [16] 복황후의 아들 둘도 독살당했다. 말이 복황후의 아들이지 당금의 천자였던 헌제의 아들, 즉 황자 둘을 죽인 것. [17] 정작 그렇게 황후가 된 조조의 딸은 후일 조비의 찬탈에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끝내 조위의 공주이기보다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한다. 조황후는 조비의 이복남매이기도 하고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조씨 측도 복황후나 동귀인과 달리 신변에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조비가 선양을 받고 옥새를 달라고 사자를 보내자 못 준다고 한참 버티다가, 끝내 강요를 못 이겨 옥새를 집어던지며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고 울며 저주했고, 기어이 폐위된 남편을 따라가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했다. 혹시나 자기가 아들을 낳아서 후일 그 아들이 제위를 물려받기를 기대한 것 아닐까 하는 설도 있으나, 헌제가 말이 황제지 조조가 자기 아내를 막 죽여도 찍소리 못하고 물밑에서 암살 시도나 하는 허수아비 신세였던 걸 고려하면 조 황후의 아들이 황제가 되어 태후가 된다고 해서 별로 누릴 것은 없으며, 이미 황제나 다름없는 조비가 승패를 확실히 하자고 나선 것에 반발하는 단계부터는 그럴 가능성조차 사라졌는데도 버틴 것이다. 거기다 나중에는 망국의 폐주가 된 헌제를 끝까지 따라가기까지 했으니, 권력욕같은 것 없이 충심과 사랑 때문에 헌제의 편에 남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8] 예시로 김안로는 집권기간 내내 반대파 숙청을 많이 했는데 그 와중 작서의 변의 주동자로 여겨진 경빈 박씨의 아들, 복성군까지 얽혀 죽게 되었다. 문제는 복성군이 당시 임금인 중종의 아들이라는 것, 그 결과 중종은 역대 조선왕조 임금들 중 영조와 더불어 친아들을 죽인 유이한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김안로에 대한 경계로 이어졌는지 결국 김안로는 몇 년 뒤 실각하고 사사당한다. [19] 사마의가 가진 군공은 기껏해야 제갈량의 북벌을 막은 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크긴 하지만 그것이 위나라 전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비교적 적었던데 비해 조조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렸던 한나라에서 온갖 군벌들을 다 격파하고 낙양과 하내 등 중심지역부터 시작해 서쪽의 서량과 비옥한 서주, 무엇보다 원소가 중국 최강의 군벌로 군림할 수 있게 해준 금싸라기땅 기주를 포함한 하북4주까지 통합해냈다. [20] 전투 후 남은 인원을 이렇게 했다는데 관도대전 전체 기간 동안 죽임을 당한 원소군이 7~8만 명이라고 한다. 전투에서 사망한 인원도 포함이지만 투항병의 숫자도 대규모였을 것이다. [21] 주로 회남 지역에 시행되었는데, 유수구 전투 직후 조조의 뻘짓으로 회남의 백성들이 집단으로 오나라로 이주하는 일도 생긴다. 이 때문에 회남 지역은 인구가 확 줄어 텅텅 비어버렸다. 한중의 무력화 같이 제대로 생각하고 이주시킨 것도 있지만, 이 때의 집단 이주는 맞아죽을래 이주할래 양자택일이나 다름없어서 성공했어도 욕먹을 짓이다. [22] 일단 역사적으로는 청나라 시기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23] 당연하지만 정치적으로만 봐도 후대 왕조들에서 권신인 조조나 사마의같은 인물을 좋아할 리가 없다. 조조나 사마의를 띄워주면 나중에 자기네 왕조가 쇠하면 찬탈해도 좋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태종 정몽주를 복권시켰듯이 동진에서조차 명제는 자기 조상인 사마씨들이 찬탈한 과정을 듣자 그 막장성에 이따위 나라가 어찌 오래가겠냐고 한탄까지 했다. [24] 위진남북조 시대에 처음 등장한 촉한정통론은 유송의 초대황제 유유로 인해 널리 퍼졌으며,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옮겼으나 스스로를 정통으로 여긴 남송시대의 사관으로 인해 촉한정통론이 대세가 되어 원, 명대와 청대까지 이어졌다. 청 왕조가 정통으로 인정한 제왕만 모신 경덕숭성전에 삼국시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소열제 유비만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25]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직후 승상 직위까지 받았지만 사양하고 태부 자리까지만 올랐고 사마사는 대장군이었다. 사마소는 대장군이었다가 1년만에 진공, 진왕까지 올랐다. [26] 그것도 사마 가문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를 만든 것도 아니었다. [27] 고아는 헌제와 위의 어린 ,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와 황후들을 말한다. [28] 원문은 欺자를 썼는데, 이는 '속이다'는 뜻도 있지만 '업신여기다'는 뜻도 있으며 후자로 해석해도 뜻이 통한다. [29] 이는 근본적으로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원인이다. [30] 이 둘은 닮은 구석이 많았기에 일종의 시대를 초월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31] 당시에는 인권 같은 개념이 없기에 사람을 죽이는 것, 특히 신분이 낮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다지 무겁게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봐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할 정도였던 것이다. [32] 중국사에서 유명한 다른 학살인 장평대전에서의 포로 학살의 경우에는, 단기적으로는 적대국의 국력을 크게 깎아먹어 결국 멸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이마저도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이 죽였다', '이런 식으로 포로를 학살해대면 누가 항복하겠냐', '나중에 상황이 뒤집히면 보복당하는 건 두렵지 않냐' 등 말이 많이 나오며 거의 옹호받지 못하는 신세다. [33] 참고로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주전충도 긍정적으로 본 인물이다. 둘 다 기존 질서의 파괴자라는 점도 같고 악랄하고 잔인한 면이 많이 있었지만 주전충의 파괴는 장기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기초가 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조조의 파괴는 결국 또 다른 혼란을 낳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전충은 조조와는 다르게 일반 백성들에게는 잔인하지 않았다. [34] 촉한 멸망 약 40여년 후 그 자리에는 성한이 들어서는데 성한은 촉한의 신하였던 범장생을 재상으로 발탁하였으며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 세우는 등 촉한을 우대했고 촉한의 백성들은 그 시점까지도 강유가 촉한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은걸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촉한이 촉한의 백성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5] 일단 같은 시대의 사마염이 왜 이리 내 주변에는 멍청이들만 있느냐, 왜 나는 제갈공명같은 신하가 없는지 한탄하는 대목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적국의 신하를 칭송하는게 금기시되었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황제라지만 파격적인 발언이다. 게다가 제갈량은 미얀마에도 묘와 제사비가 있다. 당시 남방 열대지역에는 소금 등이 매우 부족하였는데 비록 침략자로서 나타났지만 제갈공명이 그 지역에 소금을 염가에 풀어버리자, 제갈공명은 침략자에서 승상각하가 되어 현지에서 모실정도로 지위가 격상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침략자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은 칭송받게 되는 이치는 똑같다. [36] 유비는 또한 돗자리 장수 등을 하면서 실물경제를 체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국가가 민간경제에 개입하는 것이 독이라는 것을 체득하였고, 유통업의 중요성을 미리 깨달았으며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우고 조세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민생의 제 1임을 젊은 시절부터 깨달은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37] 단,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조씨 일가나 사마염 이상으로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도 평가가 최악이었다. [38] 현대에 조조가 능력있는것처럼 각색되어 있지만, 이는 조조의 개인적인 출세능력, 처세술 등이 뛰어나 보일 뿐 실제 내정은 후한말 십상시에 비해 오히려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되려 십상시, 가남풍처럼 관료들을 조지면 의외로 백성들의 삶은 편해지는 부분이 있지만, 실제 역사상의 조조는 오히려 그 지방관리들보다 더 하게 백성들을 쥐어짜댔다. 툭하면 전쟁을 빌미로 가혹한 조세를 거뒀으며, 멀쩡히 살고 있는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등 가혹한 정책을 일삼다가 헬게이트라는 후한 말보다 위나라시절에 인구도 줄어들고 조세 수입도 훨씬 감소하였다. 과거 학자들이나 백성들이 바보고 이상주의자라서 유비나 제갈량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 [39] 전승에 따라 후에 강족들이 감동 받아 수백 마리의 가축으로 보답했다는 후일담이 붙는 경우도 있다. [40] 동탁이 했다기보다는 앞서 벌어진 십상시의 난으로 외척 하진과 하묘, 환관세력들이 동탁이 오기 전에 알아서 공멸한 탓이 크다. 또한 동탁을 견제할 청류파 세력마저 당고의 금으로 힘을 잃은 상태였고 그나마 남은 세력들도 동탁을 피해 외부로 도망친 상황이었기에 동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후대의 이주영이나 주전충은 아예 본인들이 나서서 기득권 세력을 일소한 권력자로 유명하다. [41]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유폐되어서 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훗날 경시제 유현에게 살해되었다. [42] 2명 다 자기를 직접 폐위시킨 사람들보다 오래 산건 덤이다. [43] 동탁이 선양받지 않은 것은 아직 힘이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아직 원소 조조가 거물이 되기 전이긴 하나, 북방의 공손찬을 포함해 동탁에 필적하는 강력한 군벌들이 있었고, 동탁 본인도 "천하를 쥐었다"고 할 만큼의 힘은 아직 없었다.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드린 건 힘도 있지만 천자를 끼고 있었고, 한조의 이름이 어느 정도 무게감은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나마 정통성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인데, 선양받는 순간 이건 모두 사라지고 힘으로만 천하를 눌러야하기 때문이다. [44] 다만 홍위병들에게 고생했다. [45] 왕건도 고려왕이었으니 누가 그렇게 지적한다면 할 말은 있었겠지만. 한편 왕건과 경순왕의 관계는 조조와 헌제 비슷해보이긴 하지만, 한때 주나라의 신하였으나 어느새 주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칭하면서 은근슬쩍 맞먹은 후, 주나라 왕위 자체를 폐지하고 주나라 동주공만 아주 잠깐 놔뒀다가 그예 그마저도 없애버린, 진나라와 주나라 사이에 가깝다. 다만 다소 조위정통론에 기울어 있던 왕건이 선양 비슷한 형식을 잠깐 흉내냈을 뿐이었다. [46] 애시당초 왕건은 궁예왕의 신하였기 때문에 그쪽 관련해서 걸고 넘어진다면 또 모를까 신라에 대해 충성심을 논하기는 어렵다. 거기다 개성이나 철원 등은 구 고구려 땅과 더 가까웠으므로 이들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기에도 좋았고. 당연하지만 궁예나 왕건이 국명을 후고구려 및 고려라고 이름을 지은 것도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47] 조선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잡았다. 디테일은 어쨌건 큰 맥락은 조조나 사마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48] 그도 그럴 것이, 신나라는 고작 15년 만에 망한 왕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