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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7:18:48

세누시야

리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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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는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C는 키레나이카 지역, F는 페잔 지역, 붉은색은 튀니지 방면 세력(오스만, 영국 제외), 녹색은 이집트 방면 세력(이탈리아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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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누시 1880.png
1880년경 세누시야 세력의 최대 판도

1. 개요2. 역사
2.1. 무함마드 앗 사누시2.2. 무함마드 알 마흐디2.3. 아흐마드 샤리프
2.3.1. 1차 대전: vs 영국
2.4. 무함마드 이드리스 1세
2.4.1. 대이탈리아 항전
2.5. 독립 후2.6. 카다피 정권 하에서

1. 개요

리비아와 차드 등 19-20세기 북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주름잡았던 부족이자 수피 조직. 1837년 메카에서 알제리 모스타가넴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앗-사누시에 의해 창단되었다. 앗-사누시는 13세기 틀렘센의 수피 성인으로, 혈연 관계는 아니었지만 존경의 뜻으로 호칭화되었다. 그는 이슬람 신학과 세속 권력이 모두 쇠퇴하던 현실을 개탄하며 (기존 마드하브와는 별개로) 마그레브에 만연한 수피 사상의 틀을 유지하되, 성인 숭배와 같은 잡다한 미신적인 의식을 배격하고 쿠란과 순나를 엄격히 따르는 수피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사상 개혁과 함께 그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리비아 안팎을 위협하던 외세와 맞서기로 하였다. 1902-13년 세누시야는 차드에서 프랑스, 리비아에서 이탈리아와 싸웠다. 1차 대전기에는 이집트와 수단의 영국과도 싸웠고, 1923년부터는 대중의 지지 및 오마르 무크타르의 활약과 함께 이탈리아에 대한 독립 투쟁을 주도하였다. 2차 대전 당시 세누시야는 북아프리카 전선에 있어 추축군에 맞서 영국 8군과 크게 협조하였다. 전후 1951년 무함마드 앗-사누시의 손자가 이드리스 1세로 리비아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2. 역사

파일:세누시 수도원.png
베이다 시가지 서쪽 외곽에 남아있는 이맘 무함마드 빈 알리 앗-사누시 모스크

세누시 종단은 전통적으로 유럽 등 외세를 배격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상이하다. 그러므로 역대 세누시 지도자들의 연대기를 통해 대강 파악하는 수 밖에 없다. 무함마드 앗 사누시는 베르베르계 왈라드 시디 압달라 부족 출신으로, 이드리스 왕조를 통해 무함마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혈통을 이어받은 샤리프였다. 1787년 알제리의 모스타가넴 인근 알-와시타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이슬람 신학과 과학, 기마술 (혹은 기사도) 등을 수학한 후 마그레브 지역의 명문 학교인 페스의 알 카라위인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앗 사누시는 사하라 지역을 여행하며 이슬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개혁 사상을 설파하였고, 튀니지와 트리폴리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뒤이어 1824년 알 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그는 현지 메흐메트 알리 파샤 정부 및 그에 순응하는 울라마 (학자층)와 종종 대립하였다.

앗 사누시는 (적어도 교육을 받은 순니) 무슬림들이 맹목적으로 4대 법학파를 따르지 말고 각자 스스로 이즈티하드 (이성 판단)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고,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세속 권력의 권위에 소극적인 자세로 순응하는 이집트 울라마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울라마는 앗 사누시가 이단이라는 파트와 (칙령)를 내렸고, 이에 그는 메카로 향하여 1843년까지 무려 15년간 학생 겸 선생으로 지냈다. 메카에서 앗-사누시는 모로코의 페스 출신이자 알-카라위인 대학의 선배인 카디리야 수피 종단의 지도자인 아흐마드 이븐 이드리스 알-파시[1]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순나의 부흥을 표방하는 그에게 ‘무히 엣순나’ (순나의 부흥자) 호칭을 올렸다. 앗 사누시 본인 역시 당대 최고의 하디스 학자 중 하나로서 명성을 날렸고, 동시에 이 시기인 1825-28년 경에 후일 세누시야 종단의 교리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2.1. 무함마드 앗 사누시

파일:세누시 말년.jpg 파일:세누시 영묘.jpg
말년의 무함마드 앗 사누시 산의 노인 카다피 정권 시절 파괴된 자그붑의 앗 사누시 영묘
파일:세누시 자위야.jpg
1856년 완공된 자그붑의 세누시 자위야. 3년 후 앗 사누시가 안장되었다.

알-파시의 사후 카디리야 (혹은 이드리시야) 종파는 둘로 나뉘었고, 앗 사누시는 그중 하나를 이끌며 1835년 메카의 아부 쿠바이스[2]에 첫 자위야 (수도원)을 세웠다. 다만 (함께 순나 회복을 주장했음에도) 수피와 상극인 와하비 세력에 의해 추방된 그는 1843년 리비아로 돌아와 동부 키레나이카 (바르카) 내륙의 고대 키레네 근처에 있는 시디 라파아에 하얀 수도원이란 뜻인 ‘자위야 바이다’를 세웠다. 이 2번째 수도원을 바탕으로 ‘세누시야’ 세력이 형성되며 지명 자체도 시디 라파아에서 자위야 바이다로 바뀌었고, 축약되어 오늘날의 ‘바이다’ (혹은 베이다)가 되었다. 앗 사누시는 수피 사상에 있어 자발적인 빈곤과 지나친 금욕 등 광신적인 요소를 금지하였다. 따라서 세누시 수사들은 이슬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며 (다른 수피들처럼) 자선에 의존하는 대신 (기독교 수도원들처럼) 각자의 노동을 통해 자족하였다.

사상에 있어서도 앗 사누시는 수피 신비주의의 직관적인 사고와 이성 중심 사고 사이에서 절충하였고, 마그레브의 도시권에서 유행하던 전자에 공감하지 못하던 베두인 부족들이 세누시야에 대거 가담하였다. 7세기 이슬람화 당시나 19세기 초엽이나 생활 양식에 있어 별 차이가 없던 베두인들에게 있어 비교적 현실적이면서도 적당히 신비적인 세누시 교리는 상당히 합리적으로 여겨졌다. 10여년 간의 적극적인 활동 끝에 현지 부족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차드 동부를 다스린 사하라 사막 남쪽의 와다이 술탄국 역시 세누시야의 동맹이 되어 후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고, 이로써 세누시야의 영향력은 리비아에서 차드 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트리폴리의 오스만 총독이 압력을 가하자, 앗 사누시는 당국의 감시와 탄압에서 벗어나고자 이집트와 접경한 내륙의 자그붑 오아시스로 거점을 옮겼다. (1855년)

2.2. 무함마드 알 마흐디

파일:무함마드마흐디.jpg 파일:키레나이카 기.png
모하메드 알 마흐디 세누시 왕가 (후일 키레나이카 토후국)의 깃발

이후로도 세력 구축에 힘쓰던 앗-사누시는 1860년, 향년 73세로 사망하였고 동년생인 두 아들들 중 장남인 무함마드 알-마흐디가 계승하였다. 당시 15세였던 알 마흐디는 부친의 동지들인 아므란, 리피 등의 보좌를 받았다. 1863년 알 마흐디는 원로들의 보살핌을 떠나 부친과 마찬가지로 페스의 알 카라위인 대학에서 쿠란과 수피 신학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친정에 나선 알 마흐디는 온건한 교리에 입각하여 통치하였다. 구세주라는 뜻인 알 마흐디라 명명되었고, 실제로 일부 지지자들이 그렇게 여겼음에도 그는 스스로 마흐디로 칭하지 않았다. 1881년 수단에서 수피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를 칭하며 거병하였다.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두 차례나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4대 칼리파 (사령관) 중 하나가 되어줄 것을 요구해오자, 알 마흐디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묵살함으로써 마흐디 운동 세력과 선을 그었다.

마흐디 운동이 성공을 거두며 수단 전역을 장악했음에도 여전히 세누시야 교리를 지지하던 와다이 술탄 알리 (재위 1858-74)와 유세프 (1874-98)의 연속적인 비호 하에 알 마흐디 정권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90년 마흐디 측의 안사르 병력이 다르푸르에서 차드로 진격하자 와다이 술탄 유세프가 나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세누시 자위야는 기존의 리비아-차드와 히자즈를 넘어 페스, 다마스쿠스, 이스탄불, 그리고 심지어 인도에까지 퍼졌다. 이렇듯 세누시야 종단이 국제적인 조직력을 기반으로 명성을 얻고, 특히 리비아 동부와 사하라 오아시스[3]들에서는 종교 뿐만 아니라 리비아의 내부 교역 및 세속 권력까지 확보하자[4] (당시 중앙집권화를 꾀하던) 오스만 당국은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2.2.1. 쿠프라 천도

파일:세누시 1883.png 파일:세누시 1888.png
1880년 세누시 세력권 오스만 당국에 밀려난 1888년의 세력권

1889년 벵가지의 파샤가 병력을 이끌고 자그붑의 알 마흐디를 '방문'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압박이 가해지자,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까 우려한 그는 1894년 중심지를 아예 '기습이 불가능한' 사하라 한복판의 오지인 쿠프라 ( 알자우프)로 옮겨버렸다. 다만 오스만 술탄 압뒬하미트 2세와의 사적인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술탄은 부관 아젬자데 사디크 엘무에이드를 2차례 (1886년 자그붑과 1895년 쿠프라) 파견하여 친서를 교환하였다.[5] 한편 세누시야는 마흐디야와 함께 소말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경쟁하였고, 전자는 현재의 소말릴란드 지역인 베르베라 일대의 하브르 유니스 술탄국에서 지지를 확보하였다. 학식 높은 셰이크인 하브르 유니스 술탄 누르 아흐마드는 정기적으로 세누시 사절단을 환대하였고, 그 교리의 영향을 받아 1899년부터 소말리아의 반외세 봉기인 데르비시 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세누시야 역시 1890년대 들어 사헬과 중앙아프리카의 식민화에 나선 프랑스에 맞서게 되었다. 1890년 오늘날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북부에 해당하는 다르 엘쿠티에서는 세누시야 종단의 회원인 모하메드 세누시가 집권하였다. 세누시야의 영향력 하에서 그는 1891년 프랑스 사절단을 죽이는 등 외세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후 모하메드 세누시는 1893년 보르누를 장악 수단계 노예상 출신의 군웅 라비흐 앗-주바이르와 사돈[6]을 맺었다. 이에 1899년 알 마흐디는 조카 아흐마드 샤리프[7]와 함 쿠프라에서 차드호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따라 자위아트 구루를 거쳐 보르구 산지 (차드 동북부)로 이동하여 프랑스의 위협에 대한 직접 대응에 나섰다. 프랑스는 1900년 차드호 서쪽의 보르누와 아가데즈를 정복하며 세누시야를 압박했다.

2.3. 아흐마드 샤리프

파일:아흐메드 샤리프.jpg 파일:1900 아프리카.png
아흐메드 샤리프 초상화 1900년경 북아프리카와 사헬 지대의 판도. 사하라 동부를 차지한 세누시야 세력 (갈색)이 보인다

1900년 들어 프랑스 군은 낙타 부대를 구성하여 차드호 동쪽의 세누시야 거점들을 공격하였다. 이미 차드호의 서안과 남안을 평정한 프랑스는 세누시야 영향력을 몰아내고 사헬 동부에도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수립하려 하였다. 차드 방면 전선을 맡고 있던 아흐마드는 최전방 카넴에 속한 자위야트 베르 알라이의 지도자 모하메드 엘바라니와 역시 차드에 속한 자위야트 아인 칼크의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와 함께 프랑스에 맞섰다. 그러던 1902년 1월 세누시 이맘 알 마흐디가 43년의 집권 끝에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자그붑이나 시와 등 동쪽 사막 지대의 세누시 공동체는 한동안 알 마흐디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그를 마흐디로 섬기기도 하였다. 그의 늦둥이 아들 이드리스는 불과 12세였기에 알 마흐디는 자신의 29세 조카 아흐마드 샤리프를 대신 후계자로 유언하였다. 다만 이때 친아들 이드리스가 장성하면 정권을 넘긴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와다이 술탄국은 1898년 술탄 유세프가 사망한 후 내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세누시야는 동맹 유수프의 아들 다우드 무라 (무함마드 살리흐)를 지지하며 다르푸르 술탄국이 지지하는 유세프의 동생 아흐메드와 맞섰다. 1900년 아흐메드가 집권에 성공했으나 1902년 6월 다우드 무라가 세누시 측의 도움으로 집권함으로써 와다이 술탄국과 세누시야 간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다우드 무라는 세누시 상인들에게 자유로운 무역과 치외법권 행사를 허가하는 등의 특혜를 베풀었다.[8] 하지만 다우드 무라는 1909년 수도 아비셰를 프랑스에 뺏겼고, 와다이 술탄국은 세누시야 대신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북부로 철수한 다우드 무라는 세누시 측의 원군 및 다르푸르 술탄 알리 디나르와 함께 1910년 1월 와디 카드자에서 프랑스 군을 괴멸시키고 옛 속국[9]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군의 반격에 재차 밀려난 그는, 승패를 반복하는 저항 끝에 결국 1911년 10월 항복하였다.

2.3.1. 1차 대전: vs 영국

파일:세누시 이집트.jpg
영국령 이집트 (이집트 술탄국)로 진격하는 세누시 군대

2.4. 무함마드 이드리스 1세

2.4.1. 대이탈리아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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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누시 저항군을 지원하기 위해 온 무스타파 케말 파샤

2.5. 독립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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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카다피 정권 하에서

파일:자그붑 2.png
파괴된 채로 방치된 자그붑의 이드리스 1세의 궁전 유적


[1] 그의 손자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 이드리시는 후일 아시르 토후국을 세운다 (1908 ~ 1930) [2] 마스지드 알 하람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산 [3] 시와, 자그붑, 쿠프라, 보르구 등. 서구에서는 중부 수단으로 불렀다 [4] 실제로 트리폴리와 벵가지 같은 해안에서조차 세누시 종단이 오스만 총독들보다도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5] 아젬자데는 그 여정을 바탕으로 1897년 '아프리카의 대사하라 여정'이란 책으로 출판하였다. [6] 전자의 딸 카디자와 후자의 아들 파달라가 결혼함 [7] 앗 사누시의 차남 무함마드 앗 샤리프 (1896년 사망)의 아들 [8] 와다이 술탄국 내에서 세누시 상인이 살해되면 술탄이 직접 복수하고, 상인이 현지인을 살해하면 술탄이 배상했을 정도.. [9] 다르 투마, 다르 기므르, 다르 마살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