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5-28 18:24:56

최종학



1. 개요2. 생애
2.1. 소련 시절2.2. 북한 시절2.3. 몰락
3. 참고문헌

1. 개요

고려인 출신 북한의 군인.

2. 생애

2.1. 소련 시절

1908년 3월 14일, 연해주 다반군 재티거우 촌락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고려인들이 많이 사는 포시에트 구역 시지미 촌으로 이주하였고, 1923년 그곳에서 초중을 졸업했다. 당시 시지미 촌에 초중이 없고 크라스키노까진 가야 고중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크라스키노로 유학가서 공부하였다. 성적은 괜찮았으나 한인 사범학교가 있는 우수리스크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에 있는 고급대학까지 유학갈 형편은 되지 않아 고중으로 학력을 마치고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공청사업을 하였다.

공청에서 상당한 지도력을 보인 그를 높이 평가한 포시에트 군당 위원회는 그를 하바롭스크 공산대학에 진학시켜주었고, 그는 193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 한카이스키 군 기계임경소 정치부 공산청년회 비서로 부임했다. 1934년 한카이스키군 당위원회 책임지도원, 1936년에는 한카이스키군당 제3비서로 승진했으나 1937년에 우즈베키스탄 호라즘 주 구루렌 구역으로 강제이주당했다. 집은 고사하고 농지도 없는 갈대밭에 팽개쳐진 그들은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지역 군당위원회에 하소연하였고, 마친 간부가 부족했는지 구루렌 군당 책임지도원에 발탁될 수 있었다. 이후 최종학은 같이 이주된 고려인들의 정착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의 활발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구루렌 군당위원회는 그를 1938년, 제2비서에 임명했고, 한인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높은 수확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구루렌 군당 제1비서까지 승진할락말락 하던 시점에 1940년, 모스크바로 차출되어 정찰학교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2년간의 학업을 마치지도 못하고 1941년에 또 소련군 총정치국에 차출되어 레닌그라드에 배치되었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 진공을 준비하고 있었고, 한국어로 된 신문을 발간하기 위해 한국어에 능통한 장교들을 필요로 하던 참이었다. 1945년, 한반도 북부가 소련군에 점령되자 최종학은 평양으로 파견, <쏘베트 신보>를 창간하였고, 소련에서 언론에 종사했었던 지식인들을 추가로 보내주면서 신문 사업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2.2. 북한 시절

그러던 중 아들 최 아파나시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창건되면서 1946년 2월, 군으로 차출되어 2사단 정치부장 겸 부사단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 1사단 정치부장 겸 부사단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발굴된 소련 문서고에 따르면 군사정치학교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1949년 2월 7일,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사령부 정치부장에 임명, 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1950년 12월, 동부전선 군사위원에 임명되었다. 계속된 고지전으로 인해 인민군의 기강은 무너져가고 있었는데, 음주, 도박, 민간인 강간이 판을 쳤고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교육, 문화사업을 실시했다. 1953년 3월, 평안남도 당위원장으로 이임한 김재욱의 뒤를 이어 신임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어 김철우에게 동부전선 군사위원직을 인계했다.

최종학은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의 사상문제를 다잡기 위해 검열위원회를 조직하고 중대 단위까지 총화, 교양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예술사업을 장려하는 한편, 소련, 중국, 몽골, 동유럽과의 교류사업도 전개했으며 인민군이 민청, 여맹과 계속 교류하도록 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대장까지 진급했으나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 군내 선전까지 장악하고 김일성 우상화를 실시하면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연안계인 김창만은 고려인들과 사이가 아주 나빴는데 김창만은 자신의 부인이 최종학과 친구였다는 것을 모두 불편해하면서 최종학을 예의주시했고 이 때문에 최종학에 대한 개인적 정보를 많이 입수했다고 한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받았다.

최종학은 1955년 2월, 인민군 창건 7주년 보고에서 인민군의 정통성을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 있다고 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에도 어느 정도 참여했다. 1956년 4월, 3기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제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2.3. 몰락

8월 종파사건 이후 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도 이어졌다. 1957년, 김창만은 군에 대한 대대적 사상검토 과정에서 최종학을 비롯한 고려인 간부들을 마구 공격했다. 김창만은 최종학의 정치사상 교양사업은 목적지향성 없이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의 교양사업이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일성도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기념연설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를 통해 최종학이 반당종파분자들의 죄행을 철저히 폭로규탄하지 않았으며 상황을 방치하고 당중앙에 사업이 다 잘되고 있다고 허위보고한 죄가 있다고 마구 공격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최종학의 사상적 동요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 그가 혼자머리로 생각하고 독판하고 지도사업을 똑똑히 하지 않아 조선인민군 내의 당사업은 수정주의자, 반당분자와의 투쟁을 못했다고 주장했다. 1958년 3월 전원회의의 결론인 <인민군대내 당정치사업을 개선강화하기 위한 과업>에서도 김일성은 최종학을 비판하였다.
지난 기간 총정치국이 당이 요구하는 수준에서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최종학을 비롯하여 총정치국 내 일부 일군들이 사상적 동요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총정치국내 일부 사람들이 사상적 동요를 일으키자 인민군대 내에 숨어있던 반당분자들은 그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군대내에 수정주의적 사상독소를 퍼뜨렸습니다. 총정치국장은 수정주의의 사상적 독소들을 대담하게 물리칠 대신에 부들부들 떨었고 아래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수정주의의 사상적 독소들이 활개치는 것을 보고도 방임해 두었으며 반당분자들과 종파분자들은 이러한 사태를 리용하여 반당적이며 수정주의적인 사상독소를 적극 퍼뜨렸습니다.

1958년 5월 27일, 방송위원장 남봉식과 저녁식사에서 최종학은 당시 상황을 회고했는데, 최용건이 총결 군사위원장으로 참여하고, 김일성, 김창만도 참석하였는데, 김창만이 미친듯이 인신공격을 퍼부어대다가 최용건이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고 한다. 최종학이 며칠간 공들여 준비한 원고를 가지고 연단에 서자 갑자기 최용건이 들을 가치도 없으니 견장을 뜯어버리라고 소리쳤고, 대위 한 사람이 최종학의 견장을 뜯고 군복 윗도리까지 벗겨버리고 300여명의 군관 앞에서 조리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현직에서 철직하며 인민군대에서 제대한다는 처분을 받았다. 후임 총정치국장으로는 김태근이 임명되었다. 이후 김일성은 입만 열면 최종학은 소련의 제도를 교조주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반미 구호도 없애려 했다고 마구 씹어댔다. 최종학은 해임 직후 1958년 2월 근로자에 조선인민군이 인민민주주의독재의 도구라고 규정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어느 정도는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무소용이었다.

급기야 숙청은 그의 자식들에게도 미쳐 모스크바 경제대학 4학년에 다니던 장남 최 아파나시가 평양으로 소환되어 즉시 강동 정치범 수용소에 처박혔다. 최 아파나시는 앉아선 죽을 수 없다고 친한 운전수에게 부탁하여 차를 몰래 얻어탄 이후 소련대사관에 망명했다. 이 사건으로 귀국을 준비하던 최종학은 함경북도 길주 파이프 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었으며 곧 지배인에서도 경질되어 1960년에 보통부기부 출납부장으로 일하다가 1961년 사망했다고 한다. 다만 유성철은 최종학이 소련으로 쫓겨난 것으로 기억하였는데, 그렇다면 아들과 상봉했을 터이지만 그러지 못한 것을 봐서 북한을 떠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최아파나시는 소련으로 가는데 성공하였고, 한일무의 딸과 결혼하여 이후 조국민주평화통일구국전선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