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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9:20:15

기욤 디프르

성명 기욤 디프르
Guillaume d'Ypres
출생지 1090년대
플란데런 백국
사망지 1164년/ 1165년 (향년 60대)
플란데런 백국
아버지 필리프 드 로
아내 클레망스 드 부르고뉴의 조카
직위 이프르의 버그레이브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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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의 귀족, 군인. 무정부시대에 플란데런 용병 지휘관으로서 스티븐 왕의 편에 서서 마틸다에 대적했다.

2. 생애

아버지 필리프 드 로는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1세의 아들이자 로베르 2세의 남동생으로, 공식 기록에서 이프르 백작을 칭했다. 어머니는 양모를 제작하는 평민으로, 필리프의 정부였다. 플란데런 성직자이자 플랑데런 연대기 작가 브뤼헤의 갈베르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그에 대해 언급한 편지 구절을 인용했다.
"귀족 아버지와 평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어머니는 평생 동안 계쏙해서 양털을 기르고 있다.

1119년경, 기욤은 로베르 2세의 아내인 클레망스 드 부르고뉴의 조카와 결혼했다. 그는 1118년 이전에 아버지의 영지를 계승했지만,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했다. 1119년, 플란데런 백작이자 로베르 2세의 아들인 보두앵 7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기욤은 로베르 1세의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직계 남성 후손이었기에, 보두앵 7세의 어머니이자 그의 이모인 클레망스와 클레망스의 두 번째 남편인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기욤은 사생아였기에 대다수 플란데런 귀족들의 외면을 받았고, 결국 덴마크 국왕 크누드 4세와 플란데런의 아델[1]의 아들인 샤를 1세에게 밀렸다.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프르 성과 그 지역의 버그레이브[2]로 군림했다.

1127년 3월 2일, 샤를 1세가 여러 기사와 행정관을 배출한 플란데런의 명문가로서 자기들의 권력을 박탈하려는 것에 분노한 에렘볼트 가문의 사주로 암살되었다. 그 후 기욤은 플란데런 백국의 서쪽 지역을 장악한 뒤 플란데런 귀족들에게 자신을 새로운 플란데런 백작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지지를 받았다고 거짓말했다고 한다. 일각에서 그가 샤를 1세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그는 그 해 3월 20일 에렘볼트 가문의 구성원 한 명을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자신과 암살자 사이의 관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루이 65세는 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손자이며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의 아들인 기욤 클리토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우기로 했다. 기욤 클리토는 1127년 3월 말부터 많은 플란데런 남작들의 지원을 얻었고, 브뤼헤 겐트 시의 지지를 받아냈다. 그 해 4월 말, 기욤 클리토는 이프르를 공략하고 그곳에서 농성하던 그를 생포했다. 그는 샤를 1세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1128년 3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기욤 클리토가 자신과 대적하는 또다른 정적인 티에리 드 알자스가 버티는 알스트를 포위했다가 석궁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1128년 7월 28일에 사망했고, 티에리 드 알자스가 플란데런 백국의 새 백작이 되었다.

1130년대 초, 기욤은 티에리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와 사건의 진행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반란에 실패한 뒤 1133년경에 플란데런에서 쫓겨난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으로 이동한 뒤 1136년부터 스티븐 왕에게 용병대장으로 고용되었다. 1137년 스티븐 왕에 의해 플란데런 용병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공국을 파견되어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의 노르망디 침공에 대항했다. 그는 이 시기에 여러 도시와 마을을 심각하게 약탈해,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멜룬 백작 갈레랑 4세 드 묄룬과 함께 군사 활동을 벌인 끝에 1138년 5월까지 노르망디 공국의 질서를 회복했다.

그러던 중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스티븐 왕을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추대하면서, 무정부시대가 발발했다. 그는 스티븐 왕의 소환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스티븐 왕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1139년 스티븐 왕이 솔즈베리 주교, 엘리 주교, 링컨 주교를 체포해 강제로 군자금을 뜯어낼 때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1141년 2월 2일 링컨 전투에 참여한 그는 윌리엄 르 그로스와 함께 좌익 부대를 이끌고 라눌프 드 제농이 이끄는 웨일스 부대를 밀어냈지만, 로버트를 따르는 기병대가 다른 전선을 돌파한 뒤 후방을 요격하자 패주했고, 스티븐 왕은 생포되었다.

이후 켄트주에서 스티븐 왕의 왕비인 불로뉴의 마틸다에게 가담한 그는 플란데런 용병대와 켄트 출신 민병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인근 농촌을 약탈했으며, 1141년 6월 28일에 런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마틸다를 몰아낸 뒤 런던에 입성했다. 1141년 9월 14일 윈체스터 전투에서 윈체스터를 포위한 마틸다군을 역으로 포위해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생포했다. 그 후 스티븐 왕은 로버트와 교환되어 런던에 돌아온 뒤 잉글랜드 국왕으로 복위했다. 일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켄트주 전체를 장악했으며, 켄트 백작으로 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가 켄트 백작이 되었다는 공식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켄트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그곳의 안보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분명하다.

기욤은 1146년경에 복슬리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클레르보 수도원의 시토회 수도자들을 이곳으로 초대했다. 1148년 스티븐 왕과 켄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 사이의 갈등을 중재했다. 그 후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는데,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1153년 스티븐 왕과 헨리 2세 사이에 월링포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내전이 끝난 후, 그의 켄트에서의 지위는 위험에 처했다. 당시 그는 켄트 내의 어떤 토지도 보유하지 않았고, 도시와 왕령의 수호자로서의 수입만 받았다.

1154년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그는 대다수 플란데런 용병과 함게 잉글랜드를 떠났다. 헨리 2세는 그가 1156년까지 440 파운드 스털링의 연금을 받도록 허용했다. 그는 1154년부터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로부터 로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걸 허락받았다. 이후 로의 성 피에르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1164년 또는 1165년에 사망했다.


[1]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1세의 딸 [2] Burgrave. 도시와 상당한 주변 땅에 걸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재산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