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사(紳士, Landed Gentry/Shenshi)는 명청시대의 지배계층이다.2. 명칭
신( 紳)은 허리띠라는 뜻으로 향촌의 지주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신에 지식과 학문을 갖춘 지식인 계층 사( 士)와 수재 거인, 진사 전·현직 관리 등 대부(大夫)들을 뜻한다. 과거를 독점할수 있는 신분으로 이며 과거 제도외의 공생과 연납을 통해 신사가 된 비정도공생이 있었다. 사실 연납도 수재나 거인이상 급제자 이어야 가능했다. 근대에 들어서 '신사'는 젠트리 또는 젠틀맨의 한자 역어로 사용된다.3. 역할
조선의 사대부와 롤 모델로 송대 이래 향촌의 지주들은 북송 진종 연간에 3만명에서 남송 이종 연간에는 50여만명이 과거 응시를 할정도로 자신의 경제력을 과거 시험에 투사하여 공부에 전념 했는데, 생원이나 수재시에 급제 하지 않더라도 과거 응시생이라는 신분으로 실질적으로 향촌을 통치 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지방 통치는 성-부-주-현 네가지 단계로 나뉘었는데 현재에도 하남성 산동성 광동성 같은 성은 인구가 1억이 넘고, 면적도 남한보다 훨씬 클정도인데다가 최소 단위인 현 조차 조선이나 고려의 하위 지방 단위와 비교도 안되게 크고 많은 인구 였기 때문에 조선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아니었다. 진나라때의 군현제 실패 이후 한나라 시절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는 역사적으로 중앙에서 지방 지주들에 대한 간섭을 억제하며,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이 관청 소재지를 떠나 관할 지방 곳곳을 순시하거나 향촌 질서에 간섭하는것을 처벌할 정도로 지방 세력과의 충돌을 꺼렸다.그리고 이들은 원래 지주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방 실무의 가장 중요한 세금을 담당했기에 이들의 협조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 했다.
이들은 명나라의 향촌의 지배층이었으나, 명조말 이자성의 난과 같은 농민반란들이 거세지고 만주족에게 정권이 넘어갔으나 만주족 청왕조는 일부 한인과 몽골인이 편입된 팔기군 인구가 60만에 불과하고, 한족 인구는 1억명에 달했기 때문에 왕조의 통치를 위해서는 이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예외적으로 직예(하북성+북경+천진) 지역의 토지만 몰수하여 팔기군에 분배했을 뿐 기존 지방에 대해서는 향신 계층의 기득권을 인정했고, 그 댓가로 청나라 시절에도 이들은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고, 청조에 반대하는 여러 농민 반란 (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에서도 청조를 굳건히 지지하여 의병을 조직한다.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기득권인 기인은 몰락했으나, 향신은 그대로 남아 신생 중화민국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며 향촌질서를 유지했다.[1]
그리하여 향신들은 명, 청을 거쳐 중화민국 시기까지 지주로서 중국 농촌의 지배층으로 군림한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봉건시대의 향신이라는 개념은 퇴색되었으나, 이들의 후손들이 지주로서 계속 농민을 지배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당시 군벌과 신사가 공동으로 향촌을 지배했다고 해서, 이 당시의 중화민국을 군신체제(軍紳體制)라고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중국공산당의 강제적 토지개혁으로 향신들은 대부분 몰락했고, 향신계급의 후예들인 지주계급은 평범한 농민이 되거나 혹은 토지개혁에 반항하다가 반동으로 몰려 수용소로 가거나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신들은 마을이나 촌락의 웃어른으로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었으나,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향촌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의 영향력은 완전히 뿌리 뽑혔다.
[1]
장제스 정권 및 국민당계 군벌들은 국민당 좌파들이 내세운 농촌의 토지개혁을 유보했는데, 이 때문에 향촌의 향신 세력은 국민당 정권에 우호적이었다. 민국시절을 다룬
장예모 감독의 초기작들 (대표적으로
홍등) 보면 그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