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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8:32:12

강영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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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 금속공업상 강영창동지.jpg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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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12년 10월 1일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에서 출생했다. 1931년 4월, 대구중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여순공과대학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 미쓰비시 전기주식회사실험소 기사로 일하다가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 귀국했다.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북도 지방지부건설부장으로 일했으나 미군정이 수립된 이후 10월에 월북하였다. 1945년 11월, 흥남지구인민공장 기사 겸 부지배인이 되었으며 1947년 3월에 성진제강소 기사장 및 금속관리국 기사장으로 일했다. 테크노크라트가 절실했던 김일성에게 스카웃되어 1948년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4년 7월 금속공업성 부상에 임명되었다가 1955년 11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일룡의 뒤를 이어 금속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57년 9월에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내각 금속공업상에 유임되었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26~27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산업부가 중공업부와 경공업부로 분리됨에 따라 초대 조선로동당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8년 9월 17일, 한상두에게 금속공업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1년 5월, 현무광에게 중공업부장 자리를 내주고 과학원 원장으로 이동하였다.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나름 잘 나가는 듯 하였으나 1965년 8월 2일에 병환으로 고작 54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다. 당중앙위원회, 내각, 과학원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당 및 국가기관의 요직에서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용감히 싸웠으며 나라의 인민경제복구발전과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원장의 중책을 지니고 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재능과 힘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애국렬사릉이 조성됨에 따라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김경석, 강진건,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 김원빈과 함께 강영창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으며 한참이 지나서 2021년 11월 17일자 로동신문에 "무서운 독학가, 당에 끝없이 충실한 사람, 우리 나라 선진기술자의 전형, 말없이 일 잘하고 고지식한 사람, 좋은 혁명가."라고 강영창을 과거의 충신으로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


[1] 당연히 훗날 남한의 대통령이 되는 그 전두환이 아니라 당시 국가과학원 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