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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07:01

봄여름가을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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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SS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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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rsrs.co.kr/21983.jpg|width=100%]]
<왼쪽부터>
전태관(드럼) 김종진(보컬/기타)

1. 개요2. 멤버 소개
2.1. 전 멤버
3. 역사
3.1. 결성3.2. 2인조로 재편3.3. 실험적인 음악 시도기3.4. Bravo, My Life! 이후
4. 음반
4.1. 스튜디오 앨범
5. 음악 성향6. 여담

[clearfix]

1. 개요

1986년에 결성된 대한민국 밴드. 이름이 너무 긴 탓에 사계절, 봄여가겨, 春夏秋冬(춘하추동), SSaW 등으로 줄여 부르는 경우가 있다.

밴드 이름은 김현식의 1집에 수록된 곡인 ' 봄여름가을겨울(1980)'에서 따왔는데, 멤버들이 MT를 가서 밴드 이름을 서로 짓는 과정에서 김종진이 '봄여름가을겨울'을 추천했다고 한다.

2018년을 기준으로 30주년을 맞이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해 12월 27일 전태관이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 멤버 소개

2.1. 전 멤버

3. 역사

3.1. 결성

1986년 여름, 한국 록음악의 중흥기 시절에 결성됐다. 결성 초창기에는 가수 김현식의 백업 밴드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했는데, 현 멤버인 김종진( 기타, 보컬), 전태관( 드럼, 퍼커션)에 ' 조용필 위대한 탄생' 출신의 천재 싱어송라이터 유재하(키보드), 훗날 '빛과 소금'으로 유명해지는 장기호(베이스)[4]로 시작했다.[5] 멤버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당시 상당히 앞서나가는 사운드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록 음악, 블루스, 재즈를 기반으로 하여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세련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유재하가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팀을 떠났고[6] 유재하의 빈자리를 박성식(키보드)이 메웠다. 이 멤버로 김현식의 3집인 ' 김현식 III' 앨범이 나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김현식의 마약사건이 터지면서 자연스레 팀은 와해되었고 장기호와 박성식은 사랑과 평화로 떠나갔다.[7] 이 두 명은 결국 듀엣으로 ' 빛과 소금'을 활동하였다.[8]

3.2. 2인조로 재편

결국 1988년에[9] 김종진과 전태관의 2인조 밴드로 재편하여 1집 <봄.여름.가을.겨울>을 발매했다. 10곡 중 3곡이 연주곡으로 국내 가수 최초로 연주곡이 타이틀곡이 되어 화제가 됐고,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10], '내가 걷는 길',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 유명한 노래다.

이듬해인 1989년에 발매한 2집 <봄.여름.가을.겨울 2 -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은 봄여름가을겨울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앨범이었다. 이 밴드의 대표곡인 '어떤이의 꿈'은 그해 가요차트에서 상위권에 오르고,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내품에 안기어'도 인기를 얻었다. 2018년 8월에 음악평론가들이 모여서 정하고 멜론을 통해 발표한 '(세 번째)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86위에 랭크되었다.



대중적인 밴드로 성공하면서 1991년 유명 캐쥬얼 신발 브랜드인 랜드로바의 CF 모델로 출연하며 김종진이 직접 작사/작곡한 CM송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11] 국내 최초의 라이브앨범도 발매하고 미국에서 앨범 전 과정을 제작한 1992년 3집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의 타이틀곡인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와 '아웃사이더'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가히 탄탄대로. 특히 3집은 사진가 김중만이 앨범재킷 작업을 도와줬다. 그런데 이때를 기점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은 대중적인 사운드 대신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3.3. 실험적인 음악 시도기

봄여름가을겨울은 4집 <I Photograph to Remember>와 5집 <Mystery>에서 실험적인 사운드를 내기 시작했다. 신중현의 '미인'을 자신들의 까끌한 스타일로 편곡하는가 하면 모스부호 소리를 따 넣었다. 세련된 사운드에서 까끌한 사운드로의 회기라고 할까. 이는 당시 평단의 극찬을 이끌어냈으나[12] 그전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1996년 결성 1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6집 <Banana Shake>는 CD 케이스를 깡통 형태[13]로 만들어 발매했다. 신해철, 이현도, 이주노, 이소라 등이 참여했지만 이 앨범의 대표곡인 '바나나 쉐이크'[14]가 선정성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다. 참고로 이 앨범은 영화필름 롤케이스를 딴 것처럼 CD에 영상, 즉 뮤직비디오가 들어가 있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를 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베스트 앨범과 공연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그 중 1999년 12월 31일 자정 공연 실황을 담은 <봄여름가을겨울 生生 LIVE!> Happy New Millenium이 2,000장 한정판으로 발매되어 공연에 참석한 관객들에게 한하여 배송되었다. 하지만 4~6집의 실험적인 음악의 시도로 뜻하지 않은 침체기를 겪었다.

3.4. Bravo, My Life! 이후

그렇게 침체기를 겪다가 2002년 7집 <Bravo, My Life!>가 대박을 쳤다. 특히 동명 타이틀곡인 ' Bravo, My Life!' 는 40대에 접어든 김종진-전태관의 심정이 그대로 녹아들어간, 중장년층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로 큰 공감을 얻었고, 그간의 침체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15] 자신의 인생을 3인칭화한 가사가 특징. 그러나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오버그라운드 퓨전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정체성은 이 시기에 크게 퇴색되어 아쉬워하는 팬들도 많았다.

7집 이후에는 주로 연주곡 중심의 앨범 발매와 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다. <Best of the Best Bom Yeo-Reum Gaeul Kyeo-Ul Song, Instrumental and their Story>(연주곡 중심) <Wine & Music Series I, II, III>(라이브 중심)을 냈는데, 특히 라이브 앨범 시리즈인 <Wine & Music Series>에서는 레게, 재즈, 보사노바 등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선보였다. 3년에 걸쳐 저작권 소송을 벌였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의 모든 음반과 온라인 및 오프라인 판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2008년 9월에 20주년 기념앨범인 8집 <아름답다, 아름다워!>를 발매했고, 여기서는 클래식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봄여름가을겨울 - 브라보 마이라이프 (MBC 음악캠프 125회, 2002/01/12)

8집 이후 전태관이 암투병 생활에 들어가 반쯤 활동 정지된 상태로, 와인 콘서트로만 활동하고 있었다. 전태관 사후 김종진의 인스타그램 포스트에 따르면 2014년부터 전태관은 투병으로 드럼 스틱을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전태관은 2018년 12월 28일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지만, 전태관은 자신 없이도 봄여름가을겨울 활동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후 김종진 전태관의 말을 되새기며 2019년 1월 16일 ~ 2월 24일 소극장 콘서트에서 30주년 콘서트를 했다.

4. 음반

4.1. 스튜디오 앨범

5. 음악 성향

밴드 초기에는 록을 기반으로 블루스 재즈를 접목한 시도가 돋보이는 밴드였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전신밴드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들의 음악 성향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봄여름가을겨울은 1990년대 초반 2~3집에서 퓨전 재즈로 흥했다. 그러다 4~6집 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좀 더 다양한 음악과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록밴드이지만 한 스타일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셈이다.

6. 여담



[1] 봄여름가을겨울의 작사 / 작곡 전체를 맡고 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중후하고 섹시한 미중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와인 애호가라고한다. [2] 굉장한 연습벌레로 알려져 있다. 당시 늘 연습실에 놀러갔던 김장훈은 볼 때마다 연습실에 전태관이 연습을 하는 걸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 밴드 드러머에게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장훈 또한 지독한 연습주의자인데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전태관은 한 수 위인 듯하다. [3] 손목 인대가 늘어났는 데도 철제 스틱으로 연습해 나중에 2연타 스트록을 완성시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당시 드러머에 대한 인식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야성미 넘치거나 뭔가 무게감 있는 모습을 강조하던 모습과는 달리 스마트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주식에 꽤 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김종진의 말에 의하면 거의 프로인 듯하다. [4] 나는 가수다의 전문 위원으로 활동했다. [5] 여담으로 당시 유재하가 다들 한 명씩 맡고 있는 계절이 있는데 자신은 뭐냐고 묻자 김현식이 그냥" 환절기 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김종진, 전태관은 김현식이 자신들을 인정하고 멤버로 영입한다는 말에 뛸듯이 기뻤었다고 한다. [6] 김종진이 말하길, 유재하의 탈퇴 이유는 김현식이 자신이 쓴 곡들 중 단 한 곡만 불러 삐져서(...) 나갔다고 한다. 그 뒤 유재하는 1987년에 1집 앨범을 발표하고 얼마 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유재하가 사망하자 김현식은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7] 사실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 '밴드 오브 브라더스' 빛과 소금 편을 통해서 이 뒷이야기를 밝혔다. 당시 봄여름가을겨울은 김현식이 스케줄을 물어오면 밴드가 거기에 맞춰 스케줄을 뛰는 식으로 밴드를 운영했는데, 제아무리 유명한 김현식이라고 해도 큰 수입을 물어오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전태관이 수입을 정산하고 나면 다섯 명에게 돌아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한다. 거기에 집안에서 장남이었던 장기호, 박성식은 당장의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장기호와 박성식은 봄여름가을겨울을 탈퇴하고 바로 사랑과 평화에 영입되었다. 다만 장기호와 박성식이 탈퇴해 선배들이 있는 밴드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명했기에 나쁘게 갈라진 건 아니어서 꾸준히 교류를 가졌고, 장기호는 전태관 타계 직전까지 병문안을 왔다. 링크. 전태관 타계 이후 김종진, 장기호, 박성식은 2020년부터 '봄빛'이라는 프로젝트로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8] 원래는 한경훈까지 트리오로 시작했으나 2집 이후 한경훈은 탈퇴하였다. [9] 김종진과 전태관은 2인조 재편 전 잠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몸담았었다. [10] 2006년 옥주현이 대대적인 체중감량을 하고 활동을 재개했을 때 찍었던 파스퇴르 '쾌변 요구르트'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부르기도 했다. # [11] 그 해 광고대상을 거머쥐는 것을 비롯하여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타임캡슐에 보관되는 물품에 이 CF 영상자료가 들어갔을 정도다. [12] 4집은 음악적으로 완벽한 소리를 전하려는 시도를 한 앨범으로 평가된다. # [13] 영화필름 롤 케이스를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14] 바나나가 상징하는 것이 남자의 그것과 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했다. 요조의 '바나나 파티'와 비슷한 예. [15] 여담으로 Bravo, My Life는 오리지널, Reprise, 영화 플라이 대디 OST 버전이 있는데 플라이 대디 OST 버전은 초반에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를 일렉기타로 느리게 치는 전주가 추가 되었다. [16] 여담으로 윤상은 당시 손무현과 함께 김완선의 백밴드인 ' 실루엣'에서 베이시스트로도 활동했었고, 작곡을 하기도 했었다. [17] 음악 스타일이 본인들과 하던 것과 동떨어진 면에서 좀 이질감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들으면 시대를 앞서갔었고 사적인 감정뿐이었다며 윤상의 행보를 인정했다. [18] 사실 이런 부분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밴드들은 행사가 거의 주요 돈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전인권도 현재는 업소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레전드고 나발이고 어디까지나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말이다. [19] 김장훈은 김현식과 거의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기에 더더욱 가까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