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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0:40:54

글로스터의 로버트

파일:글로스터의 로버트.jpg
성명 로버트 피츠로이
Robert FitzRoy
생몰년도 1090년경 ~ 1147년 10월 31일
출생지 노르망디 공국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브리스톨 성
아버지 헨리 1세
어머니 옥스퍼드셔 북부의 그레이 가문 출신 여성
아내 메이블 피츠로버트
자녀 윌리엄, 로저, 하몬, 리처드, 마틸다, 메이블, 필립, 리처드( 사생아), 로버트(사생아), 메이블(사생아)
직위 초대 글로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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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초대 글로스터 백작. 헨리 1세 사생아로, 무정부시대 시기에 마틸다의 편에 서서 스티븐 왕과 대적했다.

2. 생애

1090년경 노르망디 공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헨리 1세이며, 어머니는 옥스퍼드셔 북부의 그레이 가문 출신 여성이라고만 전해질 뿐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1] 그는 헨리 1세가 낳은 20명 이상의 사생아 중 장남이었으며, 출생 직후 헨리 1세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헨리 1세는 1087년부터 1096년까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쉼없이 돌아다니며 입지를 갖추고자 사력을 다했기 때문에, 그가 어린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아마도 교회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볼 때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알고 철학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 훗날 잉글랜드에서 과학 예술을 적극 후원했으며, 당대 연대기 작가 몬머스의 제프리와 맘스버리의 윌리엄은 그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집필하기도 했다.

1113년 노르망디에 있는 아버지의 궁정에 합류한 그는 이듬해 웨일스의 글래모건 일대를 정복한 로버트 피츠하몬의 장녀 메이블과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글로스터셔와 웨일스 국경지대의 여러 주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했으며, 카디프 성과 사우스 웨일스의 글래모건 일대의 영주가 되었다. 또한 노르망디의 에브레시와 크릴리도 로버트의 영지가 되었다. 1121년 또는 1122년, 로버트는 초대 글로스터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 후 로버트는 수십년간 웨일즈 국경 귀족들의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잉글랜드 왕국의 사우스 웨일즈 공략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젊을 때부터 자신이 재능있는 군사 지도자이자 권위있는 정치가임을 입증했다. 그는 아버지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왕실 군대의 고문과 대장을 역임했다. 1119년 브레뮐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1123~1124년에는 아마우리 드 몽포르와 갈레랑 드 보몽이 이끄는 노르만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1126년 헨리 1세에게 밀려난 전임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를 카디프로 이송한 뒤 로베르 2세가 1134년 2월 3일에 사망할 때까지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120년 헨리 1세의 유일한 합법적인 아들인 윌리엄 애설링이 해상 사고로 사망한 후, 로버트는 헨리 1세의 딸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던 마틸다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보장하려는 헨리 1세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1127년 1월 1일 앵글로색슨-노르만 귀족들 중 처음으로 마틸다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헨리 1세가 사망하면 마틸다를 여왕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했다. 헨리 1세가 1135년 12월 1일 숨을 거뒀을 때, 그는 왕의 임종을 지켜봤다.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로버트는 노르망디에 남아 왕위 계승자 후보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노르만 귀족들은 윌리엄 1세의 딸인 아델리의 장남인 샹파뉴와 블루아 백작 티보 2세를 추대하려 했다.[2] 그러나 곧 잉글랜드에서 티보 2세의 남동생인 에티엔 드 믈루아가 스티븐 왕으로 선포되어 즉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버트는 일단 스티븐을 왕으로 인정헀고, 1136년 부활절에 잉글랜드에서 열린 왕립 의회에 참석해 스티븐의 선출을 확인했다. 로버트는 왕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스티븐이 귀족들이 작성한 대헌장을 준수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시점에선 마틸다의 여왕 등극이 가능하지 않았다고 여겼고, 1136년 초 마티랃의 노르망디 남부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다.

한편, 웨일스인들은 헨리 1세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 정계가 어수선한 틈을 타 앵글로색슨-노르만 귀족들의 영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펨브로크셔의 큰 영지인 카마던셔를 탈환했고, 뒤이어 브러헤이니옥과 우스크 계곡으로 침투했다. 스티븐 왕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려 했지만,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가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겠다며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기 때문에 웨일스로 갈 수 없었다. 그 대신 로버트에게 지역 귀족들과 함께 웨일스인들을 저지하도록 했다. 로버트는 글래모건에 대한 웨일스인들의 침공을 격퇴했지만, 웨일스 내부로 진군하지는 못했다. 이 무렵 스티븐 왕이 플란데런 용병대장 기욤 드 이프르와 쌍둥이 형제 로버트 드 보몬트, 갈레랑 드 보몬트를 총애하면서 자신의 권력이 축소되자, 그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고 마틸다를 옹립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1138년, 로버트는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고 찬탈자 스티븐을 물리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합류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마틸다 지지 세력의 입지를 급격히 강화했다. 잉글랜드 서부 및 남부 주의 앵글로색슨-노르만 귀족 상당수가 마틸다 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로버트의 첫번째 군사 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노르망디에서는 갈레랑 드 보몬트에게 밀렸고, 런던으로 진군하려 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왕실군의 저지로 실패하고 브리스톨로 후퇴헀다. 1138년 말 글로스터로 후퇴했고, 이듬해 초 우스터를 거점으로 삼았다가 다시 브리스톨을 새 거점으로 삼았다. 1139년 8월 31일 잉글랜드에 상륙한 마틸다를 브리스톨 성으로 모셨고, 그녀의 군대를 이끌어 스티븐에 대적했다.

로버트의 군대는 잉글랜드 서부의 워햄, 우스터 및 보몬트 가문의 영지를 대거 접수했고, 도싯, 윌트셔, 버크셔 및 옥스퍼드셔에 있는 스티븐 왕과 추종자들의 영지를 습격해 주민들을 학살하고 농촌을 파괴헀다. 내전은 곧 다양한 봉건 영주들이 적의 땅에 대한 지속적인 약탈전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국가가 황폐해지고 행정부가 붕괴되었다.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 백작이 통치하는 영토의 경계는 코츠월드 언덕을 따라 이어졌는데, 언덕의 양쪽 땅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점차 버려졌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대규모 회전을 벌이길 기피하고 습격전만 이어갔다.

그러던 1140년 말, 체스터 백작으로서 잉글랜드 중부 및 북부의 가장 큰 영주인 라눌프 드 게르논이 스티븐 왕과 갈등을 벌인 끝에 마틸다 편에 섰다. 1141년 1월, 로버트는 웨일스 용병 부대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라눌프와 가세한 뒤, 링컨 성을 포위 중이던 스티븐 왕에게 접근했다. 1141년 2월 2일, 로버트와 라눌프는 링컨 전투에서 왕실군을 격파하고 스티븐 왕을 생포했다. 그 후 스티븐은 브리스톨로 이송되었고, 마틸다는 로버트와 함께 윈체스터로 가서 윈체스터 주교이자 교황 특사 블루아의 앙리와 합의한 뒤 4월 8일 잉글랜드 여왕으로 선출되었다. 두 달 후, 마틸다는 런던으로 가서 윈저 성에 자리잡고 대관식을 치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런던 사절단에게 몹시 오만하게 대했고, 높은 세금을 즉시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가뜩이나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런던 시민들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얼마 후 스티븐 왕의 왕비인 불로뉴의 마틸다가 기욤 드 이프르와 플란데런 용병대, 그리고 켄트 출신 민병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인근 농촌을 약탈했다. 이에 시민들은 그녀에게 호응하기로 마음먹었고, 당초 마틸다 여왕을 추대하기로 했지만 형제를 풀어주길 거부하고 조카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걸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블루아의 앙리 주교도 여기에 가세했다. 6월 24일, 런던 수비대가 봉기를 일으켜 윈저 성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마틸다 여왕은 가까스로 탈출해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그 후 로버트는 마틸다와 함께 윈체스터 대주교에게 복수하고 다시 한 번 영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기로 마음먹고 윈체스터로 진격했다. 1141년 8월 12일 윈체스터에 도착한 마틸다와 로버트는 윈체스터 시를 장악했고, 블루아의 앙리는 올베시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마틸다는 당장 성채를 포위해서 공략할 수 있었지만, 그러는 대신 앙리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가기를 거부하고 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즉시 윈체스터로 가기로 하고, 기욤 드 이프르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9월 중순, 불로뉴의 마틸다가 이끄는 군대가 윈체스터 외곽에 자리잡았다. 이리하여 윈체스터 성채를 포위하는 윈체스터 시의 마틸다 여왕 군대가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의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초 마틸다 왕비의 편에 섰던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드빌과 펨브로크 백작 길베르트 드 클레어는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불로뉴의 마틸다에게 귀순했다. 여기에 기욤 드 이프르가 윈체스터 북족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옥스퍼드와 글로스터로 향하는 경로를 차단했으며, 런던 민병대가 추가로 윈체스터로 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9월 14일에 윈체스터를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마틸다 여왕의 탈출을 지켜주기 위해 후방에 남기로 했고, 콘월 백작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이 정예병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고 앞서 가기로 했다. 그들은 윈체스터 서쪽 문에서 몰래 나와서 솔즈베리로 향했다.

얼마 후,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는 적이 달아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각 윈체스터 시로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장병들은 곧장 윈체스터 시로 진입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천천히 후퇴했다. 선봉대는 윈체스터에서 북서쪽에서 약 8.5마일(13.7km) 떨어진 곳에서 테스트 강을 무사히 도하한 뒤 마틸다를 글로스터로 데려다줬지만, 나머지 부대는 적군에게 궤멸되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테스트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에게 에워싸인 채 분전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로버트에게 상당한 특권을 약속하며 회유했지만, 로버트는 자신은 끝까지 마틸다 여왕을 따를 거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불로뉴의 마틸다는 마틸다 여왕에게 자기 남편인 스티븐 왕을 풀어주면 로버트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로버트 없이는 군대를 이끌 지휘관이 딱히 없었던 마틸다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1141년 11월, 양측은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교환했다.

1142년, 로버트는 앙주 백작이자 마틸다의 남편인 조프루아 5세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노르망디로 향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 공국 정복에 열을 올렸을 뿐, 아내를 돕는 데엔 큰 괌심이 없었다. 결국 로버트는 300~400명의 기병 및 마틸다의 장남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함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 있는 사이, 스티븐 왕은 공세를 개시해 버크셔, 옥스퍼드셔, 윌트셔 일대를 휩쓸고 마틸다를 옥스퍼드 성에 가두고 포위 공격했다.( 옥스퍼드 공방전) 로버트는 스퍼드에서의 소식을 전해듣자 웨어햄을 포위 공격했느데, 아마도 스티븐 왕이 포위를 풀고 웨어햄을 구출하려고 달려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이를 무시하고 옥스퍼드 공방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12월 초 어느 날 밤, 마틸다는 기사 4명과 함께 변장한 채 성 조지 타워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당시 공방전이 오래 지속되면서 스티븐 군대 내부의 많은 병사가 탈영하고 다른 이들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 그녀는 방심한 적군 진영을 몰래 지나간 뒤 추종자들이 모여 있던 월링포드에 도착했다. 그녀의 탈출은 하느님이 그녀에게 행운을 안겼다는 풍문이 퍼질 정도로 기적적인 일로 여겨졌다. 옥스퍼드 성채는 마틸다가 탈출한 다음 날 항복했고, 스티븐은 그곳에 새 수비대를 배치했다. 하지만 그는 옥스퍼드에 있을 줄 알았던 마틸다가 월링포드로 탈출한 걸 알게 되자 낙담했다. 그는 월링포드로 진군해 또다른 포위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1143년 초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로버트는 웨어햄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1143년 여름, 스티븐 왕은 잉글랜드 서부 지방을 평정하기 위한 새로운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마틸다의 군대가 접수한 항구도시 웨어햄을 탈환하려 했지만, 수비대가 강력한 방어 시설에 힘입어 굳건히 버티자 대신 솔즈베리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던 중 윈체스터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하고, 윌튼 수도원에 한동안 주둔했다. 그 사이, 로버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스티븐을 기습할 준비를 했다. 1143년 7월 1일 일몰 무렵, 윌튼 수도원 주위를 에워싼 그는 공격을 감행했다. 스티븐 왕은 뒤늦게 적이 포위했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로버트가 기병대를 이끌고 연이어 돌격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사분오열되었다. 그러다가 스티븐은 어둠을 틈타 불타는 수도원에서 탈출했고, 집사 윌리엄 마르텔은 후위대를 이끌고 로버트에 대적하다가 생포되었다. 로버트의 군대는 전투가 끝난 뒤 윌튼 일대의 여러 집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온 스티븐 왕은 윌리엄 마르텔을 돌려받는 대가로 서본 성을 로버트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로버트의 세력은 브리스톨 해협에서 도싯 남쪽 해안까지 확대되었다.

1145년 말, 크리클레이드와 치렌체스터의 사령관이었던 로버트의 막내 아들 필립이 스티븐 왕의 편으로 망명했다. 여기에 더해, 스티븐 왕은 파링턴에서 마틸다 추종 세력을 물리치고 월링포드와 템즈강 계곡의 마틸다 세력을 잉글랜드 서부의 주력군으로부터 차단했다. 또한 로버트의 영지인 글로스터와 브리스톨이 스티븐 왕이 파견한 기병대의 습격으로 황폐해지자, 로버트는 스티븐 왕과 휴전 협상을 해야 했다. 1147년, 로버트는 서리의 파넘을 공략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브리스톨로 돌아갔지만 열병에 걸려 1147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는 브리스톨 성 인근에 세워진 성 제임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로버트가 사망하자, 많은 귀족들이 스티븐 왕의 편으로 넘어갔고, 마틸다와 헨리는 1148년 2월 스티븐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나 조프루아 5세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스티븐 왕 역시 또 다른 반란에 시달리면서 무정부시대를 끝내지 못했고, 나중에 장성한 헨리 왕자가 잉글랜드로 돌아와 스티븐과 대적한 끝에 1153년 평화 협약을 맺고 공동왕에 등극했고, 1154년 스티븐 왕이 사망한 뒤 잉글랜드의 단독 군주 헨리 2세가 되었다.

3. 가족



[1] 한때 학계에서는 알세스터 영주 로버트 코벳의 딸인 시빌라 코벳이 그의 어머니라는 가설이 각광받았지만, 현재 대다수 학자들은 시빌라가 1090년경엔 10살이 조금 넘었다는 점을 볼 때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2] 12세기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연대기 <스티븐 왕의 행적>에 따르면, 일부 귀족은 로버트를 왕위 후보로 제안했지만, 사생아이기 때문에 다수의 귀족들로부터 외면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