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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3 21:47:27

기원전 213~209년 발칸 전역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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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인 기원전 213~209년, 로마 공화국 한니발 바르카와 손잡고 이탈리아로 진군하려는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5세에 맞서 벌인 일련의 전역.

2. 상세

기원전 214년 아폴로니아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일리리아 해안의 요충지인 아폴로니아를 사수한 로마군 지휘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는 오리쿰 항구에 정박한 채 겨울을 보냈다. 한편, 필리포스 5세는 아폴로니아에서 패퇴한 뒤 자신에게 반기를 든 메세네를 진압하기 위해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에게 군대를 맡겨 파견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메세네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메세네 주변 영지를 황폐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리스인들의 반 마케도니아 감정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필리포스 5세는 이대로 일리리아를 장악할 기회를 날릴 생각따위 없었다. 그는 해로가 로마 해군에 의해 봉쇄된 이상 육로로 진격하기로 했다. 기원전 213년, 마케도니아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로마군이 굳건히 버틴 아폴로니아와 디라키움은 공략할 수 없었지만, 아틴타니아와 디말레 마을을 점령하고 일리리아의 다사레타스 족, 파르티노스 족, 아르디아이 족을 복속시켰다.

필리포스 5세는 여세를 몰아 아폴로니아와 로마와 동맹을 맺은 스케르딜라이다스의 영토 사이에 있는 리수스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아폴로니아 공방전 때와는 달리 경계를 철저하게 해 로마군의 접근 여부를 철저히 감시했고, 대다수 로마군이 이탈리아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하느라 바빴기에 자신에게 맡겨진 육군이 별로 없었던 라이비누스는 리수스 요새에 구원군을 섣불리 보낼 수 없었다. 결국 리수스 요새는 수 개월 만에 함락되었고, 필리포스 5세는 마침내 일리리아 해안가에 거점을 마련했다.

필리포스 5세가 기어이 항구를 확보하자, 로마인들은 위협을 느꼈다. 당시 한니발이 1차 타렌툼 공방전에서 이탈리아 남부의 최대 항구도시인 타렌툼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시라쿠사 공방전 역시 카르타고 정부가 시라쿠사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기에 승패를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르타고 함대가 리수스로 가서 마케도니아군을 싣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다면, 필리포스 5세와 한니발이 조우하여 로마를 공동으로 상대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이에 라이비누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사절을 보내 필리포스 5세에 공동으로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기원전 217년 필리포스 5세에게 참패한 뒤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어야 했던 아이톨리아인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라이비누스는 기원전 212년 말 함대를 이끌고 아이톨리아를 방문한 뒤 연방 의회에 출석해 연맹의 지도자 도리마코스, 스코파스와 협상했다. 그는 로마가 카푸아 공방전에서 승리해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가고 있다고 전하며, 마케도니아 왕국을 충분히 상대할 여력이 있다고 장담했다.

아이톨리아 연맹 의회는 논의 끝에 로마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협약을 맺었다. 로마가 단독으로 점령하거나 아이톨리아인들과 협력하여 점령한 코르기라(현재 코르푸) 남쪽의 모든 도시는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넘어가며, 로마가 단독으로 점령해서 확보한 물자는 로마군이 소유하되 연합군이 도와줬다면 분배하기로 했다. 또한 로마는 25척의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를 제공하고, 아이톨리아인들은 대부분의 군인을 제공하기로 했다. 라이비누스는 여기에 더해 엘리스, 메세네, 스파르타, 페르가몬 왕국, 스케르딜라이다스 등에 사절을 보내 반 마케도니아 동맹에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기원전 212년 가을,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가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한 다르다니아인들을 응징해 신티아를 공략하느라 바쁜 사이에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있던 아카이아 동맹을 공격했다. 이에 아카이아인들은 전쟁에서 지면 모두 죽자고 맹세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에페이로스의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아이톨리아인들은 아카이아인들의 이같은 항전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필리포스 5세가 아카이아 동맹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구원하러 달려오자 본토로 철수했다.

반면 로마인들은 더 성공적인 결과물을 얻어냈다. 라이비누스는 함대를 이끌고 아카이아 동맹에 소속된 오에니아데, 나수스를 공략했으며, 자칸투스 섬을 뒤이어 공격해 필리포스 5세가 세운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공략했다. 이 도시들은 사전 약속대로 아이톨리아 동맹의 소유가 되었다. 또한 라이비누스와 아이톨리아의 스트라테고스인 스코파스는 안티키라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주민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고 도시는 아이톨리아인들에게 넘어갔다. 그 후 라이비누스는 함대를 코르푸로 옮겨 겨울을 보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스파르타, 엘리스, 메세나는 로마와 동맹을 맺고 필리포스 5세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210년, 라이비누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 로마로 돌아갔다. 그런데 원로원은 라이비누스의 과장된 보고를 듣고 발칸 반도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오판하여, 갈바에게 1개 군단의 지휘권만 맡기고 나머지는 해산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에게 해로 진군해, 필리포스 5세에게 포위된 에키누스를 구원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에키누스는 곧 항복했다. 이후 아이기나를 공략하고 모든 주민을 노예로 팔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아이톨리아 동맹에 넘겼으며, 페르가몬 왕국에게 아이기나를 넘기는 대가로 전쟁에 참여시켰다.

기원전 209년, 스파르타군과 아이톨리아군이 연합하여 아카이아 연맹을 공격했다. 갈바 역시 이를 지원하고자 라미아를 공격한 아이톨리아 동맹에 1,000명의 해병을 지원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대응해 친히 라미아로 진격했고, 이어진 2번의 전투에서 아이톨리아군에게 각각 1,000명의 사상자를 입히며 패퇴시켰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이 패배에 동요했고, 때마침 로도스, 키오스, 이집트, 아테네 사절단이 찾아와서 마케도니아와 아이톨리아 연맹의 화해를 주선하겠다고 제안하자 마케도니아와 30일 동안 휴전한 뒤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갈바가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와 함께 나우팍토스에 상륙하여 아이톨리아 연맹을 구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이톨리아 동맹 측은 돌연 오만하게 나오면서 필로스를 메세나에, 안티나니아를 로마에, 아르디아이를 스케르딜라이다스에게 넘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분노해 "나는 진정으로 평화를 찾고자 여기 왔거늘 너희는 전쟁을 키울 구실만 찾고 있었구나!"라고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이후 필리포스 5세는 나우팍토스에서 시콘으로 이동한 로마군을 기병으로 급습했고, 로마군은 서둘러 자기 배로 도망친 뒤 나우팍토스로 철수했다.

시콘에서 로마군을 물리친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본거지인 엘리스를 아카이아 연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키클리아데스와 함께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갈바는 키리네로 항해해 적이 엘리스를 포위하기 전에 4,000명의 군단병을 엘리스에 배치시켜서 도시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 5세는 기병대를 이끌고 군단병들을 향해 돌격했지만 도중에 낙마한 뒤 걸어가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군이 승기를 잡자 퇴각했다. 이후 군대를 수습해 피리쿠스 성채를 습격하여 점령한 뒤 4,000명의 포로와 20,000마리의 말 등 동물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다르디아나인들이 마케도니아를 또다시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한니발과 힘을 합쳐 로마를 도모하려던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로마는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메세네, 페르가몬 왕국 등이 마케도니아를 묶어두는 사이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