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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포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 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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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고랑포 전투
파일:다고랑포운로드-1.jpg
<colbgcolor=#536349> 시기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장소 파주시 적성면, 청단, 고랑포 일대
교전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지휘관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백선엽 대령
제1사단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최경록 대령
제11연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고한조 대위[1]
제1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정영홍 소령
제2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재명 소령
제3대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전성호 대령[2]
제12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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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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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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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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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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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연대 제3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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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연대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병화 소령
보병학교교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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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교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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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사단장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김기태 경위
장단경찰서 경비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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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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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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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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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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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이창권 대좌
제3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황석 대좌
제14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현학봉 대좌
1사단 포병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최현 소장
제3경비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방호산 소장
제6사단장
파일:북한 국기.svg 김후진 대좌
제1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한일래 대좌
제13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조관 대좌
제15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이민 중좌
6사단 포병연대장
파일:북한 국기.svg 최율석 대좌
제203전차연대장
병력 병력 10,161명
105㎜ 곡사포 15문
57㎜ 대전차포 18문
81㎜ 박격포 36문
60㎜ 박격포 54문
60㎜ M9A1 바주카
각종 기관총 43정
병력 21,000명
122㎜ 곡사포 24문
76㎜ 곡사포 72문
45㎜ 대전차포 168문
화포 총계 444문
전차 40대, 자주포 32대[3]
피해규모 불명확 불명확
결과 북한군의 개성, 문산, 고랑포 점령
국군 제1사단의 전략적 후퇴

1. 개요2. 배경3. 부대 배치 상황4. 개전 직전
4.1. 한국군4.2. 북한군
5. 작전 계획6. 전투
6.1. 제3대대 제11중대6.2. 제3대대 제10중대6.3. 제3대대본부
7. 결과8. 평가

[clearfix]

1. 개요

고랑포 전투는 6.25 전쟁 초기 청단 - 고랑포 간의 서부 삼팔선 지역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한국군 제1보병사단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으로부터 개성과 고랑포 지역에서 동시에 기습공격을 받아 치른 전투이다.

당시 한국군 제1사단 담당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북한군의 전체 상황에 대해선 개성-문산 전투를 참고하기 바란다.

2. 배경

한국군 제1사단이 삼팔선에 대한 최초의 경비대를 파견한 것은 1948년 1월 초순이다. 이 무렵 소수의 미군만이 배치되었던 문산 북쪽 임진강 나루에는 경비의 소홀함을 틈타 북한군의 침범이 잦았던 때문에 당시의 초대 여단장 송호성 준장이 경계강화책으로 보병 1개중대를 출동시켜 미군과 합동 근무케 한 것이 시초이다.

이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5일에는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부임하고 이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사단은 11월에 들어 수원에 위치한 제11연대를 문산으로 추진시켜 삼팔선 경비임무를 미 제7사단 32연대로부터 인수케 함으로써 고랑포 서쪽의 삼팔선 서부방면의 경비를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이때 삼팔선 경비란 주요간선도로의 요지에 경비초소만을 설치하였을 뿐 전술적으로 유리한 삼팔선상의 요충지는 그대로 비어둔 관계로 무방비상태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경비상태가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하여 북한군은 이러한 요충지를 사전에 점거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중에서도 개성시라는 중요 도시가 포함되어 있고 지형상 방어정면이 100km이 넘어가며 지형효과도 제대로 못받아서 방어하기 어려우며 자연적인 배수진이 되어 버린 제1사단 담당구역에는 북한군의 소규모 도발 및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탄10용사로 알려진 1949년 5월 4일의 송악산 전투다. 해당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개성시가 북한군에게 포위되기도 했으며 그 후에도 심심하면 박격포 포탄이 개성시를 목표로 날아오기도 했다.

따라서 북한군이 국지적인 도발을 포함한 각종 공격을 가해올 가능성이 높았기에 한국군 제1사단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3. 부대 배치 상황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km, 제13연대는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방어계획이 변동되기 전에는 총합해서 100km가 넘어가며 동서이동이 극히 어려운 배수진과 같은 불리한 삼팔선을 제1사단이 모든 병력을 투입해서 사수하라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계획같지도 않은 방침만이 수립되어 있었다.

1950년 4월 22일로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곧 사단의 전 지역을 돌아본 뒤 청단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100km의 정면을 방어하기 위한 현행 작전계획이 사단의 방어한계를 초과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곧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군의 주공 방향을 고랑포부근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의 주 전력을 임진강선으로 전환한다면 방어정면이 20여km로 축소 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임진강의 자연장애물로써 보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시에는 청단, 연백, 개성은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임진강을 주방어선으로 삼으면서 방어선 길이를 20km으로 단축한 후 상황이 좋아지면 역습을 통해 다시 삼팔선 이남 지역을 수복한다는 방식으로 방어계획을 변동하게 된다. 만일 상황이 안좋아진다면 임진강 남쪽에 예비진지를 만들어서 최후의 방어를 한다는 계획도 잡아놓았다.

해당 계획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총 3단계로 이뤄진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제1사단은 1950년 6월 초까지 진지구축작업을 마치고 임진강철교 폭파도 계획하였다.

4. 개전 직전

4.1. 한국군

한국군 1사단은 제11연대를 사단예비대로 사단사령부와 같이 수색에 배치하고 제12연대를 개성, 연안, 배천에, 제13연대를 문산, 고랑포 일대에 배치하여 38선 일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1사단은 보유병력에 비해 담당 지역이 넓었기에 38도선의 경계진지에는 최소의 병력을 배치하고 임진강 남안을 좌우로 제2방어선을 지정해 강력한 주력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만일 제2방어선을 지탱할 수 없으면, 봉일천을 좌우로 제3방어선인 예비방어선을 구축해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1사단은 당시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진지 재편성으로 인해 교육훈련율이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11,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 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개전 전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의 여파 및 북한군의 공격 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였다.

결국 6월 25일 개전 당시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12연대의 경우 80km에 이르는 방어 구역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개전 당시에는 병력의 42%만 가지고 전투를 해야했다.

제12연대 제3대대는 서쪽으로는 청단군 금학리 부근 하천인 읍천에서부터 연안군과 배천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 전포리[4]까지 54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병력을 배치한 구간은 실제로는 39km 정도이며 청단 서쪽지역 11km 정도는 병력이 배치되지 않고 경찰이나 가끔 순찰하는 공백지역이었다.

제12연대 제2대대는 서쪽으로는 예성강에서 개성 시가지 북쪽을 지나, 개성시 운학동 소재 청학동을 거쳐 덕암리와 룡흥리 간의 소반고개까지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3연대는 장풍군 영남면 대원리[5]에서부터 소반고개 - 판문점 - 두매리 - 조금리 - 고랑포리 - 원당리에 이르는 구간을 경비하고 있었다.

또한 방어계획 수정으로 보유차량의 대부분을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대규모 수리 및 정비를 위해 기지창으로 이동조치 되었으며, 제11연대의 경우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상황이었다.

남아있는 공용화기의 수준도 별로 좋지 않았다. M3 105mm 경곡사포는 본래 공수부대용 경량화포로 사정거리가 짧아서 북한군의 대포병사격에 취약하였으며 57mm 구경의 M1 대전차포는 원래 영국의 6파운더 대전차포의 라이선스 생산형으로 이미 2차대전 후반부터 관통력의 한계점을 드러내던 무기였으며 6.25 전쟁시기에는 미군이 관통력 좋은 분리철갑탄은 명중률 낮다고 라이선스 생산을 안하고 기존의 철갑탄은 경사장갑에 명중시 탄자붕괴가 일어나서 포탄이 장갑을 못뚫고 깨지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나마 한국군에게는 고폭탄만 많이 지급했지 철갑탄은 매우 부족하게 주는 등 대전차포로 쓰기에는 문제가 매우 많은 상태였다. 운용요원도 대전차포 사용훈련을 제대로 못받았고 전차라는 것을 전쟁이 터져서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니 대전차포를 대전차 용도로 사용하기 곤란했다. 따라서 사실상 보병포로 사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나마 M1 카빈 M1 개런드같은 제식 소총 M1918 브라우닝같은 경기관총은 삼팔선을 수비하는 사단답게 제대로 장비하고 있었으나 2.36인치 바주카로 불리는 60mm 구경의 M9A1 바주카는 기본적인 관통력이 80mm 급이라 성능이 애초부터 부족하였고 포탄의 구조적 문제로 경사장갑에 착탄시 도탄된 후 발화하여 메탈제트가 허공으로 날아가서 그나마 부족했던 성능도 크게 하락하는 상태였다.

수비병력이 적으며 수비도 곤란한 지역인지라 육군본부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이종찬 대령의 휘하에 있는 독립기갑연대의 유흥수 대령에게 지시하여 박도경 대위가 지휘하는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9대로 구성된 기갑 1개 중대를 동원해서 1950년 5월 25일부터 1개월 정도의 예정을 잡고 개성, 배천, 연안, 청단지역을 순회시켰다. 이러한 행위를 한 이유는 북한군에 대한 무력 시위겸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이미 제대로 된 전차를 다수 보유한 북한군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후술할 오인 사건을 발생시키는 등의 부작용도 터졌다.

거기에 4월 22일 부임한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부대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기도 전에 6월 14일부터 시흥 소재 보병학교로 이동해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받고 있었기에 최경록 제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24일에는 용산의 육군회관 낙성식에 사단장 대리인 최경록 대령과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등 많은 간부가 참석하여 외출중이었다.

4.2. 북한군

본래 한국군 제1사단을 상대하던 북한군은 38선 제3, 제7경비여단이었지만, 6월 23일 기동훈련을 핑계로 하여 북한군 제1보병사단이 남천에 배치되었으며, 중공군 제166사단과 독립군 제4사단이 모태로 편성된 북한군 제6보병사단이 사리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이들 2개 사단이 해당 방면의 침공군 주력이 된다.

북한군 제6사단은 구화리로, 제1사단은 고랑포, 적성 방면을 주공으로 일거에 개성 연백지구의 아군을 공격 분산시키고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아군의 한강이남 후퇴를 차단, 일대격멸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북한군 제6사단이 옹진반도 전투를 비롯한 조공에 상당수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개성시를 비롯한 경의선과 경의가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북한군 1사단은 고랑포와 적성 지역같은 우회로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는데 전면전이 발생하면 한국군이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전차등 중화기가 임진강을 건너는 길이 막혀버리므로 도하가 상대적으로 손쉬운 임진강 상류 지역과 아예 도하가 필요없는 부근을 북한군 제1사단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북한군 제6사단은 광범위한 면적에 대해 조공을 실시하고 도하작전을 하거나 주변 섬에 상륙하고 최종적으로는 한강 남쪽에서 한국군을 포위하는 작전도 해야 하므로 소련군에게서 지원받은 도하장비를 집중시켰기 때문에 약간의 전차와 소수의 보병 정도는 해당 장비를 이용해서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진강철교가 박살나도 병력을 어느 정도는 임진강 남쪽으로 계속 투입할 수 있었기에 북한군 6사단이 선택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군 6사단은 사단장인 방호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모두 비정규전 전문가이고 실전경험도 풍부했으므로 한국군이 개성시에 깔아놓은 벙커같은 방어시설을 우회해서 침투하여 목표를 함락시킬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북한군의 배치현황을 보면 북쪽의 137고지로부터 서쪽으로 282고지(대원리) - 송악산 - 325고지(배천) - 120고지(연안 북쪽) - 98고지(청단 북쪽)등을 연하는 38도선상의 지형을 따라 진지를 편성하였으며 개성시가를 완전히 감쌀 수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에 벙커를 구축하는 한편, 제1, 제2, 제3 경비여단 후방 남천에는 북한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제1, 제2, 제3연대와 포병연대를 두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의 병력은 도합 21,000명 내외이며 장비는 122mm M-30 곡사포 24문, 76mm ZiS-3 사단포 72문, 45㎜ 53-K M-42 대전차포 168문, 그 밖에 그들의 총사령부 직할의 제105기갑여단에서 지원된 제203전차연대의 T-34-76 T-34-85 전차 40대와 SU-76M 자주포 32문이 이들 사단의 지원거리내에 집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북한군은 전쟁 전에 세워놓은 작전계획에 따라서 북한군 1사단은 동두천, 포천방면으로 침공하는 다른 북한군 사단과 협력해서 한국군을 압박하면서 서울과 주변지대인 한강 이북에 묶어놓으면서 계속 전진해서 서울을 개전 2일째에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북한군 6사단은 개전시 광범위한 조공업무를 담당함과 동시에 개성시를 함락한 후에는 김포군의 김포반도에 주력을 상륙시켜서 춘천-홍천 전투의 북한군 제2군단이 담당한 임무와 같이 한국군을 한강 북쪽에서 포위해서 섬멸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예시

5. 작전 계획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1950년 5월초에 사단 책임지역내의 38도 분계선 경비와 북한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사단의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제13연대는 제3대대장 유재성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가 고랑포에서 대원리까지의 28km 구간의 삼팔선 경비를 계속 수행케 하는 한편 화석동의 연대본부지역에 위치한 제1대대를 연대 우일선으로 삼아 마지리(파평산 : 적성 남쪽) 에서 금파리 사이의 구간에 배치하고, 제2대대를 연대 좌일선으로써 금파리 서쪽에서 율곡리(208고지)간에 배치하여 각각 주진지를 건설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북한군의 기계화 부대의 접근로로 예상되는 방어전면 동서를 횡단한 320번 도로와 주진지 전방에 돌출된 자하리부터의 적의 접근을 방해하는 한편 임진강 북쪽부대의 철수를 엄호케 하고 제3대대가 임진강 이남으로 철수한 다음 연대예비로서 금곡리(파평산 측후방)부근에 배치토록 하였다.

그리고 수색의 제11연대는 사단의 좌일선으로 예하 제2대대를 연대 우일선으로 삼아 화석동 - 율곡리 간에 배치하여 임진강 나루터 이서의 적의 예상도하지점을 막도록 하고 제1대대를 연대의 좌일선으로 하여 임진강교 남안의 마정리 일대에 배치하여 임진강 북쪽부대의 철수엄호와 해당 교량을 통과하려는 북한군의 접근을 막도록 하였다.

6. 전투

파일:고랑포전투.jpg
고랑포 전투 상황도

6월 25일 새벽에 고랑포와 개성 지역은 지난 밤부터 내린 비가 가랑비로 변하여 땅을 적시고 있었는데, 아침의 정적을 깨고 포성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38도 분계선 경비 진지와 그 주변 부락이 적의 포연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격은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겪은지라 단순한 위협사격으로만 보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공격준비사격이었던 것이다. 포격이 끝난 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38도 분계선을 순식간에 돌파하였다.

이렇게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삼팔선 경비부대는 적의 전차와 병력의 우세에 눌려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분산하게 되었으므로 사단은 문산의 제13연대로 하여금 우선 주진지를 점령케 하고 이어서 수색의 제11연대를 축차로 진지에 투입하여 임진강선에서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6.1. 제3대대 제11중대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38도 분계선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3대대는 대대 지휘소를 아곡동(장단 북쪽)에 두고 그의 예하중대를 대대의 중앙전면에 있는 두매동(박골)에서 남으로 신장단에 이르는 소로를 경계선으로 하여 배치하였다. 삼팔선상에 제10중대를 우일선으로 하고 제11중대를 좌일선으로 한 선형진지를 마련한 후 대대 예비로써 제9중대를 대대본부 부근에 배치하였다.

제3대대의 좌일선을 담담한 제11중대는 이신국 중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를 담당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154고지를 중심으로 양 측면에 2km ~ 3km 정도 떨어져 있는 무명고지까지 3개 지점에 각각 1개 분대씩 분할해서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제1소대는 중대 담당지역 우측에 있는 236m의 대덕산에 배치하고 나머지 1개 소대는 중대 예비병력으로 삼아서 제11중대본부와 같이 대덕산 남쪽 2km 지점에 위치시켰다.

이렇게 배치한 이유는 중대가 담당하기에는 넓은 범위인데다가 제12연대 담당구역부터 대덕산까지 적당한 방어거점이 부족하고 대덕산이 함락될 경우에는 임진강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어서 대덕산을 방어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배치를 진행한 것이다.

북한군도 대덕산 함락에 중점을 두어서 새벽 4시 30분부터 대덕산 일대에 집중포격을 가했으며 취침용 참호에서 쉬고 있던 소대원들이 급하게 전투용 참호로 긴급이동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은엄폐가 불가능한 개활지로 잠깐 나와야 했으며 그 결과로 인해 소대선임하사관이었던 박구서 중사가 전신에 포탄 파편을 뒤집어쓰고 과다출혈로 전사한다.

해당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진지 밖에 북한군 포탄이 산발적으로 낙하하는 상황에서 소대선임하사관 박구서 중사가 소대장에게 다가오면서 말하기를 "소대장님! 적의 포탄이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니 전방에 배치된 경계분초가 위험합니다...제가 한번 다녀오겠습니다."하면서 출발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 소대장 조철권 중위는 "지금은 위험하니 포격이 그친 다음 다녀오라."라고 만류하였는데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잠시 포격이 멈춘 듯하자 이 틈을 본 박구서 중사가 성급하게 진지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때마침 진지 근처에 날아와서 작렬하는 북한군 포탄 1발 때문에 전신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조철권 중위는 즉각 부근의 병사와 함께 그를 진내에 옮겨 응급 처치하였으나 곧 과다출혈로 전사한 것이다.

포격이 끝난 후 북한군 3개 소대 병격이 종대 대형으로 북쪽에서부터 두매동 - 장단 도로를 따라서 남진을 시작하였으며 적의 선두부대가 1소대진지까지 접근하였다. 여기에 대응해서 1소대는 진지 코앞인 200m 거리까지 북한군을 유인한 후 집중사격을 실시하여 격멸에 성공하였으나 북한군의 주력은 이미 대덕산 측면으로 우회해서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고 있었다. 후방인 장단을 점령하여 대덕산을 포위하려는 것이었다.

1소대는 이미 중대와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전령을 중대본부에 보내는 한편 소대장은 전방의 경계분초로 증원병력과 함께 이동해서 경계분초가 아직 무사함을 확인했다. 그 이후에 소대는 즉시 임진강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1소대는 6월 25일 낮 12시경에 대덕산에서 철수를 개시해서 북한군이 장악한 장단을 우회하여 오후 늦게 문산포에서 소형 목선을 사용해서 임진강을 도하했다.

해당 지역의 북한군이 개성을 동쪽에서 포위하며 대덕산을 우회해서 고립시키고 장단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므로 중대본부와 제1소대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나았고 철수가 가능했으나 정면에서 대규모의 북한군 병력을 상대한 제2소대의 경우에는 지형도 불리한 상황인데다가 순식간에 포위되어 빠져나온 병력이 거의 없었으므로 상세한 전투내용이 불명확하다.

6.2. 제3대대 제10중대

제3대대의 우일선을 담당한 제10중대는 임헌덕 중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를 중대 좌측에 있는 104고지에 배치하고 정세응 소위가 지휘하는 제3소대를 중앙의 126고지에 배치하였으며 장재만 중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중대 우측의 112고지(고랑포 북동쪽 2km)에 배치하였다. 특히 제1소대의 경우에는 주로 전방의 사미천 계곡과 남북을 통하는 주변도로를 경비하였는데, 해당 112고지는 한 때 남북교역이 성행했을 때 매일 수십대의 차량이 오고가던 곳이다.

제3대대 좌일선인 제11중대와 마찬가지로 중대 병력에 비해 담당지역이 너무 넓어서 각 소대간 거리가 3km ~ 5km에 이를 지경이므로 서로간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심지어 통신도 중대와 소대간에는 EE-8 전화기 1대만으로 연락이 간신히 되었고 소대간에는 서로 연락하는 수단이 없다시피 했다. 소대에 SCR-536 무전기가 배치되었긴 했지만 배터리 문제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정해진 시간에 짧은 무전교신만 정기적으로 하던 상태라 긴급시 소통이 매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서 지형적 요건도 불리했다. 제10중대 담당구역부터는 임진강이 계속 우측 상향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삼팔선에 가깝게 되므로 자연적인 배수진이 만들어질 뿐 아니라 고랑포 시가지는 삼팔선 코앞이나 다름이 없었고 112고지 우측의 가여울 지역은 대규모의 병력 뿐 아니라 전차를 포함한 중장비도 그냥 강을 건너도 될 정도로 강의 수심이 얼마 되지 않으며 물살도 느린 곳이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면적인 침공이 있을 경우에는 정면에서 돌파공격을 당하는 동시에 가여울 방면에서 임진강을 도하한 북한군에게 샌드위치 공격을 당하기 딱 좋은 지역이었다.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가 사내동(고랑포 서남쪽 3km)에 있는 중대본부에서 포성에 눈을 뜬 것은 6월 25일 새벽 4시 30분이었다. 제1소대장인 장재만 중위가 즉시 전화로 보고한 것에 따르면 112고지에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된다는 내용이었다. 중대장은 전화보고를 받은 후 즉시 전체 소대에 전투태세에 돌입할 것을 지시한 후 대대본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잠시 후에 112고지의 장재만 중위로부터 북한군 1개 중대가 112고지에 있는 진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을 끝으로 제1소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상황이 위급해진 것으로 판단한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112고지에 대한 증원이 시급하다고 보고 중대본부요원과 화기소대 병력으로 출동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이 때, 제3대대장 윤재성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중대장은 최선을 다하여 고랑포 지역을 사수하라." 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에 제10중대장은 중대의 출동을 대대장에게 보고한 다음 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보급차량을 이용해서 112고지를 향하여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출동부대가 고랑포 시내에 접어들자 적의 선두부대가 고랑포 북쪽 외곽의 구릉을 먼저 점령한 상태였으며 달려오는 한국군 중대에 사격을 집중하였다.

졸지에 사격을 받은 중대는 급히 차량을 반전시켜 남쪽 임진강변으로 이동한 다음 59고지 능선에 부대를 배치함과 동시에 즉각 60mm 박격포로 북한군이 점거한 고지에 화력을 집중하고 수랭식 기관총으로 112고지로 통하는 도로에 견제사격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전날 내렸던 비의 탓인지 아직도 고랑포 지역엔 옷을 적실 정도의 가랑비와 엷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으므로 조준사격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시야를 확보할 때까지 112고지로 통하는 도로 방면에는 총구 방향을 고정한 고정사격을 실시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강변의 안개가 부분적으로 걷히자 하고랑포쪽에서 임진강을 도하하는 집단이 시야로 들어오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이들의 복장은 희고 또 검기도 하여 처음에는 피아의 식별이 어려워 한국군 제1소대의 철수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가졌으나 이들의 선두가 임진강 남쪽 800m에 있는 53고지 정상에 오르자마자 곧 인공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는 것이었다. 북한군이었던 것이다.

인공기를 본 후에야 북한군임을 확인한 제10중대는 고랑포로 지향하였던 박격포와 기관총의 사격방향을 즉각 동측방의 53고지에 돌려 일시에 전체 화력을 집중하자 북한군은 크게 당황한 듯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뒤에 응전태세를 갖춘 북한군의 자동화기가 불을 뿜은데 이어 박격포를 쏘아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한국군, 남쪽에는 북한군이라는 서로 방향이 엇갈린 사격전과 포격전이 이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대가 보유한 포탄이 소진되었으며 북한군은 곧 자하리 방면으로 남하를 시작하였다. 이 때가 6월 25일 아침 6시였다.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북한군이 중대와 가까운 아곡동의 대대본부 지역까지 침공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후 자신의 중대를 이끌고 임진강변의 석포로 철수한 후에 25일 오후에 임진강 나루터 북쪽에 위치한 동관리에 도착해서 철수작전중인 제3대대와 합류했다.

제10중대가 담당한 지역이 워낙 불리한 지형이었던 탓에 중대본부와 함께 했던 병력외에는 제대로 된 전투상황을 알 수 없다. 특히 삼팔선상의 경계진지에 배치된 병력에 대해서는 연락두절후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정황상 포위섬멸되었거나 화력에 압도된 후 괴멸당했으며 병력중 극히 일부만이 각자 알아서 분산철수했으리라고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6.3. 제3대대본부

6월 25일 새벽에 대대본부를 포함하여 이종근 중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와 한인성 대위가 지휘하는 제12중대등이 위치한 아곡동의 제3대대 숙영지에서는 전방에서 들리는 포성을 들으면서 전투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대대장 천막에는 전방중대로부터 계속 북한군의 남침보고가 유선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전방에서의 보고를 받은 제3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북한군의 침공규모가 매우 크다고 판단한 후 전방을 담당한 중대장들에게는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대대비상을 발동하는 동시에 대대본부와 근방에 위치한 중대들에게 출동준비를 지시한다. 그 후에 제13연대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해당 지시의 내용은 제3대대는 지연전을 펼치면서 주력은 임진강 나루터로 철수하고 고랑포 방면 배치부대는 파평산 동쪽으로 철수하도록 해서 금곡리 부근의 예비대 위치로 집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제13연대본부의 지시를 받은 제3대대장은 전방에 배치된 중대들에게 해당 명령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이미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다. 그래서 제3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전방에 배치된 중대가 필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위급한 사태에 직면한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에 대한 의견을 잠시 대대참모들과 교환하였는데 이 결과 대대의 사용 가능 병력을 동원하여 춘양동(대대 숙영지 전방 2km)에 있는 91고지와 그 서측 무명고지(181고지 동쪽)을 확보하여 해당 2개 고지에 진지를 건설함으로써 장단까지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전방에 배치된 중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한국군을 추격하는 북한군에게 일격을 가하기로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리하여 제9, 제12 양개 중대로 하여금 즉각 행동을 개시토록 하여 숙영지를 출발하려는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수 발의 북한군 포탄이 숙영지 주위에 떨어지면서 북한군 전차 7대가 북쪽 1km거리에서 남하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제3대대장은 제9중대에게는 대대 숙영지 좌우 측면의 능선을 확보하게 하고 제12중대에게는 북한군 전차를 직접조준사격하기 위해서 81mm 박격포를 탄약차와 같이 능선에 배치하도록 하며 60mm M9A1 바주카의 사수와 부사수를 전원 소집해서 도로변에 종심형태로 배치하여 매복하도록 조치했다.

이로부터 얼마 뒤에 장단으로부터 대대 숙영지 옆을 지나 고랑포 쪽으로 올라가던 장단경찰서 소속의 3/4톤 트럭 1대가 500m 전방의 길 모퉁이에서 북한군 전차의 85mm 전차포에 맞아 대파되었다. 해당 트럭은 장단경찰서의 경비주임인 김기태 경위가 무장경찰관 21명을 이끌고 고랑포 지역으로 출동 중이었던 상태였으며 생존자는 한국군에게 구출된 6명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전원 전사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진상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북한군 전차와 한국군 장갑차를 분간치 못하던 당시의 상황때문이기도 했다. 해당 광경을 목격한 제12중대 기관총 반장이었던 김일하 병장의 증언에 의하면 "능선에 배치된 병사들끼리 저것이 아군이냐? 적군이냐? 하면서 떠들고 있었는데 한 병사가 '지금 올라가는 저 경찰차량을 사격하면 적군이고, 그대로 통과시키면 아군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길 모퉁이에서 해당 경찰차량이 포격을 당함으로써 아군 장갑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의 한국군이 북한군 전차와 한국군 장갑차를 분간하지 못한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애초에 청단부터 고랑포까지는 수비병력이 적으며 수비도 곤란한 지역인지라 육군본부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이종찬 대령의 휘하에 있는 독립기갑연대의 유흥수 대령에게 지시하여 박도경 대위가 지휘하는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9대로 구성된 기갑 1개 중대를 동원해서 1950년 5월 25일부터 1개월 정도의 예정을 잡고 개성, 배천, 연안, 청단지역을 순회시켰다. 이러한 행위를 한 이유는 북한군에 대한 무력 시위겸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이미 제대로 된 전차를 다수 보유한 북한군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한군 전차건 한국군 장갑차건 간에 회전포탑에 전차포를 장착했다는 것이다. 한참 후인 2020년대에도 회전포탑에 대포가 달린 장갑차량은 모조리 전차로 부르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 현실인데 당시의 열악한 시대 상황상 실제로 전차를 본 한국인 자체가 드문데다가 당시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한국군이 장갑차를 전차로 과장선전하기도 했고 장갑차 부대가 서울로 철수한 때가 개전 1일 전인 6월 24일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갑차 부대의 철수사실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선의 장병들이 북한군 전차와 한국군 장갑차를 구별하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발생했으며 개성시 서쪽 4km에 위치한 명륜동 삼거리의 헌병검문소에서도 북한군 전차를 한국군 소속으로 오인하고 헌병이 검문소를 통과시켜주는 오인사건이 일어날 정도니 헌병도 오인사건을 일으키는 마당에 일선 장병들이 북한군 전차와 한국군 장갑차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 경찰차량을 파괴한 북한군의 전차가 잠시 노상에 서게 되자 후속 전차가 그 뒤를 이어 종대를 이루게 되었다. 북한군 전차가 갑자기 잠시 멈춘 것에 대해서는 이유가 불명확하지만 아마 북한군도 자신이 사격한 트럭이 혹시 북한군 것이 아닌가 하고 확인을 하려고 멈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광경을 본 제9중대장 이종근 중위는 "전차 공격의 시기가 바로 이때다"라고 판단하고 능선의 배치된 60mm M9A1 바주카 부대에게 즉각 "사격개시!"를 외쳤으며 바주카가 사격을 가하자 81mm 박격포까지 가담하여 순식간에 포화가 북한군 전차를 휩싸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후 초연을 뚫고 북한군 전차가 진격을 재개하였으며 전차의 주변에서 산개한 북한군 1개 중대가 역습을 가했다. 그래서 대대 숙영지 전방의 개활지를 사이에 두고 교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좌측방의 도로를 따라 7대의 전차가 계속 남하함으로써 제3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제9중대 제1소대장 장두철 중위를 대장으로 하는 8명의 특공대를 선발하여 북한군 전차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공격 행동 중에 모두 산화하고 말았다.

여기서 대대장은 다시 특공대 공격을 요망하자 수많은 지원자가 손을 들고 나왔는데 이 가운데 동 화기중대의 김일하 병장 등 7명이 선발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전차병기가 없어서 수류탄과 개인 화기만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특공대가 주위의 무성한 초목을 이용하여 10m 거리까지 육박하여 전차의 측면에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렇게 2차에 걸친 대전차 육탄공격이 무위에 그치자 제3대대장은 현 위치에서의 지탱은 어렵다고 판단한 후 대대본부를 포함해서 2개 중대수준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쪽 2km인 85고지로 철수시켰다. 그 후에는 25일 오후 5시에 임진강 나루터 북쪽인 동판리에서 제10중대와 합류한 다음에 191m 높이의 일월봉에서 병력을 재배치하였다가 해가 진 후에 나룻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밤 10시 30분에 금곡리 부근에 집결하였다.

7. 결과

1일간의 지연전에서 제13연대 제3대대는 북한군 1사단 주력을 상대로 대략 절반 정도의 병력을 상실하였으나 북한군에게도 총합해서 1개 대대 정도의 병력을 상실하게 하는 타격을 주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전과는 고랑포 지역에서의 기습매복이나 대대본부 주변에서의 사격전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삼팔선상의 진지에 배치된 후 소식이 두절되고 현재도 상황을 알 수 없는 소대진지에서 고립된 채 끝까지 전투한 병력들의 분전이 더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판단된다.

북한군의 진격속도가 침공군에게 유리한 지형 + 전차가 쉽게 임진강을 건너는 통로를 통해서 임진강 남쪽으로 다수 내려옴 +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에도 불구하고 임진강 북안을 완전장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파평산 공격에도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북한군이 진격한 후방에 고립된 소대진지들이 저항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해당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은 개성-문산 전투 문서를 참고.

8. 평가

고랑포 전투는 불리한 지형에서 넓은 담당지역을 모두 방어하기 위해서 진지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진지의 폭이 좁아지는 악조건하에서도 부대가 붕괴되지 않고 지연전을 펼쳤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특히 좌측의 제12연대 주력이 개성을 3시간 안에 함락당하는 등 빠른 붕괴를 겪은 데 비해서는 그럭저럭 1일 동안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지연전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고랑포 지역의 경우에는 자연적인 배수진에다가 가여울 방면에서 북한군 전차부대를 포함한 대규모 부대가 쉽게 임진강을 건너서 우회가능한 상황에서도 북한군 선두부대에게 기습사격을 가하는 등 나름대로 공적을 많이 세운 편이다.

그리고 장단과 고랑포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친 결과 임진강 방어선의 우측인 파평산에 한국군이 배치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중요점도 존재한다. 특히 제13연대 제1대대가 탄약수령 과정에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간신히 탄약을 보급받고 진지에 배치되자마자 북한군이 몰려온 것을 생각해본다면 고랑포 방면을 지키던 제13연대 제3대대가 빠르게 붕괴되었으면 그대로 파평산이 함락될 위기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고랑포 전투는 한국군 제1사단이 삼팔선에서 치른 전투중 가장 성과가 좋은 것이라고 평가받기 충분하다.
[1] 6월 26일부로 고임현 대위로 교체 [2] 6월 26일부로 김점곤 중령으로 교체 [3] 제105기갑여단 제203전차연대 [4] 현재 개풍군 연강리 [5] 현재 개성시 룡흥동 일부