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KBS N SPORTS의 해설위원인 류지현의 선수경력을 서술한 문서.2. 아마추어 시절
서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틀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이종범과 함께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격수로 발돋움했다.3. LG 트윈스
3.1. 화려한 데뷔와 신인왕
1994 KBO 리그 신인왕 |
1994년 LG에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되는데, 리틀야구부터 아마 시절 내내 이종범( 건국대)과 함께 최고의 내야수로 각광받았음에도 프로행 직전인 한양대학교 야구부 4학년 당시 어깨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성적이 추락하고,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해 자신의 가치에 비해 낮은 7천5백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 연세대행이 확정됐음에도 온갖 공을 들여 영입한 입단 동기(이나 고졸인) 김재현의 계약금은 1억원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부분. 그러나 그는 신인 데뷔와 동시에 주전 1번타자 자리를 꿰차며 LG의 돌풍을 주도했고 그 해 태평양 돌핀스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이 해 .305-15홈런-51도루를 기록하며 신인 최초 20-20클럽의 김재현, 타율 3할1푼과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의 서용빈을 제치고 1994년 신인왕에 등극했다. 당시 유지현의 신인왕 수상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고졸신인임에도 리그 역사상 신인 최초 20-20을 달성한 김재현의 임팩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김재현의 신인왕 수상을 유력시했다. #당시 기사 그래서 정작 유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하자 당시 야구팬들의 반응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당시는 WAR같은 질적 분석, 지수가 그다지 보편하되지 않은 시기였고, 유지현은 득표에서 상당히 근소한 차이로 김재현을 제치기도 했다. (물론 양적 기록을 기준으로 따져도 유지현은 신인왕으로 손색없는 성적을 올렸다. 전 경기에 출전했으며 타율 .305와 15홈런 51타점 51도루로 신인 시즌이 연간 기준으로는 그의 최고 시즌이었다. WAR에서도 해당 시즌 김재현보다 우위에 있다.)
당시 유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한 비결로 전 경기 출전과 1번타자로서의 공헌도를 높이 평가받았다는 식으로 기사화가 되긴 했지만, 그 시절만 해도 MVP나 신인왕, 골든글러브는 화제성 + 양적 성적 + 팀 성적 영향 등을 반영해서 투표하는게 대세였기 때문에 신인왕 투표 전에는 김재현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기사가 많이 나왔지만, 정작 유지현이 수상하는 바람에 김재현이 기자들한테 밉보인 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도 나왔을 정도였다. 다만 신인 3인방 중 김재현, 서용빈과는 달리 그 해 골든글러브는 수상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알다시피 그 해 4할-200안타-100도루에 도전했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서 안보이시는 분 때문에...
3.2. 1995년
1994년 신인왕을 수상했음에도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는 그해 84도루와 0.393을 기록한 바람같은 분에게 내주고 만다. 1995년에도 매 경기 1994년 이상의 활약을 보여 주었으나 방위 복무[1]로 인해 홈 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던 탓에 풀타임을 뛰지 못했다. 결국 유격수 골든글러브는 그해 우승 팀인 OB의 김민호에게 돌아갔다.[2] 그리고 세월이 흘러 셋은 모두 LG트윈스에서 감독, 코치로 한솥밥을 먹게된다3.3. 1996년~1997년
소집해제 후 복귀한 1996년, 타율이 .249로 떨어지며 다소 부진했고,[3] 1997년, 감독 추천으로 출장한 올스타전에서 9회 2사 만루에서 대타로 나와 역전 적시타를 때려냈고 곧바로 MVP에 등극, 쏘나타 3 승용차를 부상으로 받았다. 그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만루홈런을 치는 활약을 하였다. 1996~1997년에도 리그 정상급 유격수로 활약했으나 골든글러브는 언제나 이종범의 몫.3.4. 1998년~2002년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1998, 1999) |
1998년 이종범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떠나자, 1998~1999년 2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드디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4] 이처럼 전성기에 이종범이라는 벽에 가려 그의 천재성은 늘 2인자라는 수식어로 점철되어야만 했다.
공격력은 이종범보다 부족했지만, 수술로 인해 약해진 어깨에도 불구하고 수비력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약한 어깨를 풋워크와 한 박자 빠른 타구 판단으로 커버했고 특히 2루 쪽으로 쏠리는 타구의 경우 슬라이딩 후 역모션 송구 등 서커스에 가까운 명장면들을 자주 연출했다. 수비 측면에서는 어깨에 의존하는 이종범보다 오히려 기술적으로 김재박-류중일의 계보를 있는 정통 유격수라고 볼 수 있다.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 이종범 유격수-유지현 2루수 포메이션이 가동됐는데, 이들은 이렇게 국가대표로 계속 활동하며 공수주를 모두 겸비한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혔다. 유지현-이종범-박정태가 아마에 공존하던 시기에는 3루 유지현-유격 이종범-2루 박정태의 포메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는 유지현 부상 전으로 강견 시절임) 유격수 수비로는 전문가들도 이종범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유지현에 대해서는 간간이 힘에 부치는 3-유간 상황의 원바운드 송구만 빼면 타구 판단에 이은 풋워크, 다이빙, 글러브질 등 극찬하는 편이며 논란의 여지가 적은 편. 오히려 본인이 아닌 이종범 항목에 유지현과의 수비력 비교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
LG가 리그를 평정하던 1994, 1995년 후 해태가 1996, 1997년에 살아나면서 자연스레 양 팀간 더비가 리그 최고 빅매치가 되었고, 이 둘은 같은 포지션에 둘 다 야구 지능이 높았고 각 팀의 리드오프로서 항상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이 속한 LG와 해태는 1997 시즌에 잠실경기에서만 해태가 8회 이후 역전패를 5번[5]이나 당했을 정도로 맞대결에서나 순위 경쟁에서나 치열한 혈투를 벌였고, 결국 LG보다 1.5게임차 앞선 해태가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LG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유지현과 이종범은 2006년 WBC에서 대표팀 코치와 주장으로서 재회하게 된다.[6]
이종범이 주니치로 떠나기 무섭게 골든글러브 2연패를 했고, 박정태와 키스톤 콤비를 이룬 1999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훌륭한 호흡을 자랑하며 나란히 베스트 포지션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때 획득한 출전권으로 이듬해 열린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유격수로 출전이 예상되었으나, 대회 직전 대표팀 감독이 주성노에서 김응용으로 변경되며 주전 유격수로 박진만, 내야 백업으로 김태균을 대신 선발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7][8] 결과적으로 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하며 이런 논란은 자취를 감췄고, 유지현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분풀이 맹활약을 펼치며 2승 1패로 두산에 리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기는 날은 스포츠 신문 1면에 나왔다. 그러나 엘지는 마무리 장문석의 연이은 블론 세이브로 이후 3연패하며 허망하게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이광은 감독의 해임 및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2001년부터 무명이었던 권용관의 기용과 함께 2루수-유격수를 보기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팔꿈치 수술로 시즌을 늦게 시작한 2002년에는 권용관이 주전 유격수를 맡는 대신 완전히 2루수로 전향해 3할 1푼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여전히 준수한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하여[9]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3.5. 슬럼프와 은퇴
2002년까지의 활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2003년 급격한 하락세를 타게 되는데,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머무르는 등 극도의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은사인 이광환 감독은 유지현을 2루수로 전향시켜가며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하필 이 슬럼프 시점에 찾아온 FA계약 때 1년 4억원이라는, 유지현이라는 존재 가치에 너무도 격에 맞지 않는 처우를 받기에 이른다. 유지현은 은퇴 이후, FA 계약 당시 원인불명의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유지현의 은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이순철이 유지현을 쓸모없는 선수로 취급해 결국 반강제적인 은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유지현은 2004년 안좋은 몸상태에 슬럼프까지 맞은 상황이었음에도 2군에서 재활 및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 조차 받지 못하고 1군 선수단을 따라 다니면서 배팅볼이나 던져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때 컨디션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갑자기 무리하게 유격수로 기용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핑계로 도태되게 만드는 식의 운영을 하였다. 4월 18일 잠실 KIA전에서 무사 1,2루에서 대타로 유지현을 낸 뒤 번트를 지시하여 쓰리번트 실패 삼진을 당하고 팀은 연장전 끝에 5연승이 무산되자 이순철 감독이 유지현 탓을 한 바 있다. 특히 신인 내야수 박경수에게 사실상 반 강제로 주전 자리를 내주고[10] 인스트럭터 역할을 코칭스태프와 구단으로부터 사실상 강요받으며 그해 가을 현역 은퇴 선언을 하였고, 10월 5일 롯데전 클리닝타임 때 약 20분 간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에서 과거 대표팀 파트너인 박정태와 포옹하는 장면과 더불어 [11] LG와 각서 파동 등 관계가 틀어질대로 틀어진 김재현과 조우하는 장면은 곧 팀에서 밀려나가는 동병상련에 처한 레전드들의 안타까운 모습이었고, 많은 LG 팬들의 안타까움과 공분을 샀다. 이처럼 불운한 선수 말년으로 인해 본인의 가치와 재능에 비해 이후 끊임없이 저평가되는 계기가 된다. 유지현의 은퇴 직후 한화에 부임하여 팀 리빌딩 중이던 김인식 감독이 유지현을 안타깝게 여겨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현역 복귀 오퍼를 한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SK 조범현 감독 쪽에서도 이적 제의가 있었으나, 본인은 엘지에서 현역을 마감하고 싶다며 고사하였다.[12]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열린 그의 은퇴 경기는 LG 트윈스 프런트와 팬들의 간극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 워낙 갑작스러운 유지현의 은퇴에다 김재현 각서 건까지 겹쳐 은퇴식 내내 관중석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13] 은퇴식 영상 #
은퇴식 때 경기 상대 팀인 롯데 덕아웃으로 걸어가 박정태 선수와 포옹하는 서프라이즈가 있었다. 원래 유지현과 박정태는 아마시절부터 대표팀 생활을 같이 하여 친분이 있었고 심지어 은퇴식 당일날도 박정태와 점심을 같이했는데 이때도 서프라이즈에 대해서 일체 말이 없었기에 박정태가 더 놀랐다고 한다.[14]
여러 인터뷰나 행적을 돌이켜보면 성격이 유하고 선후배 선수나 구단 관계자들과 각 세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스스로를 김기태, 김태형처럼 군기반장으로 포지셔닝하지 않았다. 반면 팀 내에서 주장일 당시 리더십은 본인의 실력이 받쳐줘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프라이드가 강했던 것으로 보이며, 선수협 문제에서도 엉뚱하게 친 선수협 멤버가 아닌 김기태와의 충돌로 팀원들이 그를 따라 단체로 가입 철회를 하여 같은 팀 양준혁, 김재현을 비롯한 친 선수협의 디스를 감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두고두고 리더십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 나중에 본인이 주도하여 팀원을 선수협에 전원 가입시켰던 것과 구단과의 연봉협상 조정 신청 등을 봐서는, 본인의 소신은 있으나 말년에 LG 이외의 팀으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구단의 지도자 연수 제의를 수용하는 것을 봐서 친정팀에 대한 로열티가 우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처럼 주변, 특히 구단과 마찰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어설프게 프런트와의 구원(?)이 있어서 LG 감독으로 앉을 수 있을 지 관전 포인트다. 류중일, 염경엽 등 선배들의 감독 데뷔 시점을 고려하였을 때,[15]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데다가 실력만 놓고 보면 이미 감독 후보로 언급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런기태 사태 때에도 언론지상에 후임으로 언급이 되지 않은 점은 생각해봐야 할 일. 양상문 감독 밑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입지를 굳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상문 감독의 사임 때에도 후보로 언급되던 차에 구단이 류중일 감독으로 급선회하며 이루지 못했던 감독의 꿈을 2020년 겨울에서야 이루게 되었다.
이후 2006년 WBC 국가대표팀 코치, 2007년~2008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후 2009년부터 2011년까지 LG 트윈스의 작전주루 코치를 담당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199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LG 타선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전성기의 유지현은 1번 타자의 교과서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수 시절 '꾀돌이'라는 별명[16]이 붙여질 정도로 지능적인 경기를 펼쳤다. 생전의 하일성 위원 등 당시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들이 유지현의 경기 감각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을 정도로, 팀 선배 김재박처럼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영리한 야구를 했던 선수. 약해진 어깨로 10시즌을 유격수-1번타자 역할을 했으니 체력이 마냥 약하다고 보기도 어렵다.공을 오래 보고 투구수를 늘리기 위해 초구는 그냥 흘려보내곤 했는데, 이를 의식한 상대 배터리가 초구를 대충 던지면 기습적으로 잡아당겨서 잠실 좌측 펜스(유지현존이라고 불린다)를 살짝 넘기는 홈런을 치기도 했다. 또한 출루해 놓고 도루를 할 듯 안 할 듯 하면서 상대 투수의 골치를 썩이는 지능적 플레이를 즐겨 했다. 아예 이종범처럼 대놓고 그냥 도루해 버리는 게 상대 입장에선 차라리 편했다는 후문.
작은 체구 덕분에 적용되는 스트라이크 존도 좁았고 타격시 몸을 웅크리는 버릇 덕분에 존은 더 좁아졌고 거기에 훌륭한 선구안[17]과 발군의 커트 실력이 갖춰져서 2스트라이크 노볼의 볼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3볼로 만들던 건 예사였다. 이른바 용규놀이의 원조격. 또한 장타력도 출중하여 두 자릿수 홈런도 곧잘 칠 정도였으니.. 상대투수는 피할 수가 없었다. 덧붙여 잠실에서 오히려 원정경기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했다. 선두타자 홈런 하면 이종범 또는 이순철을 떠올리기 쉬우나 유지현도 만만치 않았던 것. 그 덕분에 클린업도 아닌 선수가 한 시즌 평균 볼넷이 60여개로 통산 17위, 2할 후반대인 통산 타율에 비해 통산 출루율은 .377로 통산 30위다. 대놓고 발야구 컨셉이 아니면서도 주루 센스가 매우 좋은 편으로, 활동 시즌이 짧은 편임에도 도루도 통산 12위에 위치한다.
한 마디로 리드오프로서 필요한 장점은 모두 갖춘 선수로, 그의 높은 출루율과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볼 때 LG의 "신바람 야구"라는 팀 컬러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그가 주로 출전한 1994-2002 9시즌 중 LG는 1996, 1999, 2001년을 제외하고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1회 우승, 3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아마 시절부터 실력으로 국가대표 고정 멤버였던 덕에 유독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유지현 존으로 날려보낸 1997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의 역전 만루홈런(상대 투수 성준),[18][19] 2002년 한국시리즈 2차전 6회 임창용 상대 안타 및 도루로 역전 시발점 역할, 5차전 6회 2사에서 전병호 상대 2루타 및 3루 도루, 패스트볼로 득점 등 팀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 깨알같은 안타와 도루를 시전하며 팬들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통산 홈런은 적지만 특히 중요한 순간에 잡아당기는 2루타 코스의 타구를 잘 쳐냈다.
특이점으로 홈으로 사용한 잠실에서 친 홈런이 원정경기 홈런보다 오히려 많았다. 당시는 좌우 펜스가 95m로 펜스를 5m 앞으로 당겼었는데, 폴대쪽으로 최대한 잡아당겨 살짝 넘어가는 홈런을 많이 쳤던 것. 신인시절 커리어하이인 15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중 11개가 잠실에서 넘긴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팬들과 기자들은 좌익수 쪽 폴대 옆 5m의 빈 공간을 '유지현 존'으로 불렀고 우익수 쪽 폴대 옆 5m의 빈 공간을 '정수근 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유지현에 비해 정수근의 홈런은 손에 꼽는 수준이라...
입단 동기인 김재현과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하다. 이미 등번호(김재박의 7번), 계약금 등 문제로 입단 때부터 자존심 차원의 갈등을 빚어 사이가 좋다고는 말 못하는 관계였다가, 김재현이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할 때 유지현은 구단 편을 들어서 크게 틀어진 것. 그러나 1년 후에는 유지현도 LG 구단이 선수협에 가담한 선수들의 연봉 삭감, 징계성 트레이드를 보다 못하여 LG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키고, 본인도 2001년에 가입했다. 선수협 가입, 뒤이은 2002년 연봉 조정 승리[20]는 유지현이 구단과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21년쯤에 김재현이 해설위원을 하던 중 김재현과 류지현은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해명했다. 아래짤은 친분 관계와 상관 없는 듯 하다.
5. 평가
이처럼 LG의 간판스타로 손색이 없는 선수이지만, LG팬을 제외한 팬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우선 선수협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단골로 비판받는다. 김기태, 이호성이 그랬듯이 구단 측 편을 든 것이 원인으로 일명 선수협 오적 중 한 명으로 취급된다. 정작 본인은 연봉조정 갈등에서 구단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다른 면도 있다. 류지현이 처음에 구단 선수협 결성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구단들이 선수협 주동자들을 방출/트레이드하며 악질적으로 대응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LG 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킨 사람도 류지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LG 구단은 유지현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다만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에 섣불리 배척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2020년까지 LG에서 코치로 일하며 같은 구단에서 27년간 활동했으며, 2021년부터는 아예 LG의 감독을 맡으면서 구단과의 나쁜 과거도 정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LG 구단의 프런트에서 유지현과 대립했던 이들은 2008년을 기점으로 그룹 감사로 잘려나갔다. 당시 단장이던 유성민도 2005년에 단장에서 물러나 2007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장타율 | 출루율 |
1994 | LG | 126 | 482 | .305 |
147 (3위) |
20 | 0 |
15 (8위) |
51 |
109 (2위) |
51 (2위) |
64 (2위) |
.440 |
.391 (4위) |
1995 | 64 | 236 | .305 | 72 | 8 | 0 | 1 | 17 | 44 |
33 (5위) |
44 | .352 | .423 | |
1996 | 100 | 385 | .249 | 96 | 15 | 3 | 4 | 26 | 56 | 24 | 59 | .335 | .363 | |
1997 | 125 | 479 | .269 | 129 | 24 | 2 | 3 | 45 | 78 |
44 (4위) |
61 | .347 | .364 | |
1998 | 126 | 476 | .277 | 132 |
36 (1위) |
1 | 12 | 61 |
94 (2위) |
40 (3위) |
71 (5위) |
.433 | .377 | |
1999 | 93 | 356 | .303 | 108 | 19 | 5 | 11 | 45 | 67 | 14 | 50 | .478 | .392 | |
2000 | 129 | 495 | .281 | 139 | 24 | 1 | 7 | 38 |
97 (4위) |
25 (4위) |
73 | .376 | .373 | |
2001 | 129 | 448 | .283 | 127 | 26 | 2 | 9 | 53 | 90 | 21 |
96 (2위) |
.411 | .411 | |
2002 | 91 | 326 | .310 | 101 | 14 | 3 | 1 | 25 | 51 | 21 | 38 | .380 | .381 | |
2003 | 109 | 334 | .234 | 78 | 7 | 0 | 1 | 16 | 30 | 23 | 31 | .263 | .306 | |
2004 | 16 | 33 | .152 | 5 | 0 | 0 | 0 | 2 | 3 | 0 | 3 | .152 | .222 | |
KBO 통산 (11시즌) |
1108 | 4050 | .280 | 1134 | 193 | 17 | 64 | 379 | 719 | 296 | 590 | .383 | .377 |
[1]
서용빈을 제외한 유지현, 박종호, 송구홍 셋 모두 방위로 갔고, 당시 방위병의 경우 홈 경기에 한해 출장이 가능했다 보니 방위 복무로 병역의무를 마치는 선수들이 많았다.
[2]
비슷한 시기
이종범도 방위 복무를 하느라 홈 경기만 출장한 탓에 류지현, 이종범 둘 다 골든글러브 후보에 오르지 못했고, 결국 김민호가 수상한 것. 다만 김민호도
1995년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는 등 그해 유격수로는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충분히 수상할 만 했다.
[3]
다만 이때 출루율은 .363으로 타율에 비해 훨씬 높았고, WAR도 3.74를 기록했기 때문에 무조건 부진했다고 볼 수도 없다.
[4]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1998년에는 타율은 비록 .277에 그쳤으나, wRC+ 126.3, OPS 0.809, WAR 6.08을 기록하며 1994년 이후 2번째 커리어하이였다. 1999년에는 다시 3할 타율에 복귀했고, 0.869라는 커리어 최고 OPS를 기록했다.
[5]
그 중 해태의 연장전 끝내기 패배가 3번이었다.
[6]
이종범이 류지현보다 1년 선배이다.
[7]
다만 2000년 시즌부터 박진만이 기존의 정상급 수비와 더불어 타격 부분에서도 포텐이 터지며 공격형 유격수로 발돋움하며 팀도 우승하고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해라 대표팀 승선이 유력했던 상황이었고, 덕분에 유지현은 백업 유격수 또는 내야 유틸 자원으로 대표팀에 선발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다만 김태균의 경우에는 수비는 박진만, 유지현보다 아래였고 타격도 이따금씩 터지던 뜬금포를 제외하면 별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논란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8]
다만 이 당시 박정태와 유지현이 선수협 사태에 연루되어 있어서 최종 명단에서 빠진 거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9]
부상에서 복귀한 뒤 초반에는 실전감각 문제로 타율 1할대에 허덕이며 주로 하위타순에 배치되었으나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무섭게 맹타를 휘두르면서 리드오프로 복귀했다.
[10]
박경수가 초반 맹타 후 부상당해 1군에서 제외됐을 때도 유지현은 1군 엔트리에 올라오지 못했다. 이때 금지어 이순철이 한 말은 '공수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아 쓸 수 없다.'는 멘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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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태는 2002년 부진으로 인해 LG와의 트레이드 논의가 되었고, 시즌 종료 후 FA에는
꼴런트의 어처구니 없는 옵션조항으로 인해 대립하다가 일방적으로 계약 포기를 당하기에 이른다. 다행히도 팬들이 롯데 프런트를 향해 엄청난 공세를 벌였고, 팬들의 봉기를 이기지 못해 겨우겨우 계약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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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나이로 34였지만 타격, 주루가 리그 상위권에 2루수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삼성에 남으려 했던 강기웅의 은퇴상황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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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대팀인 롯데의 선수대표로 박정태가 꽃다발을 전해주었을때 1루의 LG팬들이 열렬히 환호해주었는데 이것 자체야 은퇴식에서 보이는 훈훈한 광경인 반면, 소속팀인 LG 선수들과 류지현이 인사를 나눌때는 1루에서 호응소리도 적었고 감독인 이순철이 꽃다발을 전해줄때는 아예 야유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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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태는 나중에 방송에서 유지현에게 너무 고마운 동생이라며 애정을 표현했고 이 은퇴식 상황이 안타까운 마음에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도 결국 몇달 지나지 않아 후배와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는 은퇴식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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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일은 48세, 염경엽은 45세에 감독직에 올랐다. 유지현 코치는 2017년 현재 4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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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상에서는 유젼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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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출루율 0.377로 역대 3000타석 이상 선수들 중 30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투고타저 시대에 투수가 승부를 회피하여 자연스럽게 출루율이 높아지는 슬러거 타입의 선수가 아니면서 체력 부담이 큰 유격수를 주로 소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출루율이다. 동시대에 활약한 전준호의 통산 출루율이 .375, 이종범의 통산 출루율이 .369다. 키스톤 내야수로 유지현보다 높은 통산 출루율을 기록 중인 선수는
서건창과
정근우뿐이다. 활약한 시대가 다름을 감안하면 유지현의 출루 능력은 당대에선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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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현의 개인 유일한 만루홈런이며 페넌트레이스에서 만루홈런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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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루홈런 역시 잠실에서 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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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현은 연봉 조정에서 선수가 구단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사례이며, 2021년
주권 이전까지 유일하게 승리했던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