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서광선(徐光鮮)[1] |
출생 | 1897년 음력 2월 29일[2] |
전라남도
무안군 부내면
죽동 (現 전라남도 목포시 죽동)[3] |
|
사망 | 1972년 7월 10일 (향년 75세) |
묘소 | 망우역사문화공원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97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무안군 부내면 죽동(現 목포시 죽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무안군 부내면 개벌동(現 목포시 호남동 7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고, 경상남도 부산부(現 부산광역시)로 재차 이주해 주소지를 두었다.1917년 3월 23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장일환(張日煥), 강석봉(姜錫奉)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선국민회를 조직한 뒤 전라도 지역 책임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청년들을 집결시키고 미국 하와이에 있던 국민회의 박용만과 연락하였으며, 기관지 『국민보(國民報)』를 간행해 배포하는 등 일본 제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1917년 7월부터 회원들 간의 연락에 차질이 생기면서 사실이 누설되었고, 얼마 뒤 불행히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총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부터 1922년까지는 거주제한 처분을 받아 제주도에 연금되었고, 1919년 제주도에서 청년들을 모아 금주회(禁酒會)를 조직한 뒤 모금을 통해 모은 돈으로 여자 야학교를 신설하는 등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1920년 9월에는 목포부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제지를 받아 해산되기도 했다. 1922년부터는 전라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반도 고학생 친목회 순회 강연을 개최했다.
8.15 광복 후 1950년 전남보도협회(全南報道協會)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63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있었던 군정 연장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풀려나 민정당 전라남도당 준비위원 및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그 뒤 1972년 7월 10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서동일, 오재영, 한용운,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오기만, 유상규 등과 함께 망우역사문화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매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