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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영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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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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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이 영 Cy Yo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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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투수 | |||||||||||||||||||||||||||||||||||||||||||||||||||||||||||||||||||||||||||||||||||||||||||||||||||||||||||||||||||||||||||||||||||||||||||||||||||||||||||||||||||||||||||||||||||||||||||||||||||||||||||||||||||||||||||||||||||||||||||||||||||||||||||||||||||||||||||||||||||||||||||||||||||||||||||||||||||||||||||||||||||||||||||||||||||||||||||||||||||||||||||||||||
득표수 | 867,523 | }}}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1903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bordercolor=#bd3039> |
보스턴 레드삭스 명예의 전당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1919,#ffffff |
에디 콜린스 | 지미 콜린스 | 조 크로닌 | 바비 도어 | 릭 페럴 |
지미 폭스 | 레프티 그로브 | 해리 후퍼 | 허브 페녹 | 레드 러핑 | |
베이브 루스 | 트리스 스피커 | 테드 윌리엄스 | 칼 야스트렘스키 | 톰 요키 | |
사이 영 | 토니 코니글리아로 | 돔 디마지오 | 프랭크 말존 | 자니 페스키 | |
짐 라이스 | 스모키 조 우드 | 진 R. 요키 | 칼튼 피스크 | 딕 오코넬 | |
멜 파넬 | 리코 페트로첼리 | 딕 래디츠 | 루이스 티안트 | 켄 콜먼 | |
드와이트 에반스 | 래리 가드너 | 커트 가우디 | 재키 젠슨 | 네드 마틴 | |
빌 몬부켓 | 레지 스미스 | 밥 스탠리 | 릭 벌레슨 | 데이브 페리스 | |
루 고먼 | 존 해링턴 | 텍스 휴슨 | 더피 루이스 | 짐 론보그 | |
프레드 린 | 웨이드 보그스 | 빌 캐리건 | 데니스 에커슬리 | 빌리 굿맨 | |
브루스 허스트 | 벤 몬도어 | 피트 러널스 | 헤이우드 설리반 | 딕 브레시아니 | |
엘리스 카인더 | 조 모건 | 제리 레미 | 조지 스캇 | 번 스티븐스 | |
딕 윌리엄스 | 조지 딕비 | 웨스 페럴 | 마이크 그린웰 | 에드워드 F. 케네디 시니어 | |
빌 리 | 에버렛 스캇 | 프랭크 설리반 | 모 본 | 토미 하퍼 | |
에디 카스코 | 짐 피어설 | 존 발렌틴 | 돈 짐머 | 마티 배럿 | |
엘리스 버크스 | 조 돕슨 | 더치 레너드 | 조 무니 | 커트 실링 | |
존 I. 테일러 | 조 카스티길론 | 로저 클레멘스 | 노마 가르시아파라 | 페드로 마르티네스 | |
아이라 플래그스테드 | 래리 루치노 | 제이슨 배리텍 | 팀 에이크필드 | 벅 프리먼 | |
알 그린 | 데릭 로우 | 마이크 로웰 | 케빈 유킬리스 | 빌 디닌 | |
댄 듀켓 | 리치 겟맨 | 데이비드 오티즈 | 매니 라미레즈 | 더스틴 페드로이아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bordercolor=#00385d>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명예의 전당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1919,#ffffff |
얼 애버릴 | 멜 하더 | 슈리스 조 잭슨 | 켄 켈트너 | 냅 라조이 |
스티브 오닐 | 조 슈얼 | 트리스 스피커 | 할 트로스키 | 사이 영 | |
루 보드로 | 빌 브래들리 | 밥 펠러 | 밥 레몬 | 엘머 플릭 | |
사첼 페이지 | 스탠 코벨레스키 | 래리 도비 | 짐 헤간 | 얼리 윈 | |
레이 채프먼 | 로키 콜라비토 | 애디 조스 | 알 로페즈 | 샘 맥도웰 | |
알 로젠 | 허브 스코어 | 짐 배그비 | 마이크 가르시아 | 찰스 내기 | |
안드레 손튼 | 조 고든 | 마이크 하그로브 | 샌디 알로마 주니어 | 웨스 페럴 | |
딕 제이콥스 | 빌 비크 | 케니 로프턴 | 사이 슬랩니카 | 게일로드 페리 | |
잭 그래니 | 짐 워필드 | 카를로스 바에르가 | 존 하트 | 오마 비즈켈 | |
지미 더들리 | 알버트 벨 | 찰리 제이미슨 | 프랭크 로빈슨 | 짐 토미 | |
매니 라미레즈 | 데일 미첼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사이 영 | |
헌액 연도 | 1937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76.12% (2회) |
아모스 루시 ( 뉴욕 자이언츠, 1894년) |
→ |
사이 영 ( 보스턴 아메리칸스, 1901년) |
→ |
크리스티 매튜슨 ( 뉴욕 자이언츠, 1905년) 루브 워델 (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05년) |
189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 ||||
빌 허친슨 ( 시카고 콜츠) |
→ |
빌 허친슨 ( 시카고 콜츠) 사이 영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
→ |
프랭크 킬렌 ( 피츠버그 파이리츠) |
189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다승왕 | ||||
아모스 루시 ( 뉴욕 자이언츠) |
→ |
사이 영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
→ |
프랭크 킬렌 ( 피츠버그 파이리츠) 키드 니콜스 ( 보스턴 비니터스) |
1901년 ~ 190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 | ||||
신설 | → |
사이 영 ( 보스턴 아메리칸스) |
→ |
잭 체스브로 ( 뉴욕 하이랜더스) |
189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왕 | ||||
존 유잉 ( 뉴욕 자이언츠) |
→ |
사이 영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
→ |
테드 브레이텐스테인 (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
190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왕 | ||||
신설 | → |
사이 영 ( 보스턴 아메리칸스) |
→ |
에드 시버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89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탈삼진왕 | ||||
아모스 루시 ( 뉴욕 자이언츠) |
→ |
사이 영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
→ |
닥 맥제임스 (워싱턴 세네터스) 사이 세이무어 ( 뉴욕 자이언츠) |
190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탈삼진왕 | ||||
신설 | → |
사이 영 ( 보스턴 아메리칸스) |
→ |
루브 워델 (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보유 기록 | |
통산 최다 승 | 511승 |
통산 최다 패 | 316패 |
통산 최다 완투 | 749회 |
통산 최다 이닝 | 7356이닝 |
통산 최다 타자 상대 | 29567회[1] |
통산 최다 선발출장 | 815회 |
최다 20승 시즌 | 15회 |
최다 15승 시즌 | 18회 |
연속 시즌 300이닝 | 15년 연속 |
연속 시즌 200이닝 | 19년 연속 |
연속 이닝 무안타 | 25 1/3이닝 연속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bd3039> |
보스턴 레드삭스 역대 감독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20272c,#d3dade |
보스턴 아메리칸스 시대 (1901~1907) | ||||
1대 지미 콜린스 ★★ 1901~1906 |
2대 칙 스탈 1906 |
3대 사이 영 1907 |
4대 조지 허프 1907 |
5대 밥 엉글라웁 1907 |
|
보스턴 레드삭스 시대 (1908~) | |||||
6대 디컨 맥과이어 1907~1908 |
7대 프레드 레이크 1908~1909 |
8대 팻시 도노반 1910~1911 |
9대 제이크 스탈 ★ 1912~1913 |
10대 빌 캐리건 ★ ★ 1913~1916 |
|
11대 잭 배리 1917 |
12대 에드 바로우 ★ 1918~1920 |
13대 휴 더피 1921~1922 |
14대 프랭크 찬스 1923 |
15대 리 폴 1924~1926 |
|
10대 빌 캐리건 1927~1929 |
16대 헤이니 와그너 1930 |
17대 샤노 콜린스 1931~1932 |
18대 마티 맥마너스 1932~1933 |
19대 버키 해리스 1934 |
|
20대 조 크로닌 ☆ 1935~1947 |
21대 조 맥카시 1948~1950 |
22대 스티브 오닐 1950~1951 |
23대 루 보드로 1952~1954 |
24대 핑키 히긴스 1955~1959 |
|
25대 루디 욕 1959 |
26대 빌리 저게즈 1959~1960 |
27대 델 베이커 1960 |
24대 핑키 히긴스 1960~1962 |
28대 조니 페스키 1963~1964 |
|
29대 빌리 허만 1964~1966 |
30대 피트 루넬스 1966 |
31대 딕 윌리엄스 ☆ 1967~1969 |
32대 에디 포포스키 1969 |
33대 에디 카스코 1970~1973 |
|
32대 에디 포포스키 1973 |
34대 대럴 존슨 ☆ 1974~1976 |
35대 돈 짐머 1976~1980 |
28대 조니 페스키 1980 |
36대 랄프 하욱 1981~1984 |
|
37대 존 맥나마라 ☆ 1985~1988 |
38대 조 모건 1988~1991 |
39대 버치 홉슨 1992~1994 |
40대 케빈 케네디 1995~1996 |
41대 지미 윌리엄스 1997~2001 |
|
42대 조 캐리건 2001 |
43대 그래디 리틀 2002~2003 |
44대 테리 프랑코나 ★ ★ 2004~2011 |
45대 바비 발렌타인 2012 |
46대 존 패럴 ★ 2013~2017 |
|
47대 알렉스 코라 ★ 2018~2019 |
48대 론 로니키 2020 |
47대 알렉스 코라 2021~ |
|||
★: 월드 시리즈 우승 / ☆: 월드 시리즈 준우승 / ★: 아메리칸 리그 우승(월드 시리즈 미개최) |
}}} ||
}}} ||
|
|
사이 영 Cy Young |
|
본명 |
덴튼 트루 영 Denton True Young |
출생 | 1867년 3월 29일 |
오하이오 주 길모어 | |
사망 | 1955년 11월 4일 (향년 88세) |
오하이오 주 뉴코머스타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8cm | 95kg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890년 현금 트레이드 (CLV) |
소속팀 |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2] (1890~1898) 세인트루이스 퍼펙터스-카디널스 (1899~1900) 보스턴 아메리칸스-레드삭스 (1901~1908) 클리블랜드 냅스 (1909~1911) 보스턴 러슬러스[3] (1911) |
지도자 | 보스턴 아메리칸스 감독 (1907) |
기록 |
퍼펙트 게임 (1904.5.5) 3회 노히트 노런 (1897.9.18, 1904.5.5, 1908.6.30) |
[clearfix]
1. 개요
그의 통산 기록영의 투구는 단순히 공을 던지는 행위를 넘어 타자에게
기하학 문제를 제출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
변화구의) 곡선에 대한 그의 이해도는 철도 엔지니어에 버금간다.
클리블랜드 리더 신문 #
클리블랜드 리더 신문 #
미국의 야구 선수. MLB 통산 최다이닝, 최다승, 최다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본명은 '덴튼 트루 영' 이나 별명을 활용한 등록명 '사이 영'으로 훨씬 유명하며,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도 등록명을 공식 이름으로 쓴다.[4] '사이(Cy)'는 사이클론의 약자로써, 사이 영의 패스트볼이 사이클론(Cyclone)같아서 붙여진 별명이다. 정확한 경위를 설명하자면, 영이 입단테스트 당시 공을 던지는 쪽 뒤에 있던 판자를 박살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사이클론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5] 혹은 사이는 당시 시골뜨기에게 주로 붙던 별명이고, 영이 오하이오 농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2. 선수 경력
데드볼 시대에서 롱런한
이닝 이터는 당신이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소수다. 당대의 혹사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팔이 빠져서 야구를 그만 둬야 한 투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MLB 역사상 5000이닝 이상을 던진 13명의 투수 중에서
데드볼 시대의 투수는 7명이고, 6000이닝은 6003이닝의 퍼드 갤빈[6]이 유일하다. 368이닝을 20년이나 던져야 사이 영의 7,356이닝을 달성할 수 있는데. 오늘날 젊은 투수에게 300이닝이라도 던지게 하는 감독은 고소당하거나 체포당할 것이다. 사이 영의 7000이닝을 돌파하려면 유례가 없는 의학적 발전이나 로봇 투수가 나와야 한다.
- 테드 버그, USA 투데이 기자
- 테드 버그, USA 투데이 기자
메이저리그 통산 22년 동안 30승대 시즌을 5번, 20승대 시즌을 10번 기록하며 통산 511승을 거두었다. 참고로 일본에서 최다승 기록이 카네다 마사이치의 400승, 대한민국의 최다승 기록은 송진우의 210승이다. 위 기록과는 한마디로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 외에 최다 이닝 투구(7,356 이닝), 최다 선발 출장(815 경기), 최다 완투(749 경기), 퍼펙트 게임 1회[7], 노히트 노런 3회. 그리고 최다 패배(316패)[8] 상술했듯이 퍼펙트 게임을 포함하여 노히트 경기는 통산 3회 기록했는데, 이는 샌디 쿠팩스가 깰 때까지 최다 기록이었다.[9] 아메리칸 리그 창설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에서 보스턴으로 이적했으며 첫 번째 월드시리즈의 첫 번째 투구를 했다. 그리고 그해 월드시리즈 2승을 기록하며 팀을 최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2.1. 선수 생활 초반과 전성기
선수들이 클럽하우스에서 나와 연습을 하는 도중에, 촌스러운 모습의 한 선수를 향해 관중석에서 킥킥대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몸이 너무 커서 그의 셔츠는 드럼헤드마냥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긴 팔은 셔츠 소매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멋쩍게 마운드로 걸어가는데 그의 거대한 몸이 우스꽝스럽게 씰룩거려서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위대한 캡 앤슨이 사이 영을 보며 "저게 그 천재인가?"라며 비웃었다. 쓸쓸히 마운드로 올라간 투수는 워밍업을 하며 어색함을 떨쳐내고, 이윽고 그가 던진 공은 퍽하는 소리와 함께 빛처럼 빠르게 포수 글러브에 꽂혔다. 경기가 시작되고 거만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간 시카고의 타자들은 한 명 한 명 방망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벤치로 돌아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은 이닝이 거듭될수록 더욱 효과적인 피칭을 했고, 시카고는 결국 패배하고 미친 듯이 분노하며 경기장을 떠났다.
새로운 투수의 독특한 형상에 웃었던 관중들은 경기 후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 1890년 8월 6일,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홈 경기, 사이 영의 프로무대 데뷔전. #
위대한 캡 앤슨이 사이 영을 보며 "저게 그 천재인가?"라며 비웃었다. 쓸쓸히 마운드로 올라간 투수는 워밍업을 하며 어색함을 떨쳐내고, 이윽고 그가 던진 공은 퍽하는 소리와 함께 빛처럼 빠르게 포수 글러브에 꽂혔다. 경기가 시작되고 거만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간 시카고의 타자들은 한 명 한 명 방망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벤치로 돌아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은 이닝이 거듭될수록 더욱 효과적인 피칭을 했고, 시카고는 결국 패배하고 미친 듯이 분노하며 경기장을 떠났다.
새로운 투수의 독특한 형상에 웃었던 관중들은 경기 후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 1890년 8월 6일,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홈 경기, 사이 영의 프로무대 데뷔전. #
그는 1867년 3월 29일, 오하이오주 길모어에서 맥켄지와 낸시 영 부부의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농장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와주면서 몇몇 세미프로 팀의 내야수로 뛰었는데, 1890년 칸톤이라는 프로팀에 입단, 15승 15패를 기록한 후 내셔널 리그의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로 $300에 팔렸다.
1891년에 27승을 기록, 이듬해 36승과 1.93의 자책점으로 내셔널 리그 다승왕에 오른다. 초창기에 그는 불 같은 강속구로 유명했으니, 이 시기부터 제구력에 신경을 써서 커리어 내내 사구를 거의 헌납 안하는 투수가 된다.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에서 9년,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에서 2년을 보낸 후 1901년에 출범한 아메리칸 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한다. 레드삭스에서의 첫 해는 그의 커리어 하이로, 33승, 자책점 1.62, 그리고 158 탈삼진을 기록한다. #
2.2.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불멸의 기록들을 세우다
1903년 그는 사상 첫 월드 시리즈에서 레드삭스의 우승을 이끈다. 1904년엔 아메리칸 리그 첫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고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25와 1/3연속 무안타 이닝을 (퍼펙트 게임 포함) 기록한다. 1908년, 41살의 나이로 21승과 1.26 자책점을 기록한 그는 선수경력의 마지막을 보스턴 러슬러스와 함께 하고 은퇴한다.사실 그는 여전히 피칭에서는 경쟁력을 갖고 있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비대해진 몸과 둔해진 순발력이 문제였다. 둔해진 몸으로 피칭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해지면서, 투수 앞으로 대는 번트를 견제하지 못했던 것. 실제로 은퇴하면서 "이거 번트 때문에 은퇴하는군" 이라며 허허 웃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511승[10], 316패[11], 7,356이닝[12], 그리고 그의 500승 이상으로 깨지기 힘들다는 749 완투[13]. 사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되고 완투가 극도로 줄어들고 있는 현대야구의 추이를 감안할 때 그 어느 하나도 앞으로 깨질 수 없는, 깨져서도 안 되는 기록이라고 봐야 한다.[14]
2.3. 은퇴 후
1913년에 연방 리그의 클리블랜드 그린 삭스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었지만, 은퇴 후 첫 20여 년의 대부분을 아내 로바와 오하이오 피올리에 있는 농장에서 보낸다. # 1937년에 명예에 전당에 두번째 투표로 입성했는데, 첫회 입성 실패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1933년에 아내와 사별을 한 후 오하이오 뉴커머스타운에 있는 농장으로 이사를 가 거기서 친구들과 말년을 보냈다. 그가 1955년 11월 4일에 숨을 거두자 이듬해 MLB수장 포드 프릭이 사이영 상을 제정한다.
3. 연도별 기록
사이 영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890 | CLV | 17 | 9 | 7 | 0 | - | 147⅔ | 3.47 | 145 | 6 | 30 | 8 | 39 | 1.185 | 101 | 1.6 | 1.7 |
1891 | 55 | 27 | 22 | 2 | - | 423 | 2.85 | 431 | 4 | 140 | 10 | 147 | 1.348 | 120 | 6.0 | 6.6 | |
1892 | 53 | 36 | 12 | 0 | - | 453 | 1.93 | 363 | 8 | 118 | 8 | 168 | 1.062 | 176 | 7.1 | 13.9 | |
1893 | 53 | 33 | 16 | 2 | - | 422⅔ | 3.36 | 442 | 10 | 103 | 10 | 102 | 1.289 | 144 | 7.3 | 11.2 | |
1894 | 52 | 26 | 21 | 1 | - | 408⅔ | 3.94 | 488 | 19 | 106 | 6 | 108 | 1.454 | 138 | 6.3 | 9.5 | |
1895 | 47 | 35 | 10 | 0 | - | 369⅔ | 3.26 | 363 | 10 | 75 | 8 | 121 | 1.185 | 152 | 6.7 | 12.0 | |
1896 | 51 | 28 | 15 | 3 | - | 414⅓ | 3.24 | 477 | 7 | 62 | 11 | 140 | 1.301 | 140 | 8.3 | 9.9 | |
1897 | 46 | 21 | 19 | 0 | - | 335⅔ | 3.78 | 391 | 7 | 49 | 9 | 88 | 1.311 | 123 | 5.6 | 7.4 | |
1898 | 46 | 25 | 13 | 0 | - | 377⅔ | 2.53 | 387 | 6 | 41 | 9 | 101 | 1.133 | 136 | 6.8 | 6.7 | |
<rowcolor=#FFEF00>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899 | STL | 44 | 26 | 16 | 1 | - | 369⅓ | 2.58 | 368 | 10 | 44 | 6 | 111 | 1.116 | 154 | 6.7 | 8.4 |
1900 | 41 | 20 | 18 | 0 | - | 321⅓ | 3.00 | 337 | 7 | 36 | 3 | 115 | 1.161 | 120 | 6.4 | 7.5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01 | BOS | 43 | 33 | 10 | 0 | - | 371⅓ | 1.62 | 324 | 6 | 37 | 7 | 158 | 0.972 | 219 | 7.8 | 12.5 |
1902 | 45 | 32 | 11 | 0 | - | 384⅔ | 2.15 | 350 | 6 | 53 | 13 | 160 | 1.048 | 166 | 7.7 | 10.1 | |
1903 | 40 | 28 | 9 | 2 | - | 341⅔ | 2.08 | 294 | 6 | 37 | 9 | 176 | 0.969 | 145 | 5.7 | 6.6 | |
1904 | 43 | 26 | 16 | 1 | - | 380 | 1.97 | 327 | 6 | 29 | 4 | 200 | 0.937 | 136 | 7.7 | 9.3 | |
1905 | 38 | 18 | 19 | 0 | - | 320⅔ | 1.82 | 248 | 3 | 30 | 8 | 210 | 0.867 | 147 | 8.0 | 7.1 | |
1906 | 39 | 13 | 21 | 2 | - | 287⅔ | 3.19 | 288 | 3 | 25 | 8 | 140 | 1.088 | 86 | 5.8 | 2.0 | |
1907 | 43 | 21 | 15 | 2 | - | 343⅓ | 1.99 | 286 | 3 | 51 | 7 | 147 | 0.982 | 129 | 5.8 | 7.6 | |
1908 | 36 | 21 | 11 | 2 | - | 299 | 1.26 | 230 | 1 | 37 | 1 | 150 | 0.893 | 195 | 6.4 | 9.4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09 | CLE | 35 | 19 | 15 | 0 | - | 294⅓ | 2.26 | 267 | 4 | 59 | 8 | 109 | 1.108 | 113 | 3.3 | 3.5 |
1910 | 21 | 7 | 10 | 0 | - | 163⅓ | 2.53 | 149 | 0 | 27 | 4 | 58 | 1.078 | 103 | 2.8 | 2.2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11 |
CLE/ BSN |
18 | 7 | 9 | 0 | - | 126⅓ | 3.78 | 137 | 6 | 28 | 4 | 55 | 1.306 | 97 | 1.8 | 0.5 |
MLB 통산 (22시즌) |
906 | 511 | 316 | 18 | - | 7356 | 2.63 | 7092 | 138 | 1217 | 161 | 2803 | 1.130 | 138 | 131.5 | 165.6 |
빨강색은 MLB 전체 1위(투수 한정).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사이 영 | 99 | 468 | 328 | 82 |
HOF 입성자 평균 | 40 | 185 | 100 | 50 |
- JAWS - Starting Pitcher (5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사이 영 | 168.4 | 79.3 | 123.9 |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 73.9 | 50.3 | 62.1 |
5. 사이 영 상
자세한 내용은 사이 영 상 문서 참고하십시오.사이 영 사후 그의 업적을 기려 1956년부터 매년 각 리그의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인 ' 사이 영 상'이 제정되었다.
예전부터 메이저리그는 MVP 수상 경쟁에서 투수에 비해 타자가 많이 유리한 편이었고, 그에 따라 당시 야구계에서는 그 해 최고의 성적을 올린 투수만 따로 수상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마침 역대 최다승을 올린 레전드급 투수 사이 영이 사망하여 이를 기려 상 이름을 '사이영상'으로 정했다. 그때 사이 영이 사망하지 않았으면 ' 월터 존슨 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6. 그에 대한 평가
6.1. 독보적인 신체조건
그의 루키 시절부터 모든 스카우터들이 눈여겨본 것은 그의 압도적인 체구였다. 188cm에 95kg. 19세기의 팀 키프, 키드 니콜스, 찰스 래드번 등의 명투수들보다도[15] 키는 10cm 이상 크고, 체중은 20kg 더 나갔다. 심지어 무려 한 세대 뒤에 거인 투수로 유명하던 월터 존슨보다도 2cm가 더 크고 5kg가 더 나갔으니, 당대 관중들과 선수들에게 준 위압감은 엄청났다. 현대 기준으로 신장은 200cm이 넘고 체중은 120kg가 넘는 거한을 보는 느낌과 같다.그리고 무식하게 많이 던지다가 은퇴한 나이 44세에도 끝내 마모되지 않은 신기한 관절을 타고났다.[16]
6.2. 데드볼 시대를 유일하게 20여 년이나 견뎌낸 철완
이 늙은 소년은 이번 시즌 매우 좋은 폼을 보여주고 있다. 1169년 여름 이후로 가장 좋았다는 1663년 시즌 때보다도 더 좋아 보인다.
#][17]
- 스포팅 라이프 신문[18], 사이 영의 45세 되던 시즌에 그의 장수에 대해 경의를 표한 농담.[19]
- 스포팅 라이프 신문[18], 사이 영의 45세 되던 시즌에 그의 장수에 대해 경의를 표한 농담.[19]
사이 영의 기록들이 당시 투수 기용 성향상 무식하게 오래 뛰어서 세운 기록들이라고 폄하하거나 좋은 투수임은 맞으나 큰 임팩트[20][21][22]는 없었던 투수라는 의견도 있다. 그 근거로 명예의 전당에 첫 해에 헌액되지 못하고 2회째 투표에서 76.1%의 득표율로 헌액된 점을 든다. 하지만 첫 해 투표에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커리어의 절반 가량을 19세기에 뛰었기 때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명예의 전당 설립 당시 투표를 하는 기자들은 과거의 선수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과거의 선수들을 명예의 전당에 보내기 위해 베테랑 위원회(Veteran Committee)를 만들었다.[23] 사이 영도 명예의 전당 취지상으로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되는게 합리적인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베테랑 위원회로 가지 않고 당당하게 '투표'로 헌액되었다.[24] 실제로 19세기에 데뷔한 투수 중에 사이 영을 제외하고는 투표로 헌액된 투수가 없는 걸 보면 2회차 헌액이라도 오히려 사이 영의 위엄이라고 볼 수 있다.[25][26] 또한 사이 영 당시에 선발 투수의 로테이션이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래서 투수들의 선수 생명이 지금보다 많이 짧았다. 그렇게 꾸준히 많이 던지고도 22년이나 투수 생활을 유지한 선수는 사이 영밖에 없으며 사이 영과 같은 해 데뷔한 레전드 투수인 키드 니콜스의 선수 생활이 15년(통산 361승)에 그쳤던 것만 봐도 사이 영이 독보적이다. 사이 영은 22년의 선수 생활 동안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던지고도 별다른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며 은퇴도 번트 수비가 안 돼서 은퇴했다. 모두 꾸준한 자기관리 덕분이었으며 이 역시 사이 영의 위엄이다.
사이 영의 성적은 오래 뛰기만 하면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절대로 아니며 리그의 정상급 성적을 20년간 계속해야 달성할 수 있는 극강의 임팩트와 꾸준함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 기록이다. 실제 사이 영은 선수시절 내내 리그의 정상급 선수였다.
- 22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통틀어 17번 리그 다승 10위 안에 들었으며 16번 평균자책점 10위 안에 들었다.[27]
- 최다 이닝은 19번 10위 안에 들었다.
- 평균자책점, 다승, 이닝 등 주요 투수 기록에서 리그 10위권에 든 횟수가 월터 존슨보다 더 많다. 그래서 리그 10위권에 얼마나 자주 랭크되었는지를 점수로 매기는 Gray Ink는 사이 영이 1위이고 월터 존슨은 2위이다.[28][29] 참고로 사이 영은 22시즌, 월터 존슨은 21시즌을 뛰었다.
- 비율 스탯도 매우 뛰어난데 7356이닝이나 던졌음에도 조정 평균자책점은 138이며(역대 19위), WHIP은 1.130이다. 일반적으로 비율 스탯은 오래 뛸수록 일반적으로 나빠진다.
- 통산 볼넷이 1217개에 불과하며 9이닝당 볼넷 비율은 1.489로 역대 23위이다.[30]
- bWAR 170.0(투수 통산 1위), fWAR 131.5(투수 통산 2위)로 세이버스탯 또한 넘사벽의 수치를 보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이 영을 월터 존슨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월터 존슨을 제외한 모든 역대 투수들이 다 그저 그런 투수가 될 것이다. 실제로 각종 설문이나 전문가 의견, 세이버메트릭스 분석에서 사이 영은 월터 존슨과 역대 1-2위를 다투는 위대한 투수이다.[31] 아무튼 90년대까지는 사이 영을 평가절하하는 의견이 꽤 존재했지만 21세기들어 세이버메트릭스가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알아둬야 할 점으로, 사이 영의 남아있는 각종 일화를 모아본다면, 사이 영은 그렉 매덕스처럼 두뇌파 투수였으며, 투구한개 한개를 아껴 던지는 스타일이었기에 이리 장수하면서 던질 수 있었다고 보인다. 사이 영은 자신이 활동했던 1900년대에 이미 "요새 투수들은 너무 공을 함부로 던져"라고 말했다. 이미 투구 개수의 중요성을 100년도 더 전에 인식하고 있었다.
"전 다른 투수들처럼 경기 전 워밍업 하는데 10~15분을 소비하지 않았어요. 3~4분 정도 몸을 풀고 5분되면 마운드로 갔죠. 그리고 절대로 불펜으로 간적이 없어요. 오, 물론 구원 등판한 적은 엄청 많지만 그냥 벤치에서 바로 마운드로 직행, 거기서 포수랑 몇 번 캐치볼하는 걸로 준비 끝이었죠. 그 정도면 컨트롤이 됐어요. 공을 던질 땐 꼭 최대한 적은 투구 수로 맞춰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제가 이틀에 한 번[32] 등판할 수 있는 비결이었어요."
#
#'''
은퇴 후 그의 인터뷰中
은퇴 후 그의 인터뷰中
6.3.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역대 최고의 생존왕
사실 그의 기록은 당대 그와 자웅을 겨루던 라이벌들처럼 300승 문턱에서 멈출 수 있었다.1901년, 그가 새로 출범한 아메리칸 리그에 이적하기 전에 11년 동안 286승[33]을 거둔 그의 나이는 34세로, 명백히 하락세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실제로 그는 전 시즌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는데, 처음으로 20승을 거두는데에 실패했고 이닝 수도 커리어 최저였다. 타자들은 그때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하기 쉽다"라고 도발했고, 언론들은 수시로 그의 이름에 Old를 붙이는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스턴 레드삭스[34]는 당대 최고 수준인 $3,500의 연봉으로 우대한다. 아무리 하락세인 사이 영이라도 신생의 아메리칸 리그에서 평타 이상은 해주겠지라는 기대감에 비롯된 계약이었다. 그러나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절대로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칼을 갈고 준비하며 개막된 아메리칸 리그 원년, 그는 다승왕, 삼진왕, 최저 자책점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한다. 개막전 오프시즌에 노화로 위력이 줄어든 속구를 보조하기 위해 커브볼 두 개를 추가로 장착했는데, 각이 큰 오버핸드 커브볼과 사이드암 커브볼이었다. 그것도 투구마다 다른 팔각도로 바꿔가며(!) 던졌고, 가끔씩 언더핸드로도 던지며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 예나 지금이나 투구폼을 바꾸면서 던지는 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무리수인데, 그는 이렇게 10시즌을 더 던졌다. 30대를 기점으로 체중이 늘고 갈수록 속구의 위력은 떨어졌으나 그때마다 제구를 더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그 결과, 그는 그를 말년의 스타로 영입한 레드삭스 구단의 예상을 뒤집으며 은퇴는커녕 당당한 현역으로 11시즌을 더 뛰며 225승을 더 추가했다. 그 11년 동안 리그에서 가장 적은 수의 사구를 기록하는 등, 40대에 리그를 지배하는 사상 첫 선수였다.
스포츠 기자 프랜시스 리히터는 1910년, 사이 영이 43세가 된 해에 이렇게 썼다. "저에게 야구라는 게임이 경험한 역대 최고의 투수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사이 영이라고 답하겠어요.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아요."
7. 조언
* "커브는 제구가 잡힌 후에 익히는 거에요. 다른 걸 배우기 전에 먼저 변화구에 집중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는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이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컨트롤을 먼저 잘 잡은 젊은 투수는 속구와 커브를 동시에 마스터하려고 발버둥치는 투수보다 훨씬 더 먼저 성공적인 변화구 투수가 될 수 있어요. 커브는 단지 제구를 보조하는 악세서리에 불과해요."
#
#
* "참을성이 매우 중요하죠. 서둘러서 하려고 하면 안돼요. 제 경우를 보면, 지난 몇년간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
* "전 좋은 팔다리를 갖고 있죠. 스프링 캠프에 가면 3주동안 공은 건드리지도 않았고, 많이 걷고 많이 달리는 것만 반복했어요. 쓸데 없이 공을 던지는 건 절대로 안했어요. 이미 팔을 너무 많이 쓴 감이 들어서요. 추가로 써봤자 좋을리 없었죠."
#[35]
7.1. 투수의 성공법칙 (1908년)
출처: Baseball Almanac[36]- 1. 투수는 시인과 같아서 태어난 것이지 만들어지는게 아니다.[37]
- 2. 올바른 습관을 들여라. 술은 하지 말고, 담배는 자제하고, 토바코, 커피, 차 등의 기호품은 적당히 즐겨라. 선수는 각성제의 도움 없이 잘 해야 한다: 물,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면 그 누구한테나 충분하다.[38]
- 3. 이슬 맺히는 새벽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노력할 각오가 없는 사내는 투수가 될 생각도 해선 안된다.
- 4. 침착함과 냉정함을 익혀라. 이것들은 기를 수 있는 능력들이다.
- 5. 슬럼프가 올 때는 받아들이고 이겨내라, 그리고 계속 정진하라.
- 6. 언제든지 원하는 곳에 공을 꽂을 정도의 실력이 되지 않으면 아직 일류 투수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구부터 제일 먼저 신경을 써라.
8. 어록
- (41세의 나이에 보스턴을 떠나며) 제 심장은 언제나 보스턴 팬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제가 보스턴에 없어도 저를 응원해주시길 바랍니다. #
- "친구 중 한명이 나를 싸이클론이라고 불렀고, 내가 그걸 싸이라고 줄였지. 그때부터 그게 내 이름이 되었고." # #
- "노히터를 하려면 좋은 실력과 좋은 운이 필요하지." # #
- "투수들이 너무 많아. 지나치게 많아. 한팀 당 10명이나 12명이나 있다니, 다들 할일이 너무 없잖아. 4명의 선발과 한명의 구원투수면 충분하지. 3일에 한번씩 선발을 돌리면 제구도 잘 잡히고 팔의 컨디션도 좋게 유지될거야. # #
- 우리 집안에서 던지기를 못하는 사람은 없어. 내가 어렸을 때 돌맹이로 다람쥐를 잡았고, 내 할아버지는 날아다니는 칠면조 독수리를 돌맹이로 한방에 죽였지. # #
- 타이 콥에 대해서: "그의 문제는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 들인 다는 거야. 지나치게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 #
- (부상없이 엄청나게 긴 선수생활의) "비결은 없어요. 그냥 야외활동을 하고, 절제있게 생활하고, 그리고 튼튼하게 타고 난 팔을 가진 덕분이죠. 딱히 제가 다른 투수들보다 몸관리를 열심히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제 선수로서의 장수는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지 특별한 관리의 산물은 아니에요." # (참고로 오프시즌에 쉬지 않고 농장 일이랑 나무꾼 일을 겸업 했다.)
-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난 몇주간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어요... 마치 심장이 쪼개진 듯한 느낌이에요. 어머니를 위해서 야구를 한다는 건 스스로 알고 있었죠. 그런데 얼마만큼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
- 1940년 인터뷰: "(경기 외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경기장 시설이랑 장비는 열악했고, 식사도 좋지 않았고,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기차는 석탄가루 범벅이었고, 호텔엔 샤워실도 없었고, 방은 시끄러웠지. 잠을 못 잘 정도로 벌레가 많은 방도 종종 있었어. #[39]
9. 사이 영에 대한 말말말
"
월터 존슨은 빨랐지만
에이머스 루지[44]5번의 탈삼진왕과 5번의 볼넷왕을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구위와 불안정한 제구력을 동시에 지닌 투수였다.]만큼은 아니었어. 그리고 루지는 존슨만큼 빠르지 않았지.[45] 그런데 영은 그 둘보다도 빨랐어."[46]
- 호너스 와그너
- 호너스 와그너
10. 수상 및 기록
- 월드 시리즈 우승 (1903)
- 5회 다승왕 (1892, 1895, 1901~1903)
- 2회 평균자책점왕 (1892, 1901)
- 2회 탈삼진왕 (1896, 1901)
- 퍼펙트 게임 (1904.05.05)
- 3회 노히트 노런
11. 이모저모
- 아내 로바와 금슬이 좋았으나 자손을 남기지는 못했다. 1907년, 그가 40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늦둥이 딸을 보았으나 몇시간도 되지 않아 사망했고, 이 참혹한 비극은 영 부부에게 죽을 때까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고 한다. #
- 야구를 시작한지 10년이 되는 1900년까지 2연속 미완투 경기가 없었다.
- 그의 마지막 경기가 최악이었다. 브루클린 다저스를 상대로 6이닝까지 3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또한, 3실점 모두 비자책점이었고, 3피안타와 볼넷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3:3 동점 상황인 7회 1아웃부터 자그마치 8연속 안타[47]콤보를 맞고 강판당했다. 참고
-
1939년 6월 12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개장식에 초청되어, 자신보다 1년 앞서 헌액된 베이브 루스 등과 함께 연설을 했다. 1:05부터 재생.
- 사이 영의 실착 유니폼 중 한 벌 대한민국에 있다. 물건 수집광으로 유명한 이랜드그룹의 박성수 회장이 낙찰 받은 것. 메이저리그 역사상 정상급의 대선수지만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뛰던 시절에는 아직 유니폼에 등번호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48][49]
- 1908년 8월 13일. 메이저 리그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이 영의 날'을 제정했는데, 그날 아메리칸 리그 경기는 모두 취소되고 당시 영의 소속팀인 보스턴 레드삭스와 나머지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가 대결했다.[50] 이는 사이 영이 500승을 달성하기 2년전의 일이었다. 20,000명의 좌석이 모두 매진되고 무려 10,000명이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고 한다. 그날 입장권 수익료는 모두 영에게 돌아갔는데,[51] 그의 연봉보다도 많은 액수였다고 하고, 2이닝 교대마다 박수세례속에 트로피, 선물, 꽃다발 등이 영에게 수여되었다. 당시 41세였던 사이 영은 복받이는 감정에 계속 목이 매여 제대로 연설을 못했다고 한다.
- 그가 71세가 되던 1938년, 뉴욕 자이언츠의 스프링 캠프에 갔었는데, 그때 야구에 문외한인 젊은 기자가 그에게 실로 주변사람들을 창백하게 만드는 질문을 했다: "영씨, 혹시 메이저 리그에서 뛰어 본 적 있나요?" 그것에 영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기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젊은이. 난 자네가 죽을 때까지 보게 될 승리 장면보다도 더 많은 승수를 쌓았어." 출처[52]
-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첫 승리투수이다.
- 사이 영은 투수 중 통산 안타 1위 기록(623안타)[53] 또한 가지고 있다. 사실 영의 타격실력은 투수임을 감안하면 무난한 수준이었는데, 워낙 오래 뛰었기에 가지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54]
[1]
이닝과 성격이 매우 유사한 기록이지만, 어쨌든 MLB 공식홈페이지에서는 이를 분명한 하나의 기록으로 취급하고 있다.
[2]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전신이 아닌, 지금은 아예 사라진 야구팀.
[3]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신이며,
보스턴 레드삭스와는 관계없다.
[4]
대표적으로
홈런 베이커,
캣피시 헌터,
베이브 루스,
치퍼 존스나
버스터 포지도 본명이 아닌 별명을 공식 이름으로 쓰는 사례다. 범위를 넓히면
마이클→마이크,
조너선→존,
도널드→돈 등 애칭으로 등록명을 정하는 사례도 매우 많다. 다소 마이너한 사례지만
행크 콩거 역시 등록명으로 본명은 '현 최 콩거'.
[5]
그 당시에는 스피드 건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은 전해지지 않는다.
[6]
사이 영의 선배로, 메이저리그 최초의 레전드 칭호를 받은 투수. 작은 키에 엄청난 구속으로 작은 증기기관이라 불리웠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300승 투수이다. 대신 선수생활 중 염소불알 추출물 주사를 맞은 걸 은퇴 후에 신문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는데, 당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도 메이저리그에는 다양한 약물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상황이라, 관심받은 적 없던 뉴스였으나 무려 100년이 지나 메이저리그 금지약물 대량적발 사태 때 갑자기 19세기 선수들의 과거 약물까지 다 털리는 바람에 죽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부당하게 욕을 먹게 되었다.
[7]
그 경기는 라이벌이던
루브 워델과의 라이벌전이었고 사이 영은 퍼펙트를 한 것보다 워델에게 이긴 것에 더 통쾌해했다. 그전 맞대결에선 웨델에게 1피안타 완봉승을 당하고 도발을 당했던 터라 부아가 치밀어있던 상태였다. 덤으로 거의 99.9%의 경기에서 투수가 9번타자로 나오는 특성상 퍼펙트게임이 이뤄지는 경기의 마지막 타석은 상대 투수 타석일 수 밖에 없는데, 마침 웨델이 완투를 한지라 마지막 타석에 올라선 선수는 웨델이었고 그가 플라이아웃되자 영은 기쁨에 겨워 웨델에게 도발을 시전했다고.
[8]
워낙 많은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패가 많은 것일 뿐 승률은 61.8%로 좋은 편이다. 또한, 통산 최다패는 충분히 명예로운 기록이다. 80% 이상의 비현실적인 승률이 나오는 게 아닌 이상 많은 경기를 치르면 필연적으로 통산 승수와 패수는 같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즉, 통산 패배수가 많다는 건 정말 꾸준하게 경기에 나섰으며 그만큼 오랜 기간동안 수준급 능력을 보여줬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210승으로 KBO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 역시 통산 153패로 최다패 투수다.
[9]
이후
놀란 라이언이 최다 노히트(7회) 타이틀을 가져갔다.
[10]
이 기록 2위는
월터 존슨의 417승.
[11]
이 기록 2위는 퍼드 갤빈의 308패.
[12]
전술했듯 이 기록 2위는 퍼드 갤빈의 6003이닝.
[13]
경기당 이닝수가 8이닝이 넘으며 완투율은 8할이 넘는다. 이 기록 2위는 퍼드 갤빈의 639 완투, 3위는 팀 키프의 554 완투. 참고로 현대야구 최고의 금강불괴 이닝이터였던
그렉 매덕스의 통산 출장 경기수가 744경기다.
[14]
511승은 0점대를 쉽게 찍고 만장일치 MVP를 매년 받는 선발투수가 나타나서 20여년 동안 부상 없이 롱런하든지 해야, 316패는 평범 이하의 투수가 약팀에서만 부상 없이 롱런하던지 하면 가능할 수 있으나, 이닝과 완투는 커리어 내내 전 경기 완투를 해도 750경기 이상 등판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경신이 불가능하다.
[15]
모두 300승 투수다.
[16]
축구의 경우
카푸가 있다.
[17]
During spring training, Sporting Life had a little fun with Young’s longevity: “The old boy is said to look better than any previous season since 1663, considered by many to be his best years since the Summer of 1169.”
[18]
1924년에 폐간된 신문으로 현재 동명의 비지니스들과 관계없다.
[19]
그러나 그는 결국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1912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
[20]
월터 존슨과
피트 알렉산더와 비교해보자면 월터 존슨의 블랙잉크는 무려 150으로 압도적 1위, 피트 알렉산더는 월터 경보다는 조금 적지만 그래도 엄청난 수치인 130으로 역대 2위를 기록했다. 반면 사이 영은 앞의 둘에 비해서는 상당히 뒤쳐진 102로
레프티 그로브의 111보다 뒤쳐진 역대 5위를 기록 중이다. 그래도 워낙 꾸준했던 탓인지 사이 영이 그레이잉크 만큼은 468로 2위인 월터 경의 420를 압도적으로 제치는 1위를 기록하기는 했다. 참고로 피트 알렉산더의 그레이잉크 수치는 둘보다 훨씬 뒤쳐진 342. 물론 이 기록도 역대 5위의 기록이다.(3위는
워렌 스판(374), 4위는
크리스티 매튜슨(350))
[21]
일단 사이 영이 활동하던 시대, 특히 19세기 말 시절에는 1년에 500이닝 이상을 던지는 에이스 투수 있는 팀이 많았고 600이닝을 초과하는 괴물 성적을 거둔 선수들도 있었는데, 사이 영은 600이닝은 커녕 500이닝도 던진 적이 없다. 주로 1시즌에 300이닝대를 유지했고, 453이닝이 최고 이닝 기록이며 400이닝 시즌이 총 5번밖에 안 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관리 잘 받은 에이스 투수 대우다. 그래서 누적 대비 임팩트가 약했던 건 사실이다. 못 믿겠다면
찰리 레드번,
퍼드 갤빈,
윌 화이트,
조지 브래들리,
팀 키프 같은 전설들의 기록을 찾아보자. 1시즌 기록으로는 사이 영과 차원이 다르다.[55] 물론 사이영의 누적 기록은 저런 동시대 다른 임팩트 있던 선후배 투수들의 커리어를 한참 넘는다. 그들은 사이 영만큼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팩트로 넘을 수 없는 절대 누적 기록이다. 참고로 월터 존슨은
사이 영과 동시대 선수로 인정되는 선수가 아니고, 17년이나 데뷔 차이가 나는 한참 후배다.
[22]
이 레전드 투수들의 1시즌 기록은 대충 70경기, 650이닝, 45승, 25패, 경기당 8~9이닝 수준이다. 심지어 팀 키프의 1883년 기록을 보면 경기당 9이닝이 넘는다. 즉 거의다 완투를 했고 연장전 완투도 했다는 것.
[23]
당시에는 Old-Timer Committee
[24]
사이 영의 동료였거나 동료급 나이대 선수들이었던
빌리 해밀턴, 제스 버켓(버켓은 진짜 사이 영의 팀 동료 친구였다.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의 전성기 주역.), 에드 델라한티 같은 전설의
4할 타자나 에디 플랭크,
키드 니콜스,
모데카이 브라운 등이 베테랑 위원회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고, 또 사이 영 보다 훨씬 늦게 데뷔한
리치 애시번,
에노스 슬로터,
짐 버닝 등이 베테랑 위원회로 헌액된 것을 보면 알 수있다. 심지어 동시대 레전드 후배 중 그나마 후세에 알려져서 투표로 들어간
윌리 킬러조차 4수로 겨우 턱걸이해서 들어갔다. 최초의 5인에 속하는 투수 월터 존슨의 17년 선배이자, 크리스티 매튜슨의 10년 선배인 사이 영이 재수 입성이라면 엄청난 거다.
[25]
최초의 5인인
호너스 와그너도 19세기에 데뷔했지만 19세기에 뛴 햇수는 3년이다. 사이 영은 10년을 19세기에 뛰었다. 타자인 와그너를 제외한 19세기 출신 투표 입성 야수는 재수로 입성한
냅 라조이와 4수로 입성한
윌리 킬러가 있다.
[26]
지금까지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헌액된 선발투수는 15명뿐이다. 이것도 2014, 2015년에 5명의 선발 투수가 무더기로 들어가서 그렇지 그전까지는 10명이었다.
피트 알렉산더나
레프티 그로브도 삼수, 사수 끝에 입성했다. 또한 첫 번째 명예의 전당 투표는 뽑아야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쟁률이 지나치게 치열했다. 다만 타이 콥은 명예의 전당 생긴다고 할 때부터 야구계에서 1등이 문제가 아니라 100퍼센트 받아서 논란될까 걱정된다고 했던 인물이다. 실제로 단 4명을 제외한 전원이 투표했다.
[27]
이 중 12번은 5위 안에 들었다.
[28]
타자 Gray Ink 1위는
타이 콥이다. Black Ink 1위는
베이브 루스이다.
[29]
Gray Ink를 제외한 나머지 HOF Stat은 거의 다 월터 존슨이 1위. 예외적으로 HOF 스탠다드의 경우
크리스티 매튜슨이 1위다.
[30]
볼넷이 현재처럼 확립된 1889년 이후 200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 중 3위이며 3000이닝 이상 투수 중에는 1위이다. 물론 당시에는 9이닝당 볼넷 비율 같은 통계는 집계하지 않았지만 그 만큼 사이 영의 제구력이 좋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치.
[31]
실제로
로저 클레멘스를 제외하면 사이 영은 fWAR과 bWAR 분야에서 모두 1위이다.
[32]
상술된 대로 그 시절엔 이 정도면 에이스 중에서 많지 않은 편이었다. 화이트처럼 1시즌 동안 일주일에 5일씩 계속 등판한 투수도 있었다. 심지어 절반 이상을 선발로 보냈다
[33]
물론 이 성적으로도 그의 스타성과 당시까지만 기록해둔 성적만을 고려해도 충분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겠지만 거의 베테랑 위원회로 헌액됐을 확률이 높고, 또 사이 영 상이라는 상 자체의 이름도 그의 이름이 붙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역대 위대한 선수 10걸 안에는 커녕 30위권에도 힘들 가능성이 높다.
[34]
당시 이름은 보스턴 아메리칸즈
[35]
관절이 소모품이라는 논쟁이 100년이 넘게 이어지는 걸 감안했을 때 시대를 초월하는 경이로운 안목이다. 타고난 신체에 관리법까지 예사롭지 않다.
[36]
http://www.baseball-almanac.com/legendary/licyyr.shtml
[37]
조 디마지오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All pitchers are born pitchers" (모든 투수들은 태생 자체가 투수다).
출처
[38]
이 시기는 약물이 크게 잘못이라고 인식되지도 않던 시대였다. 당장 사이 영이 은퇴하고도 수십 년 뒤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조차도
독일군도, 일본군도, 심지어 미군조차도 각성제를 상시 복용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39]
사이 영 현역시절 당시는 증기기관차 시대였고, 여객비행기 따윈 없었다.
[40]
그가 롱런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부드러운 투구폼에도 있을 걸로 추정된다.
[41]
지금은 메이저 리그 최악의 인종주의자로 악명높은, 당대 최고의 스타. 앞선 항목에서 서술됐듯이 어린 사이 영을 보고 군침을 흘리며 그의 소속팀에 팔라고 $1,000을 제시. 소속팀은 "됐거든?"하며 단칼에 거절했다.
[42]
캡 앤슨 이후 최고의 스타였던 타이 콥이 월터 존슨을 보고 한 이야기랑 비슷한 일화다.
[43]
출처
[44]
1890년대에 활약한 투수로, 커리어 전성기 6년에서
[45]
뭔가
말이 이상한데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둘이 대등했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46]
출처
[47]
순서대로 나열하면 3루타-4연속 단타-3연속 2루타
[48]
만약 결번이 된다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결번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49]
참고로, 이렇게 등번호가 없던 시절에 뛰었던 레전드들 중 일부는 그 선수가 뛰었던 홈구장에 그의 이름이 새겨지거나, 코치 시절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코치 시절 등번호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호너스 와그너가 있다.
[50]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첫 올스타전이 개막되기 무려 25년전의 일이다
[51]
출처
[52]
죽을 때까지 볼 것보다도 많이 쌓았다는 말은 기자가 하라는 취재는 안 하고 책상에 앉아서 중계만 듣고 기사 쓴다는 디스의 의미도 있어보인다. 이 말이 나온 1938년에는 1년에 팀당 154경기를 했다.
[53]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베이브 루스와
투타겸업 선수인
오타니 쇼헤이 제외
[54]
참고로 투수들 중 2루타 1위는
스모키 조 우드, 3루타 1위는
월터 존슨, 홈런 1위는
웨스 페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