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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1:20:27

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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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福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전설
2.1. 한국과 일본에서
3. 관련 사료4. 창작물

1. 개요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인물. 자는 군방(君房), 서불(徐巿)[1]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기원전 219년, 방사 진시황에게 중용되었고, 이후 명령을 받아 어린 남녀 수천명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서 불로초를 구하러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서복이 진시황을 속이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서복의 탐험은 두번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 사마천 사기에 기록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 "바다에 봉래(蓬山), 방장(方丈), 영주(瀛洲)라는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목욕재계하시고, 어린 남녀 아이를 데리고 신선을 찾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아이 수천 명을 선발하여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게 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28년
시황이 대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학자와 방사들을 아주 많이 모조리 불러 모아 태평을 이루려 했더니 방사들이 단약을 구워 기이한 약을 만들자고 했다. 지금 듣자하니 한중(韓衆, 한종)은 가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 등은 거금을 쓰고도 끝내 약을 구하지 못했다. 간사한 놈들이 서로 이익을 챙기고 고발한다는 말만 날마다 듣고 있다. 노생 등을 내가 존중해서 잘 대했거늘 지금 나를 비방하며 나의 부덕을 무겁게 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이런 방사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요망한 말로 검수(黔首)[2]를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35년
방사 서불 등은 바다로 가서 선약을 구하길 몇 해가 지나도록 구하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자 문책 받을 것을 두려워해 거짓으로 "봉래의 선약은 구할 수는 있으나 커다란 상어 때문에 늘 어려움을 당하다보니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활 잘 쏘는 사람을 함께 보내 상어를 보는 즉시 연속 발사되는 석궁을 쏘면 됩니다"라고 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37년
서복(徐福)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신기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온 서복이 말했습니다.

『신이 바다 한 가운데서 대신(大神)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너는 서쪽 땅 황제의 사자가 아니더냐?'라고 물어서 신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복용하면 수명을 더하여 연장할 수 있는 신약을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이 말했습니다. '너희 진왕은 예의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서 복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 즉시 그 대신을 따라 동남쪽의 봉래산에 이르러 영지(靈芝)로 이루진 궁궐을 보았는데 구리빛을 띤 용의 형상을 한 사자가 나타나 하늘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신이 재배하고 '마땅히 무엇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해신이 대답하기를 '양가집 사내 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을 바치면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진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동남 동녀 3천 명과 오곡의 각종 씨앗과 백공들이 만든 물건들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서복은 비옥하고 넓은 평원을 얻자 그곳의 왕이 되어 그곳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회남형산열전

사실 진시황은 수은 중독의 영향도 있고 암살에 대한 노이로제, 불로불사에 대한 집착 등이 겹쳐 말년에 꽤 광폭한 행보를 보였는데 서복은 그런 진시황을 두 번이나 속여 먹고도 무사히 탈출한 것을 보면 배짱있게 황제를 구워 삶고 의심을 풀고 환심을 살 정도로 본인의 화술이나 인간적인 매력, 인맥 등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복의 이후 행보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기 위해 먼 바다로 떠났다는 신비로운 소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만들어줘서, 서복이나 불로불사를 다루는 창작물에서 서복이 진짜로 영약을 구했다는 설정이 자주 쓰인다. 아니면 당시 진시황의 무리한 만리장성 건설과 분서갱유등의 악명을 떨치고 본인에게 불로초를 찾거나 수은을 먹거나 하는 불사에 대한 집착을 한 행적도 있었다 보니 점점 제정신이 아닌 시황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불로초를 찾는 빌미로 영원히 도주했다는 설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서복 자신이 불로불사를 누렸다기 보다는, 어른의 사정으로 다른 이들이 그 혜택을 보았다는 얘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장예모의 영화 진용이나 성룡 김희선이 나온 영화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3] 등이 있다.

2. 전설

2.1. 한국과 일본에서

3. 관련 사료

4. 창작물

파일:조온_서복.png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병종은 뜬금없이 산악기병계고 성우는 장예나이다. 일러스트나 성우에서 알 수 있듯 TS당해서 일단은 여성인 듯한데 사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어려운 중성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결정판에서 수정된 야마토 캠페인에서는 일본으로 건너가 현지의 조몬 부족을 진압하고 나라를 새로이 세우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게임 번역이 영 아닌 수준이라 이름이 중국식 독음인 "쉬푸"로 표시된다.

좀비 랜드 사가 시리즈에서는 마스터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조금씩 떡밥을 흘리다 2기에서 정체가 완전히 밝혀졌다. 자세한 건 서복(좀비 랜드 사가) 문서로.

트리니티 블러드에 등장하는 악의 조직 로젠크로이츠 올덴의 2인자 이자크 페르난도 폰 캠퍼가 오래전에 사용했던 이름 중에 하나라고 나온다.

Fate/Grand Order에서도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복(Fate 시리즈) 문서로.

맛없는 밥 엘프와 유목생활에선 3000명의 소년소녀들을 데리고 이세계로 가서 인간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세계에선 슈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선술을 쓸 수 있었는지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던 소녀를 선술로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지옥락에서는 아사에몬과 죄인들이 떠난 신선향에서 불로불사의 수행을 이어오던 천선들과 관련이 있는 인물으로 묘사된다. 자세한 건 지옥락 문서로.

풍운(만화)에서 제석천의 이름으로 주인공 일행을 갖고 놀았다. 게임 '풍운 2: 칠무기'에서 제석천으로 변신하여 최종 보스로서 전투에 임한다.

엘피스(컴투스)에선 광선총 안에서 불로초를 가지고 있어 멀쩡한 것으로 나온다.

[1] (시, 5획)가 아니고 巿(불, 4획)이다. 고우영 초한지에도 '서시'로 잘못 나온다. [2] '검은 머리'라는 뜻. '백성'의 진나라 표현. [3] 여기서는 김희선이 배역을 맡은 옥수 공주와 그녀를 모시던 호위무사가 불로불사의 혜택을 누렸다는 설정이 있다. 문제는 이게 자기들이 좋아서 얻은 게 아니라, 기껏 구해온 불로초를 중증 의심병 환자인 진시황이 그거 독초 아니냐면서 ' 네가 한 번 먹어봐라'하고 억지로 먹여서 그렇게 됐다고. 덕분에 정작 지는 이걸 먹지도 못하고 죽어서, 둘이 감금된 왕릉에 안치되는 신세가 되었다(...). [4] 이것도 신라인 연오랑이 일본에서 왕이 된다는 내용의 설화인데, 일본 역사에 신라 망명왕자 천일창 이야기가 나오는 등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한 설화로 본다. [5] 여담이지만 탈무드에 수록된, 생명을 구해주는 풀이라는 이야기에서도 까마귀가 어디선가 물어온 죽은 생명을 살리는 풀이 나온다. 다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6] 다만 한국의 삼신산 개념에서 한라산에서 자라는 지초(芝草), 즉 약초를 삼신산 불사약 중 하나로 꼽았다. [7] 중국 고대에는 대나무를 쪼갠 죽간에 점도가 높은 옻먹을 사용해 기록했는데, 이 때문에 필획이 처음은 유난히 두껍고 점점 가늘어져 마치 올챙이 같은 모양의 글자가 쓰여졌다. 이를 과두문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