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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3:39:12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이화여대 김활란 관련 발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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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이화여대 김활란 관련 발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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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실 여부
2.1. 긍정론2.2. 부정론
2.2.1. 반박
3. 반응4. 관련 보도

1. 개요

2024년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김준혁 수원시 정 국회의원 후보자가 이화여대의 총장을 지낸 김활란이 학생들을 위안부로 팔아넘기고 미군 장교들에게 성상납을 주선했다는 발언을 하면서 제기된 논란.

김준혁은 2022년 8월 14일 방송인 김용민이 진행하는 유튜브에 출연해 김활란이 해방 이후엔 이대 학생들을 미군 장교에게 성상납시켰다는 발언을 하였다. 김준혁 “내 전공은 궁중 에로… 이대 초대 총장, 학생들 성상납 시켜"

2. 사실 여부

2.1. 긍정론

미국의 공식 문서로 교차검증을 해 보면 당시 여대생들이 미군을 접대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김활란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김활란이 총재로 있던 낙랑클럽은 미군 산하 방첩기관 CIC가 작성한 문건에서 영어가 능통한 고학력자 여성을 모집해 유력자들에게 접대를 통해 정보를 빼내오는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간주되었으며 이화여대 등 당시 명문 여대생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조직이었다.[1] 이 문서가 해금된 후 중앙일보에서 1995년에 특종으로 보도했으며 # 월간중앙에도 보고서 번역문이 실린 바 있다.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1948년이나 1949년께 사회단체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 귀빈, 한국 정부의 고위관리 및 군 장성, 주한외교관들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는 한국전쟁으로 한때 부산에 있었다.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여재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에게 주로 국한되었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 있는 호스티스였다.
김상도, 「6·25 무렵 모윤숙의 미인계조직 ‘낙랑클럽’에 대한 미군방첩대 수사보고서, 미 국립문서보관소 비밀해제로 최초공개」, 『월간 중앙』, 1995.2, 217쪽.
이에 따르면 낙랑클럽은 1948년경 시인이자 정치인이였던 모윤숙의 주도로 결성돼 국내 모 여대 출신의 용모단정한 영어가능자 150여 명을 회원으로 두고 주로 주한외교사절, 미국 고위관리, 미군 고위 장성 등을 위한 접대 행위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들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측과의 협상에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정보는 이미 논문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미 국무성의 보고서에 따르면 낙랑클럽은 1948년 혹은 194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이화여대 출신으로 영어를 잘하는 150여명의 여성들이 서양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품격을 갖추어 알리는 일을 맡았다. 낙랑클럽의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이 맡아서 모임을 주도했다.
장영은,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89쪽.
더불어 낙랑클럽 구성원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수필가 김숙희의 기록에 따르면
미군을 만난다지만 상대는 미 군정청의 실력자들인 장성급, 고급 장교에 한정되었고, 남한에 들어와 있던 각 나라 외교관과 유엔 산하 각종 단체장이었다. 사교적인 파티에 참석하여 그런 외국인들로 하여금 남한에 호의를 갖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화 출신을 중심으로 한 달 만에 100여 명이 낙랑클럽 회원으로 지원했다. 그들 중에는 정부가 수립되고 장관급에 오른 주요 정치인의 부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라는 구절이 있어 이화여대 구성원이 해당 클럽에 들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계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봉직한 김기협 교수는 고급 '사교' 조직 '낙랑클럽'을 아십니까?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당시 낙랑클럽에 실제 참여한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사실상 접대 조직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 글에서는 회원 대부분이 이화 후배였다는 저술도 김준혁의 발언을 뒷받침한다.
낙랑클럽이 처음 발족했을 때는 회현동에 있던 모윤숙의 집에 회원들이 모였으나 미 군정청과 선을 대고 있던 우익 정치인이 주선하여 일본인 호화 저택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았다. 회원들이 그 저택의 넓은 다다미방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클럽 운영의 리더였던 모윤숙은 사교적인 호탕한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위트와 유머 섞인 이야기로 대부분 이화 후배인 회원들을 사로잡았고, 항상 옆에 있던 김수임은 명랑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했다.

2.2. 부정론

유흥 목적으로 접대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관계를 제공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김준혁이 ‘이화여대생 미군장교 성상납’ 발언의 근거라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한 논문[2]에도 ‘성상납’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김활란이나 모윤숙에 의해 동원된 젊은 여성들이 파티에서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는 않았을지라도"[3]라고 표현하는 등 당시 활동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성상납은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문구가 있었다. 서울신문 여성신문

실제로 낙랑클럽의 활동 양상에 대한 회장 모윤숙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낙랑구락부는 어찌 알고 물어. 그런 6·25 피란 시절(1951년) 부산에서 생겨 약 2년간 지속되었지.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외국 손님 접대할 때 기생파티 열지 말고 레이디들이 모여 격조 높게 대화하고 한국을 잘 소개하라’고 분부하지 않겠나. 우리는 부랴부랴 낙랑구락부를 조직, 김활란 박사를 고문으로 하고 내가 회장을 맡았지. 금방 50명 가량의 회원이 모였는데 그 때 예쁘고 인기 있던 여성으로 손원일 제독 부인인 홍은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부인 허숙자씨 등이 생각나는군. 말하자면 낙랑은 정부의 부탁으로 이른바 파티대행업을 한 셈인데……. 부산 송도 바닷가 돌멩이 위에 지은 집(귀속 재산)을 우양( 허정) 장관한테서 빌려 씨 싸인드 맨션이라고 부르고 파티비용은 청구서에 따라 장면 총리실에서 지불해 주셨죠. 한 번에 5만 내지 10만 원 정도였든가 몰라. 국무위원들이 귀빈들을 초대하는데 빈객으로 오는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 리지웨이 장군, 워커 장군, 밴 플리트 장군에 무초 미국 대사 등이 온 곳 같고, 그때 장면 총리와 무초 대사가 뜰 모퉁이 버드나무 밑에서 수군수군하는 모습을 보고 우린 전쟁이 멎고 통일이 되는 줄로만 알았지. 헬렌 김(김활란)이 외국인 대하는 매너 에티켓 등의 회원교양을 지도했고 나는 모닝캄(Morning Calm), 나라에 와 주셔서 반갑다는 두 마디 환영사만 했었지. 그리고 서툴러서 손님 구두를 밟는 가운데 사교댄스도 췄고 미인계도 썼지 뭐, 이 말은 쓰지 말아요. 그러나 낙랑을 통해 우린 값진 민간외교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장영은,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94-95쪽.
진보언론인 미디어오늘에서도 김준혁이 제시한 논문에서 김활란의 인솔, 유흥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만 이것이 '성상납'이라는 명확하고, 명백한 기록이 없으므로 김준혁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봤다. #

논문이 인용한 1차 사료인 1953년 미군 CIC의 정보 보고서에서도 ‘김활란 총장이 이대생을 성접대시켰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CIC 보고서는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1948~1949년 사회 단체로 조직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 귀빈, 한국 정부의 고위 관리 및 군 장성, 외교관들을 엔터테인(entertain)하기 위한 것이다. 6·25전쟁으로 한때 부산에 있었다. 회원은 대개 잘 교육받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 있는 파티 주최자들(hostesses)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CIC 보고서를 논문이 번역하는 과정에 ‘entertain’을 ‘접대’, ‘hostess’를 ‘호스티스’로 번역하다 보니 우리말 어감에서 일부 오해가 생겼다.

1953년 8월5일, 한국에 파견돼 있던 미군 정보참모부 소속 하워드 해리스 대위는 “낙랑클럽 일부 주최자의 대접 활동이 공식 매춘부 자격으로(acting in the capacities of official prostitutes) 파티의 손님과 동거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됐다”, “낙랑클럽 창립자 중 한 명이 부산 주둔 미군 야전 장교의 동거인(co-habitant)이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CIC는 한 달 후 이러한 주장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3년 9월7일 미군 정보부서(G-2) 소속 이건 R.타우쉬 대령은 두 주장 모두 “출처 및 세부 정보 불명(Source and details unknown)”이라고 밝혔다.

또 해당 보고서가 1952년 9월24일자 미 ‘데일리 팔로알토 타임즈’의 기사를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윤숙은 ‘낙랑 걸스’는 샴페인 파티에서 손님들을 대접하지만 동시에 빨치산들이 들끓는 산을 올라 경찰서에 따뜻한 식사를 전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는 부분을 소개하며 “회원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육아 방법, 위생과 영양 개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모윤숙은 전쟁이 끝나면 한국 여성 해방을 위해 이 조직을 활용하길 바란다”는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CIC의 보고서가 “원문은 사교 모임에 대한 설명”이라며 “낙랑클럽을 비밀스러운 성접대가 오가는 공간으로 묘사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며 “보고서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맥락과 다른 뉘앙스를 가진 단어들을 선택하면서 원문과는 다른 해석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영문학자의 분석이 있다. #

2.2.1. 반박

모윤숙이 낙랑클럽 회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에 인용된 발언이 객관적인 사실을 밝혀 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모윤숙의 회고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낙랑클럽 관련 사실들을 축소 및 은폐했다고 평가되며[4] 위에서 주장한 낙랑클럽의 조직 시점도 사실과 다르다. 반면 1952년 외국인 종군기자가 취재한 기사[5]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낙랑걸들은 그렇지 않다”고 위안부들은 비감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13쪽.
여기서 말하는 위안부들은 물론 전쟁 당시 동원된 한국군 위안부다. 당시 위안부들의 관점에서는 낙랑클럽의 활동에 본인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술한 CIC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젊은 장교 기자들을 위해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낙랑 걸들을 대거 불러오기도 한다. 어느 날 밤 파티에서 한 젊은 참석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10년은 더 나이 먹은 여성이 접대하러 나오자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 그러자 15분 안에 한국정부 고위관리가 젊은 낙랑회원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먹은 낙랑회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낙랑회원들은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접대하기 위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Possible Espionage Activity at Seenchon-Dong Hospotal.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미군 CIC 정보 보고서 1 - 인물조사보고서』. 1996. 667-668쪽.
부산 피난 시절에도 미군들을 상대로 접대행위를 계속했는데, 부산 주둔 미국의 한 관리는 이 클럽 회원들이 심지어 軍막사에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
이러한 기록을 보았을 때 낙랑클럽이 유흥업소와 유사한 집단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정확히는 모윤숙이 언급한 제독 부인, 사장 부인, 김활란 등은 정말 사교댄스와 파티 활동만 했을 개연성이 있지만 젊은 장교와 기자들을 접대했다는 '젊고 아름다운 낙랑 걸들'의 활동은 이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이처럼 당시 낙랑클럽에서 성(性)을 이용하여 접대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를 '위안', '성욕 위무', '성적 위계관계 수용', '성적 위안' 등으로 인식 및 평가한 연구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위문은 금전이나 물품(편지 포함), 노력봉사 등을 통한 지원을 의미했고, 위안은 성(性)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를 가진 오락, 유흥의 제공을 의미했다. (…중략…) 그러나 일부의 여성지도자들은 이와 다른 형태의 활동인 외교 미군(UN군) 장교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의 '파티 대행업'에 나섰다.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각료와 유력인사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파티대행업에 나선 여성지도자는 김활란 모윤숙이었다. 이들은 각각 전시국민홍보외교동맹(이하 홍보외교동맹이라 약함)과 낙랑클럽을 조직하고 여학생 등을 동원하여 파티대행업에 나섰다.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09-110쪽.[6]
하지만 여성들의 '사교'는 여성들의 성을 대가로 한 이른바 성적 경제의 값비싼 대가에 다름 아니었다. 모윤숙 이승만의 지시로 '낙랑클럽'이라는 여성 '사교' 모임을 결성하여, 미군정 고위관료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시혜와 보은의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국제정치질서의 섹슈얼한 양상에 복무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아름다운 여성들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낙랑클럽'의 엘리트 여성들은 여성들 내부의 계급적 차이를 첨예화함은 물론 미군정 고위관료들의 고독과 성욕을 위무하는 '위안형' 주체로서 여성들 간의 내적 차이를 무화하는 이율배반적 측면 또한 갖고 있었다.
공임순, 「스캔들과 반공 : '여류' 명사 모윤숙의 친일과 반공의 이중주」, 『한국근대문학연구』 9(1), 2008, 190쪽.
이와 같은 대한여자청년단 활동과 낙랑클럽 활동은 모두 여성의 성(性)을 내세운 활동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전쟁기 여성을 동원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주로 구원의 손길을 제시하거나 위안을 담당하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이 강화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즉 한국전쟁기 여성들은 병사들을 간호하고, 피 묻은 군복을 빨며, 주먹밥을 해 나르는가 하면, 병사들의 무훈과 승리를 염원하는 위문대를 만들고, 일선 병사의 노고를 위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들을 성적으로 ‘위안’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배안숙, 『모윤숙(毛允淑)의 인식과 활동(1945-1953)』,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39쪽.
또한 교양 어학뿐만 아니라 몸매에 있어 매력이 있는 인물이 주빈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외교라는 것이 성적인 위계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민영, 「반공 국민의 회고담과 민족주의적 주체 구성의 자기 서사 - 모윤숙의 『회상의 창가에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2(2), 2021, 262쪽.
여성신문 후속 기사에서 주장한 내용도 유의미한 반박은 아니다. 이 기사에서 언급되는, 미군 정보참모부 소속 하워드 해리스 대위가 입수한 정보[7]는 바로 같은 지면에 등장하는 김수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김수임은 실제로 낙랑클럽을 통해 미군 대령 존 베어드(John Baird)를 만났고, 그의 정부가 되어 동거했던 것이 맞다.[8] 이는 이미 국내에도 알려져 있던 부분이며, # # 당시 모윤숙조차 인정했던 사실이다.
모윤숙 이강국 뿐만 아니라 당시 김수임과 동거 중이었던 “미군인 B대령”에게도 원망의 목소리를 전했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밉고 염치 없는 사람! ‘여보, 당신이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오. 이강국을 잡아야 할 당신이 이강국을 놓치고 지금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보기도 싫어요. 이 방을 썩 나가요.’”
장영은,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91쪽.
김수임은 학창 시절부터 모윤숙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해방 후에는 함께 낙랑클럽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김수임은 모윤숙의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다가 한국 경찰에 체포된 뒤 전쟁 발발 직전, 간첩 혐의를 받고 사형당한다. 김수임의 간첩 혐의는 동거인이었던 미군정 헌병 사령관을 통해 미국의 기밀을 공산주의자이자 김수임의 연인이었던 이강국에게 넘기고 그의 월북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김수임의 재판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이었고 모윤숙의 전쟁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회고록을 통해 모윤숙은 이강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김수임을 세뇌시켰는지를 강조한다.
이민영, 「반공 국민의 회고담과 민족주의적 주체 구성의 자기 서사 - 모윤숙의 『회상의 창가에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2(2), 2021, 262쪽.
따라서 하워드 해리스 대위가 입수한 정보가 거짓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3. 반응

3.1.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여대, ‘미군에 이대생 성상납’ 발언 김준혁 사퇴 요구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공식 입장문을 통해서 김준혁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화여대가 발표한 입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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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는 최근 유튜브와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된 김준혁 후보의 본교 구성원에 대한 명예훼손 발언에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김 후보의 발언은 본교와 재학생, 교수, 동창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본교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후보자 신분으로서 가져서는 안되는 여성차별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바탕으로 당시 여성들은 물론 현대의 여성에 이르는 전체 여성에 대한 명백한 비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김준혁 후보가 검증되지 않은 자료와 억측으로 본교와 구성원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엄중히 대응할 방침입니다.

본교는 김 후보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발언과 태도에 대해 즉각 사과하고 후보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합니다.

한편 이화여대 재학생 및 졸업생 등 9명이 구성한 단체 '역사 앞에 당당한 이화를 바라는 이화인 일동(이화인일동)'은 김활란은 친일 행적 및 낙랑클럽 운영 등 분명히 문제가 있는 인물이며, '초대 총장이라는 이유로 김활란을 칭송하는 일이야말로 이화여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 '이 기회에 김활란 동상을 교정에서 철거해야 한다' 등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해당 단체는 2024년 4월 8일 오후 12시 30분 기준 이화여대 동문 438명이 공동 성명에 동참했다고 전했다.

3.2. 여성단체

3.2.1.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김활란 총장이 창설한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미군정 시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군 장교들에게 성상납했다"고 주장한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정 김준혁 후보의 사과와 후보 사퇴를 촉구했으며 "김 후보가 명확한 근거도 없이 저급한 언행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에게 치욕감과 모욕감을 주었다"고 규탄했다. 여성협의회는 사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김 후보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

3.2.2. 고은광순

본 논란이 파생되기 이전에, 낙랑클럽 관련 의혹제기를 해온 고은광순은 자신이 주장한 것과 이모의 입학년도가 차이가 난다는 이화여대의 반박에 '그러면 오히려 반갑다'라면서 낙랑클럽의 활동기간이 길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기억에 따른 '들은 이야기'이고 실물 증거는 없다고도 하였다. #

고은광순의 이모 은모씨는 1935년생이며, 이화여대 56학번이다. 고은광순은 “이모 은모씨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고, 1948년 무렵 낙랑클럽 활동을 했다”고 말했으며, 실물 증거 없이 이야기로만 들었다는 해명과 달리 “어렸을 적 가족 앨범에서 이모가 잔디밭에 미군과 함께 앉아있는 사진을 봤다. 그 옆엔 이모뿐 아니라 여대생들이 미군들과 커플이 돼서 아마 집단 미팅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사진이었다”며 분명히 실물 증거를 본 것처럼 주장했다. 미국 CIC 기록에 따르면 낙랑클럽은 1952년 활동을 끝냈으며, 따라서 56학번인 고은광순의 이모가 낙랑클럽 활동을 했을 수가 없다. # 정치적 선동을 위해 자신의 이모를 매춘부로 전락시킨 격이다. #

3.3. 정치권

3.3.1. 더불어민주당

민주 “김준혁 후보 ‘이대생 성상납’ 발언 부적절…사과 권고”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상황실은 “김 후보의 과거 유튜브 방송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이화여대 학교와 구성원들에게 사과할 것을 김 후보에게 권고했다”고 밝혔다.

홍익표 원내대표와 김부겸 선거대책위원장 역시 김 후보의 사과를 요구했다. 홍익표 김부겸

이재명 대표는 페이스북에 "역사적 진실에 눈감지 말아야" 라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 이에 대해 이재명 대표가 김준혁 후보를 옹호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자 이재명 대표 측은 실무자의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 그리고 이때 해당 글에 첨부되었던 동영상에서 고은광순[9] 씨가 자신의 이모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1935년생인 자기 이모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생이었는데 당시 김활란에게 걸려 1948년 당시 미군에게 성상납을 했다는 식의 주장을 했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 애초에 나이부터가 맞지 않고, 문제의 이모란 사람은 실제로는 1956학번이었던 것이다. #
3.3.1.1. 김준혁 후보
김준혁 후보는 논란이 확산되자 국민의힘을 위시한 보수세력이 자신의 발목을 잡기 위해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아닌 것을 크게 키우려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이들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겠다는 요지의 글을 작성하기도 하였으나 # 결국 2024년 4월 2일 오후 자신의 SNS를 통해 이화여대 구성원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10]

3.3.2. 국민의힘

與 "김준혁, 김활란·이대생 능멸 발언...사퇴해야"

이용호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 후보가 자신이 출마한 지역구에 있는 이화여대와 그 구성원을 능멸한 망언을 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아무런 근거 없이 초대 총장인 김활란 여사를 종군 위안부 동원자로 낙인찍고, 이화여대생을 미군에 성 상납한 사람들로 추락시켰다고 비판했다.

3.3.3. 녹색정의당

녹색정의당은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과 성을 자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성적 대상화'라고 비판했다. #

박지아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굳이 자극적으로 대표적인 여자대학을 언급한 점, 주장과 관계없이 일본군 위안부나 여성 신체를 언급한 것은 성적 대상화의 전형적 사례'라며 '학자적 양심이 아니라 자극적이고 성적인 발언을 선택한 인물이 국회의원 후보가 되는 것 자체가 이번 총선에서 여성과 성차별이 무시되고 배제되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3.3.4. 개혁신당

정인성 개혁신당 선대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반일의 도구로만 이용하고 비뚤어진 성 인식에 찌들어 여성을 욕보이는 민주당은 김준혁을 비롯한 문제의 후보들을 즉각 사퇴시키고 최소한의 도덕성을 되찾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

4. 관련 보도

"김준혁 사퇴하라" 이화여대 발칵‥논란에 "앞뒤 다 자르나" | MBC
[4·10 총선] 민주당 김준혁 "김활란, 학생들 성 상납시켜" 또 구설 | MBN
김준혁 막말 파문… “김활란, 美장교에 이대생들 성상납” | 서울신문
성적 막말 논란 김준혁... 국민의힘 "배설 수준" 사퇴 촉구 | 한국일보


[1] 낙랑클럽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구한 것은 다름아닌 뉴라이트다. [2]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07-148. [3]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16~117쪽 [4] 이민영, 「반공 국민의 회고담과 민족주의적 주체 구성의 자기 서사 - 모윤숙의 『회상의 창가에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2(2), 2021, 275쪽. [5] 1952년 12월 24일에 발행된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데일리 팔로 알토 타임스의 기사. CIC 보고서에 인용된 자료다. [6] 위에 서울신문과 여성신문에서 김준혁을 비판하며 인용한 그 논문이다. [7] “낙랑클럽 일부 주최자의 대접 활동이 공식 매춘부 자격으로(acting in the capacities of official prostitutes) 파티의 손님과 동거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됐다”, “낙랑클럽 창립자 중 한 명이 부산 주둔 미군 야전 장교의 동거인(co-habitant)이었다” 등. [8] 공임순, 「스캔들과 반공 : '여류' 명사 모윤숙의 친일과 반공의 이중주」, 『한국근대문학연구』 9(1), 2008, 186쪽. [9] 성이 '고'씨와 '은'씨를 조합한 '고은'씨이고 이름이 '광순'이다. [10] 앞의 항변 포스팅과 뒤의 사과 포스팅 모두 이화여대나 김활란 건만 언급한 게 아니고 같은 시기에 불거진 김준혁 본인의 박정희 및 위안부 관련 망언과 수원화성과 융릉 관련 망언에 관해서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