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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9 11:04:47

만티네아 전투(기원전 207년)



1. 개요2. 배경3. 전투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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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인 기원전 207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동맹 세력인 아카이아 동맹군이 로마 공화국의 동맹 세력인 아이톨리아 동맹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기원전 208년, 한니발 바르카와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로 넘어가서 로마 공화국을 공략하려 했던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탈리아로 건너가기 위한 교두보인 아폴로니아를 공략하기 위해 벌인 아폴로니아 공방전에서 패배한 데다, 그 직후 로마가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메세네, 엘리스, 페르가몬 왕국을 끌어들여 사방에서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게 하는 바람에( 기원전 213~209년 발칸 전역) 수세에 몰렸다.

기원전 208년 무렵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과 아탈로스 1세가 이끄는 페르가몬 해군이 에게 해를 지배했고, 아이톨리아 동맹은 테르모필레를 요새화하여 필리포스 5세가 남하하는 것을 저지했으며, 로마와 동맹을 맺은 일리리아의 스케르딜라이다스는 아들 플루라토스 3세와 함께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리소스, 아크로폴리소스 등 일리리아 내륙 영토를 탈환했다. 이에 필리포스 5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단념하고 지휘관과 군대를 분산시키고 여러 고지에 봉화를 설치해 적의 움직임을 자신에게 즉시 전달하도록 한 뒤 수비에 전념하면서 상황을 살폈다.

얼마 후, 반 마케도니아 연합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군은 한니발 바르카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발칸 반도에 육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에, 갈바는 오직 소규모 함대만 운용할 수 있었다. 육상에서는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등이 공세를 주도했지만, 유일하게 마케도니아 편을 들고 있던 아카이아 동맹을 제압하는 것조차 애를 먹고 있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자국의 영토를 탈환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그 이상 공세를 펼칠 생각은 없었고, 페르가몬 왕국은 이웃 국가인 비티니아 왕국과 갈등을 벌이고 있어서 역시 전력을 기울이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세를 시작한 갈바는 아탈로스와 함께 60척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아이기나에서 렘노스로 항해했다. 아탈로스는 페파레우스를 공격한 뒤, 갈바와 함께 니케아로 건너갔다. 이후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점거하고 있던 우라에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에우보이아로 이동하여 우라에오스를 곧 공략했다. 그는 뒤이어 칼키스를 공략하려 했지만 적의 방비가 생각보다 강하자 로크리스의 항구 도시인 키노스로 이동했다. 한편 아탈로스 1세는 로크리스 동부의 주요 도시인 오푸스를 점거한 뒤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며칠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때 봉화를 통해 적이 오푸스를 공격했다는 것을 조기에 파악한 필리포스 5세가 달려왔고, 약탈품을 수집하느라 사방에 흩어졌던 페르가몬군은 제대로 된 대항 한 번 못해보고 패주했다. 아탈로스 1세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사로잡힐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고 바다로 탈출했다.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은 비티니아 왕국이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하자, 아탈로스 1세는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갈바는 할 수 없이 아이기나로 철수했고, 로마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원전 206년까지 그곳에 머물며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페르가몬 왕국과 로마 모두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여유가 생기자,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트로늄과 케피소스강 북쪽의 티트로니움과 드리마이아를 공략했다. 이에 이집트, 로도스, 비잔티움, 키오스, 미틸레네, 아테네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아이톨리아 동맹과 필리포스 5세가 화해하도록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기원전 207년 봄 엘라테이아에서 이들 사절단을 만난 필리포스 5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아이톨리아 동맹은 전쟁을 꿋꿋이 이어가기로 결의했다.

3. 전투

기원전 207년, 스파르타 국왕 마차니다스가 이끄는 아이톨리아-스파르타 연합군은 아카이아 동맹의 영토로 침입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필로포이멘은 마케도니아 방식으로 육성된 아카이아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이에 맞섰다. 양군은 만티네아 평원에서 조우했다.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아이톨리아 동맹군은 15,000명, 아카이아군은 15,000 ~ 20,000명이었다고 한다. 마차니다스는 좌익에 배치된 팔랑크스를 이끌고 아카이아 우익을 공격하게 하면서, 우익 부대의 대열을 길게 늘려서 아카이아군 좌익과 길이 같게 한 뒤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 또한 대열 앞에 투석기를 배치해 적 대열을 향해 돌덩이를 퍼붓게 했다.

적군이 투석기로 아군을 향해 돌덩이를 퍼붓기 시작하자, 필로포이멘은 일리리아 용병들에게 투석기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적진에서 용병들이 달려들자, 마차니다스 역시 용병을 보내 그들을 막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양군 군대 전체가 서로를 향해 진격하면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초기에는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차니다스의 용병들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일리리아인들은 맹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고, 아카이아군 좌익도 무너졌다. 이에 마차니다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몸소 추격했다.

마차니다스가 도주하는 아군을 쫓기 위해 전장을 이탈하는 것을 본 필로포이멘은 후퇴 명령을 내리는 대신 아카이아 보병대에게 전진해 전장을 장악하라고 명령했고, 살아남은 일리리아인, 전사 및 용병들을 끌어모아서 팔랑크스 뒤에 자리를 잡아서 마차니다스가 추격전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 후 아카이아인들은 마차니다스의 이탈로 지휘 공백이 생긴 적의 통제되지 않은 공세를 그들 앞에 파진 넓은 도랑을 적절히 활용해 격퇴한 뒤 도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적병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마차니다스는 추격전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아군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본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일리리아인 및 전사들이 마차니다스를 알아보고 공격했고, 마차니다스는 곧 피살되었다.[1] 이 전투에서 최소 4천 명의 스파르타인 및 아이톨리아인이 전사했고, 더 많은 병사가 생포되었다. 여기에 본영에 남아있던 모든 보급품과 수송 마차도 아카이아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반면 아카이아군의 손실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아카이아군은 필로포이멘의 지도하에 테게아를 공략하고 라코니카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

4. 이후

만티네아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이톨리아 동맹은 더이상 전쟁을 이어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의 동의 없이 필리포스 5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고, 기원전 206년 가을 필리포스 5세가 전쟁 중에 빼앗아간 영토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국이 로마로부터 넘겨받은 영토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로마는 이에 반발해 기원전 206년 봄 일리리아 총독으로 선임된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에게 보병 10,000명과 기병 1,000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맡겨 전쟁을 재개하게 했다.

그러나 이 정도 병력으로는 필리포스 5세를 상대하기 어려웠고, 아이톨리아 동맹이 전쟁을 재개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결국 투디타누스는 필리포스 5세와 화해하기로 했고, 필리포스 5세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양국은 필리포스 5세가 전쟁 초기에 장악한 디말룸(Dimallum) 시와 파르티니(Parthini) 및 아틴타네스(Atintanes) 족 중 디말룸과 파르티니를 되돌려주되 아틴타네스는 그대로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며, 필리포스 5세는 로마에 대한 어떠한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로마 역시 그러지 않겠다는 내용의 포이니케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필로포이멘이 몸소 창으로 마차니다스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