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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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방숙후(汁方肅侯)
옹치 雍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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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숙후(肅侯) | |
작위 | 십방후(汁方侯)[1] | |
성 | 옹(雍) | |
이름 | 치(齒) | |
아들 | 옹거록(雍鉅鹿) | |
고향 | 사천군(四川郡 혹은 泗川郡) 패현(沛縣)[2] | |
생몰 기간 | ? ~ 기원전 192년 |
1. 개요
중국 진(秦)나라 말기와 전한 초기 인물.2. 생애
기록이 거의 없는 마이너한 인물이지만 한고조 유방을 엿먹이고도 나중에 열후로 봉해진 일이 유명하다.사실 이는 휘하 공신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장량의 계책이었다.유방과 동향 사람으로 호족 및 유력자 출신이다. 같은 무뢰배였지만 성격이 호탕했던 왕릉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싸가지가 없었던 유방과는 사이가 나빴다고 전해진다. 이 탓에 왕릉까지 봉작을 뒤늦게 받아야 했다고 한다. 진나라 2세 황제 원년 유방이 거병하여 풍읍과 패현을 기반으로 삼고 이듬해에 옹치에게 풍읍을 맡겼다. 그러나 옹치는 자신은 호족 출신인데 서민 출신이자 무뢰배였던 유방을 멸시하여 위나라 왕 위구에게 풍읍을 바치고 항복 해버렸다. 패현이 남아있긴 했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배반당해 어처구니 없이 땅을 잃은 유방은 홧병으로 잠시 쓰러졌다고 한다.
초한전쟁 중 어느샌가 유방에게 항복하여 공을 세웠다. 유방은 옹치가 미웠지만 세운 공을 생각해서 죽이지 않았다.
천하를 통일한 후 소하, 장량 등 몇 명만 열후에 봉해졌을 뿐 다른 신하들은 공적 다툼이 결론나지 않아 봉작을 받지 못했다. 봉작이 내려지지 않는 것과 유방이 자신을 숙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제장 사이에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당시 유방이 가장 공이 큰 신하들을 이성왕에 봉할 때부터 결국 저 사람들은 다 트집 잡혀 죽고 유씨로 대체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3]
유방은 장량과 상담하여 유방이 특히 미워하기로 유명한 사람을 열후에 봉함으로써 신하들을 안심시키기로 하였다. 고조는 옹치를 십방후에 봉하고 봉읍으로 2천 5백 호를 내렸다. 제장들은 유방을 배신했던 옹치가 후에 봉해진 것을 보고 "옹치가 상을 받는데 우리가 상 받을 차례도 언젠가 틀림없이 오겠구나" 하며 안도했다.
유방의 목숨을 살려주고도 자신의 주인을 배신했다고 디스 당하고 사형당한 정공의 사례를 생각하면 옹치는 엄청나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92년에 사망했고,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옹거록(雍鉅鹿)이 작위를 이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유배지로 받았던 촉 지역의 땅을 골라서 건네준 부분에서 유방의 뒤끝이 엿보이기도 한다. 옹치가 봉지에 부임했다는 언급은 없으므로[4] 세금만 받으면서 살았다면 아주 나쁜 건 아니었겠지만.
옹치의 후손으로 삼국시대 옹개가 있다. 무슨 얄궂은 일인지 옹개는 후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건국된 촉한의 1대 황제이자 고제의 후손인 유비 사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살해당하고 말았다.
3. 대중매체에서
초한전기에서는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에서 유비 역을 맡은 우용이 분하였다.한국 더빙판 성우는 조규준.유방네 사수정의 이웃인 동악정 사람으로 그곳 왈패들의 우두머리 격. 유방의 주변 인물들이 대부분 꼬질꼬질하게 생기긴 했지만, 옹치는 특히나 얼굴이 시커멓기에 가장 더럽게 보인다. 유방과 물길을 두고 우격다짐을 벌이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5]처음에 유방 패거리와 맞붙었을땐 무기도 있는데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간단히 발라버리지만 유방은 다음날 다시 싸우자고 한다음에 일부러 부하들의 무기도 다 버려두고 다가가선 일부러 얻어 맞아 일방적 피해자인 것처럼 연출하였고 결국 옹치 일행은 유방의 꾀에 넘어가 관아에 끌려갔고 이후 유방이 여산 공사를 위해 인부들을 이끌고 떠날때 꽁꽁묶여서 등장한다.
유방이 거병한 후 갈곳이 없어서인지 따르긴 하는데 성질이 급하고 온갖 트러블에 다 말려드는데다 인수도 없고 군마도 없는 니가 뭔데 주군이냐는 식으로 수시로 유방을 인정 못한다며 툴툴거려 유방의 아우들과는 앙숙지간. 과부를 겁탈해 마을사람들의 고발로 아예 목이 달아날 뻔했지만 과부가 애걸복걸해 사실을 겁탈이 아니라 원해서 한거라는게 드러나 사형은 면하고 채찍형만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근데 그럼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될탠데 하필 SM플레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허세를 부리려고 그런건지 몰라도 유방에게 '강제로 했지! 그래야 재밌잖아!'라고 말해서 죽을 뻔 했다. 그래도 패현 공격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서 번쾌와 함께 앞장서서 활약했고, 독단이긴 했지만 복병으로 패현을 공격한 진군을 격퇴시키는 등 용맹은 쓸만해서,유방은 부하들의 반발에도 옹치에게 병사들 훈련담당이나 자신의 부재시 패현을 사수하는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결국 유방이 패현을 비운 사이 옹치는 그를 배신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후 유방의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려다 심이기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혔는데 유방의 선처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자신을 살려준것에 감사하지만 결국 후회하게 될거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
왜 배신했냐는 유방의 물음에 '자신도 주군소리가 듣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이 일화는 영포의 일화에서 빌려온 듯 하다. 영포는 왜 반역했냐는 유방의 물음에 '제(帝), 즉 황제가 되고싶었다'라고 심플하게 답했다.[6] 이때 유방이 '어이구 그렇게 주공이 되고 싶으셧세요?' 하면서 큰절을 올리는 인성질을 시전한다.
이후 홍문연 때 초군에 들어간 것으로 재등장. 연회자리에서 빠져 나온 유방에게 사람을 잘써야 한다며 조무상이 이간질을 했다는 걸 알려주고 과거에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초군 진영을 빠져 나게게 도와준다. 한번 분풀이로 무릎을 꿇으라고 시키긴 했지만. 차림도 그렇고, 조무상이 배신할때 항우에게 바친 증거도 챙겨나올 정도면 병졸도 아니고 나름 지위가 있던 모양.이때 유방은 그에게 보내줘서 고맙다며 옹치에게 형제라고 칭하지만 옹치는 내가 왜 형제냐며 지난번의 은혜를 갚는것 뿐이라고 말한다.참고로 배신이 들통난 조무상은 병력을 몰수 당한후 유방앞에 끌려온뒤 번쾌를 비롯한 유방의 부하들에게 즉시 끔살당한다.
비록 유방을 배신하는 것도 그렇고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나긴 하지만 문정후 초한지를 비롯한 여타 창작물이 옹치라는 인물 자체를 거의 묘사하지 않았다는걸 생각하면 초반부 한정이긴 해도 비중을 챙겼으니 나름 수혜를 입은걸지도?.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유방전에서 우군, 적으로 등장한다. 병과는 적병. 능력치는 무력 85, 지력 74, 통솔 55, 민첩 68, 행운 84. 성격은 보통.
망탕산에서 산적 질을 하다가 성 축조를 위한 부역자들을 이끌고 가는 유방을 습격했지만 패해서 번쾌와 단기접전에서 패하고 붙잡힌다. 옹치와의 싸움으로 일꾼을 데려갈 수 없게 된 유방이 산적이 되자 옹치는 어쩔 수 없이 유방 일행과 동행한다.
유방이 패현을 점령하고 거병하면서 유방이 풍읍을 맡겼지만 옹치는 위구의 설득으로 유방을 배신했으며, 유방이 항량의 지원을 받아 풍읍을 공격하면서 사로잡혔다가 유방을 배신한 이유에 대해 유방이 욕을 너무 많이 한 것, 강한 세력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 유방에게 주공 소리 듣고 싶었다는 것 등을 말하자 유방이 납득해 죽이지는 않고 추방하는 처벌만 내리기로 해서 풍읍을 떠난다.
초군으로 있다가 고릉 전투에서 계포와 함께 고릉성의 북문을 공격했다가 한군에게 붙잡힌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유방의 거병 초창기부터 등장한다. 성우는 남도형.[7]
주로 꽁치로 불리며, 경박하고 거만한 목소리가 포인트. 유방의 거병 이후 풍읍을 위나라에게 바쳐버리고 제후로서 제법 버티다가, 유방이 항량의 군사를 받고 나타나자 빌빌 기다시피 하며 항복한다.(첫번째 배신) 그 후 등장이 없다가 팽성대전에서 유방을 추격하는 초나라군 장수로 등장한다.(두번째 배신) 마지막으로 광무 대치 시점에서 왕릉 과의 연으로 다시 한에 귀순한다.(마지막 배신)
이후 한나라 건국 후 장량의 계책으로 제후직으로 받는 것으로 더 이상의 등장은 없다.
[1]
훗날 광한군(廣漢郡)의 십방현(什邡縣)을 봉지로 받은 것이다.
[2]
전한의 패군(沛郡)
[3]
유방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한신, 팽월, 영포, 노관 등 모든 이성왕이 제거되었고 그 자리를 유방의 친척들이 대신했다.
[4]
장량,
진평,
역기 등 봉지를 받고도 끝까지 장안에서 지낸 인물들을 보면 주어진 영토를 직접 다스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던 듯하다.
[5]
이 장면은 감독이 적당히 시눕시스만 알려주고 연기는 전적으로 배우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다들 연기력이 장난이 아니라서 정말 왈패들 다툼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코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6]
한신과 팽월 등의 처우에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 시작이긴 했지만, 결국 제일 중요했던 건 둘이 죽고 유방마저 늙었다면 자신을 막을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금만 늦게 발각되어서 유방이 죽은 후에 반란했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긴 하다.
[7]
후속작에서 후손인
옹개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