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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8:41:13

브라이언 피츠카운트

성명 브라이언 피츠카운트
Brian FitzCount
생몰년도 1090년 ~ 1147년?
출생지 브르타뉴 공국
사망지 예루살렘?
직위 월링포드와 에버게이브니의 영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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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무정부시대 마틸다의 편에 서서 스티븐 왕에 대적했다.

2. 생애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 사생아로, 어린 시절을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그는 헨리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114년부터 헨리 1세의 헌장에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여기에 헨리 1세의 사생아였던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119년 이전에 잉글랜드 왕실의 지원 덕분에 월링포드의 상속녀인 마틸다와 결혼했고, 아내의 권리로 월링포드의 영주가 되었다. 또한 헨리 1세로부터 웨일스의 에버게이브니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며, 궨트 북부를 통제했다. 그는 월링포드의 영주로서 강력한 요새를 그곳에 건설했다.

1127년 헨리 1세가 앙주 백국과 정치적 동맹을 맺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는 마틸다를 앙주 백국의 후계자인 조프루아 5세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함께 윈체스터 왕실 재무부의 회게를 감사했다. 이는 마틸다의 지참금으로 쓰일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1131년 왕실 무관장에 선임되었고, 글로스터의 마일즈와 함께 왕의 비공식 장관이 되었다. 그가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의 왕실 헌장에 증인으로 자주 등장한 것을 볼 때, 그는 헨리 1세 치세 마지막 10년을 그의 궁정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뒤 스티븐 왕이 헨리 1세가 생전에 정했던 후계자 마틸다를 제치고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을 때, 그는 일단 로버트와 함께 스티븐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웨일스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했을 때, 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진한 클레어 영주 리처드 피츠길버트에게 섣불리 깊숙이 진군하지 말고 신중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리처드 피츠길버트는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격했다가 웨일스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패사했다. 1136년 봄 대부분의 웨일스 및 잉글랜드 서남부 귀족들이 스티븐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1138년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반기를 들었을 때 당장 가담하지 않았지만, 1139년 10월 마틸다가 로버트의 초대를 받아 잉글랜드로 건너간 뒤 월링포드에 이르렀을 때 즉시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글로스터의 로버트, 글로스터의 마일즈와 함꼐 마틸다의 주요 추종자였다. 그러나 스티븐 왕과 추종자들이 월링포드 성을 잇달아 습격해 그 주변 일대를 황폐화하면서, 그가 헨리 1세 치세 동안 획득했던 재산은 모조리 사라졌다. 1139년, 스티븐 왕은 월링포드 성을 아예 함락하기 위해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월링포드 성은 굳건히 버티다가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구원한 덕분에 풀려났다.

브라이언은 전쟁이나 약탈 과정에서 생포한 자들을 가둬놓고 고문을 원을 뽑아내기 위해 성내에 "브라이언의 철창(Brien's Close)'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감옥을 세웠다. 1143년 윌튼 전투에서 생포된 스티븐 왕의 집사 윌리엄 마르텔은 이 감옥에 수감된 유명한 죄수 중 한 명이었다. 당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브라이언의 철창에 갇혀서 고문을 당한 죄수들의 비명이 매일 벌어져서 월링포드 마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한다.

1141년 2월 2일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 왕이 생포된 뒤, 마틸다와 함께 런던으로 가서 대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해 6월 28일 런던 시민들이 반기를 들자 마틸다를 모시고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이후 마틸다, 로버트와 함께 윈체스터 전투를 치렀다가 적군에게 패주한 뒤 데비지스로 피신했다. 그 후 그의 영지는 스티븐 왕의 공세로 고립되었고, 그의 영지는 곡물을 심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황폐해졌다. 이 때문에 월링포드에 있는 수비대를 위한 식량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에버게이브니 영지를 글로스터의 마일즈에게 양도했다. 여기에 마일즈의 막내 아들인 고티에를 입양한 뒤 그로스몬트의 영주권을 부여했다.

에버게이브니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1147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가 1150년 이전에 수도원에 은퇴했고, 그곳에서 얼마 안 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그는 마틸다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