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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3:11:19

김만금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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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1부수상 1959년 1월 20일 직함 신설
김일 1959년 임명, 1962년, 1967년 유임
<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2부수상 1970년 7월 11일 직함 신설
박성철 1970년 임명
<rowcolor=#003478,#C39335> 내각 부수상
1기
1948-1957
박헌영· 홍명희· 김책(1948)
허가이(1951)
최창익· 정일룡(1952)
최용건· 박의완(1953)
박창옥· 김일(1954)
정준택· 정일룡재임명(1956)
2기
1957-1962
김일· 홍명희· 정준택· 남일· 박의완· 정일룡(1957)
리주연(1958)
리종옥· 김광협(1960)
3기
1962-1967
김일· 김광협· 김창만· 정일룡· 리종옥· 리주연· 남일(1962)
최용진(1964)
고혁· 김창봉· 박성철(1966)
4기
1967-1972
김일· 김광협· 박성철· 김창봉· 리주연· 남일· 리종옥· 최용진· 정준택(1967)
김만금· 홍원길(1970)
최재우(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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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제1부총리 1982년 8월 31일 직함 신설
강성산1982-1984[1] 연형묵 1985-1986 김윤혁 1986-1986 홍성남 1986-1987
1987년 10월 14일 직함 폐지,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대체

[1] 1984-1985년 사이 남한 언론에서는 최영림이 제1부총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한 문헌에선 당시 제1부총리 직함을 사용하지 않았음.
<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부총리
5기
1972-1977
정준택·박성철·김만금·홍원길·최재우·남일(1972)
리근모·정준기·홍성남·허담(1973)
김영주(1974)
공진태·연형묵(1975)
리종옥·계응태(1976)
6기
1977-1982
계응태·허담·정준기·강성산·공진태·김두영(1977)
강희원·로태석(1978)
김경련(1979)
조세웅·서관히(1980)
홍시학·김회일·홍성룡·최광·리근모재임명(1981)
7기
1982-1986
강성산·계응태·허담·홍성룡·홍시학·최재우·공진태·최광·김창주·김회일·김두영·김복신·정준기(1982)
김환·김영남(1983)
최영림·조세웅재임명·김복신재임명·김창주재임명(1984)
연형묵·안승학·현무광(1985)
홍성남재임명(1986)
8기
1986-1990
홍성남·김영남·김복신·정준기·김창주·김윤혁·최광·정준기(1986)
조세웅재임명(1988)
강희원재임명(1989)
9기
1990-1998
홍성남·강희원·김윤혁·김창주·장철·김영남·최영림·김복신·김환·김달현(1990.5)
홍시학재임명(1990.10)
공진태재임명(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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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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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농업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11년 3월 13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수원고등농업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며 또 다른 정보에 따르면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그가 일제강점기에 관개공사장 막노동꾼으로 일하면서 반일 지하투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에 가입해 안주읍 노동부장, 안주군 직맹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46년 8월 평남 중화군 위원장에 배치되었으며 1950년 7월에는 남포시 당위원장이 되었다. 6.25 전쟁 중에는 인민유격대를 지휘해서 싸웠다 카더라.

1950년에 소련으로 유학하여 간부학교를 졸업하였고 귀국 후인 1952년 6월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배치되었다가 1952년 11월 평남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 6월에 평남 당위원장이 되었으며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평안남도 당위원장을 지내다가 19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현무광의 뒤를 이어 중앙위원회 농업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농업 집단화 사업을 협동농장에 들려하지 않는 부농에 대한 현물세를 추가로 매기고 산간지역 고령 농민 가구들을 평야로 이주시키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1958년 9월 전원회의 이후 함경북도로 파견되어 노동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산업 일선을 쪼아댔다. 1959년 6월 전원회의에서 농업상 한전종이 보수주의자로 지목되어 숙청되자 1959년 7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후임 농업상에 임명되었다. 이때 내각에 집중하기 위해 농업부장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60년 8월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60년 8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무역상 림해에게 농업상을 넘겨주고 중앙위원회 농업부장으로 다시 이동했다.[1] 이후 림해의 자리는 박정애가 차지했지만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농업성이 농업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김만금이 다시 농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농업부장, 농업상 등을 계속 맡으면서 북한의 농업 정책을 사실상 틀어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9년 10월 농업대표단장으로 중국을, 1960년 5월에 소련, 1961년 7월에 몽골을 방문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농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9년 9월, 소련과 헝가리를 방문하였다. 1970년 7월 11일, 제2기계공업상 홍원길과 함께 농업 담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으며 농업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 후임 농업위원장에는 장윤필이 임명되었다.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10월에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 수단을 방문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선출, 회의 주석단에 포함되었으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농업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정무원 부총리를 겸하게 되었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3년 8월에 15년이나 역임한 농업위원장에서 물러나서 서관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김만금이 농정 실패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정무원 부총리 및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서도 해임되어 조국전선 의장 및 전국평화옹호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김성애와 친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김성애가 전국적인 누에치기 운동을 벌였는데 김만금이 이를 지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덕분에 이를 주도한 녀성동맹의 위세가 대단해져 당연히 김성애도 목에 힘을 주고 다니게 되었다. 이를 보고 대노한 김정일이 김만금을 곁가지의 측근이라고 해임해 버렸으며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하고 평양건설건재대학에서 철학교수를 하던 김만금의 딸 김정희도 철직하여 꽃집 일군으로 강등시켜 버렸고 아들도 말단 사회안전원 사무관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

김만금 본인은 어느 정도 활동을 이어가 전국평화옹호민족위원장 자격으로 1974년 1월에 호주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8월에는 북한-불가리아 우호협회 회장을 맡는 등 외교, 통일 업무를 보았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8년 4월 26일,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가이아나 총리 린든 샘슨 환영대회에 등장하였다.

1978년 3월, 정치위원회 위원에 보선, 1978년 6월,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평양시 인선은 매우 혼란스러운데 1978년 5월부터는 서윤석이 평양시 책임비서로 활동하는 것이 확인되며 이 시기까지는 김만금이 평양을 방문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는 등 현직이었음이 확인된다. 하지만 통일부 자료나 1996년에 나온 북한인명사전 등을 보면 1978년 5월에 서윤석이 인민위원장도 겸한다고 되어 있고 1979년부터 김만금은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1982년 11월 5일에는 김만금이 평양시 친선대표단장 자격으로 자오쯔양을 만났다. 이후에는 평양시 인민위원장이 공석이었는지 부위원장 왕경학과 최운봉이 대신 일을 보고 다녔고 1985년 8월 20일에는 서윤석이 또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자격으로 불가리아 언론인들을 만나는 등 매우 개판이다.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1983년까지는 김만금이 인민위원장, 1983년부터는 윤기복, 1984년부터는 박승일, 다시 1985년부터 서윤석이 인민위원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12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고 1980년 10월에 열린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에서 탈락하여 중앙위원회 위원에 그쳤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에서 탈락했고 대신에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정치국 위원에 보선된 적이 있는지 프로그램판 조선대백과사전에는 1982년 4월, 조선로동당 6기 5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었다고 쓰고 있다. 정치국 위원 해임 이후에는 조국전선 의장으로 사업하였다.

1984년 1월,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주창준, 지창익 등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열 달 만인 1984년 11월 2일 오후 7시에 73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조국전선은 공동 명의로 부고를 발표했는데 "동지는 전후 당이 제시한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 로선을 높이 받들고 농업협동화와 사회주의공업화를 위한 투쟁에 적극 참가하였다. 동지는 다년간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우리 당의 농업정책을 관철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과 지혜를 다 바쳤으며 나라의 농촌경리발전과 사회주의건설에 크게 공헌하였다. 김만금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께 무한히 충실하였다."고 좋게 말해 주었다.

국장이 거행된 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정무원 부총리 직함으로 안장되었으나 1997년 심화조 사건이 발생하면서 부관참시당하고 무덤에 총질을 당하는 엄청난 운명을 맞이했다. 이후 심화조 사건을 주도한 채문덕 등이 숙청당하면서 복권되어 무덤이 복구되었는데 애국렬사릉을 가 본 사람들은 80년대에 조성된 김만금의 무덤이 유독 깨끗한 것을 볼 수 있었고 모르는 척 북한 안내원들에게 물어보면 난감한 표정으로 사연이 많았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90년대에 나온 북한 조선대백과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없으나 복권된 후에 나온 프로그램 버전에는 다시 수록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그의 동생 김만억은 베테랑 조종사였는데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지만 1970년대에 발생했다는 피바다 가극단 몰살 사건 때 조종사를 맡았다가 같이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5. 참고문헌


[1] 신임 무역상은 리주연이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