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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관련 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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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1.24. 정규앨범
1집 Got To Be There
1972.08.04. 정규앨범
2집 Ben
1973.04.15.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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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01.16.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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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08.10.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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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6.20. 정규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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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5.20.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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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ltim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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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Thriller 25
2009.10.26. 컴필레이션 앨범
This Is It
2010.12.10. 사후앨범
11집 MICHAEL
2012.09.18. 정규앨범 25주년 기념판
7집 Bad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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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Thrill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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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론3. 타 인물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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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클 잭슨의 업적을 평가하는 각종 언사를 정리한 문서.

2. 평론

마이클 잭슨은 미국인들이 흑인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선봉장이었다. 새로운 흑인 그룹들이 라디오에서 대히트를 쳤고, 음반회사들은 MTV 앞에 머리를 숙였다. 1977년 음악시장을 양분했던 펑크와 디스코 시대 이후 아마도 팝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해인 1983년에 오직 마이클 잭슨만이 앞으로 어떤 음악이 시장을 지배할지 아주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흑인 아티스트들의 출연을 거부했던 로큰롤 TV와 라디오 방송국의 굳게 닫힌 문도 현재 음악산업에서 가장 재능 있는 한 스타에 의해 무너졌다. 그 뒤로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Billie Jean의 크로스오버가 가장 중요했는데 디스코 시대 이후 처음으로 흑인음악을 백인 로큰롤 청중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AOR(당시 백인 음악 위주의 라디오 프로그램)도 무너뜨렸고 이로 인해 MTV가 완전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Billie Jean을 시작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큰 히트를 쳤다.
롤링 스톤/ The Year in Music: 1983
마이클 잭슨이 팝 스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을 따라 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잭슨은 단순히 팝과 댄스 레코드를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걸 원했고 알앤비 리듬에 락 기타와 디스코 선율, 펑크를 융합했다. 중얼거리는 듯한 알앤비 베이스라인에 아프리칸 전통 리듬을 융합한 Wanna Be Startin' Somethin'은 여전히 난해하면서도 웅장하게 들린다. 당시에 누가 이런 음악을 했던가? 그리고 더 주목할 것은, 이런 음악을 들려줄 생각을 한 아티스트가 이후에 그 누가 있었던가? 앞으로 잭슨과 견줄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잭슨의 혁신성을 그들 각자의 작품에 적용할 제자들만이 앞으로도 꾸준히 생겨날 뿐.
롤링 스톤/ Michael Jackson's Indelible Pop Legacy
Thriller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음악 형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롤링 스톤/ THE 40 MOST GROUNDBREAKING ALBUMS OF ALL TIME
단순한 앨범 그 이상의 가치를 넘어, Thriller는 음악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팝의 판도를 영원히 바꿔 20세기와 21세기 하나의 글로벌 문화 현상으로 남아있다. 스릴러 앨범의 곡들은 너무나도 역동적이고 독특해서 락/팝/소울 같은 장르의 정의도 내릴 수 없다. Beat It은 에디 반 헤일런의 기가 막힌 기타 연주와 함께 팝과 락을 새롭게 융합하여 오랜 시간 지속돼 오던 흑백 음악의 장르적 경계를 허물었다. Wanna Be Startin' Somethin' 같이 아프리카 리듬, Billie Jean 같이 알앤비에 기반을 둔 곡들도 있다. 이전 그 누구도 이렇게 광범위한 장르와 소재를 가지고 앨범을 만든 적은 없었다. "마이클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업적인 인종적 장벽의 붕괴는 뮤직비디오와 함께했죠." 팝 비평가 조 보겔은 말한다.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예술 형식인 뮤직비디오에 매료된 마이클은 뮤직비디오에 스토리를 넣어 대규모 스케일로 제작해 모두가 즐기길 바랐다. 하지만 화려한 촬영기법, 극적인 이야기 전개 그리고 멋진 안무를 담고 있었음에도 Billie Jean 뮤직비디오는 백인 락 아티스트 위주로 프로그래밍되던 초기 MTV에 방영이 거부된다. 이에 마이클의 소속사 Epic은 MTV에 끝까지 항의했고 결국 MTV는 손을 들었는데 한번 이 벽이 무너지자 MTV의 시청률은 고공행진, 이어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에게도 활짝 문이 열렸다. "마이클은 MTV의 재키 로빈슨이죠" 문화비평가 투레는 말했다.. 그의 예술성, 안무, 음악은 계속해서 팝, 소울, R&B 그리고 힙합 아티스트와 팬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RIAA/ Michael Jackson's 'Thriller' First Ever 30X Multi-Platinum RIAA Certification
이전 그 어떤 흑인 아티스트도 마이클 잭슨과 같은 혁명적인 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다. 잭슨은 장르를 초월하는 음악 스타일을 창조해 팝 아이콘의 지위를 얻었고 팝 음악에서 뮤직비디오와 댄스의 역할을 재정립했다. 또 인종 간 경계를 깨뜨리기 시작했는데 'Billie Jean'과 'Beat It' 두 곡 모두 빌보드 1위를 기록하며 MTV의 인종 장벽을 무너뜨렸다. 잭슨 이전 1980년대 초반까지는 백인 락 음악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잭슨이 가장 거대한 스타가 되면서, 만약 잭슨이 아니었다면 소외됐을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에게도 부상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잭슨은 깜짝 놀랄 정도의 천부적인 노래 실력으로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11살의 나이에 대부분의 성인 보컬리스트들보다도 더한 능숙함과 열정으로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과 같은 빌보드 1위 곡들을 배출했다.. 1983년 모타운 창립 25주년 기념 빌리진 공연에서 문워크를 선보이는 잭슨을 본 수많은 대중들은 이제 댄스와 더욱 강렬한 음악, 리듬을 선보이는 가수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바야흐로 프린스와 마돈나의 등장에 전국적으로 열광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잭슨 이전에 MTV에 나오는 댄스 음악은 오직 영국 음악뿐이었다. 스릴러 이후 MTV는 힙합, 더 나아가 결국 랩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토니 스클라파니 음악평론가/ Today 매거진 기고문, 'Jackson changed course of music, society'
흑인음악과 백인 음악의 크로스오버가 새로운 사운드로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9년 KBS 인터뷰)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의 말마따나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 (2009년 한겨례 기고문)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뉴팝을 발명했다'라는 평을 받거든요. 여기서 뉴팝이란 것은 당시 팝 음악계 내부에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인종적 취향의 벽 자체를 아울렀다는 얘기거든요.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박은석 음악평론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었다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였다.
김광한 음악평론가/ 동아일보 인터뷰, 존재만으로도 위대했던 '팝의 황제' 44년 무대조명 꺼지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항상 흑인 스타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 흑인 스타가 1등은 못했어요. 항상 백인한테 뒤졌죠. 그런데 마이클 잭슨에 와서 흑인이 제대로 톱이 된 겁니다.(2015년 JTBC 인터뷰) 마이클이 왜 중요하냐, 마이클이 등장한 83년에 드디어 서러움 당하던 흑인음악이 진짜 1등으로 올라섰거든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마이클은 이곳저곳에서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의 흑인들의 정서를 온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도 사실 마이클에게 채무자다 이런 표현을 써요. 마이클이 없었으면 미국 흑인들이 무슨 희망을 갖고 살았겠어요. 그니까 마이클은 흑인음악이 제대로의 우위를 점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고 어떻게 보면은 미국에 적어도 음악에 관한 한 계급 질서를 바꾼 거죠. 댄스음악이 세계적 주도권을 갖게 된 것도 마이클과 함께라고 볼 수 있고요.(2017년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그는 또한 음악적 현상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의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사회에서 신음한 흑인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류하고 있다. 그와 같은 흑인 스타들의 분발로 설움과 차별에 시달려온 흑인들은 자신감을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 생애 어려울 것 같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전이던 사후던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음악사적 위상이 견고하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1980년대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의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백인들의 사랑을 받은 흑인은 없다.(2009년 위클리 공감 기고문)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당시에 주류 음악이었고 마이클과 동시에 성공했던 뮤지션들도 모두 주류 아티스트였습니다. 이러한 마이클의 영향 속에서 변화를 시도한 장르가 바로 헤비메탈입니다. 젊음의 반항을 반영했던 헤비메탈이 1980년대 들어와 약간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마이클 잭슨처럼 '주류로 가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도 한복판에 깃발을 꽂자는 그러한 흐름은 미국 LA에서 싹텄습니다. 'LA 메탈'이라고도 부릅니다. LA 건즈, 머틀리 크루, 포이즌 등의 LA 메탈 그룹은 불량한 20대 남자들만 헤비메탈을 들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헤비메탈의 개념 붕괴를 시도했습니다. 여성과 10대들도 연주하고 들을 수 있는 헤비메탈 음악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이클이 추구한 상업적인 스타일에 부응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것입니다. 마이클과 메탈의 변신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관련이 있습니다. 마이클이 주류에서 위력을 떨치면서 다른 음악 장르 역시 팝(pop)화 현상은 물론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는 점입니다. 1984년 마이클의 인기가 여전할 때 밴 헤일런이 발표한 'Jump'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점령했습니다. 정통 록이 아니라 신시사이저로 듣기 편안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밴 헤일런은 이 곡을 가리켜 헤비메탈 대신 '팝 메탈'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무거운 중금속 사운드가 아니라 팝 금속의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무난하게 들을 수 있는, 그들의 지향대로 10대와 여성들도 들을 수 있는 헤비메탈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문에 헤비메탈 하드코어들에게 약간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팝 메탈의 팬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팝 메탈의 기운이 절정에 달한 때는 본 조비의 활약 당시였습니다. 팝 메탈은 본 조비에 와서 완성됩니다. 헤비메탈도 198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결국 상당히 팝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 록'
마이클 잭슨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속출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이다. 한국도 이전엔 댄스음악, 댄스가수라는 수식이 없다가 마이클 잭슨 시대를 맞아 일반화됐다.(2009년 위클리 공감 기고문) 마이클 잭슨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매체 환경의 변화입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이전 유력 매체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을 알게 된 것은 뮤직비디오에서였습니다. 당시 마이클의 뮤직비디오는 미국의 유선방송인 MTV에서 상영했습니다. 개국 당시 MTV는 '뮤직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그룹 버글스의 노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연일 틀었습니다. 이 곡을 통해 이제는 뮤직비디오 시대임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이러한 MTV의 의지외 욕구는 1982년 마이클에 와서 마침내 실현됩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어떤 밴드를 좋아한다 해도 얼굴도 모르고, 밴드의 리더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가수 얼굴도 모르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고문이죠. 이와 같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출하고 주도한 사람이 바로 마이클입니다. 마이클 덕분에 마돈나, 컬쳐 클럽도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의 주요 매체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MTV로 확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뮤직비디오가 얼마나 멋있게 만들어졌나를 통해서 음악을 접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다매체 시대입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마이클이 처음 시도하여 대중적으로 흐름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미국의 대중문화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 이전과 이후를 전기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로큰롤이라는 음악이 흑인에게서 백인에게 전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은 록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흑인음악인 소울과 R&B를 바탕으로 백인음악인 팝과 록이 완벽히 결합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비틀즈 이후 영국 뮤지션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던 미국의 대중문화계에 미국적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고, 음반시장에서 비주류로 밀려나 있었던 흑인음악이 주류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Thriller] 앨범의 뮤직 비디오를 시작으로 MTV도 흑인 뮤지션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로 유명한 존 랜디스 감독의 ‘Thriller’와 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Billie Jean’, ‘ Beat It’의 뮤직 비디오는 80년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분장과 영상 기법으로 제작되어, 뮤직비디오계의 역사를 바꿔 쓰면서 1983년도 MTV 뮤직 어워드를 휩쓸고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인종적 경계와 장르를 통합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그동안 흑과 백으로 나뉘었던 미국의 대중문화가 흑백의 구분없이 함께 화합하여 세계 시장을 선두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자 자신이 문화 그 자체였던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은 현대 음악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대중들에게 새로운 문화의 문을 열어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마이클 잭슨은 Thriller로 1980년대와 1970년대에 명확한 선을 그으며 록의 시대에서 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경계선마저 무너뜨렸던 셈이다.
김작가 음악평론가/ 시사IN 기고문,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마이클 잭슨은 음악계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이자 사랑받는 퍼포머, 그리고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아마도 그 어떤 뮤지션도 음악 산업에 마이클보다 커다란 임팩트를 남기진 못했을 것이다. 그의 쇼트 필름 'Thriller'에서 보이듯이 그의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은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 놓았다. 마이클의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문화 속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뮤직비디오를 음반 산업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주었다. 활동 기간 동안 마이클은 로봇춤과 문워크 같은 복잡한 춤 테크닉 여러 가지를 유행시켰으며, 심지어 반중력 동작을 해내기 위해 특수 신발을 제작하여 특허를 내기도 했다. 그의 쇼트 필름에서 보이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빌보드/ Michael Jackson to Make Television History on the BBMAs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이전 1980년~1982년 사이 음반 시장은 망해가고 있었고, CBS 에픽의 1982년 8월 13일은 직원들의 주요 해고가 있던 날로 검은 일요일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모든 걸 바꾸었다.
빌보드 2009년
음반을 들으면 이건 소리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마이클의 음반은 스튜디오에서 들으면 사운드가 다른 음반과는 다릅니다. 정말 보통 소리가 아닌거죠.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유행을 선도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마이클은 음악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입니다. 마이클과 함께 소울팝, R&B팝이 궤도에 올랐고 프린스, 라이오넬 리치,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르는 컨트리 팝이었지만, 마이클이 우뚝 솟으면서 완전히 음악의 양태가 바뀌었습니다. 마이클의 등장으로 인해 세련된 흑인음악, 재즈나 가스펠의 영향을 받은 음악마저도 등장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기본적으로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정서가 있다. 대중음악계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너를 지칭하는 이 고유명사에는, 20세기를 살아왔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의 가슴과 머릿속에 조각조각 아로새겨진 다채로운 정취와 이미지가 녹아 있다. 여기에는 음악과 그만의 창법과 목소리, 문워크로 대표되는 춤과 특유의 몸짓, 장갑과 모자를 비롯한 의상, 화려한 뮤직비디오, 펩시콜라, 백반증과 성형수술, 사생활과 관련한 온갖 스캔들 등이 포함된다. 그의 별칭인 ‘팝의 제왕(King of Pop)’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만 마이클 잭슨의 위상과 영향력은 그저 ‘팝 스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대중음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팝 음악’과 동격으로 여겨진 유일한 아티스트로서, 그는 80년대의 위대한 음악적 성과를 통해 이후의 팝이 향하게 될 방향을 제시하고 음악시장의 지도를 바꾸었음은 물론 헤아릴 수 없는 음악인들에게 끝없는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해왔다.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두 개의 영역에서 빛을 발한 게 아니다. 그는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자 탁월한 역량의 작곡가, 위대한 프로듀서, 감각 있는 편곡자, 천재적인 춤꾼이자 안무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이상적인 공연기획자이자 연출가였다. 더 놀라운 건 흔한 멀티플레이어들이 그러하듯 여러 분야에 걸친 약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흉내를 내는 수준이 아니라 전문가들을 감탄하게 할 정도의 감각과 실력, 아이디어, 실행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들의 마이클 잭슨을 향한 존경심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이 모든 요소들은 복합적 화학반응을 거쳐 음악과 퍼포먼스의 형태로 일체화를 이루었고 전에 없던 독창적인 음악과 무대 미학으로 표출이 되었다. [Thriller](1982) 앨범 이후 그가 걸어온 길은 말 그대로 대중 예술의 핵심요소들이 조화를 이룬 종합 예술 활동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R&B와 팝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사운드의 바탕에는 록과 소울, 펑크(funk)와 디스코, 재즈, 그리고 컨템포러리 R&B의 선율과 힙합의 리듬을 결합한 뉴 잭 스윙(new jack swing)에 이르는 여러 스타일이 자리한다. 물론 그의 치밀하고 완벽한 사운드의 완성에 퀸시 존스(Quincy Jones)나 테디 라일리(Teddy Riley),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 빌 보트렐(Bill Bottrell) 등과 같은 거물 프로듀서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방향과 색깔을 잡아가며 각 요소의 이상적 배치 및 조화를 통해 시너지를 창출한 인물은 싱어 송 라이터이자 프로듀서인 마이클 잭슨이었다. 거의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스튜디오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장비와 음향기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재능 있는 아티스트로서의 마이클 잭슨이 여기 있다. 여섯 살 때부터 형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Jackson 5)의 멤버로 활동을 펼쳐온 어린 마이클 잭슨을 사로잡았던 건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와 재키 윌슨(Jackie Wilson), 아이즐리 브라더스(Isley Brothers) 등 로큰롤/R&B 뮤지션들,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 시대의 천재적인 배우이자 춤꾼들인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와 진 켈리(Gene Kelly),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였다. 특히 제임스 브라운의 놀라운 퍼포먼스와 그가 엄마처럼 따랐던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의 가창 스타일은 어린 마이클 잭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잭슨 파이브 시절 버블검 팝 사운드의 중심에서 활기차게 노래하던 어린 마이클의 ‘보이 소프라노’ 목소리는 청소년기를 거치며 ‘하이 테너’로 변화했고, 성인이 된 후 발표한 첫 앨범 [Off The Wall](1979)을 통해 특유의 ‘딸꾹질 창법’을 선보인 이후 매끄럽고 부드러운 팔세토의 목소리를 지닌 매력적인 보컬리스트로 거듭나게 되었다. 미성숙한 소년의 그것과 같은 가느다란 음색과 의도된 가성, 그리고 공격적인 외침의 멋들어진 조화를 자유로운 음역으로 표출해내는 마이클 잭슨의 가창력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과도 같다. 독특한 호흡을 기반으로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숨결에 실리는 그의 목소리는 때로 슬픔을 가득 머금은 듯한 속삭임으로, 때로 날카로운 쇳소리로 청각을 자극하지만 그만이 지니는 우아한 떨림은 절묘한 하모니와 정교한 리듬 위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며 더없이 매혹적인 ‘마이클 잭슨의 음색’을 이루는 것이다. 노래의 재능과 더불어 그의 천재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은 작곡의 역량이다.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의 그래미 수상곡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를 비롯해 ‘Beat It’과 ‘Billie Jean’, ‘Wanna Be Startin' Somethin'’, ‘The Girl Is Mine’ 등 [Thriller]의 주요 작품들, 두 곡을 제외한 [Bad](1987)의 모든 곡들, ‘Black Or White’와 ‘Heal The World’, ‘Who Is It’, ‘Jam’, ‘Will You Be There’ 등 [Dangerous](1991)의 히트곡들, 그리고 [HIStory](1995)의 대다수 신곡들과 [Invincible](2001)을 채우는 여러 공동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훌륭한 곡들을 썼다. 1985년 아프리카의 기아 난민을 돕기 위해 팝계의 슈퍼스타 50여 명이 참여한 대중음악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의 감동적인 명곡 ‘We Are The World’ 역시 마이클 잭슨의 작품이었다.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가 함께 작업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마이클이 가사의 대부분과 주 멜로디를 만들었다.) 그는 악보나 노트에 곡과 가사를 쓰지 않았다. 멜로디와 노랫말, 편곡의 아이디어는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했고 그는 녹음 시 드럼과 베이스 등 필요한 리듬 라인의 연주 대신 악기 사운드를 ‘노래’했다. 그리고 비트박스를 포함한 그의 악기 흉내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그의 음악은 인종과 세대를 초월한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이클 잭슨의 많은 곡들에는 누구나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현란하고 화려한 그의 춤은 보는 이를 그대로 몰입시킨다. 여기에는 어떠한 철학이나 관념, 이념과 취향 따위의 ‘가치 판단’이라는 장애물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리듬과 선율에 기막히게 녹아드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강렬하며 미학적인 그의 몸동작은 본능의 영역에 자리하는 감성과 감각을 자극한다. 결국 그는 ‘엔터테인먼트’ 즉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고 기분 좋게 반응하는 요소들의 핵심적이고 강렬한 포인트를 집어내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완벽한 표출은 그를 ‘궁극의 엔터테이너’로 자리시켰다. 그가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우리에게 선사한 강렬한 쾌감은 다른 것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짜릿함이다. 이것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에 열광하는 이유다.
김경진 (Groovers 이사, 전 CJ E&M 음악사업부문 음악제작팀장)/ 출처
당시 최고 인물들을 앨범 작업에 참여시킨다는 원칙은 지금까지도 여전한데, 그래서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당대에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간 사운드로 여겨진다.
장호연 음악평론가/ 웹진 weiv, Thriller 앨범 리뷰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 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만 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 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고영탁 음악평론가/ 웹진 izm, 아티스트 리뷰 '마이클 잭슨'
국내 가요의 역사가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나오기 전과 나온 이후로 나뉘듯이 팝 음악의 역사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이 나오기 전과 나온 이후로 나뉜다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판매량과 더불어 마이클 잭슨의 '팝의 황제' 등극, 팝 음악의 흑백 장벽 붕괴, 심지어는 음반 산업과 카세트테이프 제조업의 호황 등등으로 이어질 만큼 수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음반이기에 오히려 이 음반의 녹음 상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가 들어본 1980년대 앨범 중에서 이 앨범만큼 녹음 품질이 좋은 앨범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녹음 품질이 대단히 뛰어납니다. 예를 들어 'Thriller'를 들어보면 도입 부분에서 삐걱거리는 나무문이 열리면서 무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룻바닥을 걸어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마치 영화처럼 그려지죠. 지금 2017년에 녹음된 앨범들도 이 정도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앨범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 세계의 모든 청소년들을 뒤로 걷게 만들었던 'Billie Jean'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이 곡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녹음하기 어려운 곡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요. 대중음악에 쓰이는 악기 중에 가장 듣기 어려운 악기가 베이스 기타라는 건 누구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 곡은 곡 전체에 흐르고 있는 베이스 라인이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곡이기 때문에 그 베이스 기타 소리가 묻히면 안 됩니다. 여기에 마이클 잭슨이 입으로 내는 소리지만 음표에는 그려지지 않는 소리, 이를테면 바람 소리나 딸꾹질 소리 등의 소리가 정확히 표현되어야 하죠. 게다가 어느 정도 해상도를 보장할 수 있는 모니터 계열의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좁은 녹음실에서 녹음을 한 후 믹싱 과정에서 리버브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잔향이 남게 녹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eat It'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어보면 후렴구로 반복되는 'Beat It' 이라는 가사가 한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리를 옮겨가며 소리가 나서 여러 명이 코러스를 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앨범이 발매된 시기가 1982년임을 감안하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이 곡의 기타입니다. 이 곡에는 메인 리프를 치는 기타와 펑키 리듬과 솔로를 치는 두 대의 기타가 있는데요. 헤비메탈처럼 보컬보다는 기타의 볼륨이 큰 장르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마이클의 앨범처럼 보컬이 중심이 되고 기타 연주는 반주가 되는 음악에서는 기타 소리가 엉키거나 묻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곡에서는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가 크지 않은 볼륨에서도 선명하게 잘 들립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연주가 너무 훌륭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곡의 메인 기타와 베이스 기타는 Toto의 스티브 루카서가, 기타 솔로는 에디 반 해일런이 연주했습니다) 믹싱을 잘 한 덕이지요. 그리고 그 뒤에는 전설적인 프로듀서가 아니라 그냥 전설인 퀸시 존스가 있습니다. 비단 [Thriller] 앨범뿐만이 아닙니다. 퀸시 존스와 결별하고 테디 라일리와 작업한 첫 번째 앨범인 [Dangerous] 앨범은 마치 이문세 4집처럼 거의 모든 곡이 싱글 커트된 앨범이죠.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학생 시절이라 변변한 오디오도 없이 그냥 싸구려 이어폰으로 들었는데요. 그래서 이 앨범이 그렇게 녹음 상태가 좋은 앨범인지 몰랐습니다. 한참 후에 오래된 CD를 정리하다가 이 앨범이 눈에 띄어서 CD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가만히 눈을 감았는데요. 그렇게 감은 눈은 1분도 안 돼 동그랗게 떠졌습니다. '아니 이 앨범이 이렇게 녹음이 잘 된 앨범이었나?' 하는 생각에요.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의 음악은 후배들에게 교본이 되고 있습니다... 팝의 황제라는 명성에 가려진 그의 음악과 놀라운 사운드 퀄리티는 멜론 Hi-Fi의 무손실 음원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 뮤직스토리 '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스릴러 앨범이 팝 음악 시장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면 확실히 Dangerous 투어는 팝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상철 음악평론가/ 인터파크 '댄저러스 투어 Live In Bucharest' 리뷰
1981년 8월 1일, MTV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직비디오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 초기에 MTV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이었다. 1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히고 있었지만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MTV가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지게 된 건 1983년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뮤직비디오를 통해서였다. 수많은 기록을 세운 이 곡의 오리지널 비디오는 13분짜리 단편영화의 컨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최초의 뮤직비디오였고 MTV를 비로소 대중적인 채널이자 광고 효과가 높은 채널로 자리 잡게 만든 1등 공신이었다.
차우진 음악평론가/ 네이버 뮤직 매거진 '뮤직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
MTV가 처음 개국했을 때 뮤직비디오는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음악을 듣기 위해 MTV를 틀었다. 하지만 마이클은 좀비들과 함께 춤을 추는 ‘스릴러’를 10분이 훌쩍 넘는 단편 영화로 제작해 뮤직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
김작가 음악평론가/ 시사IN 기고문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누구도 잭슨만큼 댄스라는 예술 형식을 대중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타비아 닌고 문화평론가 / 2009년 NY Daily News
마이클 잭슨은 1983년 5월 16일, 모타운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그의 넘버원 싱글 Billie Jean 공연을 선보였다. 그날 이후, 더 낫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앤서니 디커티스 음악평론가/ 저서 'Present Tense'
'Beat It'은 라디오와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TV 뮤직비디오에서의 흑인 아티스트와 백인 아티스트 간의 인위적인 장벽을 허물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그 이후 나온 흑인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 덕분에 MTV에 자연스럽게 비디오가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의 후광 효과를 본 거죠.
바브 슬레이드 Kiss FM 뉴스 국장/ 2009년 CNN 인터뷰
로큰롤 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에 의해서 대중화됐습니다. 그런데 로큰롤 뮤직은 흑인의 음악에서 출발했어요. 리듬 앤 블루스라고 하는. 디스코 음악 역시 흑인의 펑크, 소울 음악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음악을 가지고 대중적 스타가 된 뮤지션들은 다 백인들이었어요. 1950년대 선(Sun) 레코드의 샘 필립스 사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죠. "로큰롤 음악은 너무 젊은이들에게 사랑받을 음악인데 그래서 흑인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 청년 한 명만 있다면 단번에 대중들의 스타가 될 텐데.." 그때 등장한 게 엘비스였습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 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80년대 이 스타의 등장한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됩니다. 누굴까요? 마이클 잭슨입니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록큰롤이라는 음악이 흑인에게서 백인에게 전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은 록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흑인음악인 소울과 R&B를 바탕으로 백인음악인 팝과 록이 완벽히 결합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비틀즈 이후 영국 뮤지션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던 미국의 대중문화계에 미국적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고... (생략) 인종적 경계와 장르를 통합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그동안 흑과 백으로 나뉘었던 미국의 대중문화가 흑백의 구분 없이 함께 화합하여 세계 시장을 선두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잭슨의 노래는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 스릴러 앨범의 편곡은 록인지 펑크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규정짓기 힘든 리듬을 갖고 있으며 실제 사운드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강력한 조합과 어우러져 그의 하이톤 목소리에 딱 들어맞는다.
1984년 뉴욕 타임스/ MICHAEL JACKSON AT 25: A MUSICAL PHENOMENON
앨범의 모든 수록곡은 지금 발표되는 곡들과 섞어 틀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는 펑크, 포스트 디스코와 같은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록의 어프로치를 붙여 넣었으며, 동시에 퍼커션 운용으로 곡의 특색을 키우고 자신의 창법과 음색으로 전체를 아우르며 팝 음악을 새롭게 정의했다고 해도 될 정도의 성과를 이뤄냈다. 음악 자체의 결 또한 다양한 장르를 섞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로 완성해냈다.
박준우 음악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잭슨 집안은 흑인 사회의 케네디가이며 흑인 가수들을 주류 TV쇼에 출연시켜 인종에 관계없이 대중에게 표를 팔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제임스 워커 연예계 전문 변호사/ 2009년 CNN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 발표 훨씬 이전에 이미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 1972년 영화 Ben을 상영했던 극장의 상당수는 흑인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잭슨은 백인들이 장악했던 할리우드의 영화 주제곡 'Ben'을 불렀다.
워싱턴 포스트 2009년
마이클은 대중 문화에 끼친 영향력 측면에서 엘비스, 비틀즈, 프랭크 시네트라의 계보를 이어요. 21세기에 댄스팝, 알앤비 혹은 소울을 선보이는 그 누구든 마이클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ㅡ짐 데로가티스 음악평론가/ 2009년 NPR 인터뷰
오늘날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그 자신의 천재성과 엄청난 노력이 함께해 얻은 결실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그는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며 최고 음악인이 되기 위한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결국 최고의 가창력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 최고 수준의 댄스로, 전 세계 춤과 음악계 판도 모두를 바꾸었다. 어셔,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등 수많은 팝스타들이 현재까지도 그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등에 비견할 만한 이 팝 음악사에 길이 빛날 걸출한 음악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음악계의 큰 손실이다.
ㅡ조성진 음악평론가/ 조성진의 음치불가 '마이클 잭슨' 편
팝의 황제이자 아이콘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농구계의 마이클 조던 같은 인물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수식으로는 모자란, 그 분야 자체를 상징하는 거대한 존재 말이다. 마이클 잭슨은 ‘천재가 노력도 하고 성실함까지 갖추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다. 동시에 그가 지닌 여러 재능이 어쩌면 고루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가 무대에서 완벽한 퍼포먼스를 구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퀸시 존스 같은 위대한 프로듀서와 작업한 최고의 재능을 지닌 ‘댄스 가수’를 넘어 이미 그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능이 재능을 가렸다고 할까. 불세출의 뮤지션..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요절로 인한 신화화’ 운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요절로 인한 신화화로 인해 자신이 지닌 음악적 능력보다 과대평가된 뮤지션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ㅡ김봉현 음악평론가/ 시사저널 기고문 '마이클 잭슨, 세계를 열광시키다'
그 완벽한 사운드 안에서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에 지금의 그 어떤 팝 앨범보다 현대적인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흑인음악의 원초적인 비트와 그루브를 백인의 팝 안에 정제시켜 융화했고, 그것을 록의 다이내믹으로 폭발시켰다. 그가 곡의 도입부에서 선보이던 독특한 창법은 그대로 어셔와 저스틴 팀버레이크, 비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수많은 댄스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의 무대를 보며 퍼포먼스를 구상한다. 그는 모든 장르가 가장 쾌락적인 형태로 융합하는 팝 음악을, 가수의 춤이 단순한 몸짓을 넘어 거대한 무대와 합일 되는 새로운 퍼포먼스의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King of Pop’의 서거는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시작이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지구의 모든 뮤지션들이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받으며 살았지만, 정작 마이클 잭슨 개인은 그 업적으로부터 격리됐다.
ㅡ강명석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기고문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제왕 마이클은 인종차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백인 주류 사회의 총아로 등장했다.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사로잡는 무기는 다름 아닌 마이클의 팝 음악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우리는 이미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고, 비틀스, 레이 찰스, 밥 말리 등 대중음악의 시대별·장르별 전설을 목격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이클 잭슨을 “내 생애에서는 다시 보지 못할 레전드 중 레전드”(T 윤미래의 말)로 만들었을까? 그의 음악은 모타운의 유명 흑인 스타들을 자랑하던 디트로이트 R&B의 정수의 경계를 뛰어넘어 록과 재즈, 포크와 발라드 등 여타 장르의 장점을 모두 모은 정제된 작품이었다. 가장 많은 리스너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팝의 틀 속에 용해하는 절제력과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힙합을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MTV 등 주류 방송 매체로 진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이라는 사실을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은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ㅡ서병후 음악평론가/ 맥심 코리아 2010년 6월호
도대체 잭슨은 팝 음악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어떤 면에서 그가 팝 음악 그 "자체"를 정의하는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팝이 무얼까? 잭슨이 "Off The Wall'로 본격적인 Epic 레코드 시절을 열어가기 이전에 팝이란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주류 중산층 청취자 타겟의 보수적이면서 듣기 편한 이지 리스닝 재즈/팝의 변용 내지는 빅 밴드 음악의 한 갈래에 불과했다. 틴 팬 앨리가 그랬고 스윙이 그랬다. 락앤롤, 트위스트, 디스코, 훵크 등 흑인들의 음악으로 출발한 주류 대중음악도 결국 백인 주류 문화로 변형, 도입, 흡수되거나 아니면 저질 음악으로 낙인찍혀 조기에 사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개중 인기가 높았던 모타운은 확실히 광범위한 청자를 확보했지만 록에 비하면 저질스러운 싸구려 음악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고 그나마도 그 뒤를 이은 디스코와 훵크는 7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제대로 꽃피우기 전에 또 하나의 깜둥이 음악으로 낙인 찍히며 '블랙뮤직에 기반한 주류 팝 음악'이라는 미션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 잭슨은 정확히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었다. 다른 방식으로. 그는 메인스트림인 팝을 자신만의 블랙뮤직 속에 녹이며 백인들의 지배적인 팝 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 결과 MTV가 열광한 첫 번째 스타는 허여멀건한 금발의 청년이 아닌 검은 잭슨의 춤사위였고 백인 중산층 청자들의 보수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AOR(Album Oriented Rock)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것도 그의 음악이었다. 재즈에서 훵크까지 모든 음악을 꿰뚫고 있던 프로듀서 퀸시 존스, 그리고 클래식부터 록앤롤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스승으로 송 라이팅을 공부한 잭슨의 어프로치는 개방적이면서도 대담했다. 그들은 정확히 장르나 형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어떤 다채로운 사운드의 모음을 향해 질주했고, 이런 독창적인 방향 설정은 정확히 엘피 시대를 지나 씨디 시대로 향하는 첨단 현대 대중 음악의 취향을 정확히 포착해 내고 있었다. 장르 아티스트가 아닌 팝 아티스트의 영역, 타협적이지만 자유롭고 실험적인 한 곡 한 곡,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과 송 라이터, 엔지니어들이 총 출동, '곡에서 곡'을 향하는 거시적인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한 음에서 한 음으로' 집착해대는 음악 만들기를 실험한 결과 잭슨이라는 걸출한 아이콘이 탄생된 것이다. 뻔한 수치조차 들먹일 필요가 없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그는 전 세계 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이며, 미국 밖에 알려진 그 어떤 이들보다 더 '유명한' 미국인 엔터테이너였다. 음악성, 지명도, 상업적 성공 등을 모두 종합해 볼 때도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솔로 가수나 밴드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대중음악에만 시선을 고정, 시대적인 상징성만으로 명인들의 계보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40년대의 프랭크 시나트라, 50년대의 엘비스, 60년대의 비틀즈, 70년대의 레드 제플린을 잇는 80년대의 진정한 아이콘은 마이클 잭슨임에 틀림없다. 잭슨의 삶, 퍼스낼리티, 그리고 그의 음악은 오로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평생을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음악, 다른 세대, 다른 지역, 다른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려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장난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퓨어 팝의, 한때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원대한 꿈을 그는 잠깐이나마 이뤘고, 그 담대함이 가져다준 성공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결국에 그 업적들이 오늘날 킹 오브 팝이라는 그의 위상을 선사했다. 21세기 팝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 잭슨은 잠재력 있는 천재 소년 가수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예술의 경지를 탐하며 그의 모든 것을 꾸준히 연마해 나갔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페셔널리즘과 예술과 음악에 대한 그치지 않는 욕심은 그가 떠난 무대에 미국 팝의 정수라 부를 만한 여섯 장의 레코드로 똑똑히 증언된다. 그리고 팝의 전당에, 음악의 전당에, 대중의 전당에 마이클 잭슨의 별명 킹 오브 팝은 영원히 결번 아닌 결'별명'(retired nick name)되어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 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가수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매니아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다. 그는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1984) 대중음악의 피터팬이자, 성장하기를 거부한 소년인 세계적인 팝 스타 마이클 잭슨은 컴백을 시도했으나 목요일 오후 UCLA에서 사망했다. 잭슨 씨는 50살 인생 중 40년을 대중들의 시선에서 보냈고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이클의 커리어 중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타였으며 7억 5천만의 레코드[1]를 판매했습니다. 전국의 라디오 방송국은 그의 죽음에 반응하며 노래를 마라톤처럼 송출하고 마이클 잭슨의 혁신적인 뮤직비디오의 결과로 성공한 MTV는 그의 히트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009).
뉴욕타임즈 1984년 그리고 2009년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연예인입니다. 여태까지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충격적인 공연은 모타운 25주년에서 마이클이 문워크로 무대를 가로질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보자마자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미치지 못 하는 것은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을, 마이클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그 위인들과 함께 합니다. 빌리 진은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깊이가 함께 한 그가 만든 가장 중요한 레코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어떤 노래보다 빌리 진은 가장 훅(hook)이 많았습니다. 빌리 진은 기억하기 쉬우며 빌리 진 안의 모든 악기는 각기 다른 훅을 연주합니다. 당신은 거기서 12가지의 음악적 조각들로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롤링 스톤 2004년 선정 Rock N roll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35위 'Michael Jackson' 설명문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진정한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 잭슨신드롬 이후 그 어떤 가수가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일찍이 전설이 된 엘비스와 비틀스를 빼놓고 대중적 파급효과를 따진다면 잭슨을 능가하는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지구상 모든 인류가 열광한 가수는 잭슨이 유일했다. 그의 음악 앞에선 피부색을 떠나 모든 인종이 하나가 됐다. 매번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세션 연주자들을 초빙, 빈틈없는 마술 같은 스튜디오 레코딩을 창조했다. 'Billie Jean' 'Man in the Mirror' 'Black or White' 등 그렇게 탄생된 잭슨의 음악은 지구촌 수억 인구에게 감동과 전율, 눈물과 환희로 다가왔다.
ㅡIZM 2009년, 김獨 기고
마이클 잭슨은 한동안 팝의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팝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스가 있었다. 하지만 잭슨 뒤로는 아무리 기교가 좋고 인기가 높은 팝 스타라고 해도 갈수록 분화되는 음악팬들의 다양한 맛을 맞추지 못했다. 커트 코베인, 퍼피,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 비욘세, 라디오헤드도 '아니올시다'였다. 그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였던 마돈나마저 그의 수준엔 못 미쳤다...(생략)... 사실 잭슨보다 재능이 뛰어난 연예인이 결코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설적 댄서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춤을 칭찬했고 가수로서도 잭슨은 지나치리만큼 카멜라온이었다. 부드러움과 거침, 감칠맛 나는 비통함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생략) ... 특히 음악을 개념화한 뮤지션으로는 아마도 제임스 브라운만이 잭슨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졌을 듯하다. 잭슨과 선견지명 있는 그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디스코, 소울, 팝을 혼합했다. 사실 그런 음악은 많은 가수가 만들어내 매일 매시간 모든 팝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들린다. 하지만 잭슨의 노래만 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니 뮤직 사장을 지낸 토미 모톨라는 잭슨을 “음악 사업 전체의 주춧돌이 됐던 존재”라고 말했다. 안에서 느끼는 그의 삶이 뭐든 간에 밖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분명히 천재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대성공이라고 하든 기묘한 서커스라고 하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뉴스위크 2009년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음악을 그처럼 훌륭하게 선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ㅡNile Rodgers

3. 타 인물의 평가

마이클은 타고난 천재에요. 그 모든 명예와 영광을 안을 자격이 있죠.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또 슈퍼 퍼포머에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도 진짜 사람이라는 거죠.
스티비 원더/ 1984년 7월 빌보드 매거진
(질문에 대해 한 단어로 답변하는 라디오 코너에서 진행자가 마이클 잭슨에 대해 묻자) 천재(Genius)
프린스/ 2004년 라디오 Doug Banks Morning Show
음악 천재이며 매우 친절하고 감수성이 뛰어났던, 무대에 올랐을 때 항상 150% 이상을 보여줬던 청년. 마이클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당신의 모든 무대,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요.
아레사 프랭클린/ 2009년 Hollywood Bowl 콘서트
마이클 잭슨은 나에게 그의 눈썹 연필 화장품을 줬어요. 근데 그건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는 천재고, 똑똑하고, 나는 그가 자랑스러워요. 그는 혁신가이고, 해방자입니다. 마이클, 사랑해요. 당신 광고에 나 좀 넣어줘요. 마이클의 스타일, 옷, 그리고 몇몇 작품들을 내 과거 사진에서 보면, 리쳐드를 볼 수 있어요, 근데 지금은 그가 내 광대뼈를 갖게 됐어요. 네, 이걸 갖게 됐어요.
리틀 리처드/ Joan Rivers 토크쇼
비록 내 취향은 아니지만 마이클 잭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천재이다.
리암 갤러거/ 2009년 Daily Mail 인터뷰
저에게 있어 마이클 잭슨이 어떤 의미인지는 단 몇 마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는 나의 친구였죠. 제가 음악 산업에 뛰어들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이클이었어요. 저에게 영감을 주었죠. 저를 가르쳤어요. 그와 함께 웃기도 했죠. 그는 거대한 MTV에 흑인 아티스트들이 방송에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줬어요. 그의 가족과 아이들에게 깊은 슬픔을 느끼고 부디 그들이 마이클의 음악과 예술의 위대한 유산에서 위안을 얻길 바랍니다.
휘트니 휴스턴/ 2009년 휘트니 휴스턴 공식 사이트
마이클 잭슨은 언제나 내 우상이었어요. 그는 단순히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유니크한 천재에요. 그를 잃는다는 건 엄청난 손실이죠. 마치 케네디와 엘비스처럼요.
셀린 디온/ 2009년 Guardian Magazine
나의 멘토이자 형제, 친구인 마이클 잭슨이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 저는 그의 음악, 춤, 가사, 그리고 그의 순수한 천재성에 감동받아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마이클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날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R. 켈리/ 2009년 Telegraph Magazine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이나 프린스를 보며 자라지 않았나요? 저는 마이클이었어요. 저는 제가 커서 마이클 같은 가수가 되고 싶은건지 아니면 그와 결혼하고 싶은건지 결정하지 못했죠. 사람들이 마이클에 대해 뭐라 말하든 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요. 그는 퍽킹(Fucking) 천재니까요. 그거면 된거에요. 그는 어린시절을 도둑맞았어요. 그래서 항상 아이들을 주변에 두고 어울렸죠. 그럴 때면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 같고 삶이 마법같이 느껴지고 매일 땀 흘리며 일하러 가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저는 마이클을 이해해요.
에이미 와인하우스/ 2004년 가디언지 인터뷰
대중음악 역사상 그 어떤 아티스트도 마이클 잭슨보다 큰 임팩트를 남기진 못했다. 그는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는 마이클처럼 되고 싶어했다. 마이클은 언제나 팝의 황제로 남을 것이다. 삶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숨을 쉬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당신의 숨을 빼앗가 갔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의 예술을 보고 느끼고 들은 사람은 누구든, 마이클 잭슨을 경험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영광을 느낄 것이다.(2009년 비욘세 공식 사이트), 제가 처음 가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의 첫 프로듀서는 제가 마이클의 'Who's Loving You' 라이브 퍼포먼스를 계속 보게 했어요. 몇 시간이고 계속 반복해서 저에게 보여줬죠. 프로듀서가 원했던 건 제가 마이클의 소울을 느끼길 바랐던 거에요. 정말 그걸 느낄 수 있었죠. 마이클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어린아이였지만 베테랑이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다 큰 성인들보다도 더 감정을 잘 표출했죠. 그건 너무나도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것이었어요. 마치 신이 주신 것 같았죠. 마이클은 제게 때로는 테크닉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고민을 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어요. 마이클은 정말 저를 변화시켰어요. 덕분에 오늘날의 비욘세가 있게 됐죠.(2012년 비욘세 공식 사이트)
비욘세
그를 잃은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천재이자, 단순히 팝 뮤직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진정한 대사(ambassador)를 잃었어요. 그는 여러 세대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죠. 마이클을 보며 배운 모든 음악적인 것들과 무대 위에서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을 저는 언제나 소중히 간직할 거에요.
저스틴 팀버레이크/ 2009년 TMZ 인터뷰
지금 들어도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요. 스티비 원더와 함께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죠.(디지털타임스 인터뷰 '추억의 명곡에 실은 R&B 가수의 존재감), 솔로보다 잭슨스 시절의 음악을 더 좋아해요. 완전히 흑인스러운 느낌을 다 가지지 않아 더 신선했죠. 잭슨의 보컬이 너무 독보적이어서 그런 차이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보컬이 사실 말도 안 될 만큼 대단하잖아요.(네이버 뮤직 매거진 '다양한 보컬 색깔이 투영된 음반')'
나얼
오 갓! 정말 기가 막히게 움직이는군. 20세기 가장 위대한 댄서야. 내 후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젠 알겠어. 고마워 마이클.'
프레드 아스테어/ Mentalfloss 매거진 '14 Toe-Tapping Facts About Fred Astaire'
마이클, 네 솔로 앨범을 내가 만들고 싶은데 말야.” 나는 그의 눈에 비친 호기심 어린 놀라움에 꼼짝없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우리가 미개척지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즈 음악가인 나로서는 소름 끼치는 모험이었지만 말이다. 마이클과 당시 그의 매니저였던 프레디 드맨, 론 와이스너는 에픽 레코즈사를 찾아가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픽 레코즈는 내가 너무 재즈풍이라고 여겨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이클은 사업 수완이 아주 좋았다. 사람들이 과소평가한 그의 특성 중 하나였다. 마이클은 잭슨 파이브 활동으로 음반 사업을 오래 지켜봐 온 터라 음반사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음반사 측에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겠다고 우겼다. 결국 음반사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의 작업을 시작했다. 마이클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는 뒤에서 나를 등지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보컬 코치인 세스 릭스가 그를 혹독히 훈련해 음역을 넓혔다. 우리는 마치 전투를 치르듯 앨범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처럼 성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이클은 그 앨범(Off The Wall)을 계기로 10대용 버블 검 팝에서 벗어나 1980년대 팝음악의 심장에 자신의 깃발을 확고히 꽂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이클을 “내 작은 동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뛰어난 아티스트는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음반업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장담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음악 산업을 영구히 바꿔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클이 나를 떠났단 말인가? 그는 내 영혼의 일부였다.
퀸시 존스 2009년
만약 마이클 잭슨이 세상에 기여한 혁신적인 업적이 아니었다면 현대의 음악과 예술은 아마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ㅡL.A Reid 에픽 레코드 CEO/ 2014년 Xscape 앨범 발매 공식 논평
저는 마이클이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습니다. 수많은 엔터테이너들을 만나봤지만 마이클은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뛰어났어요. 지금까지 많은 뮤지션들이 그를 따라해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러겠지만, 그 누구도 마이클과 견줄 수는 없을 거에요.
딕 클라크(American Bandstand 진행자)/ 2009년 NBC 인터뷰)
북유럽 신화의 많은 신들이 마지막 날에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 멸망하는 사건을 가리키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단어는 바그너에 의해 사용된 후 위대한 시대의 종언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자리잡았다. 지난주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한 후 바로 이 표현이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죽음이 단순히 한 아티스트의 죽음이라기보다 세계 음악시장 쇠락의 상징적인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론가 강명석 씨도 지적했듯이 지금도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직 마이클 잭슨만이 '팝의 제왕'(King of pop)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지며 그의 부재는 엄청난 상실감을 남기는 것이다.
방시혁 작곡가/ 일간스포츠 기고문 '새로운 마이클 잭슨을 기다리며'
음악과 함께 전 세계를 끌어안은 자원봉사자이자 흡입력 있는 넘버원 뮤지션은 잭슨 이후에는 만나보기 어려울 거에요. 중학교 때 방구석에 처박혀 며칠을 밤새며 들었던 앨범인데, 사운드 퀄리티에 가장 많이 놀랐어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믹싱 실력이라고 할까요. 퀸시 존스와 결별한 잭슨이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와 만나 최고의 앨범을 탄생시킨 셈이죠. 전곡이 모두 타이틀곡 같은 느낌에다 한발 앞선 음악 기술을 통해 1990년대 팝계에 도장을 찍어버린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이로써 90년대 팝 시장이 정립된 게 아닐까라는 추측도 해보죠. '음악은 가장 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명반이에요.
가수 데프콘/ 네이버 뮤직 매거진 '나를 노래하게 만들어 준 음악들' Dangerous 앨범
가수가 되고 나서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느꼈다. 아무래도 마이클 잭슨에게 영감을 안 받은 가수가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음악을 듣고 자라서 중간에 들어가는 추임새 등 창법이 비슷하다.
박재범, 2014년 9월 2일 정규 2집 <EVOLUTION> 쇼케이스 현장에서
마이클 잭슨은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와 내가 연예인이 된 이유에요. 나는 이 큰 손실에 망연자실하며, 앞으로도 그의 유산에 감복하고 영감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그의 가족과 함께 기도합니다. 마이클은 깊이 그리울 것이지만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위대합니다... 가장 최고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보다 좋을 수 없을것입니다.
크리스 브라운 / "Music World Mourns Michael Jackson's Death: Madonna, Britney, Justin & Many More Paid Tribute" (26 June 2009)
그의 천재성은 유이하게 레이 찰스와 스티비 원더와 비교된다.
셰어 / Larry King Live (26 June 2009)
마이클 잭슨은 특별했다. 우리가 Bad를 함께 작업했을 때, 나는 그의 한 손에는 움직임의 절대적 숙달, 다른 한 손에는 음악에 대한 절대적인 숙달에 경외심을 느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움직이는 퀵 실버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완벽한 전문가와 함께 일하기에 정말 멋졌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진정한 예술가였다.
마틴 스콜세지 / "Music World Mourns Michael Jackson's Death: Madonna, Britney, Justin & Many More Paid Tribute" (26 June 2009)
마이클 잭슨이 '어반'으로 여겨져 MTV에서 그의 비디오를 얻지 못한 적이 있었다. 마이클 잭슨. 그래서 말 그대로 내가 죽은 후에 올 모든 사람들을 위해 문을 부수기 위해 나는 의류의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한다..
카녜 웨스트 #
내가 태어났을 때, 그것은 어머니가 듣고 있던 음악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나에게 세 번째 부모다.
더 위켄드 #
마이클 잭슨은 돌발적인 시민권 지도자 - 돌발적인 선구자다. 그는 예술성, 그림, 영화, 음악에서 많은 다른 영역에서의 장벽을 깼다.
― 돈 레몬 #
마이클 잭슨은 바로 그 젊은 세대들만을 커버하는 가수가 아니예요. 인류 전체를 상대하는 사람이지.
신해철 / Mnet 엠 스토리(M Story) 퀸시 존스 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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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반 판매량은 정확한 집계가 절대 불가능하며 마이클의 뉴욕타임즈에서 말한 음반 판매량도 추정치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