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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2:19:57

글로스터의 마일즈

성명 마일즈 피츠월터
Miles FitzWalter
생몰년도 1100년경 ~ 1143년 12월 2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주 서부 딘 숲
아버지 월터 피츠로저
어머니 베르타
누이 마틸다
아내 시빌 드 뇌프마르셰
자녀 마가렛, 로저, 월터, 헨리, 마헬, 윌리엄, 베르타, 루시
직위 초대 헤러퍼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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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초대 헤러퍼드 백작. 무정부시대 시기에 마틸다의 편에 서서 스티븐 왕과 대적했다.

2. 생애

1100년경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글로스터셔의 세습 보안관이자 글로스터 성주인 월터 피츠로저였으며, 어머니는 베르타라는 이름만 전해진다. 누이 마틸다는 웨일즈와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세워진 브론리스 성을 건축하고 변경 영주로서 활동한 리처드 피츠 폰스의 아내였다. 조부 로저 드 피트르도 글로스터셔의 보안관을 맡았으며, 로저 드 피트르의 동생인 글로스터의 듀런드가 로저의 뒤를 이어 글로스터셔의 보안관을 역임했따가 월터에게 직위를 넘겨줬다.

1121년 초, 마일즈는 사우스 웨일즈의 독립 왕국이었던 브리체이니오그를 정복한 베르나르 드 뇌프마르셰의 딸이자 상속녀인 시빌 뇌프마르세와 결혼했으며, 이를 통해 브렉녹 등 상당한 영지를 확보했다. 그는 글로스터셔의 보안관, 순회 재판관, 산림 판사를 잇따라 역임햇고, 1130년까지 스태포드셔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또한 헤러퍼드셔와 슈롭셔의 보안관인 페인 피츠존과 협력해 "세번 강에서 바다까지" 웨일즈 국경 전체를 통치했다.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하고 스티븐 왕이 등극했다. 그는 1136년 초 레딩에서 페인 피츠존과 함께 특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스티븐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후 왕의 보안관 중 한 명으로서 웨스트민스터의 이스터 의회에 참석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자격으로 옥스퍼드 의회에 참석했다. 이후 클레어 영주 리처드 피츠길버트의 미망인 앨리스가 웨일스인들에게 포위되자,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서 그녀를 구조했다. 한편, 마일즈는 아들이자 상속인인 로저를 페인 피츠존의 딸 세실리와 결혼시켰는데, 세실리는 아버지의 영지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1138년 5월, 마일즈는 글로스터에서 스티븐 왕을 영접했고, 8월 마틸다에 가세한 슈루즈베리를 포위하는 스티븐 왕과 함께 했다. 1139년 2월, 스티븐 왕은 마일즈의 친척이자 헤러퍼드 주교인 길버트 폴리엇에게 글로스터 수도원을 수여했는데, 이는 마일즈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1139년 여름, 그는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함께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초대했다. 그녀가 도착하자 마일즈는 브리스톨에서 그녀를 만나 경의를 표하고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했으며, 마틸다는 즉시 그에게 성 브리아벨스 성과 딘 숲을 수여했다. 이후 그는 마틸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139년 가을에 월링포드 성에서 스티븐 왕의 군대에 포위된 브라이언 피츠 카운트를 지원해 스티븐 왕이 월링포드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유도했으며, 11월에 글로스터에서 진군해 우스터를 철저히 약탈하고 방화했으며, 윈치콤, 세른, 헤러퍼드 성을 공략했다. 스티븐 왕은 자기를 배신한 그에게 분노해 보안관 직책을 박탈했다. 1141년 2월 2일 링컨 전투에 참여해 스티븐 왕을 생포하는 데 일조했고, 마틸다가 런던으로 행진할 때 동행했다. 세인트 앨번스에 이르렀을 때, 마틸다는 그에게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집을 하사했다. 그 해 6월 런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틸다가 도주할 때 함께 따라갔고, 글로스터에 이르렀을 때 마틸다를 설득해 옥스퍼드로 이동하도록 했다. 1141년 7월 25일, 마틸다는 그에게 헤러퍼드의 헤이우드 숲과 트리넬라를 수여했으며, 초대 헤러퍼드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틸다가 잉글랜드에 머무는 기간 내내 자신이 지급한 돈만으로 버텼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후 그녀와 함께 윈체스터로 간 그는 1141년 9월 14일 윈체스터 전투에서 아군이 패배했을 때 글로스터로 피신했다. 1142년 옥스퍼드에서 마틸다로부터 에버게이브니 성을 수여받았다. 그 해 여름에는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아들 마헬을 인질로 보냈다. 1143년 군대에 지불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영지에 막대한 돈을 요구했다. 헤러퍼드 주교 로버트 드 베순이 거부하자, 그는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이에 로버트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헤러퍼드 교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로버트의 친척이자 헤러퍼드 주교이며 글로스터 수도원장인 길버트 폴리엇은 이에 반발해 교황 특사에게 이를 해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렇듯 교회와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던 114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그는 딘 숲에서 사냥하던 중 한 부하가 사슴을 향해 쏜 화살이 자기한테 날아와서 박히는 바람에 사망헀다. 그 후 린터니 세컨다 수도원, 헤러퍼드 수도원, 글로스터 수도원 사이에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벌어졌다가 12월 28일 협상 끝에 린터니 세컨다 수도원에 안장하기로 합의했다. 사후 장남 로저 피츠마일즈가 제2대 헤러퍼드백작으로서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