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군인,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14년 7월 3일, 함경남도 삼수군 신양리의 한 화전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졸업 이후 명천군에서 자동차 운전수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만주로 넘어가 자동차 운전수로 일했다. 1941년에 귀국하여 경원군 하면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다가 해방 이후 탄광 규찰대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김일성에게 스카웃되어 경원군당위원회 부장 및 함경북도 당위원회 부부장을 역임했으며 당중앙위원회에서도 부부장으로 사업했다.6.25 전쟁이 발발하자 10사단 정치부사단장으로 참전했으며 1953년에 13사단장에 이명되었다. 1953년 말에 문화선전성 부상에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의 1959년 3월 연설을 보면 전임자 한상두의 후임으로 함경북도 당위원장으로 재임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의 정치 행적이 불분명했던 1950년대에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숙청당한 전임 총정치국장 최종학의 뒤를 이어 총정치국장을 잠깐 역임하기도 하였다.[1] 이후 서철에게 총정치국장 자리를 물려주고 9월 29일, 전임자 허성택의 뒤를 이어 석탄공업상으로 이동하였고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59년 8월 3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석탄공업상이 폐지됨에 따라 석탄공업상에서 해임되었다. 당중앙위원회 건설운수부장에 임명되어 일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1964년 12월 4일, 전임자 정일룡의 뒤를 이어 전기석탄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전기석탄공업상에 유임되었으나 1969년 3월 26일 2시에 56세를 일기로 오랜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해방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 인민민주주의혁명과업수행과 사회주의혁명과업실천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투쟁하였으며 또한 당 및 국가 기관의 요직에서 다년간 사업하면서 4천만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와 그이의 위대한 혁명사상의 구현인 당의 로선과 정책을 높이 받들고 국가사업과 나라의 인민경제발전을 위한 사업에 헌신분투하였으며 전기석탄공업상의 중책을 지니고 나라의 전기석탄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힘을 다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김경석, 강진건, 강영창,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 김원빈과 함께 김태근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최용진.
- 위원: 김영주, 정준택, 최중국, 연형묵, 정동철, 김만금, 정일룡, 김두삼, 림계철, 리근모, 백선일, 강희원, 최재우, 오태봉, 김응삼, 리장수, 오성렬, 진문덕.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4권.
[1]
여정의 증언에 따르면, 군 내부에 강력한 반종파투쟁을 전개했으나 고급 군관들을 닥치는대로 조지다 보니까 군 내부의 기강과 사기가 땅을 치게 되어 병사들이 탈영을 하는가 하면 일부 고급 군관들이 아예 탈북까지 하는 등 분위기가 너무 나빠지자 김일성의 지시로 숙청을 중단했는데, 김일성이 자기가 숙청을 중단하라고 해놓고 왜 계속 하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 통에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예편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