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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마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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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네스토르 이바노비치 마흐노[1]
Нестор Іванович Махно
파일:Hestor_Makhno_v_emigratsii.jpg
출생 1888년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굴랴이폴레
(現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 훌랴이폴레)
사망 1934년 7월 24일 (향년 45세)
프랑스 파리
부모 아버지 이반 로디오노비치 마흐노
어머니 에브도키야 마트베예브나 마흐노
형제자매 형 폴리카르프, 사벨리, 에밀리안, 그리고리
자매 옐레나
배우자 갈리나 안드레예브나 쿠즈멘코 (1927년 이혼)
자녀 딸 옐레나
1. 개요2. 생애
2.1. 메노나이트 학살 문제2.2. 독재를 실시하려 한 군벌?
3. 여담4. 연관 기록물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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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리냐 죽음이냐. 역사적인 이 순간에 우크라이나 농민과 노동자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죽기에는 우리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인류 그 자체인 우리들은 승리해야만 합니다. 과거에 그래왔듯 새로운 주인에게 우리의 운명을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 자신들의 진실에 따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입니다."
네스토르 마흐노, 1918년 11월[2]

우크라이나 정강주의 아나키스트이자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РПАУ)[3]의 지도자.

혁명 이후와 러시아 내전 당시에 아나키스트 유격대를 이끌며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자유지구(Вільна територія, 1918–1921)를 형성했지만 볼셰비키에게 흡수되었다. 정치적 실각 이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였고 1934년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러시아 혁명사에서는 볼셰비키당 독재에서 대숙청으로 인해 세계혁명과 이상주의 세력 인사들이 숙청되기 이전,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제정 말기 혁명가들,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억압자에 저항했던 자포리자 코자크 정신을 잇는 마지막 상징으로 루스문화권 전반에서 낭만적으로 기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아나키즘 역사에 있어서는 단순히 저항의 집합에 불과했던 아나키즘을 크로포트킨의 이상에 근거해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마흐노의 공동체가 붕괴한 이후로 중국과 스페인에서 자유지구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주장했던 정강주의 이론에 근거한 연합체를 오늘날에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볼때 그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도 마흐노의 노선을 따르는 많은 반러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결성되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싸우고 있다.[4]

현대 우크라이나에선 단순히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심지어 이념적으로 완전히 상반되는 나치 독일과 손잡은 파시스트에 가까웠던, 동시대에 활동했다면[5] 서로 쏴죽일 정적이었을 법한 스테판 반데라와 나란히 기념하는 경우도 많다. 우크라이나 아나키즘 운동의 맥이 끊긴 이유로 소련에서는 마흐노를 민족주의자로 폄하했기 때문에 지금도 민족주의자로서만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6] 스페인어로 된 우크라이나 현지 종손과의 인터뷰

2. 생애

[7]
우크라이나의 독립이란 얘기를 할 때 우리 의미는 결코 (우크라이나 총재정부 수장) 시몬 페틀류라 같은 자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이란 말을 하는게 아니다. 우리가 하는 얘기는 우크라이나 노동자와 농민들의 사회적 독립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 민족은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나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노동자로서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표트르 아르시노프, 마흐노주의자 운동사 출처[8]

1888년[9] 소도시 훌랴이폴레(Гуляйполе)[10]에서 6남매(5남 1녀)중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0개월일때 죽었기 때문에 형편이 매우 곤궁했다. 그래서 7살부터 지주의 소와 양을 돌보는 일용직으로 살아갔고 8살에는 겨울에만 열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2살에 자퇴하여 독일인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후 17살이 되자 주물공장에 취직한 그는 현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만든 20명 정도가 속한 소규모 지하조직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거기서 경찰서를 습격하는 수용적 아나키즘 운동을 하다가 2년 후인 1908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모스크바로 압송된 이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게 된다. 그곳에서 1910년 표트르 아르시노프(Пётр Андреевич Аршинов)[11] 에게서 체계적인 아나키즘 이론을 배웠고 교도소에서는 역사, 문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시기 그는 여러 번 간수에게 저항하여 아홉번 가량 독방에 감금되었고 결국 이 과정에서 폐결핵을 앓게 된다.

1917년 3월 2월 혁명 시기 법무장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정치범 3만명을 일괄 석방한다. 이에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마흐노는 독자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규합하여 소비에트의 의장에 취임한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혼란으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한 흑위대를 결성한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내부의 경영갈등과 우크라이나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 때문에 1918년 4월경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볼가강을 거슬러 피난하다 6월경 모스크바로 간 마흐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접촉했고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었으나[12] 어쨌든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훌랴이폴레로 돌아온[13] 곧바로 민병대를 소집하기 시작해 항쟁에 돌입하였다. 그의 부대는 겨우 30여명 수준이었지만 우크라이나에 진주한 동맹국 군대나 카자크 부대와 승리를 여러번 거두었는데 마흐노의 부대가 적을 격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병대와 타찬카를 이용한 기동성 덕분이었다. 이후 1917년 9월 천여명의 오헝 제국군을 격파한 디브리우카(Дібрівка)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소규모 부대가 합류해 수천명 규모로 확장되면서 독립적인 정치활동을 시도할 정도로 커지게 된다. 마흐노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우호적인 농민들에게 말을 교체받고 식료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보병이 다수였던 다른 부대보다 빠르게 기동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강철같은 의지와 날카로운 기지를 겸비한 마흐노"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아버지(батько)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될 무렵 퇴각하던 동맹군으로부터 많은 장비를 획득하고 훌랴이폴레를 점령한 마흐노는 자신의 본거지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14] 1919년 1월부터 경제적, 군사적 문제를 논의하는 지역회의를 소집한 아나키스트들은 자발적인 동원 노동자 및 농민 및 군인을 위한 3개의 협의회 설치등을 논의하였다. 이후 아나키즘에 근거한 코뮌이 각지에 설치되었으며 그중 최초로 설치된 것은 순교한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이 무렵 볼셰비키들에게 탄압받던 아나키스트들이 우크라이나로 피신오자 그들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어 신문들이 발행되었으며 문화교육과 학교들이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동맹'이었던 볼셰비키들이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그들을 위해 식량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짧은 황금기는 몇 달도 채 가지 못했다. 볼셰비키가 처음에 마흐노를 용인했던 것은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에서 그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마흐노가 점차 세력을 불리자 이를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9년 4월에 이미 볼셰비키는 새로운 회의를 열지 말 것을 경고했으나 마흐노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5월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킨 그리고리예프(Григорьев)에 대한 대응을 마흐노가 거부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후 6월 적군이 훌랴이폴레를 공격하여 코뮌의 해체를 명령하였고 며칠 후 안톤 데니킨의 백군이 도착하면서 이들을 싹 없애버리고 말았다.[15] 크림반도 근방의 헤르손으로 퇴각한 마흐노는 그리고리예프를 사살하고 자원병을 받아들여 세력을 재정비하였다.

그곳에서 마흐노는 라다 정부와 협상하여 공동으로 백군과 투쟁하기로 합의했으나 이행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밀려 우크라이나 서쪽지역까지 철수해야만 했다. 한편 그 무렵 안톤 데니킨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내전을 끝내고자 하였다. 이에 볼셰비키 측은 뻔뻔하게도 흑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아나키스트들은 백군이 승리하는 것보다는 공산주의자가 이기는 것이 낫다는 인식에 이에 동의하게 된다. 이에 1919년 9월 1일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을 선포한 마흐노는 9월 26일 페레고노브카에서 데니킨의 군대를 격파해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데니킨은 최정예부대를 철수시켜야 했고 이를 기점으로 데니킨의 군대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마흐노는 다시 우크라이나 중부로 이동하여 아나키즘에 근거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그러나 1919년 말 마흐노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인한 폴란드 전선 이동명령을 마흐노가 거부하면서 둘의 관계는 다시 파토났고 반년 이상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브란겔의 군대가 다시 크림반도에서 북상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동맹이 체결되었다. 동맹의 대가로 볼셰비키들은 억류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을 석방시키고 소비에트 정권을 무력 전복을 시도하지 않는 선에서의 선전의 자유도 보장되었다.[16] 이 짧은 동맹은 단 한달만에 다시 폐기되었고 다시 적군은 마흐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내전에서 완전히 우위를 점한 볼셰비키는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우크라이나 농민들 스스로 스테판 라진, 예멜리얀 푸가초프[17]라고 부르는 마흐노를 내버려 두는 것은 소비에트 정권에 있어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적군은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흑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가장 전성기에 달했을 때도 5만명 정도에 불과했던 혁명반역군은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결국 유격전을 펼치던 마흐노마저도 얼굴과 발에 부상을 입고 수십여명만 남아있던 소부대는 치료를 위해 1921년 루마니아 왕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서 우크라이나 자유지구는 붕괴하였다. 마흐노는 이후 폴란드로 망명하였으나 마흐노의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긴 폴란드 정부가 그를 추방하였다. 1924년 독일인 지주들을 학살한 혐의로 단치히에서 체포되었으나, 재판이 벌어지기 전에 탈옥하여 도주하였다.[18] 이후 버크만의 초빙으로 1925년 파리에 정착한 마흐노는 극장에서 목수 생활을 하다가 르노 자동자의 노동자로 일하며 살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에 입은 부상이 도지면서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그의 아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결국 그의 아내와 딸은 마흐노를 떠났으며 그 이후에는 각지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으로 연명하였다.

파리에서 아나키스트와 교류하던 마흐노는 자유지구의 실패가 아나키스트들의 단결력의 부족에 있다고 판단해 아나키스트 조직을 설립하고자 시도했으나 "아나키적 볼셰비키"이라며 아나키스트들에게 비판받았다.[19] 말년에는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민병대를 지휘해 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부상으로 인하여 거부하였다. 이후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이 재발해 병사하였다. 한 사람의 동료만이 지켜본 쓸쓸한 최후였으며 시체는 화장되어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2.1. 메노나이트 학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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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메노나이트 하인리히 디트리히(1884–1919)
러시아인, 유대인, 폴란드인, 독일인, 아르메니아인 할 것 없이 모든 민족의 노동자들은 가난과 착취란 사슬에 묶여있고... (중략) 우리의 적은 민족 불문하고 널리 퍼져있다: 러시아인 공장주, 폭압적 독일 지주, 폴란드인 귀족, 유대인 은행가 모두가 우리의 적이다.
1919년 훌랴이폴레 혁명군사회의 행정위원회의 성명
우크라이나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을 벌이던 당시 마흐노가 학살을 실행했다는 의혹, 특히 유대인과 독일인 메노나이트 문제는 살아있을 때부터 마흐노를 비판하던 주요 소재였다.[20] 따라서 이에 대한 최소한의 고찰은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 다행히 이에 대해서는 1920년대부터 이미 생존자 메노나이트가 증언을 남기고[21] 1945년 이후부터 관련된 학술연구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추적이 가능하다.

18세기 후반 자포리자 지역에 존재했던 카자크 수장국이 해체되어 슬로보다우크라이나[22]와 키예프 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돈강 유역으로의 독일인 개신교도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이들은 서유럽의 선진적인 농업이나 농노제로부터의 자유, 세금와 병역 면제 등의 특권 등의 이유로 다른 우크라이나인들보다 부유하게 살던 편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원을 소유한 지주가 되는가 하면 다른 우크라이나인들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영위하는 등 (사회주의적 의미에서) 계급분화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19세기 후기부터 정교회로의 개종 강요 및 부여된 특권들이 폐지되면서 메노나이트들은 다시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던 메노나이트는 약 12만명 정도였고[23] 동부 우크라이나에는 7만 5천명이 거주하고 있었다.[24]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초부터 마흐노우슈치나에 대한 메노나이트 살해 사건이 보고되었다. 1959년에 저술된 메노나이트 백과사전에 따르면 1919년 마흐노우슈치나에게 살해당한 메노나이트들은 총 600명이었다고 한다.[25] 그 중 가장 큰 학살은 1919년 하반기에 있었던 호르티차(Хортиця, Chortitza) 마을에 있었던 사건으로 245명의 메노나이트가 살해당하고 100명 정도의 여성이 강간당한 사건이었다.[26] 분명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호르티차 마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11,666명이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거대한 메노나이트 거주지라는 사실이다. 메노나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씨가 마르는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차라리 언급하려면 역시 1919년 마흐노우슈치나의 약탈로 206명이 살해당하고 329명이 기근으로 사망해 마을이 소멸해버린 자흐라디우카(Заградівка)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

메노나이트들은 마흐노의 유년 시절 메노나이트 농장에서 일한 사건에서 그 동기를 찾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그것에 회의적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인임을 자각하면서도 러시아어로만 글을 작성했으며[27] 그에게 있어 혁명은 민족이 아니라 계급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메노나이트에 대한 적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아나키스트가 지적하는 다른 사건은 1918년 초기부터 메노나이트가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1918년 4월경부터 일부 메노나이트들은 붉은 군대와 독일군에게서부터 병기, 탄약을 지원받아 자경단(Selbstschutz)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목적 중 하나는 아나키스트가 몰수하여 재분배한 재산의 탈환에 있었으며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훔쳐간 것으로 의심하는 농민을 처형하다 마흐노우슈치나에게 보복당하는 일도 있었다.[28][29] 그러나 당시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독일군에 대한 게릴라 활동이 빈번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행동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반감을 사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30]

또한 호르티차와 더불어 가장 거대한 거주지였던 몰로치나(Молочна) 지역의 메노나이트와 루터교회 신자들은 독일인이 남긴 탄약과 장비로 2700명의 보병대와 300명의 기병대를 편성해[31] 1919년 3월까지 마흐노를 저지하는 등의 사건이 있는 것은 물론[32] 데니킨의 군대에 호응해 마흐노우슈치나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3월경부터 등장한 것이 유명한 콘트라즈벳카(контрразведка, 방첩부대)인데 방첩부대의 주요 목적은 '특정 당파'에 협력하거나 비밀경찰과 같은 업무에 종사하는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의 조직에서 영향을 받은 이 군사부대는 후대는 물론이고 당시 마흐노와 함께하던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서조차 마흐노를 비판하는 주요 소재이긴 했다.[33] 이 부대는 체카와 같은 비밀경찰이 아닌 군사부대로서 설립 초기의 주요임무 역시 볼셰비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흐노는 자신들에게 적대시하는 게릴라 활동을 차단하는 '체카'를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간혹 방첩부대가 살인과 고문을 유희로 즐기고 전문 기술자를 등용했다는 등의 증언을 증거랍시고 첨부하는 경우가 있다. 이 증언의 최초 출처는 한때 마흐노를 지지하다 전향한 유대계 우크라이나인인 이사아크 테페르(Ісаак Тепер)의 회고록인데 이 회고록은 1924년 소련에서 서술된 것이다. 당연히 출처의 정확성을 의심할뿐더러 방첩부대의 사령관였다가 전향해 NKVD 요원으로 활동한 레프 자도프(Лев Задов)의 1924년 회고록이나 1938년 대숙청 당시의 재판 기록(유죄를 입증하는데 더 없이 요긴한 증거임에도!)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재고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 조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권력에 굶주린 마냥 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임의로 집행을 실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러나 방첩부대는 이를 묵인하지않고 대체조직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마흐노우슈치나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조사,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그 대상은 무기, 혹은 구두로 마흐노우슈치나를 공격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념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아나키즘 사회가 어떤 것인지도 습득한 대상이었다.[34] 1920년 1월의 선언문에는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은 체카를 위시로 한 모든 강제집행기관을 반대한다는 문구가 쓰여있는데[35] 이로 보아서 이미 이 무렵에는 방첩부대가 형해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1919년 7월경부터 안톤 데니킨의 군대가 다시 우크라이나로 진주해오자 자경단은 백군에게 협력하였다. 단순한 협력을 넘어 데니킨의 군대에 자원입대한 메노나이트도 분명히 존재하였고[36] 이들은 당연히 보복행위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니킨의 군대가 패퇴한 뒤 마흐노가 돌아온 뒤 재차 보복행위가 반복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즉 마흐노우슈치나에게 메노나이트들은 경제적인 착취를 일삼는 지주임은 물론이고 언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르는 잠재적인 위협분자로 간주된 것이다.

또한 언급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메노나이트에 대한 학살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마흐노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재장악한 10월 초에서 러시아 전역에 확산되는 티푸스가 마흐노우슈치나에서 발견되는 11월 22일까지로 한정되어 있다.[37] 이 시기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다시 볼셰비키와 적대관계가 되었고 이후에는 학살을 하고자 하여도 그럴 여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마흐노우슈치나를 자처한 그들이 정말로 마흐노우슈치나인지 판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메노나이트들의 증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자신들을 습격한 사람들이 마흐노의 직할부대인지, 마흐노우슈치나를 자처한 평범한 민병대인지, 그저 마흐노의 이름을 사칭한 도적떼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방첩부대가 멋대로 약탈을 하는 부대에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아마 두번째였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총재정부 수장 시몬 페틀류라의 일화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알려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대 포그롬으로 악명높았고 결국 페틀류라는 이로 인해 망명지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슈바르츠바르트의 손에 암살당했다. 설령 페틀류라가 포그롬에 부정적이었다 해도[38] 그에게는 일선 부대를 통제할 권력이 없었고 결국 포그롬을 방지할 수 없었다.[39] 마흐노우슈치나의 메노나이트 학살도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해방전쟁[40] 당시 각 정파는 적군,백군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인민군, 녹군 등 독립적인 무장부대까지 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마흐노 역시 반유대주의에 부정적이었음에도 자신 앞에서 유대인 학살을 선동하는 병사를 만날 정도였다.[41]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은 물론이고 독일인[42]까지 참여한 운동이었다.[43] 즉 마흐노우슈치나는 특정한 민족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역에 만연한 가난과 착취을 몰아내는 계급투쟁을 위한 조직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메노나이트에 대한 학살을 마흐노가 직접 지시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러한 학살이 마흐노의 명령으로, (계급이 아닌) '메노나이트 (독일)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이었음을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시 네스토르 마흐노와 함께 우크라이나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하였던 유대계 러시아인 볼린(Волин, 1882–1945)[44]은 이렇게 발언하였다.
"마흐노주의자의 서사는 "명확하게 밝히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고상하며, 비극적이며, 심오하며, 복잡하며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사람들에게 대한 설명은 모순된 해석에 근거한다. 서류를 통한 우리가 했던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닌데, 문서 자체는 죽어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경험을 절대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류에 근거하여 글을 쓰는 것은 다양한 자료를 참고할 수 없게 된 미래의 역사학자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contemporary)가 자신의 행위와 그 역사 자체에 (다른 이보다) 훨씬 엄격함을 요구할 것인데, 그것(서술된 역사)에서부터 역사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우리(contemporary)는 거대한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 사건에 대한 판단과 이야기를 피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서사와 서류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contemporary)의 과제를 말하기보다는 그 개인의 경험을 (감정적으로) 투사시키는 것에 가깝다. 만약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작가는 (진실과 동떨어진다는) 모호한 위험에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하게는 사건의 본질이었던 살아있는 영혼을 매우 심각하게 변질시켜 묘사하고, 독자와 역사학자를 오해로 빠지게 만들 것이다.

- Peter Arshinov, 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 (1918-1921), 1923.

2.2. 독재를 실시하려 한 군벌?

"만약 내가 당신에게 한 마디의 거짓말을 했다면 이를 저주하시오. (하지만) 내가 진실과 당신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오."
네스토르 마흐노, 1921년

마흐노는 당대부터 민족주의자이니 유대인을 학살했느니 군부독재를 시도하는 마적단이니 하는 볼셰비키의 흑색선전으로 인하여 아나키즘 내에서조차 오해를 받은 한편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차이로 비판을 받아야 했고 러시아 내전 스페인 내전으로 아나키즘 운동이 크게 쇠락한 이후에는 그 존재감마저 잊혀지고 주로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동구권에서 겨우 기억되는 수준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우크라이나에서 '위대한 우크라이나인'을 조사했을 때 레닌이 21위에 오른 반면 마흐노는 겨우 32위에 올랐다. 한편 2017년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 당시 주요 인물에 대하여 알아봤을 때 가장 선호하는 인물은 3.2%로 최하위인 반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은 44%에 올라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그 뒤로도 레닌주의자인 존 몰리뉴는 자신의 저서 Anarchism: A Marxist Criticism[45]에서 이렇게 같이 마흐노를 평가하였다.
아나키즘은 볼셰비키 전체주의가 대중의 진정한 해방 혁명을 짓밟은 증거라며 마흐노 운동과 크론시타트 반란을 신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 마흐노는 아나키즘의 원대한 선언을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독재적 농민운동 지도자이자 군 사령관으로서 제멋대로 정적(특히 공산주의자)를 처형하고 술에 취해 흥청망청하기 일쑤였다. 마흐노와 마흐노 운동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는 (아나키즘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조지 우드콕의 고전적 저작 <아나키즘: 자유인의 사상과 운동의 역사>인 듯하다.

"마흐노는 뼛속까지 시골내기이자 지방분권주의자였다. 마흐노는 도시와 도시 문명을 증오했고, '자연의 소박함'을 예찬했고, 태곳적 농촌의 전설처럼 "농민이 흥겹게 노래 부르며 일하던"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마흐노주의자들이 나중에 꽤 큰 도시를 여럿 점령했을 때 공업을 조직하려 하지 않았고 도시 노동자 가운데 소수만이 그들을 지지했던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바로 (마흐노가 이끈) 혁명반역군이다. 이론적으로는 '농민, 노동자, 반역자 의회'가 그 군대를 통제했지만 실제로는 마흐노와 마흐노 휘하 지휘관들이 지배했다. 또 군대가 모두 그렇듯 자유 의지는 이름뿐이었다. 그 군대에는 나름의 징집 방법과 마흐노가 주인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급조한 규율도 있었고 즉흥적이고 폭력적인 처벌도 흔했다. (하략) "

아나키스트 볼린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술 때문에 마흐노는 ...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마흐노의 혁명적 의무감은 느닷없이 변덕으로 바뀌었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잦았다. (중략) 이 때문에 마흐노운동은 마흐노를 중심으로 한 군벌이나 음모 집단이 되어버렸다."

(중략) 도시의 노동자 운동과 손잡은 농민운동은 대단한 진보였다. 그러나 도시의 노동자 권력이나 볼셰비키로 대표되는 노동자 권력의 잔재에 맞서는 농민운동은 반동적일수밖에 없었다. 농민의 깃발이 붉은색이든 녹색이든 아나키스트를 상징하는 검은색이든 '공산당 독재를 분쇄하려는 농민 반란은 자본주의나 차르 체제가 부활하는 문을 열어 주기만 했을 것이다.
이승민 역, 아나키즘 :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66~69p

하지만 러시아 내전 시기에 참전했던 볼셰비키의 회고는 정반대이다. 예를 들어 마흐노와 맞섰던 세묜 부됸니 휘하에 참전했던 이사아크 바벨은 자신의 자전적 연작문학인 붉은 기병대[46]에서 마흐노를 "영웅이자 천재"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아나키스트였다가 러시아 내전 시기 볼셰비키로 전향한 빅토르 세르주 역시 "비교할 사람이 없는 재능 있는 전략가"라며 칭송했다.[47] 아나키스트였던 옘마 골드만은 남부 혁명을 가장 눈에 띄게 만든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볼린은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공을 저지시킨 것은 전적으로 마흐노의 공로"라고 평했으며 1970년대 미국의 역사 연구가인 마이클 팔리 역시 데니킨의 군세를 패퇴시킨 것은 적군보다는 흑군의 역할이 더 컸다고 언급했다. 볼셰비키가 마흐노를 군벌 독재자라고 비하했던 것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프로파간다였을 뿐 그 어떠한 실증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대척점에 있다고 인식하는 블라디미르 레닌조차도 마흐노를 보며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의 1/3만이라도 마흐노와 같았으면 아나키스트들과 협력했을 터인데!"라고도 말한 바가 있으며 나중에 옘마 골드만이 수감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석방 운동을 했을 당시 "우리 감옥에는 부랑자와 마흐노주의자들이 있을지 언정 아나키스트는 없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48]

또한 공산주의자를 임의로 처형했다는 것 또한 근거를 찾아보기 힘들며 볼셰비키가 내전 기간 내내 아나키스트를 탈법적으로 처형한 것을 감안해보면 이걸로 마흐노를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상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918년 레닌과 접촉한 마흐노는 "볼셰비키의 세력은 철도에서 15마일만 떨어져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언급했으며, 러시아 내전의 다른 무장세력과 달리 마흐노의 군세가 몇년동안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를 활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현지 주민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아르시노프와 볼린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마흐노가 했던 말의 원본은 엄밀히 말해 "힘들지만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사회"였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49] 몰리뉴가 중역과정에서 착각을 한 것인지 고의적으로 왜곡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적절한 인용이라는 점은 분명한 셈이다.

또한 조지 우드콕은 마흐노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마흐노는) 천민들에게 복수천사였고 지금은 푸가초프가 죽음의 순간에 등장을 예언했던 위대한 해방자로 존경받고 있다." 또한 아나키스트 운동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국인 학자인 폴 애브리치는 마흐노의 선전이 말뿐인 선전에 제한되지 않고 자신의 아나키스트 이론을 실천에 옮기려 한 행동가라고 평가하며 "마흐노는 조건이 허락하는 한 자신이 권유한 것을 실천하는 아나키스트"라고 언급했다. 여기에 볼린은 마흐노가 점령했던 지역에서 발행이 금지된 언론은 카데츠가 발행한 언론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아직 데니킨의 군대가 남아있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또한 다른 부분에서는 마흐노가 현지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쫓겨나다시피 도시에서 나오는 부분이 묘사되는데 마흐노의 군대가 군사독재를 실시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레닌주의자들이 마흐노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소련 붕괴 이후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어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아나키즘을 가로막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된다.[50]
" 그러나 마흐노주의자 운동의 정점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듯 우리는 그 그림자 또한 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르시노프의 말처럼 "마흐노의 성격은 혁명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했다. 한 해마다 그는 더욱 성숙해지고 자신의 행동을 더 의식했다. 1921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1918년과 1919년보다 더 깊이 있는 기질을 가졌다. (중략) 자유를 향한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거대한 의식에 바탕을 둔 대중운동에서 악은 국소화된 상처일뿐, 그것이 전체적인 생명을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중략) 이러한 고려사항을 볼 때 볼셰비키 세력의 붓질 아래에서 그들이 가정하는 것까지 마흐노주의자 운동의 약점이라고 확대될 이유는 없다. 이것은 운동의 전체적인 신빙성을 떨어트리기 위해 개인의 흠을 과장하고 왜곡(distorte)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자가 할 일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뿐이다!"

Voline, The Unknown Revolution, 1917-1921

3. 여담

네스토르 마흐노는 아나키즘 역사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헌은 적지 않은 수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https://www.nestormakhno.info/ 이나 http://www.makhno.ru/을 참고.

간혹 마흐노를 자유지구의 지도자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의 역할은 군사적 역할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는 아나키즘 공동체의 결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그가 타찬카를 발명했다고 여긴다. 이는 과장된 표현으로 원래 평원이 많은 동유럽에서는 물자의 수송이나 간이요새를 만들기 위한 용도로 수레를 이용한 전술을 많이 구사하였다. 여하튼 실제로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은 이를 매우 즐겨 사용했고 덕분에 이들은 하루에도 수십km를 주파할 수 있는 기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 중에는 그의 동료였던 볼린이 회고록으로 쓴 것도 있는데 과거에는 중요한 전기로 기록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여러 루머가 실려있어 그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다. 마흐노가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부터 술을 좋아했으며 망명한 이후에는 아예 술독에 빠져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아이다 멧(Ida Mett)[51]은 자신이 마흐노를 수년 동안 만났지만 마흐노가 술에 취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으며 만약 그가 술을 즐겨먹었다고 해도 다른 우크라이나 농민과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그가 농민들을 강제징병했다는 주장이 몇몇 있지만 레프 트로츠키는 아나키스트들에게 징병을 위한 행정조직이 없기에 징병은 불가능하다고 추론했다.[52] 이렇기에 오늘날에도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많은 부분이 불명확하다.

마흐노는 아나코-코뮤니스트였기 때문에 그가 세운 자유지대의 요소를 찾아보면 지역 평의회는 '소비에트'고 군사 지도기관은 '혁명군사위원회'인 등 비전문가라면 볼셰비키와 혼동할 정도의 유사성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1917년 10월 혁명 직후부터 대략 1918년 초중반의 매우 짧은 기간(6~8개월) 동안에는 아나키스트들도 볼셰비키 정권에 별다른 반감이 없었으며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의 중간단계였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연립정부를 이뤘고 멘셰비키[53]는 비판적 지지 위치를 취했다. 심지어는 트루도비키들도 레닌과 트로츠키가 사임하면 공동정부를 이루겠다는 의사를 타진하는 시기였다. 이때 러시아, 아니 유럽 아나키즘의 대부이자 마흐노의 이념적 스승이었던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10월 혁명을 찬양(!)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가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명하자 '오직 이 당만이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있다'라고 칭찬하였다.

물론 이후에는 위의 내용에서 언급되다시피 볼셰비키가 아나키스트들을 죄다 체포하고, 좌파 사회혁명당이 봉기를 일으키고 반볼셰비키 좌파가 다 죽어나가고, 트루도비키가 내전을 일으키는 숙청이 일어나는데,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레닌의 의중이었기 때문에 비볼셰비키 좌파에게 눈곱만큼은 우호적이었던 트로츠키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마흐노와의 협상을 맡았던 안토노프옵세옌코는 실각해버렸으며, 트로츠키도 마흐노를 손절한다. 볼셰비키가 감히 건드릴 수 없었던 크로포트킨은 죽는 그 날까지 볼셰비키를 가열차게 비판하지만, 레닌은 비판을 전부 무시해버렸다.[54]

가족으로는 아내와 딸이 있었는데 많은 혁명가들처럼 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혁명가라는 점 말고도 술을 즐기는 성격에(단 이는 위에서 언급한 볼린의 기록에서 나온다.), 복잡한 여자관계까지 얽혀 있었으니 가장으로서는 거의 최악이었던 셈. 사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것이 폴란드에 머물 때 페틀류라 계의 군인과 불륜 관계에 들어갔고 아예 마흐노를 암살하려고도 했다. 마흐노의 말년 사진을 보면 오른뺨에 칼로 베인 흉터가 있는데, 그가 자는 중 아내가 암살을 시도한 흔적이다. 마흐노 사후 그의 가족은 프랑스에 머물다가 프랑스 함락 이후로는 독일의 지멘스 공장에서 노역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후 소련으로 압송되어 8년의 징역형을 산 뒤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되었다.

마흐노 본인이 바라던 결과는 아니었겠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상징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단적인 예시로 유로마이단이 외치던 구호 중 하나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었는데 이것은 마흐노의 군대가 실제로 사용하던 구호 중 하나였다.

냉전시기 소련체제와 소련의 위성국들에게 마흐노의 세력은 힘 없는 농민들에게 약탈을 자행하는 도적 집단의 대표격으로 인식되어 선전되어왔다. 북한에서 종종 자행되는 열약한 인민군 후방부대나 건설부대의 주민약탈 행위를 일컬어 주민들은 마흐노 부대라는 은어를 쓰는데, 북한 주민들의 사상교육에서 이러한 인식이 부각된 영향으로 보인다. 훗날 레닌주의 vs 아나키스트 대규모 흑적충돌 사례 라운드 2인 스페인 내전에서도 소련이 파견한 NKVD는 스페인 현지 자생적 좌파중엔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던 CNT를 두고 '스페인의 마흐노 폭도들'이라 부르며 숙청하려고 했고, 반대로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 또한 이미 1919년대부터 러시아 아나키스트 망명객들을 통해 레닌주의에 대한 반감을 키우며 공산당을 불신했다.

마흐노가 만든 노래도 있다. 어머니 아나키는 아들을 사랑하신다네(Анархия мама сынов своих любит)


한국어 자막 버전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으며, 심지어 한국어로 변안된 버전도 있다!

러시아의 록 밴드 류베(Любэ)는 그에 대한 노래를 불렀는데 제목은 아버지 마흐노(Батька Махно)이다.[55] 마흐노 성니메[폐쇄]


러시아어 해석
Батька Махно смотрит в окно
На дворе темным-темно
На посту стоит монах
Еле-еле на ногах
Спит монастырь, дремлет село
Мошки бьются о стекло
Звезды светят и луна
А в округе тишине

Мертвые с косами вдоль дорог стоят
Дело рук красных дьяволят
Мертвые с косами сбросили цар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эх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Видели их истинный крест
Вся губерния, весь уезд
Проскакали сквозь туман
Что не весел, атаман ?
В поле гуляй, пламя пылай
Револьвер давай стреляй
Любо-любо, братцы, жить
Не приходится тужить

Мертвые с косами вдоль дорог стоят
Дело рук красных дьяволят
Мертвые с косами сбросили цар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эх

Мертвые с косами вдоль дорог стоят
Дело рук красных дьяволят
Мертвые с косами сбросили цар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Занималась алая, эх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заря
Алая заря
아버지 마흐노께서 창문 밖을 보시네
뜰은 어둑어둑 할 뿐
초소에는 승려가
겨우 다리를 펴고 있다네
교회에서 자고 마을에서 졸고
낱벌레는 창문을 두고 싸우지
별님은 달님과 함께 빛나고
이 지역에는 고요함만이...

낫과 함께 죽은 자는 길에 서 있다네!
이 일은 빨갱이 악마[57] 들의 짓이라네!
낫과 함께 죽은 자와 쫓겨난 차르놈
진홍빛을 맞이하네! (진홍빛을 맞이하네!)
진홍빛을 맞이하네! 아!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그들의 진정한 십자가를 보았소
모든 그 땅, 촌 동네에서 말이오.
파발마는 안개를 헤치며 가는데
뭐가 재미없단말이오 대장 나으리?[58]
들판을 지나면 화마가 몰아치고
육혈포를 쏴제껴라!
좋아 좋아, 형제들아 살아남아라!
절대로 원망하지 말아라!


낫과 함께 죽은 자는 길에 서 있다네!
이 일은 빨갱이 악마들의 짓이라네!
낫과 함께 죽은 자와 쫓겨난 차르놈
진홍빛을 맞이하네! (진홍빛을 맞이하네!)
진홍빛을 맞이하네! 아!

낫과 함께 죽은 자는 길에 서 있다네!
이 일은 빨갱이 악마들의 짓이라네!
낫과 함께 죽은 자와 쫓겨난 차르놈
진홍빛을 맞이하네! (진홍빛을 맞이하네!)
진홍빛을 맞이하네! 아!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새벽, 새벽, 새벽
진홍빛 새벽

러시아에서는 마흐노의 생애를 담은 12부작 드라마인 네스토르 마흐노와 고난의 삶( Девять жизней Нестора Махно)이 제작되었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만든 게임 Hearts of Iron II의 대형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패전 이후 혁명이 성공한 아나코생디칼리슴 국가 프랑스 코뮌으로 망명해 장군진에 등장한다. 노동총의회 선거에서 아나키스트 파벌이 승리할 경우 국가 지도자로도 등장한다. 본 게임과 세계관의 본격 수혜자 중 하나. 여기선 1차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현실 역사처럼 러시아 뿐만 아니라 그보다 조금 뒤 1919년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터져 전자 러시아 혁명은 실패했지만 후자는 성공했는지라 현실에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던 망명생활과 달리 동서 혁명 양쪽에서 모두 활약한 거물로 대접받고 있다.
Hearts of Iron IV 카이저라이히에선 프랑스 코뮌에서 아나키스트가 집권하면 방위위원회가 국가 원수가 되며, 마흐노는 아르헨티나 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에 파견되어 장군으로 등장한다.

메트로 2033 유니버스: 어두운 터널에서는 마흐노의 이념에 따라 살아가는 '네스토르의 무정부주의자들'들이 등장한다.

4. 연관 기록물

5. 관련 문서


[1] 우크라이나어 인명인 막심(Максим)의 애칭이다. 성씨로 쓰일 때는 마흐넨코(Махненко), 미흐넨코(Міхненко), 미흐노(Міхно) 등으로 쓰인다. [2] 인터넷으로 올라온 러시아어 원문은 소실되고 영문본만 남아 있다. # 여기에 2004년 출판된 아나키스트의 초상이라는 책에 나온 중역본을 참고했다. [3] 흔히 마흐노우슈치나(Махновщина)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4] '무정부주의자 정부군' 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시각이 많다. [5] 마흐노도 혁명기엔 20대 후반의 젊은 투사로 이름 날렸지만, 반데라는 아예 스무살 가량 더 어린 1909년생, 러시아 혁명기엔 당시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였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잼민이였다. [6] 사상적으로 반데라를 파시스트라 분류하기에는 여러모로 복잡한 감이 있기는 하다. 다만 '순수' 우크라이나인 국가를 설립한다는 목적으로 폴란드인, 유대인 러시아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극우 민족주의자에 전쟁범죄자였던 것은 다수가 동의한다. 폴란드 역사학자 에바 시마즈코 저술 에세이 [7] 네스토르 마흐노의 민병대를 담은 유일한 기록영상이다. [8]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다. #을 참고. [9] 1889년이라고 작성한 문헌도 있으나 그것은 그의 부모가 징병 기피를 위해 출생신고를 늦게 했기 때문이었다. [10] Г은 보통 g으로 발음하나 우크라이나어에서는 h로 발음한다. [11] 본래는 볼셰비키 당원이었으나 아나키즘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마흐노와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하였고 망명 후에는 그의 생애를 증언할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다가 1934년 다시 소련 정부의 허가를 받아 귀국하였으나 대숙청 시기 아나키즘 지하조직을 만들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2] 이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인 시각차 때문이었다. 두 사상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은 비슷했으나 마르크스주의는 그걸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단계가 필요하다고 본 반면 아나키즘은 그러한 '중간 기간'을 새로운 채제를 위한 위선적 장치로 간주하였고 이 때문에 레닌은 마흐노를 '이기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을 파악할 줄 모르는 몽상가'로 판단했다. [13] 이때 카자크의 약탈로 인하여 도시는 페허가 되어 있었고 셋째 형은 수배 중이던 마흐노로 인하여 사살당하고 말았다. [14] 본 문서의 최상단에 인용한 문서도 그때 발표된 것이다. [15] 백군의 목표는 구 질서 회복으로서 민족 독립, 토지 개혁, 노동자의 공장 장악 모두에 적대적이었다. [16] 한편 브란겔 역시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약속하는 대가로 볼셰비키와의 공동전선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마흐노는 사절단을 처형했다. [17] 각각 제정시대 농민반란을 선동했던 자들이다. [18] 소련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납치되었다가 베를린의 소련 대사관에 들어가기 직전 탈출한 것이라는 증언도 있다. [19] 이것이 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보통 아나키즘은 권위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가능성을 내포한 조직마저 부정하지만 볼셰비키들의 숙청을 직접 경험한 마흐노는 그런 '종이 위의 혁명'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주류를 차지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슴, 아나코코뮤니즘 분류와는 다르게 저 시대에는 크로포트킨 계열의 사회적 아나키즘 부류는 소수였으며 대다수는 반란적 아나키즘이 다수였다. [20] 그러나 전자는 그에 대한 의혹이 소련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던 사람을 즉결처분한 일화가 전해지는 점, 주요 참모들이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던 것을 볼 때 매우 희박하다. [21] Janzen, J. H. Aus meinem Leben: Erinnerungen. Rosthern, SK: Rundschau, 1929 [22] 현재의 하르키우 지역 [23] Ehrt, Adolf. Das Mennonitentum in Russland. Berlin, 1932 [24] Loewen, J.A. & W.L. Prieb, Only the Sword of the Spirit Hardcover. 1997 [25] 당연히 정확한 숫자는 아니고 참고수치로 보면 된다. [26] 여기에 마흐노의 동료 볼린의 서술에 따르면 마흐노는 음주와 강간을 즐기는 흠이 있었다는 암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마흐노주의자들의 보복이 두려워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Sean David Patterson, The Makhnos of memory: Mennonite and Makhnovist narratives of the Russian Civil War, 1917-1921, 2013 그러나 이 인용에는 세가지 흠이 있는데 생애 부분에서 언급하듯 마흐노는 파리 망명 이후로 고립되었기 때문에(오히려 볼린의 주장이 당시 프랑스 아나키즘 사회내에서는 더 주류였다.) 그를 지지할만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불명확하다는 점이 첫번째이다. 폴 애브리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1989. 두번째는 막상 볼린이 사망한 직후 그의 유언으로 출판된 유고집인 The Unknown Revolution: 1917–1921, 1947에서도 딱히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볼린과 마흐노는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부터 서로 갈등을 빚던 사이였기에 그에 대한 호의적이지 않은 증언을 남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Ida Mett, SOUVENIRS SUR NESTOR MAKHNO, 1948(프랑스어) [27] 그가 자란 19세기 말은 우크라이나 민족문화가 탄압받던 시기였으니 우크라이나 문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28] Klippenstein, L. ‘The Selbstschutz: A Mennonite Army in Ukraine 1918-1919, 2007 [29] Rempel, D.G. & C. Rempel Carlson A Mennonite family in Tsarist Russia and the Soviet Union, 1789-1923,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2 [30]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아카넷, 2016 [31] 그 중 일부는 현지 메노나이트가 아닌 독일인(패잔병?)이었다고 한다. [32] Krahn, C. and A. Reimer. ‘Selbstschutz,’ Global Anabaptist Mennonite, 1989 [33] 당시에는 국가를 개인에 대한 억압의 장치를 보고 이에 대한 공격적 저항활동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평화적인 저항활동을 벌이던 옘마 골드만조차도 "(노동의 대가인) 빵을 주지 않으면 빵을 빼앗아라"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는 당시 유럽을 기준으로 봐도 제도가 낙후되어 이에 반발한 폭력테러활동이 정파를 불문하고 극심한 곳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러시아 황족치고 사회혁명당원한테서 폭탄 테러시도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 [34] Vyacheslav Azarov, Kontrrazvedka: The story of the Makhnovist intelligence service (2008) [35] Peter Arshinov, 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 (1918-1921), 1923 [36] Klippenstein, L. ‘The Selbstschutz: A Mennonite Army in Ukraine 1918-1919, 2007 [37] 애초에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메노나이트가 극소수인 이유는 러시아 내전 시기의 학살이 문제가 아니라 독소전쟁 시기에 독일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자흐스탄 인구의 3%는 독일인이다. [38] 페틀류라가 포그롬을 막으려 했다는 학설은 소수의 수정주의적 학설로 정설이 아니다. [39] 허승철, 우크라이나 현대사(1914-2010), 2011 [40] 러시아 내전 당시의 우크라이나를 일컫는 우크라이나 역사용어 [41] 본 문단에서 앞서 언급했듯 그 병사는 즉결처분당했다. [42] 아마 이들도 메노나이트였을 것이다. [43] Alexandre Skirda. (1999) Nestor Makhno--Anarchy's Cossack: The Struggle for Free Soviets in the Ukraine 1917-1921 [44] 본명은 프세볼로트 예이헨바움(Все́волод Миха́йлович Эйхенба́ум)이었다. [45] 한국어본으로는 아나키즘 :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46] 한국에서는 기병대 라는 제목으로 번역됨 [47] 물론 빅토르 세르주는 마흐노가 알콜중독자이자 허세부리며 난폭한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도 했다. [48] 출처: 마흐노 - 나의 크렘린 방문(MY VlSIT TO THE KREMLIN) [49] 폴 애브리치, 아나키스트의 초상, 204p [50] 존 몰리뉴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이 스페인, 이집트 등지에서 아나키즘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51] 벨라루스 태생의 아나키스트. 다만 마흐노를 지지했던 아나키스트임을 감안해야 한다. [52] 흑군이 죽어라 싸웠던 볼셰비키의 당시 2인자 트로츠키가 마흐노를 옹호하는 말을 한 이유는 마흐노와 볼셰비키의 동맹을 주선한 게 바로 트로츠키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심복이자 붉은 군대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가 협상 실무를 맡았다. 파벨 디벤코 또한 트로츠키의 계파이며, 마흐노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언급된 빅토르 세르주 또한 트로츠키파였다. 트로츠키는 실권이 없었던 원로 볼셰비키 레프 카메네프를 제외하면 비볼셰비키 좌파에 '그나마' 우호적인 인사였고, 야코프 블룸킨 같은 사회혁명당계 인사나 콜론타이같이 리버럴한 이들, 2월 혁명의 지도자였던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등도 트로츠키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본인이 진압한 좌파공산주의 반란인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의 생존자들에게 지지를 받은(...) 기이한 이력까지 있다. [53] 주로 율리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국제파 멘셰비키였다. [54] 레닌이 마흐노와는 달리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바로 멘셰비키들에 대한 태도였다. 마르토프의 국제파 멘셰비키는 소련 내에서 최후까지 남은 야당세력이었고, 본래부터 볼셰비키보다 거대한 세력이었기에 1920년대까지도 소비에트에서 멘셰비키 후보가 당선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차없이 탄압하여 멘셰비키들을 망명시키거나 체포해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소련 붕괴 당시까지 소련 내에 살아 있었던 멘셰비키 인사는 단 두 명에 불과했다. [55] 사실 네스토르 마흐노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고 1968년작 소련 영화 기억하지 못하는 복수자들(Elusive Avenger)의 줄거리와 연관이 있다. 해당 영화에서는 악당이 백군으로 그려졌지만 원작이 된 소설에서는 마흐노의 군대였기 때문. [폐쇄] [57] 동명의 영화 красных дьяволят의 패러디. 농민을 약탈하는 마흐노 반군에 맞서는 볼셰비키 요원들의 활약을 담은 소련 최초의 액션 영화이자 오락 영화이다. 여기서는 당연히 볼셰비키들을 비꼬는 의미로 담았다. [58] 원문은 아타만(атаман). 카자크족의 수장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