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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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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칼레)와 유프라테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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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와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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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에서 내려다 본 시내와 비레직 대교 (1951년 건설)

1. 개요2. 역사
2.1. 십자군 전쟁2.2. 대몽 항쟁
2.2.1. 알 비라 전투 (1272년)
2.3. 오스만 제국의 조선소
3. 갤러리

1. 개요

튀르키예어 Birecik
쿠르드어 Bêrecûk
아랍어 البيرة
오스만어 بيره جك
시리아어 ܣܪܘܓ

튀르키예 동남부의 도시. 비레지크, 빌레직, 베레직, 비레칙 등으로도 표기된다. 가지안테프에서 동쪽으로 35km, 샨르우르파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 동안에 위치한다. 샨르우르파 도의 군 소재지로 인구 5만의 소도시이다. 국경 도시는 아니지만 남쪽 15km 지점에 터키-시리아 국경 관문인 카르카므쉬가 있다. 유프라테스 강의 도하처 중 하나로, 하얀 석회암 절벽 위에 세워진 성채가 장관을 이룬다. 시내에는 우르파 성문, 대사원, 부르츠 모스크 등 맘루크 왕조 시절 건축물이 남아있다. 주민 구성은 쿠르드계 60%, 튀르크계 40% 정도이다.

고대에는 비르타 혹은 마케도노폴리스라 불렸고, 중세에는 아랍식 지명인 알 비라로 불렸다. 역사적으로 자지라 지방에서 시리아 (특히 알레포)로 향하기 위한 관문이자 하항 (河港)으로써 중시되었다. 특히 십자군 전쟁과 맘루크- 일 칸국 전쟁 당시 치열한 전장이었다. 14세기 말 티무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복구되었고, 오스만 제국기에는 세관과 조선소가 있었다. 본래 도시에는 아랍 / 아르메니아계 주민 역시 많았으나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사라져 튀르크 / 쿠르드계 만이 남았다. 2000년에는 서쪽 5km 지점에 비레직 댐이 세워져 제우그마를 비롯한 여러 유적들이 수몰되었다.

2. 역사

비레직 댐 공사 도중 기원전 3000년 무렵 초기 청동기 시대 무덤 유적이 발견되었다. 도시 자체는 기원전후 무렵부터 있었고, 현지에서는 비르타라 불렸으나 공식 문서에서는 그리스어 지명인 마케도노폴리스로 표기되었다. 4세기 무렵 에데사 산하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현지 주교 마레아스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 무렵 사산 제국의 위협이 가중되며 석회암 절벽 위에 성채가 세워졌고, 363년에는 율리아누스의 메소포타미아 원정군이 지나갔다. 6세기 초엽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현지 주교 세르기오스에게 도시를 요새화하게 하였고,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에 마무리되었다. 7세기 이슬람 제국군이 점령한 후에는 기존 시리아어 지명의 아랍식 발음인 알 비라로 불리게 되었다.

2.1. 십자군 전쟁

1100년 1차 십자군이 당도하자 비라 영주 아부 이가립은 에데사 백국에 복속하였다. 하지만 1117년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는 아부 이가립을 폐하고 측근 발레랑 드 르 퓌세를 대신 봉하였다. 발레랑은 아부 이가립의 딸과 결혼하였고 (무슬림과 기독교도 간의 결혼은 1120년에야 금지되었다), 십자군 시기 일대는 빌레 (Bile)라 불렸다. 에데사를 점령한 이마드 앗 딘 장기는 1145년 1월, 수루츠 역시 점령한 후 비레직을 포위했으나 모술의 반란과 십자군 원군의 당도로 철수하였다. 에데사 백국이 사실상 멸망한 상태인 1150년 동로마 제국 킬리키아 총독 토마스는 사모사타, 아인탑, 비라 등 그 잔여 영토를 매입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무슬림 연합군이 침공하여 해당 영토는 모두 점령되었고, 비라는 마르딘에 기반한 아르투크 왕조의 티무르타쉬에게 넘어갔다. 1182년 가을 살라흐 앗 딘은 비라를 지나 에데사, 누사이빈 등을 점령하고 모술로 진격하였다.

2.2. 대몽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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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술탄 카이트베이가 세운 우르파 성문. 전형적인 중세 시리아 양식의 축성법이 적용되었다

아이유브 왕조 시기 알 비라는 변경 요새였고, 1251년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는 옛 바니아스 영주 사이드 하산을 그곳으로 유배보내었다. 1259년 12월, 시리아 원정에 나선 몽골 제국 훌라구 칸은 디야르바크르에 이어 비라를 포위하였다. 수비대는 결사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3주 후 항복하였고, 사이드 하산은 석방되어 옛 영지 복구 약속과 함께 몽골측 향도가 되었다. 비라 함락 후 몽골군은 시리아 전역을 점령했으나 훌라구가 떠난 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하며 물러났고, 포로가 된 사이드 하산은 기독교 개종 혐의로 처형되었다. 승전 후 술탄 쿠투즈는 옛 신자르 영주 사이드 알라 앗 딘 유수프 (알 무자파르)를 알레포 총독에 봉하였고, 후자는 몽골군으로부터 알 비라를 수복하였다.

다만 알라 앗 딘은 같은해 몽골군이 비라와 만비즈를 습격할 때에 원군을 조금만 보냈다가 격파당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다 군부에 의해 폐위된다. 그후 시리아에 재차 침공한 몽골군은 1차 홈스 전투 후 알레포에 주둔하다 철수하였고, 무주공산으로 남은 알레포는 1261년 맘루크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에게 넘어간다. 그해 11월 술탄 바이바르스의 군대가 알레포를 회복하자 알 바를리는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비라와 하란을 장악하였다. 1262년 알 바를리는 모술 총독 앗 살리흐의 반란을 돕다가 몽골군에게 대패하였고, 하란을 상실한 채로 소수의 패잔병과 비라로 향하였다. 훌라구 칸은 서신을 보내어 복속한다면 비라를 이크타 (영지)로 하사하겠다 제안했으나, 알 바를리는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로 향하여 바이바르스에 복속하였다.

이로써 비라는 맘루크 왕조의 영토가 되었고, 요새화되었다.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기동력에 대비하기 위해 일종의 역참 + 봉수제인 바리드를 설치했는데, 그 명칭은 양대 국경 요새인 비라와 라흐바의 합성어라 전해진다. 1265년 1월, 몽골군은 비라를 포위하였다. 몽골군이 배치한 17개의 투석기 중 15개는 시타델을 노렸다. 바리드를 통해 소식을 접한 바이바르스는 4천의 원군을 우선 파견한 후 친정에 나섰고, 이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팔레스타인에 다다른 바이바르스는 출정한 김에 십자군 세력을 공격하여 카이사레아, 하이파, 아르수프를 점령하였다.

2.2.1. 알 비라 전투 (1272년)

7차 십자군 이후 양국 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1272년 11월, 두르바이가 이끄는 일 칸국- 룸 셀주크군이 비라를 포위하였다. 투석기의 맹렬한 포격에 수비대의 사기는 꺾였다. 소식을 접한 바이바르스는 곧장 출병하며 비라의 수비대에게 꼭 도와주러 갈 것이니 우선 버티고 일주일 내로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해도 좋다고 명하였다. 7명의 아미르와 날쌘 기병만을 대동한 바이바르스는 우선 타이바르스의 선발대를 보낸 후 무려 4일만에 유프라테스 서안에 당도하였고, 함락 직전이던 비라의 수비대는 힘을 내어 결사 항전하였다. 얼마 후 하마의 2백 병력이, 12일 후에는 이집트에서 온 본대가 합류하였다. 두르바이는 부관 친카르 휘하 5천 병력에게 강변을 지키도록 했는데, 후자는 적군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로 깊은 물 앞에 주둔하였다.

맘루크측 야전 사령관 칼라운은 먼저 궁수들로 적을 교란시킨 후 기병대를 도하시켜 공격하였는데, 깊은 물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히 나아갔다. 맘루크 군의 기세에 선봉장 친카르가 전사하자 두르바이는 공성병기와 보급품도 두고 도주하였다. 이로써 비라는 구원되었고, 2백의 포로가 잡혔다. 맘루크 장군 바이사리는 패주하는 적군을 사루즈 (수루츠)까지 추격하였다. 4일 후 비라에 입성한 바이바르스는 성주 이하 수비대를 치하한 후 다마스쿠스로 개선하였다. 한편 아바카 칸은 2배의 우세에도 패하였고 전사한 친카르와 달리 상처도 없이 돌아온 두르바이를 꾸짖고 유배보내었다. 1275년 말엽 아바타이 휘하 3만의 일 칸국-룸 셀주크 군이 재차 비라를 포위했으나 추위와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다가 바이바르스의 북상 소식에 철수하였다.

1280년 몽골군은 알레포를 기습 점령했으나 비라는 건재했고, 이후 몽골군이 철수하자 술탄 칼라운은 비라에 파견한 정찰대를 통해 소식을 전해듣는다. 이듬해 가을에 벌어진 2차 홈스 전투에서 일 칸국군은 재차 대패하였고, 철수 도중 비라에서 강을 건너다 수비대와 현지인의 습격을 받아 큰 사상자를 내었다. 맘루크 역사가 바이바르스 알 만수리는 몽골군이 전투 자체보다 퇴각 도중 더 많이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14세기 맘루크 조와 일 칸국이 휴전을 맺자 비라에는 2세기 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비록 14세기 말엽 티무르의 시리아 원정 당시 파괴되었지만, 15세기 맘루크 술탄 카이트베이에 의해 성벽과 모스크 등이 복구되었다. 1516년 도시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어 터키식 지명인 비레직으로 개칭되었고, 하항으로써 부두와 세관이 설치되었다.

2.3. 오스만 제국의 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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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에 묘사된 알 비라 성채
1534년 쉴레이만 1세 바그다드를 정복하며 이라크 지역과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자 비레직은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세관에서 걷히는 세수도 1520년의 7만 5천에서 1536년 18만 구루쉬로 2배 이상 늘었다. 한편 걸프에서 포르투갈 제국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1547년 봄 오스만 조정은 비레직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첫 조선소를 세웠다. 비록 바스라, 지즈레, 디야르바크르 등의 후보지가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 건조하여 숲이 없고 나머지 티그리스 강 유역은 물살이 험해 큰 선박의 항해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살이 잔잔하고 습한 지중해 기후의 영향으로 인근 산지에 목재가 풍부한 비레직이 제국의 조선소로 지정된 것이다. 이는 바스라의 아랍 상인 핫지 파야트가 호르무즈의 포르투갈 당국에 보고하며 알려졌다.

비레직의 조선소에는 45명의 기술자가 배치되었고, 그들에게는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 1552년 7월 조정은 비레직 조선소에 선박 3백척의 건조를 의뢰하였고, 1559년 5척의 갤리선이 바스라에 배치되었다. 다만 이어지던 비레직의 전함 건조는 1560년 여름,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현지 목재를 바스라로 옮겨 그곳에서 제작하게 하며 중단되었다. 1604년 바스라를 방문한 포르투갈인 탐험가 페드로 테이헤이라는 그곳에서 생산되는 선박이 작고 비싸다고 지적하였다. 1629년 바그다드 수복에 나선 무라트 4세는 비레직 조선소에서 100척의 새 전함을 건조하게 하였고, 이후로도 비레직은 바스라를 능가하는 메소포타미아 최대의 조선업 거점으로 남았다. 189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비레직에서는 유독 잔인한 학살이 벌어졌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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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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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라테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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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문을 개조한 부르츠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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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지어진 울루 자미 (대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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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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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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