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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42:37

소북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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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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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북()은 조선 시대 붕당의 하나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인의 한 계열이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이 뿌리이며, 류영경,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1]이 중심 인물이다.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에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비롯한 소북 영수들이 죽임을 당했고, 참고로 대북도 역시 이이첨, 기자헌, 유몽인을 비롯한 대북 영수들이 잇따라 죽어서 대북과 소북 모두, 위세가 위축되고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남이공과 김신국이 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 의해 흡수되었다.

2. 역사

1599년( 선조 32) 이조 판서 이기가 홍여순(洪汝諄)을 대사헌으로 천거하자 남이공이 반대하였으며 이에 정인홍 류영경이 토론을 펼쳐 논쟁을 이어갔는데 서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 홍여순 문제로 터진 것이 정인홍과 유영경의 정치적 대립까지 겪자, 북인 내에서 분열이 생겼고, 홍여순을 비판한 유영경을 지지하며 이때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비롯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된 당파가 바로 소북이다.

선조의 후계 자리를 놓고 영창대군 광해군이라는 선택지에서 소북은 영창 대군을 지지하였다. 다만 소북이라고 모두 광해군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남이공이 유영경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소북 내에 유영경파와 남이공파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고, 결국 다시 갈라졌다. 전자는 탁소북 후자는 청소북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소북이 영창대군을 지지해 많은 사람들이 소북 세력이 선조 후기에만 아주 잠깐 정권을 잡았다가 광해군 즉위와 동시에 멸문을 당한 줄 알지만, 이 정도의 된서리를 맞은 것은 적극적으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2]한 유영경 일파(유당, 혹은 탁소북) 뿐이며, 청소북의 영수인 남이공과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했던 류희분, 그리고 박홍구, 박승종은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의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과 손을 잡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날 때 까지 정권을 같이 장악했다.

북인 정권 내에서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서인, 남인[3]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조정에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이 권력을 독점했으며,  광해군 때 서인 남인계 인물들이 대북의 날조로 일어난 옥사로 몰락하고 있을때 소북은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거나 방관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북은 대북의 전횡에 대해서 역시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훗날 인조반정의 조짐이 보이는데도 광해군은 이이첨의 대북만 신경을 쓰고 방관을 할 동안에 소북 출신 삼정승인 박승종과 박홍구는 반정에 참여했던 서인과 남인의 동향을 보고하며, 그들을 계책을 논하고 전국 각지에 의병을 모이자며 돌아다니면서 통문을 돌렸다. 그러나 반정이 성공리에 끝나면서 소북의 진압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서인과 남인이 일으킨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바로 즉시 북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비록 서인이 주도한 반정 공신들의 거센 반대에도 있었으나 대북과 소북을 비롯한 북인들이 재기하면 반드시 정권을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광해군 시절에 정책에 대해 비판했거나 유배를 간 북인들은 살려줬지만 북인 정권에서 권신,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 세력들은 엄격하게 처벌을 내렸다.

한편 대북의 경우에는 이이첨, 기자헌, 유몽인을 비롯한 대북 영수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소북도 또한 마찬가지로 북인 정권에서 권신이었거나, 아니었던가에 대해서 처벌을 갈렸는데 이때 류희분이 처형 당하고 박홍구가 귀양을 갔고.[4] 박승종은 처벌을 당하기 직전에 자결함으로써 소북 영수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해서 대북과 소북은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영수들의 잇따른 죽음과 흥안군 인성군을 옹립하려는 반역시도로 인해 철저하게 몰살이나 멸문지화를 당하며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광해군 초기 대북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던 소북의 남이공 김신국은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고 말 그대로 미미한 세력이 되어 남인 계열로 흡수되어 숙종 이후가 되면 완전히 조정에서는 잊혀진 정치 세력이 되고 만다. 다만 이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인조반정 이후에 공서파의 도움으로 부활해 사실상 소북이 남인으로 간판만 바꿔단 상태가 된다.[5]

대표적인 사례가 사람들이 흔히 숙종 시기 남인의 영수로 알고 있는 윤휴. 이익 유형원, 실학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정약용도 가계의 배경이 소북이다. 여담이지만 그나마 유영경 등 탁소북 일파들이 인조 반정 이후 서인들에 의해 복권됐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아래는 최명길이 소북 집권 시기를 평가한 글이다.
유영경은 7년 집권하는 동안 권리를 독차지하고 자당(自黨)의 기반을 굳혔으나, 그 때에 기강이 대략 잡히고 조야도 비교적 평온하였으며 사림에 화를 끼친 죄도 없었다.

3. 주요 인물


[1] 광해군의 처남 [2] 아닌 게 아니라 왕의 교지까지 숨겨버릴 정도였으니, 목숨을 구하길 바란 거 자체가 무리수다. [3] 남인 역시 같은 동인계열이라 서인보단 나은 대우를 받았으나 소북보단 대우가 낮았고 후에는 같은 이유로 인조반정을 은근슬쩍 동조(방조)한다. [4] 인조 2년인 1624년에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려한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 당한다. [5] 이들을 가리켜 서울-경기지방에 대다수 거주하는 남인들이라고 하여 근기남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황 계열의 남인들은 영남남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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